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불꽃 (7)
대수림은 아름다운 밤을 잃었다.
지옥불과 유성우가 만생을 초토화시켰다. 빛을 밝히던 야광충, 자생하는 발광식물들은 흔적조차 없이 소실되었다. 죽음과 폐허만이 만연한 이 땅에 별천지와 같은 야경은 다신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단 하루, 파멸이 닥친 오늘 단 하루만큼은 예외였으니.
―――――― 웅, 우웅, 우웅, 우웅 – !!
눈부시게 시푸른 빛이 밤의 어둠을 밝혔다. 활기찬 정령의 무리처럼 떠돌며, 온 숲을 몽환적인 색조로 물들였다.
그 빛무리의 정체는 ‘마나’였다.
고대의 대마법으로 인해 고갈된 것으로 알려진, 유성우를 쏟아붓는 대마법이 흩어져 치환된, 대마법사의 심장이 갈라져 비로소 온 세상으로 환원된 ‘고대 마나’.
화르르르르…….
그 즈음, 카딤도 ‘혈겁화’를 꺼뜨렸다.
“……흐읍.”
일반적인 신기를 뛰어넘은 심화 경지답게, 부작용의 수준은 아찔할 정도. 매 초마다 한 번씩 불타 죽는 듯한 작열통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외마디 신음 이후론 고통을 내색하진 않았다.
발치 아래에 정말로 삶의 여정을 다해가는 여인이 있었으니.
“쿨럭, 쿨럭, 흐윽…….”
멜리사는 갈라진 제 심장에서 피어오르는 빛무리를 바라보며, 천천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웅, 우웅, 우웅…….
‘마나의 가호’가 목숨줄만은 붙여놓았으나 오래가진 않을 터. 카딤은 그 생명의 불꽃이 덧없이 꺼져가는 광경을 잠시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 입을 열었다.
“……네가 마탑에 남겨두고 온, 마탑주를 기억하나?”
“쿨럭, 흐으…… 아, 아큘라…… 말하는 거야……’?”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아큘라는…… 갑자기 왜…….”
“그 녀석이 죽기 전에 나한테 당부했던 말이 떠올라서. 너를 품어주고, 이해해 주고, 내치지 말라고 했지. 피치 못하게 죽여야 한다면, 반드시 내 손으로 안식을 선사해달라고 했고.”
“…….”
“원했던 바는 아니지만…… 정말로 그렇게 되어 버렸군.”
멜리사의 입꼬리가 쓰게 비틀렸다.
“응…… 아큘라가 그랬구나……. 맞아, 그 아이…… 그렇게 날 생각해 주던…… 참 착한 아이였는데…….”
“…….”
“그 아이에게도…… 내가 참 몹쓸 짓을 했지……. 그 아이는, 항상 ‘인간’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단지, 그 근본이 악마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제대로 돌아봐 주질 않은 거지…….”
“…….”
“뭐…… 비단, 아큘라만 그런 것도 아니지……. 지난 세월 동안…… 내 손으로 망가뜨리고, 놓친 소중한 인연들이 너무 많아……. 시릴 언니나, 고든이나, 릴리아나……. 다들, 언제든 쿨럭, 쿨럭…… 내 편이 되어줄 만한 사람들이었는데…….”
“…….”
“네 말이 맞았어, 카딤……. 응, 나무꾼에게만 눈이 먼 나무 인형은…… 제 친구들까지도 장작더미처럼 불태워버렸네…….”
몸 상태는 끔찍하게 위태로웠으나, 멜리사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그것이 죽음이 임박했기 때문인지, 속에 담긴 불꽃을 모조리 토해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사내의 곁에서 안식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비로소 그녀가 카딤이 기억하던 앳된 소녀 마법사의 모습에 가까워졌다는 사실.
멜리사가 잠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남긴 기록에서…… 시릴 언니와 헤어졌던 내용에 앞서 남겨놓은 서문, 혹시 기억해?”
“……대강 왜 그렇게 굴었나 후회하는 내용이지 않았던가.”
