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02)
202화. 불길이 휩쓸고 간 자리 (1)
엘프들의 도시, 헤실리아드에 몰아닥친 재앙의 여파는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다. 이 처참히 초토화된 잿더미를 번영했던 이전처럼 되돌리려면 수십 년의 세월로도 부족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피해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복구되었다.
――――― 우우우우우웅 – !!
말라붙어 죽어가던 세계수가 온전히 그 힘을 되찾았기에.
세계수, 자연과 안식을 관장하는 헤실리아가 그 권능으로 스러진 만물을 회복시켰다. 불길에 탄 숲을 되돌리고, 그루터기 건물들을 다시 짓고, 자연화된 수호자들을 진정시키고, 미진하게 남은 불길을 꺼뜨렸다. 재앙이 불태운 흔적은 청록빛 운무 속에 백일몽처럼 말끔히 지워져 갔다.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회복은, 세계수 자체의 뿌리를 되살려 ‘균열’을 틀어막은 것이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헤실리아드의 복구에 비단 세계수만이 기여한 건 아니었다. 자연화되지 않은 수호자들, 살아남은 엘프들 또한 최선을 다해 저들의 고향을 되돌리는 데 힘썼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조력자들도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정령들.
– 쿠드득, 쿠드드드…….
– 포르륵, 포륵, 포륵…….
“으헉! 뭐, 뭐야, 갑자기?”
“저, 저것들…… 혹시 정령 아냐?”
나무의 정령, 새싹의 정령, 빗물의 정령, 진흙의 정령……. 사멸한 줄로만 알았던 옛 존재들이 불현듯 나타나 망가진 식생을 되살리고 환경을 복원했다. 정령들은 별다른 대가도 요구 않고, 이따금씩 허공에 떠도는 새파란 연기 같은 것만 집어삼킬 따름이었다.
엘프들은 그 무상의 원조를 기이하게 여겼으나, 사실 그건 결자해지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들의 진정한 정체는 ‘인페르노’, 대수림을 불태운 지옥불의 정령들이 세계수의 축복으로 정화된 것이었으니…….
그리고 두 번째는, 다크 엘프들.
퍽, 퍼 – 벅! 쩌거거걱 – !
– 크헉, 쿠훠어어어…….
“허억, 허억…… 구해주셔서 감사…… 어……?”
“다, 당신들은……?”
““…….””
자연화된 드루이드들에 쫓기던 엘프들, 혹은 무너진 잔해에 깔리거나 고립된 엘프들. 그중 적잖은 수가 세계수를 등진 배교자라 배척해온 옛 동족들에게 구조받았다.
어리벙벙하게 바라보는 구조자들을 등지고, 다크 엘프들은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 역시 명예와 칭송 따위의 대가를 바라고 도움을 베푼 게 아니었다. 단지 목숨을 걸고 그들의 사도를 구하고 지킨, 어느 소년 드루이드에 대한 경의로서 행동한 것일 뿐…….
모쪼록 각처의 협조와 분투 덕에, 헤실리아드는 불과 열흘 남짓 만에 어느 정도 본 모습을 되찾았다.
희생된 자들에 대한 슬픔까지 씻으려면 더욱 긴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엘프들의 안색은 훨씬 밝아졌다. 만물이 회복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 세계수가 그 어느 때보다 생명력이 충만해 보인단 사실이 차차 재앙이 남긴 얼룩을 씻어내렸다.
그렇게 다른 것들을 돌아볼 정신이 생기자, 엘프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의문은 이것이었다.
도대체 대수림과 헤실리아드를 불태운 재앙의 원흉은 무엇인가?
“역시, 그 지옥불을 흩뿌리던 악마들 아닙니까……? 불타는 커다란 거인처럼 생겼던…….”
“아니, 그러니까 대체 누가 그 악마들을 풀어놨냐, 이 말입니다. 어머니 세계수께서 빤히 뿌리를 뻗고 계시는데, 그렇게 많은 악마들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습니까?”
