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10)
210화. 전쟁의 전조 (6)
율리아와 던센, 그러니까 던컨의 가족들이 운타나로 피신을 떠나기로 한 당일.
골타란과 아탈라인 전사들은 어이없단 얼굴로 왁자한 행렬을 바라봤다.
때는 이른 새벽이건만, 델루타나 북문 앞은 시장판 저리 가라 할만큼 시끌벅적했다. 어릿광대처럼 거추장스레 차려입은 수행원들, 산더미 같은 사치품을 짊어진 짐꾼들, 프릴과 레이스를 덕지덕지 단 드레스를 걸친 귀부인과 시녀들…. 열 명도 너끈히 탈 만큼 으리으리하게 개조된 마차는 덤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율리아가 이끌고 온 일행은 아니었다. 골타란은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책임자 중 하나로 보이는 자에게 다가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대체. 네놈들은 어디에서 굴러먹다 온 놈들이냐.”
“아… 그, 안녕하십니까, 골타란 수장님. 저희는 델루타나 참사회 3선 의원 되시는 로펠로 의원께서 계신, 제니레토스 가문의 안주인 되시는, 몽드메드 부인을 모시고 있는 수행원 일동….
“그딴 걸 묻고 있는 게 아니다. 분명 인원과 짐은 가능한 최소화하라고 단단히 일렀을 텐데 왜 곡예단 마냥 떼거지로 짐짝을 챙겨온 거지?”
“그, 그게, 저…….”
집사가 찍 소리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뒤에 있던 귀부인이 슬쩍 아니꼬운 시선을 보냈다. 골타란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자 곧장 눈길을 깔았다만, 그렇다고 가져온 짐짝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혹시 모를 변을 피해 운타나로 떠나는 건 휠레드 부인, 그러니까 율리아만이 아니었다.
뭇 델루타나의 실권자들이라면, 예외 없이 죄다 제 처자식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자 했다. 하여 델루타나 최고의 정예군인 ‘불굴의 군세’와 참사군 병사들의 호위를 받는 피신 행렬엔, 수많은 고위층 일가의 가솔들이 비집고 들어오게 됐다.
기실 골타란은 율리아만 따로 피신시키길 바랐다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 튜리스 형제가 델루타나 정계의 중심에 있다 한들 독불장군처럼 만사를 멋대로 하는 건 불가능한 일. 아군의 협조를 얻고 정적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선, 그 가족들의 안전이라도 확실히 보장해줘야만 했다.
다만 고위층 일가의 피신은 극비리에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시민들 사이로 걷잡을 수 없이 혼란이 가중될 테니. 때문에 골타란은 필히 모든 짐과 인원을 간소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차림으로 집합하라 일렀건만…… 이 머리통에 꽃밭만 들어찬 작자들은 그 권고를 귓등으로도 듣질 않은 모양이었다.
원칙을 지켜 온 자들은 딱 한 일가뿐이었다. 본디 이 피신 계획이 세워진 목적이라 할 수 있는, 휠레드 부인 일가.
율리아는 달랑 제 아들인 던센과 수행원 세 명만 대동하여 왔다. 도저히 델루타나에서 손꼽히는 부호라곤 믿기 힘든 여염집 아낙처럼 검소한 행색으로. 골타란이 착잡한 낯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게 됐습니다, 휠레드 부인. 부인의 식솔들만 편안히 모시고자 했는데, 갑자기 저렇게 폐를 끼치는 자들이 늘어서…….”
“아뇨, 괜찮습니다. 이렇게 챙겨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 걸요. 일행이 많아서 가는 길이 적적하진 않겠네요.”
“…….”
그렇게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이 행렬은 델루타나의 사교계를 그대로 본떠 박은 거나 마찬가지인 조합이었다. 그리고 사교계 인사들이 얼마나 급 나누는 것과 남 헐뜯는 걸 좋아하는 작자들인지는 두말하면 입 아픈 일.
휠레드 부인을 지킬 안전 장치가 필요했다. 골타란은 행렬을 인솔하게 될 전사들에게 준엄하게 일렀다.
“휠레드 부인이 하는 말은 내 명처럼 받들고, 그 누구든, 부인에게 무례하게 구는 자는 곧장 행렬에서 낙오시켜 버리게. 어느 가문의 가솔이건, 안주인이건, 나발이건 관계 없이 무조건. 그 일로 벌어질 책임은 모두 내가 지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수장님.”
참사군 병사들은 대경실색했으나, 아탈라인 전사들은 군말 없이 명을 받들었다.
척박한 황야의 계율 아래, 그리고 ‘불굴의 군세’의 기치 아래, 수장의 명령은 투신이 내린 계시만큼 절대적. 전사들은 당장이라도 누구든 처단할 것처럼 도끼와 단창을 치켜들었다. 그제야 놀러 가는 것처럼 재잘대던 무리들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쪼록 피신 행렬의 구성원들은 전부 집합했다. 북문의 도개교가 열리고, 온갖 가문의 수행단과 마차가 차례차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규모와 화려함은 어지간한 개선식의 행진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예상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요란뻑적지근한 풍경. 골타란은 심란한 속내를 감추곤 율리아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도시에 남은 부인의 재산은 철통같이 지키고 있겠소이다. 아무 걱정 말고, 정말로 여행 다녀온다 생각하고 맘 편히 다녀오시오.”
“예, 알겠습니다, 골타란 님. 그, 저희 남편도 꼭 좀, 잘 부탁드리고요…….”
