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04)
204화. 불길이 휩쓸고 간 자리 (3)
그림자조차 숨을 죽이는 이슥한 밤, 야틈한 숲의 공터.
타닥타닥, 모닥불이 고즈넉이 타올랐다. 한 차례 대수림을 휩쓸었던 그악스런 화마와 달리 그 불길은 안온하기 그지없었다. 잔불의 정령들이 빛을 쫓아와 빼꼼, 환한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근처에 자리한 낯선 신영들을 보곤 후다닥 어둠 속으로 내달려 사라졌다.
불가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쭈뼛대며 눈치를 살피는 행상인, 그리고 묵묵히 불을 바라보는 야만인.
재앙의 날 이후, 두 사람은 근 보름 만에 대면한 것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각자 격전의 피로를 씻고 쉬기 위함이었으나, 실상은 감정을 정리하는 기간에 가까웠다.
던컨은 뭐라 운을 떼어야 할지 모르고 우물거렸다. 그 사이, 카딤이 먼저 말문을 텄다.
“그동안은 어떻게 지냈지. 다크 엘프들과 함께 있었나.”
“엇, 아…… 아, 아아, 옙! 낮에는 그분들을 따라 숲을 순찰하며 조난당한 엘프 분들을 구조하고, 저녁엔 레밀리온 님과 함께 부상자분들을 돌보며 지냈습니다요. 저, 나으리께선…….”
“나도 비슷하다. 엘프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숲의 폭군인지 뭔지 하는 놈들을 처치하고 다녔지.”
“예? 아, 아니, 왜…… 제대로 쉬지도 않으시고…….”
“멜리사의 죄업을 짊어지기로 약속했으니까. 그 녀석이 엘프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갚기엔 턱없이 모자라지만, 그럼에도 이렇게나마 책임을 져야겠지.”
급작스레 훅 치고 들어오는 고백.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숨이 턱 막히는 질문이 이어졌다.
“던컨. 혹여 다른 자들에게, 나와 멜리사의 과거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가.”
“…….”
던컨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모닥불이 틱틱 튀는 소리 위로, 어쩐지 평시보다도 덤덤한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못 들었다면, 이젠 숨길 이유도 없으니 전부 말해주지. 나는 300년 전, 마경에 창궐한 대악마를 격살한 용사 일행의 일원이다. 멜리사 역시 그중 하나였고.”
“……!”
카딤은 말 그대로 1회차의 과거를 전부 털어놓았다.
대륙 동부에서 멜리사와 처음 만난 것, 대륙 각지를 떠돌며 다른 일행들을 모은 것, 산맥을 넘고 황야를 가로질러 마경에 이른 것, 지독한 고생을 하고 대악마를 무찌른 후 300년을 건너뛴 것, 그리고 모든 게 초기화된 채로 멜리사의 흔적을 쫓게 된 것까지…….
이야기는 계속 평이한 어조로 이어졌다. 그 괴리감이 내용에서 오는 충격을 몇 배나 배가시켰다. 듣는 내내, 던컨은 심장이 돌처럼 굳어 뱃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렇게, 결국 내 손으로 멜리사를 죽이고 시신을 불태웠다.”
이야기가 결말에 이른 순간, 심장이 멈춘 것처럼 찾아드는 정적.
허위허위 타오르던 불길마저 군소리를 낮췄다. 별빛마저 사그라들고, 떠돌던 새털구름은 밤하늘에 남은 흠집처럼 고정됐다.
던컨은 일그러진 낯으로 한 식경을 어물거리다가, 겨우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건, 이건…… 정말, 너, 너무 하지 않습니까?”
“…….”
“아니, 어떻게…… 레밀리온이시여, 어떻게…… 한 사람에게 이렇게 큰 불행이…… 이만큼 악의적인 고난이, 끝도 없이 닥칠 수가……. 아니, 아니, 나으리, 그, 그동안 대관절 어떻게 버텨오신 겁니까……?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아니, 이건 진정, 세상에 신이 있다면 이럴 순 없습니다요…….”
카딤은 묵묵히 고개를 들었다.
그 또한 한때는 행상인과 같은 생각을 가졌다. 왜 하필 나여야 하는가. 왜 이 낯선 세상에 떨어져, 이토록 악랄한 운명에 놀아나는 게 나여야 하는가. 하지만 이제 그렇게 무의미한 탄식을 내뱉는 단계는 건너뛴 지 오래였다.
“신은 있다, 던컨.”
“……예?”
“멀리 볼 것도 없이 저기, 지상에 강림한 엘프들의 신이 있지 않더냐.”
“…….”
“그리고 엘가나, 아탈라나, 다른 신들도 꼭 있어야만 되고.”
“왜, 왜입니까요?”