“틀림없이 드래곤일 것이요! 내, 그 드래곤이 어머니 세계수까지 태우려 드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뭐, 보나 마나 천상의 신들이 분노했던 것이었겠지요……. 다들 막, 하늘이 시꺼메지고 태양이 번쩍거리고 별들이 쏟아지는 걸 보시지 않았습니까?”
여러 의견들이 분분했지만, 딱 한 가지 의견만은 일치했다. 누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쥐고 있을지.
숲의 폭군, 바실리스크를 썰어버렸던, 세계수에 들어가 홀연히 사라졌다가, 파멸이 닥친 당일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어느 야만인 전사.
“암, 틀림없네! 항상 모든 일의 중심에 그자가 있었어! 그자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다 알고 있을 거라니까!”
“그렇지요? 그럼 용감무쌍한 어르신께서 직접 그 공터로 가서 사정을 여쭤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무, 무슨 소릴 하는 겐가? 험험, 난 가서 망가진 지붕이나 좀 손봐야겠군…….”
하지만 아무도 사정을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안 그래도 흉흉한 분위기를 풍겼던 그 전사는, 재앙의 날 이후론 범접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두운 중압감을 발했다. 엘프 몇몇이 먼발치에서 보다가 까무러친 이후, 그 전사가 주로 나타나는 남쪽 공터는 바실리스크가 살던 골짜기 이상으로 절대적인 불가침의 구역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였다. 어느 해질녘, 정확히 그 공터 쪽으로 한 신영이 걸어가는 걸 봤을 때, 그걸 목격한 헤실리아드의 시민들이 일제히 경악한 이유는.
“어어……? 저, 저, 저 여자 말려야 되는 것 아니오……?”
“어이, 이보시오! 거, 거긴 가면 안 되는 곳이요! 어서 이리 돌아오시오!”
“젠장, 또 엄한 송장 하나 치우게 생겼는데…….”
그나마 용기 있는 자들이 만류하기 위해 후다닥 숲으로 내달려갔으나, 막상 와보니 여인의 신영은 온데간데없었다.
“어……?”
“음? 이보시오! 어, 어디로 간 거요?”
귀신에 홀린 것마냥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엘프들.
동떨어진 먼 수풀에서 샛노란 눈빛 한 쌍이 반딧불처럼 스러졌다.
*
듬성듬성 나무와 잡초가 우거진 공터.
그늘에 파먹힌 노을빛 아래, 무표정한 거한이 바위에 걸터앉아 장비들을 손 보고 있었다.
붉은 칼날에 기름을 먹이고 닦았다. 철 막대를 구부려 해진 견갑을 잇고, 파형 무늬 도끼날을 숫돌로 힘껏 갈았다. 썩썩, 날을 세우는지 숫돌을 분쇄하는지 모를 소리가 거칠게 심장 속을 긁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레니아가 착잡하게 입술을 뗐다.
“……상심하신 마음을, 뭐라 위로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진정 그 어떤 말씀을 드려도 위안이 되지 않을 듯해 그동안 찾아뵙질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그토록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세상을 구하신 분께…… 계속 인사를 드리지 않는 건 더 큰 무례이다 싶어 이렇게나마 오게 됐고요.”
“…….”
카딤은 처음으로 멜리사를 저지해달라 청탁했고, 그녀가 숨진 지 열흘이 넘어서야 찾아온 여인을 지탄하지 않았다. 잠깐 멈춰 섰다 낮게 숨을 내쉬곤, 하던 대로 도끼를 갈았을 뿐.
일레니아는 문득, 아래 놓인 칠흑의 도끼에서 오래되지 않은 혈흔을 포착했다. 의아한 투로 그에 대해 물어보자, 돌아온 대답은 이러했다.