“응, 아직도 계속 그 내용을 생각하게 돼……. 만일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면…… 모든 걸 더 낫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내 감정을…… 내 헌신과 노력을…… 그러니까, 내 안의 꺼지지 않는 불을…… 비록 네가 내 곁에 남지 않았더라도…… 얼마든지 더 현명하게 쓸 수 있었을 텐데…….”
“…….”
“다만, 확실한 건…… 내가 이렇게 된 게 네 책임은 아니란 거야……. 아무리 네가 내 불을 삼켰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모든 건 네 잘못이 아냐……. 그러니까 흐흥, 조금도 너 자신을 책망할 필요 없어, 카딤…….”
그러기엔 이미 단단히 감정을 얽매이고 말았다. 카딤은 대답 없이 입술을 꾹 다물기만 했다.
멜리사가 천천히 그의 모습을 훑다가 말을 돌렸다.
“아, 맞아, 그 악마의 피와 같은 효과를 주는 문신들…… 혹시 시릴 언니가 남긴 작품이야?”
“……그렇다. 시릴이 대륙 곳곳에 이 문신을 새길 주물이 있는 유적들을 남겼지.”
“응, 역시…… 시릴 언니구나. 흐흥…… 참, 나도 어쩔 수가 없네……. 이 와중에도 지기 싫단 생각이 드는 거 보니까…….”
까딱까딱, 흔들리는 다가오란 손짓. 카딤이 가까이 와 자세를 낮추자, 부드럽게 옆목을 어루만졌다.
츠즈즈즈증…….
서늘한 열감, 따스한 냉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모순적인 감각이 가라앉자, 신비 문자로 이루어진 문양이 새겨져 붉고 푸른 빛을 동시에 발했다.
“이거, 딱히 이름을 지어둔 마법은 아닌데…… 응, 뭐…… ‘불과 얼음의 가호’ 정도로 하면 적당하겠네……. 쿨럭, 쿨럭…… 이제 심연의 지옥불이나 극빙의 한파 정도가 아니면…… 어지간한 열기와 냉기는 너한테 해를 끼치지 못할 거야…….”
“…….”
“그러니까…… 그 문신과, 악마의 피에 너무 의존하진 마……. 피가 주는 능력들, 그리고 광증…… 뭔가 둘 다 ‘네 몸속에 있는 존재’와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게 본격적으로 깨어나면…… 마경에 있었을 때처럼, 네 정신이 많이 위험해질 것 같단 예감이 들어…….”
“……알겠다. 주의하도록 하지.”
“아, 그리고 또 하나 줄 게 있는데…….”
멜리사가 기습적으로 카딤의 몸을 끌어당겼다. 그러곤 반대편 옆 목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이건…… ‘대마법사의 가호’……. 효과는…… 아리따운 대마법사의 첫 입맞춤을 빼앗았다고 부러움을 살 수 있음…….”
“……입술이 너무 거칠어서 목에 흉터가 남을 것 같은데.”
“흐흐흥……. 숙녀의 입술을 그렇게 엉망진창 터뜨린 게 누군데……. 그 막돼먹은 주먹질만 없었어도 꽃잎처럼 부드러웠을걸…….”
“계속 안 아프다고 하길래 버틸 만한 줄 알았다.”
“……어휴.”
두 사람은 잠시 먼 옛날처럼 농지거리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피로 얼룩진 몰골과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 탓에 전쟁터에서 소꿉놀이를 하는 듯한 괴리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멜리사는 이 촌각의 어리광으로 그 긴 기다림이 충분히 보상받았다는 듯, 금세 장난기를 말끔히 지웠다. 먼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옛 인연들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럼 시릴 언니는…… 어떻게 된 거야? 나, 너무 어리숙하게 헤어져서…… 시릴 언니도…… 꼭 다시 만나서…… 사과해야 하는데…….”
“……그건 내 쪽이 물어보려 했던 질문이다만. 혹시 지옥에서 게일 말고 시릴을 본 적은 없나?”
“응, 시릴 언니는…… 쿨럭, 쿨럭, 본 적이 없어……. 사실 그게 맞지……. 아탈라가 제정신이 박힌 작자라면…… 시릴 언니처럼 착한 사람이 죽었을 땐…… 책임지고 천국으로 데려가야지…….”