“그래야 그 개자식들의 머리에 도끼를 처박고 모가지를 비틀 수 있을 테니까.”
“…….”
망연하게 입을 벌린 행상인을 바라보며, 대전사는 초연하게 눈동자를 빛냈다.
“불행을 자랑하며 싸구려 동정을 사려고 얘기를 꺼낸 게 아니다. 내가 모든 걸 털어놓은 이유는, 네게 한 가지 청할 것이 있어서다, 던컨.”
“…….”
“나는 이후, ‘황야’로 떠날 것이다.”
그가 만나봐야 할 옛 동료는 멜리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짊어지고 있는 사명들은 어깨가 내려앉을 만큼 많았다. 악마들을 죽이고, 균열을 완전히 닫고, 지옥에 간 자들을 구하고, 광증의 해결법을 찾고, 가짜 엘가에 맞설 준비까지 해야 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역시 급선무로 삼아야 할 건, 미처 만나보지 못한 옛 인연들의 행방을 찾는 일.
“말했다시피, 내 동료 중엔 아탈라를 섬기는 황야의 무녀도 있었다. 그 녀석의 생사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황야에 필시 무언가 흔적을 남겨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지.”
“…….”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여정엔 또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 모른다. 내 일신의 힘은 이제 대악마를 죽였던 시절에 준할 만큼 강해졌으나, 아직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큼 전능하진 못하지. 그러니…… 투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대전사가 아닌, 불완전한 한 명의 필멸자로서 묻겠다.”
“…….”
“길잡이로서, 동료로서, 그리고 ‘굉장히’ 유능한 친우로서…… 앞으로도 계속 내 투쟁의 길에 동행해줄 수 있겠느냐, 던컨.”
저 멀리 하늘 끝에서부터 날아와, 불현듯 따스한 불 자락을 뒤흔드는 솔바람이 불고.
던컨은 할 말을 잃고 굳어버렸다.
그렇지만, 이번의 경직은 방금 전까지와는 달랐다. 그 내면은 벽력같은 충격이 아닌 물결치는 감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저히 흥분을 금할 수 없었다. 비로소, 마침내, 이 두 차례나 세상을 구한 위대한 전사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완벽히 인정받고 정식으로 동행을 요청받게 되다니!
던컨은 주먹을 불끈 쥐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 이 순간, 이자에게, 이 말을 듣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을지도 모른다고.
“물론입니다요, 나으리!! 제가 아니면, 이 최고의 길잡이이자, 아곤의 뭐시기에게 인정 받은 전사이자, 투기장의 제왕을 속여넘긴 협상가이자, 마탑의 비밀을 밝혀낸 염탐꾼이자, 잊힌 신의 선택을 받은 행상인이자, 지옥불의 정령마저 쓰러뜨린 이 던컨 휠레드가 아니면 대체 누가 나으리를 돕겠습니까!”
“…….”
“걱정 마십시오! 나으리께서 옛 동료분들을 찾고 약속대로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그날까지, 이 불초 던컨, 목숨을 걸고 끝까지 곁에서 보필하겠습니다! 황야든, 산맥이든, 마경이든, 설령 지옥 끝까지 가신다 하더라도 무조건 따라갈 테니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카딤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새 뭔가 꼬리표가 더 늘어난 것 같은데. 함께한 시간이 늘어 가다 보니, 이 채신머리 없는 호들갑도 슬슬 꼴 보기 싫다기보단 정겹게 느껴지고 있었다.
한데 청산유수로 지껄인 후, 던컨은 제가 한 말을 곱씹다가 기겁하여 한 가지를 물렸다.
“어…… 그, 그런데…… 지옥 끝까지 따라간단 말만 좀 취소하겠습디다. 음, 어…… 아무래도 거긴 좀…….”
“…….”
야만인이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는 가운데, 대수림의 마지막 밤이 뉘엿뉘엿 깊어갔다.
*
시간은 충분히 지체할 만큼 지체했다.
다음 날 아침, 카딤과 던컨은 곧바로 대수림을 떠날 채비를 갖췄다.
햇볕이 닿지 않는 공터, 새벽 이슬을 머금은 바람이 잿더미를 슬쩍 휩쓸고 지나갔다. 흩날리는 티끌, 쿰쿰하게 퍼지는 탄내. 세상을 구원한 영웅들이 환송하는 자리치곤 다소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장소 선정이었다.
그렇지만 예우가 미흡한 건 아니었다. 작별 인사를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세계수 탈환 작전의 주역 인사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수호자로 복직한 파르네오, 다크 엘프들을 인솔하는 레밀리온, 심지어 세계수를 복원하느라 보름이 넘게 한숨도 못 잔 릴리아까지도.