“숲의 폭군인가 뭔가 하는 짐승들, 그리고 비슷하게 변한 수호자들. 한동안 돌아다니면서 그런 놈들을 정리했다. 앞으로 엘프 놈들이 숲을 되살리겠답시고 싸돌아다니다 해를 입는 일은 없겠지.”
“…….”
실의에 잠겨 칩거하고 있는 줄 알았건만…… 예상이 단단히 어긋났다. 이럴 때조차 투쟁을 멈추지 않은 사내를 망연히 바라보는 일레니아.
“혹시…… 세상을 사르는…… 아, 아니, 멜리사 님의 시신은…… 어느 곳에 안치되었는지요?”
“불태웠다.”
“예?”
“내 피로 다시 불꽃을 피워, 그 불로 불태웠다. 뼛가루도 다 흩날려 보냈으니 이제 불과 바람이 녀석의 무덤이라 할 수 있겠지.”
“…….”
불꽃을 피우고 잿더미가 된 여인에게 가장 걸맞은 예우의 최후.
일레니아는 숙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조의를 표하며 묵념한 다음, 사내가 자릴 비운 동안 헤실리아드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했다.
“아시다시피, 균열의 중심은 무사히 닫혔습니다. 다만 사도님께서 이르시길, 뿌리 외의 부분까지 복원하느라 세계수의 힘을 예상보다 많이 소진하여…… 멸망이 유예된 기간은 실질적으로 20년에서 30년 사이일 거라 하시더군요.”
“혼란을 줄이기 위해, 대외적으로 ‘세계수지기’는 여전히 교체되지 않았다고 알려질 거라 합니다. 애초부터 공공연히 공석에 나서는 자리는 아니었으니, 다크 엘프인 릴리아 사도님께서 직분을 잇는다 한들 큰 문제는 없겠지요.”
“대수림과 헤실리아드가 불탄 원인은, 아마 악마들의 습격으로 공표될 겁니다. ‘인페르노’들은 충분히 악마로 오해할만한 모습이었으니 이 또한 큰 문제는 없겠지요. 그러니, 따로 멜리사 님의 행적이 알려지고 명예가 실추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그 후로도 일레니아는 여러 긍정적인 경과를 알려주었다. 지옥불의 정령들이 정화됐고, 엘프들이 바친 피를 돌려받아 수명을 되찾을 예정이고, 단절됐던 엘프와 다크 엘프들의 교류를 추진하고 있다는 둥…….
카딤의 낯빛은 나아지긴커녕 더욱 어두워지기만 했다. 그 모든 회복의 소산은, 누군가 저지른 악행의 증거이기도 했으니.
일몰의 잔광 속으로 텁텁하게 녹아드는 침묵.
일레니아는 카딤의 옆 목에서 무언갈 발견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문양…… 혹여 멜리사 님께서 타계해시기 전에 남긴 것인가요?”
“그렇다. 열기와 냉기를 막아주는 마법이라더군.”
“그렇군요……. 예, 비록 말년의 행적에 불미스러운 흠결이 있긴 했으나…… 멜리사 님께서 카딤 님을 위했던 마음만큼은 진정…….”
“비단 이것만 남긴 것도 아니지. 보거라.”
말허리를 끊고는, 돌연 세차게 발을 구르는 카딤.
―――――― 콰과광, 쩌저저적 – !
흙먼지가 물씬 피어오르고, 일대의 땅바닥이 쩍쩍 갈라져 침강했다. 격렬한 땅울림에 일레니아는 하마터면 휘청거리다 넘어질 뻔했다. 어리벙벙하게 입을 벌린 여인을 향해 담담한 설명이 베풀어졌다.
“대악마를 죽였던 시절의 힘을 거의 다 되찾았다. 적어도 8할…… 아니, 9할 정도. 네가 전에 했던 말대로, 나보다 강한 존재를 죽여 ‘격’을 잔뜩 높인 덕분이겠지.”
“…….”
“내 입으로 감당하겠다 말하긴 했다만…… 멜리사의 꺼지지 않는 불이, 진정 나를 벼리는 불꽃이 될 줄은 몰랐군.”