“…….”
“그렇지만 만에 하나, 언니가 아직 안 죽은 거라면…… 그 행방의 단서는 ‘황야’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거긴 모든 아탈라인들의 고향이니까……. 네가 찾아오길 바란다면…… 그렇게 시의성 있는 장소에 쿨럭, 쿨럭…… 분명 뭔가를 남겨놓지 않았을까…….”
“…….”
그럴 듯한 추측이었다. 마침 일레니아가 전해 준, 유적을 좇는 석패도 ‘황야’에서 찾았다고 들었고. 카딤은 그곳을 이후에 향할 행선지의 후보 중 하나로 삼았다.
“아, 맞다……. 그, 내 어릴 적이랑 똑같은 분신…… 고든이 만든 게 맞지?”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흐흐흥…… 역시 살아있었구나, 그 맹탕 같은 사제도……. 그런데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니……? 직접 만나보진 못한 거야……?”
“아는지 모르겠다만, 고든은 엘가 교단을 떠났다. 정황상 잊힌 신 교단에 들어간 것 같은데, 저 하늘에서 굽어보는 엘가의 눈깔 때문인지 직접 얼굴을 비추진 않더군.”
“흐응, 엘가를 배교했다곤 어렴풋이 전해들었는데…… 그렇게 됐구나. 음, 어쩌면 그 사제도 나처럼…… 이전과는 꽤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는데……. 좀 낌새가 어떤 것 같아?”
“일단은, 조력자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직접 얼굴을 비추진 않았어도, 휘하의 사제를 보내 여정에 적잖은 도움을 줬으니.”
“그렇구나……. 응, 뭐, 어련히 잘하겠지만…… 그래도 방심하진 마. 그 사제가 지금 진심으로 너를 돕는 건지…… 너를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명심하도록 하지.”
일행의 다른 자들은 모두 거론했으니 마지막 한 명만이 남았다. 유일하게 두 사람 다 만나보았으나, 이 세상에 있지는 않은 동료.
멜리사가 파리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조금씩, 얼굴에 평안이 사라지고 내밀한 악몽이 어렸다. 손바닥을 덮어 얼굴을 가리고, 겨우 떨리는 목소리로 카딤에게 물었다.
“카딤…… 혹시 지옥에서 게일과 만났을 때…… 게일이 어떻게 죽었는지 전해 들었어?”
“아니. 그때 난 광증 탓에 대화를 나눌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
“그러고 보니 수명이 다해 죽은 모습은 아니었는데…… 게일은 대체 대악마를 처치한 후에 어떻게 된 거지? 너는 뭔가 들은 바가 있나?”
“……아니, 나도 아직 못 들었어. 이제 가서 한번 쿨럭, 쿨럭…… 물어봐야지.”
손바닥을 느릿하게 얼굴에서 치우고, 균열 너머를 응시하는 멜리사. 그녀가 방금 꺼낸 말이 두 사람 다 애써 무시하던 진실을 상기시켰다.
잿더미가 된 여인은,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응, 뭐, 어쩔 수 없지……. 나 하나 때문에 악마들이 창궐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엘프들이 수명을 잃고, 아예 세상이 멸망할 뻔했는데……. 당연히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져 고통받아 마땅하지…….”
“…….”
아무리 그녀가 세상을 구한 적 있고, 사내가 죄업을 나눠 짊어진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카딤은 한순간, 멜리사가 일부러 동료가 남아있는 지옥에 가기 위해 극악한 악행을 저지른 게 아닌가 추측했다. 하지만 이내 부질없는 생각이란 걸 깨닫곤 그만두었다. 사정이 어떻든, 그녀가 저지른 죄악의 무게는 결코 참작받을 만한 게 아니었으니.
심연처럼 무거운 침묵이 드리워졌다. 빛을 잃은 눈동자, 흐릿해진 마나, 느려지는 심장 박동. 멜리사에게선 빠르게 생명의 징후가 사그라들고 있었다.
카딤은 그녀의 심장이 완전히 멎기 전에 단호히 일렀다.