다만 얼마 전부터 행방이 묘연하여, 일레니아만은 자리에 불참했다. 먼저 떠난 건지, 다른 볼일을 보러 간 건지……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는 일.
잠깐일지라도 함께한 깊이에 따라 인연은 짙은 흔적을 남긴다.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들 사이로 뜻 모를 먹먹함이 감돌았다.
‘검은 표범’ 파르네오가 가장 먼저 나서 인사를 올렸다.
“큰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탈라의 대전사님. 전수하여주신 그 투쟁의 정신, 제 한 목숨 다하는 그날까지 영원토록 마음에 새겨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네게 아탈라의 투지가 함께 하길 빌지.”
“친우분께도 큰 신세를 졌습니다. 인페르노들을 유인하여 릴리아를 구해주셨다면서요? 그 용기와 헌신, 어머니 세계수께 맹세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다시 헤실리아드에 찾아주시면 언제든 최고의 예우로 맞이하겠습니다.”
“아, 아아……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뎁쇼, 크흠, 험험…….”
그다음으론 동맹의 초대 맹주 겸 드래곤의 친우, 레밀리온이 나섰다. 그는 친우를 잃은 전사를 씁쓸하게 바라봤다.
“……거목으로 자란 인연의 뿌리가 뽑히면, 그 상흔은 무엇으로도 덮을 수 없는 법이지. 그대의 희생과 상실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네, 카딤 공. 또한 그 먼 옛날 내 목숨을 구해준 것, 큰 고통을 무릅쓰고 재차 세상을 구해준 것,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지.”
“…….”
“아, 그리고…… 맞네, 던컨 공. 이걸 가져가게나.”
“이, 이 목걸이는 무엇입니까요?”
“나를 호출하는 유물이라네. 자네 부탁을 뭐든 하나 들어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만일 밖에서 무언가 곤란한 일이 생기거든, 거기 매달린 구슬을 깨뜨리게. 내가 곧장 날아가서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도울 터이니.”
“……!”
황금빛 구슬이 달린 목걸이를 건네받곤,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던컨.
동맹에서 레밀리온의 위상을 감안하면, 반쯤은 신을 소환하는 거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카딤은 지나가듯 팔 것처럼 이 어마어마한 유물의 값어치를 재는 상인의 눈빛을 보았으나…… 그냥 못 본 척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세계수지기 겸 잊힌 신의 사도이자, 멜리사의 의자매였던 릴리아.
“…….”
“…….”
창백한 다크 엘프 여인은 쉬이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카딤은 그 이유를 어렵잖게 가늠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잿더미가 된 여인을 상실한 아픔을 공유하는 자였으니.
하여, 카딤이 먼저 말문을 텄다.
“진심으로 사죄하겠다.”
“……예?”
“멜리사가 네게 저지른 악행은 용서받지 못할 것들이었다. 죽음으로 그 악행을 단죄받았다 한들, 남기고 간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죄업을 나눠 짊어진 자로서…… 진심으로 모든 걸 사죄하며, 최선을 다해 저 균열을 영구적으로 닫을 방도를 찾도록 하겠다.”
“…….”
혼탁한 눈망울에 물기가 어렸으나, 릴리아는 조속히 그것을 지우고 마음을 추슬렀다.
“……아니요,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멜리사가 제게 남긴 상처는 물론 깊지만, 그녀가 제게 주었던 기쁨도 그에 못지않았으니까요. 제 자매가 남긴 죄업을 짊어지실 것이라면, 제 자매가 베푼 은덕 또한 응당 함께 품으셔야겠지요.”
“…….”
“이것을 가져가십시오. 이룩하신 위업에 비하면 하잘것없습니다만…… 전사님의 여정에 도움이 될 겁니다.”
릴리아가 나무로 만들어진 단검을 내밀었다. 언뜻 봐선 평범한 목단검이었으나, 은은하게 감도는 청록빛 기운과 눈에 익은 나뭇결이 굉장한 신병(神兵)임을 증거했다.
“‘세계수의 심재(心材)’에, ‘세계수의 꿈’의 파편을 혼합한 단검입니다. 대상을 찌르면 상처를 입히는 대신, 꽤 오랫동안 저항불능한 가사 상태에 빠뜨릴 겁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말이지요. 태산처럼 거대한 괴물이나 엘가를 좇는 고위 성기사, 위험한 권능을 지닌 고위 악마는 물론…….”
“…….”
“……전사님 또한, 말이지요.”
어떠한 용도로 사용하란 건지, 그 의도가 명백한 말. 카딤은 무겁게 고갯짓하며 단검을 건네받았다.
그로써 모든 작별 인사와 용무를 마쳤다.