잊힌 신의 사제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투신의 대전사는 손본 게 무색하게 흙먼지를 뒤집어쓴 투척도끼를 바짓단에 슥슥 문지르고 쳐들었다.
“그나저나, 아무래도 멜리사가 죽기 직전에 했던 말이 계속 신경 쓰여서 말이지.”
“…….”
엘프들의 신을 죽이고, 자신이 새로운 신이 되겠다고 했던 말.
카딤은 처음엔 그게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따져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인간이 저보다 월등히 ‘격’이 높은 존재를 죽이면 폭발적으로 ‘격’이 상승한단 사실이, 자신이 이렇게 멜리사를 죽임으로써 증명됐으니까.
즉, 극단적으로 더 나아가 인간이 신을 죽인다면, 정말로 인간을 ‘초월’하여 신이 될지도 모른단 건데…….
“공교롭게도 내 주변엔, 계시라는 미명하에 나에게 어떻게든 신을 죽이라고 충동하는 자들이 있더군.”
“……!!”
초점 없이 흔들리는 샛노란 눈동자. 가일층 어두워진 공허한 동공이 그 눈을 직시했다.
“말해보아라. 만일 내가 계시대로 ‘가짜 엘가’를 죽이고 신격을 얻게 되면, 그때부터 네놈들은 뭘 어쩔 셈이지.”
“……”
“고든은 나를 통해……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냐.”
그런데 일레니아는 카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노란 눈동자는 서쪽 하늘, 저물 때가 진작 지났거늘 아직도 지평선에 걸려있는 태양에 아연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카, 카딤 니…….”
소리 지르며 손을 뻗었을 땐 이미 늦었다.
불식간에 일대를 대낮처럼 바꿔버리는 찬란한 빛줄기.
――――――― 쩌 – 엉!!
‘천벌’이 카딤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일레니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 안 돼!!!”
‘천벌’은 저항을 불허하는 심판. 그것에 직격당하면 드래곤마저도 중상을 면치 못하며, 필멸자들은 십중팔구 치명상을 입거나 즉사당한다.
그녀가 과거 갈렌타나 대학에서 천벌을 한 번이라도 버텼던 건, 순전히 은신처의 어둠을 완충재 삼고 비껴 맞았던 덕분. 하지만 방금 전의 천벌은 아무런 완충재 없는 명징한 정타였다.
터무니없이 치명적인 불찰이었다. 맙소사, 계시의 전사를 ‘굽어살피는 눈’의 시야에 들게 만들다니? 필히 해가 저문 다음 찾아오거나, 대화의 방향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미리 은신처를 조성해뒀어야 했는데……. 일레니아의 머릿속이 온통 환하게 눈앞을 메운 섬광의 빛깔로 탈색되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카딤은 치명상을 입거나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어?”
그저 식은땀을 조금 흘리며, 이맛살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인상을 팍 찡그렸을 뿐.
“이게…… 저 빌어먹을 눈깔의 천벌인가.”
“…….”
“……더럽게 아프군. 확실히 두 번 맞을 만한 건 아니겠어.”
전사는 도낏자루를 쳐들곤 태양을 쪼개버릴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목에 새겨진 ‘불과 얼음의 가호’가 혼탁한 빛깔로 명멸했다.
우웅, 웅, 우우우…….
멀거니 그 비상식적인 광경을 바라보던 일레니아는,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제 가방을 뒤졌다.
펄 – 럭!
비상용으로 남긴 ‘밤그림자 암막’의 자투리가 펼쳐졌다. 인근이 어둡게 차폐되자마자, 왜곡 구멍을 펼치고 사내의 팔을 안쪽으로 잡아끄는 일레니아.
구우우우웅 – !
새카만 천이 나풀거리며 내려앉았을 즈음, 그 밑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먼 서녘, 성난 감시자의 눈처럼 이글거리던 태양이 그제야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아 사라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