“속죄해라.”
“……응?”
“네 여정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지옥에 떨어지거든, 어떻게든 ‘마나’의 대체재를 찾아내라. 명색이 대마법사인데 설마 반푼이 악마도 해낸 일을 못 하진 않겠지. 그렇게 마법을 되찾거든, 온몸을 바쳐 악마들을 죽이고, 게일과 같이 무고하게 지옥에 떨어진 자들을 구하며 속죄해라.”
“…….”
“주저앉아 낙망하지 마라. 네 어릴 적처럼 기록의 낱장마다 포기하고 싶단 문장을 새기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그렇게 악착같이 지옥에서 버티고 있다 보면…… 내가 반드시, 너와 게일을 구하러 가겠다.”
“…….”
“우리 모두가 재회하기로 약속한 장소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이 아니지 않더냐.”
한순간, 꺼져가던 눈동자에서 뭉근한 불꽃이 반짝였다.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애처로이 떨리는 손길이 사내의 거친 낯을 더듬었다. 어둠 속에서 초연하게 번뜩이는 검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눈빛만 들여다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마경에서 지독하게 힘들 때마다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약속, 그 닳고 닳은 오래된 약속이 두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잇고 있었다.
불을 닮은 여인이 먼저 입술을 열고.
“언젠가…… 해가 저물지 않는…… 들판에서…….”
강철 같은 사내가 뒤따라 입술을 떼었다.
“……달처럼 미소 짓고, ‘다 함께’ 만날 수 있기를.”
조각난 구절이 연결되어, 온전한 한 문장을 이루는 것과 동시에.
가녀린 손길이 툭, 떨어졌다.
대마법사는 홀가분히 눈을 감았다.
―――― 웅, 우웅, 우웅…….
심장에서 마지막 숨결처럼 마나가 흘러나왔다. 유유히 떠돌던 푸른 기운은 숲을 밝히던 빛무리와 합류하더니, 무정한 밤바람에 떠밀리어 아득히, 아득히 찬연한 별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언뜻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영혼의 마지막 춤사위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딤은 눈물을 흘리거나, 잠연히 탄식하거나, 비탄에 잠기지 않았다.
주저앉아 낙망하지 말라는 말은, 비단 그녀를 향해서만 했던 말이 아니었다. 담담히 목과 오금을 받치고 차게 식어가는 여인의 시체를 들쳐 안았다.
그런데 들어 올리기 무섭게, 멜리사의 손에서 무언가가 스륵 떨어졌다.
불타다 만, 새하얀 종이 조각.
“…….”
카딤은 잠시 여인을 내려놓고 그것을 주웠다. 종이 조각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금방 드러났다.
자신을 도발하기 위해 불태운 척했지만, 차마 끝끝내 태우지 못하고 은밀히 손에 감춰둔.
어느 잊지 못할 추억의 끄트머리.
*
대륙 동부, 한적한 촌구석 마을의 교외.
“흐응…… 아아아, 정말…… 세상에, 믿을 수가 없네, 진짜…….”
붉은 양탄자를 털어내는 것마냥 긴 머리칼이 너울너울 흩날렸다. 앳된 티가 잔뜩 묻어나는 소녀 마법사가 제 몸만큼이나 큰 책을 꾹 껴안고 진저리를 쳤다. 그녀의 앞에는 난데없이 나타나 온 마을을 풍비박산 낸 어느 야만인이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잠깐, 잠깐만 멈춰봐! 그렇게 갑자기 우당탕탕 다 작살내고 떠나면 다야? 나는 앞으로, 앞으로 마을에서 어떻게 살라고요, 야만인 아저씨? 응?”
“…….”
소녀는 저 야만인이 초면부터 다짜고짜 동행을 청하기에 인신매매범인 줄로만 알았다. 그 추측은, 평소 이런저런 도움을 줘 친분이 있는 마을 촌장이 야만인은 위험하니까 조심하라고 조언하는 걸 듣고는 확신에 가까워졌다.
진실은 정반대였다. 소녀 마법사를 팔아넘기려던 자는 거꾸로 촌장 쪽이었다.