더 시간을 끌어봤자 불필요한 사족이 될 따름. 마침표에서 펜촉을 떼지 않고선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없는 법이다. 카딤은 즉각 등을 돌려 두터이 내깔린 잿더미를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떠나기 직전, 릴리아가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전사님. 혹여…… 불길이 휩쓸고 간 자리엔 무엇이 남는지 아시는지요?”
“…….”
우문이었다. 그야, 당장 그들이 있는 장소가 지옥불이 휩쓸고 간 자리의 한복판이었으니. 카딤은 일대를 죽 둘러보곤 무뚝뚝하게 답했다.
“……잿더미가 남지 않겠느냐. 지금, 이렇게 온 사방에 널려 있는 것처럼.”
“…….”
백발의 여인은 뜻 모를 미소를 떠올렸다.
겨울을 넘어 찾아드는 봄볕처럼 살가운 비밀을 간직한 미소.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더니, 사분히 눈을 감고, 슬며시 양손을 깍지 끼고, 부드러운 읊조림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빛이 발현했다.
―――― 우우우웅 – !
세계수지기의 육신으로부터 돋아 올라, 너울너울 주변을 뒤덮는 푸르른 광채.
청록의 운무가 들판에서 뛰어놀다 풀물이 든 아이의 옷자락처럼 흩날려, 텁텁하게 쌓인 잿가루를 대번에 쓸어 보냈다. 재의 군락은 눈 깜짝할 사이 비질되어 사라지고 비옥한 흙바닥이 드러났다.
그 옥토에 빛 알갱이가 쏟아졌다. 씨앗처럼 알알이 떨어져 심기고는, 자연의 정기를 흠뻑 머금고 순식간에 자라났다. 새싹이 돋고, 떡잎이 여물고, 잎사귀를 피우고, 꽃 떨기가 맺히더니, 그 눈부신 생장을 시샘하듯 한바탕 꽃샘바람이 불자…….
후우우우웅…….
새하얀 꽃보라가 휘몰아쳤다.
산뜻하게 번지는 향취와 맵시, 그 화사한 유혹에 이끌려 숲을 떠돌던 작은 생명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나비들이 꽃잎의 윤무에 어우러져 잔망스레 뛰놀고, 정령들이 흩날린 꽃잎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듯 앞다투어 꽃밭 속으로 뛰어들었다.
– 포륵, 포륵…….
– 포르륵, 포르르르…….
재로 얼룩진 폐허는 한순간에 화려한 백옥꽃의 화원으로 탈바꿈했다. 릴리아가 떠돌던 꽃의 정령 하나를 감싸들고 카딤을 바라봤다.
“보십시오, 잿더미는 고작 찰나에 스쳐 가는 잔재에 불과합니다. 불길이 휩쓸고 간 자리에선 결국 이렇게, 새 생명들이 움터 자라나는 법이지요.”
“…….”
“그러니, 계시의 전사여. 비록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잿더미와 그을음밖에 없을지라도, 그대의 투쟁이 새 생명을 틔우리란 확신을 잃지 않길 바랍니다.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선 태초의 어둠이, 안온한 유혹이 즐비한 곳에선 투쟁의 바람이, 그대가 모든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다다를 종점에는 부디, 아득히 그려오던 모두와 재회하는 꿈결 같은 안식이 함께 하기를…….”
“…….”
공허한 동공이 희미하게 해사한 음영을 품었다. 카딤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 소생의 난장을 지켜보다가.
아릿하게 불꽃의 상흔 같은 일소를 떠올리곤, 뒤돌아서 홀가분한 걸음으로 떠났다.
“어, 어엇! 나, 나으리! 가, 같이 가시지요!”
꽃 구경에 정신이 팔렸던 행상인이 부랴부랴 그 뒤를 따라나섰다. 바람결이 갈수록 짓궂게 불어, 점묘화처럼 듬성하던 꽃보라가 하양의 장막처럼 짙어졌다. 자욱한 꽃의 춤사위가 가라앉아 다시 풍경이 드러났을 무렵엔, 이미 두 사람의 신영은 봄날의 꿈처럼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기적을 부른 손님들이 떠나고도 만개한 생명들은 고스란히 남았다. 활개 치는 정령과 꽃들 뿐 아니라, 저 멀리 거꾸로 자라 세계를 지탱하는 장대한 신목까지도.
릴리아는 우수 어린 눈빛으로, 언젠가 꼭 함께 꽃밭을 구경하러 가기로 약속했던 소년 드루이드를 돌아봤다.
“……파르네오 님, 이젠 아시겠나요?”
하늘하늘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마음을 흔드는 아찔한 향기 속에서, 수백 년 만에 제가 사랑하는 순백의 꽃밭에 파묻힌 소녀가 새맑게 미소 짓고 말했다.
“제가 왜 그날 유폐처에서, ‘대 드루이드’께서 오시는 꿈을 꿨다고 했는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