대륙 동부는 현재 온갖 세력 다툼이 횡행하여, 전략적으로 가치가 큰 마법사의 몸값이 폭등하던 차. 촌장은 연고 없는 소녀 마법사에게 한동안 친절을 베풀어 방심시킨 다음, 노예상에게 팔아먹을 생각으로 장정들과 함께 그녀를 기습적으로 납치했다.
그런데 저 야만인이 갑자기 난입하여 무식하게 온 집안을 때려 부수고, 장정들의 팔다리를 꺾고, 손도끼로 촌장의 머리통을 쪼갠 다음 소녀를 구출하는 바람에 그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즉, 소녀에겐 저 야만인이 구세주에 가까운 존재였지만…… 워낙 난동의 규모가 크다 보니 뒷감당을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진 상황. 일단은 대책 없이 마을을 떠나는 야만인을 쫓아가며 책임을 묻고 있는데, 야만인이 슬그머니 뒤돌아서 이렇게 물었다.
“……굳이 계속 저런 쓰레기 같은 마을에 살 필요가 있나? 마을의 다른 놈들도 다 그 촌장과 한패였던 것 같은데?”
“어…… 그건, 그건 그렇긴 한데…… 내가, 지금 딱히 달리 갈 곳도 없어 가지고…….”
“잘됐군. 그럼 처음 말했던 대로 나를 따라와라.”
“아니, 저기요! 사람 머리통을 장작처럼 쪼개는 야만인을 대체 뭘 믿고 따라가냐고요!”
“네가 위험하니까 그렇게 한 거다. 말하지 않았던가, 너만이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고. 너를 구하려고 어쩔 수 없이 한 거지, 나도 딱히…… 사람의 피를 보는 일을 좋아하진 않는다.”
“…….”
어쩐지 갑자기, 야만인답지 않게 변해버린 사내를 빤히 바라보길 한참.
소녀 마법사는 한숨을 푹 내쉬곤,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알았어! 따라갈게! 따라간다고!”
“……정말인가?”
“그래, 정말로! 계속 야만인이라고만 부르기도 좀 그런데, 그쪽은 이름이 뭐야?”
“카딤이다. 네 이름은 분명…….”
“멜리사! 난 향후 대마법사가 될 몸이니까, 그냥 말은 빠르게 편하게 반말로 할게!”
소녀 마법사가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야만인은 그 모습을 어디선가 익히 보아 온 것처럼 당황도 않고 픽, 코웃음을 터뜨렸다.
“아, 맞다, 맞다! 잠깐만, 일단 먼저 가고 있어! 나 뭣 좀 하고 금방 뒤따라갈 테니까!”
사내가 앞서나간 틈에, 소녀는 슬쩍 제 기록을 펼쳤다.
그녀에겐 뭐든지 새로 알아낸 걸 꼼꼼히 기록해놓는 습관이 있었다. 때문에, 이전에 저 사내에 대해 기록해 둔 내용을 좀 고칠까 해서 살펴보는데……
‘산맥 너머 황야에서 온 아탈라인, 피부는 구릿빛, 키가 엄청 크고 덩치가 오우거만 함! (인간과 괴물의 혼혈? 가능한 일인가? → 연구 주제 31번 참조), 만나자마자 갑자기 동행을 요청…….’
……읽다 보니, 딱히 크게 수정할 만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대개 겉모습과 행적에 관한 내용뿐이었으니.
결국 소녀 마법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배시시 웃으며 맨 밑에 딱 한 문장만 추가해놓 았다.
“……거기다 뭘 적어놓은 거지?”
“응? 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냐!”
후다닥 뒤따라오자 사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으나, 소녀 마법사는 아랑곳 않았다. 딱 잘라 시침을 떼고 콧노래나 흥얼흥얼 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경쾌한 걸음으로 그렇게, 따스한 봄볕을 받은 머리칼을 찰랑이며, 세상을 구하기 위한 여정의 첫 발자국을 함께 내디디며.
*
종이 조각이 바스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내용을 읽어내렸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음!’
사내는 잿더미처럼 쓰게 웃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