“염려 마시오. 그러잖아도 대전사님을 찾을 필요가 있어, 가군의 행방도 함께 물색할 예정이외다. 부인께서 어디로 가시는 지는 벌써 ‘불굴의 군세’ 전체에 전파를 마쳤고.”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아, 던센! 가기 전에 아저씨한테 감사하다고 인사해야지.”
“고맙습니다, 우리 아빠한테 진 골타란 아저씨…….”
“……그래. 네게 아탈라의 투지가 함께 하길 빌지, 땅꼬마.”
그 말을 끝으로, 맹랑한 꼬마와 검소한 부인도 서둘러 피신 행렬을 뒤따랐다.
골타란은 망부석이라도 된 듯 오래 자리를 지켰다. 떠난 자들이 멀어지고, 도개교가 완전히 닫히고, 작은 발소리조차 안 들리게 되어서야 비로소 배웅을 마치고 등을 돌렸다. 부디 전쟁의 불길이 온 대륙을 뒤덮는다 하더라도, 저 모녀에겐 아주 작은 불 자락조차 닿지 않기만을 기원하며.
그러나 전쟁의 불씨는 애저녁에 도시의 디딤돌까지 파고든 후였으니…….
성문을 나선 지 두 식경쯤 됐을 무렵, 던센이 갑자기 행렬의 앞쪽을 가리켰다.
“어? 엄마? 저 아저씨, 그 맨날 거리에서 큰 개들 산책시키던 아저씨 아니에요?”
“……응?”
과연 그곳엔 한 눈에 알아볼 만한 유명인사가 있었다. 튜리스 형제의 정적이자, 늘상 거리에 송아지만한 맹견들을 끌고 다니던 의원, 라뮬렉 볼가루이스.
그가 난데없이 볼가루이스 가문의 마차 안에서 튀어나왔다. 흘끔흘끔 주변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행렬에서 이탈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주변이 워낙 어수선하고, 가문의 일원들이 가림막이 되어 다들 눈치를 못 챘지만, 휠레드 모녀만큼은 그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이내 율리아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제국에 맞서는 튜리스 가문의 행보에 허구한 날 훼방을 놓던 의원이, 부녀자와 아이들 뿐인 피신 행렬에 섞여 나와, 델루타나 밖의 어딘가로 남몰래 떠난다, 라……. 누가 봐도 수상쩍기 짝이 없는 거동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율리아는, 결국 곁에 있던 아탈라인 전사 한 명을 불러세웠다.
“저기, 전사님……?”
“예, 휠레드 부인. 무슨 일이십니까?”
“저, 방금 전에 어떤 분이 행렬에서 빠져나와 저쪽으로 사라졌는데…… 잠깐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 좀 해주시겠어요? 되도록 들키지 않게 몰래 뒤따라가서…….”
전사는 주저함 없이 명을 받들었다. 그녀의 말은 지금 수장의 지시나 마찬가지. 투척도끼를 꾹 쥐고는 신속히 라뮬렉의 뒤를 쫓았다.
율리아는 뜻 모를 긴장에 잠겨 그 모습을 바라보다, 던센의 손을 꾹 붙잡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식은 핏물처럼 서늘한 바람이 서쪽으로부터 불어와, 말라가는 들판의 잡풀을 오소소 뒤흔들었다.
*
빛줄기로서 나타났던 성기사는, 도로 하늘의 빛줄기가 되어 사라졌다.
두구궁, 두구구궁…….
카딤은 훅, 하얀 입김을 뿜으며 광휘마의 잔흔을 바라봤다.
그는 이번에도 아크팔라딘과의 거래를 받아들였다.
성기사들에 맞서는 대가로 헨다르크가 약속한 보상은 총 세 가지였다. 차후 도움이 될 성유물들의 전달, 사후 부탁 시 무슨 일이든 무조건적인 협력 보장, 그리고…… 데카그램이 지닌 ‘성흔’에 대한 정보.
이 중 단연 가치가 높은 건 세 번째, ‘성흔’에 대한 정보였다.
물리적인 조건만 따지면 아크팔라딘 몇 명을 만나든 카딤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 문제는 이적을 통한 ‘변수’. 즉, 초월적인 능력을 주는 엘가의 ‘성흔’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만…… 앞으론 그 수를 훤히 꿰뚫어 볼 수 있게 됐다.
이 정보는 뭇 제국에 대적하는 자들이라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알고 싶을 내용이었을 터. 다만 1부터 10까지 모든 게 완벽한 정보는 아니었다.
5좌부터 10좌, 하위권 데카그램에 관해선 성흔의 효과도 제약도 비교적 정보가 명확했다. 그러나 1좌부터 4좌까지의 성흔은 불분명하거나 추측 성의 정보가 많았다. 헨다르크 본인이 별들의 꼭대기가 아닌 3좌,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보니 어찌할 수 없는 한계였다.
그래도 그만큼 성흔 외의 정보로 보강 설명을 해 주었다.
‘2좌, ‘어둠을 삼키는 별’ 카시우스 경은 극히 위험한 자이니 만나게 되면 필히 주의하시오. 그자가 내가 말했던 바로 그 대주교의 우방이라오.’
‘……네 힘으로도 감당키가 힘들다고 했던?’
‘그렇소. 빛과 어둠의 힘을 동시에 다루는 성기사인데…… 본래도 강했던 자가 오랫동안 어딘가에 다녀온 후론 더더욱 강해졌더군. 사실상 현 엘가 교단의 최강자라 해도 전혀 지나친 표현이 아니지…….’
‘그 말은, 1좌를 차지한 놈보다도 그놈이 더 강하단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데카그램의 1좌는 현재 공석이나 다름없소. 그분은 성도 어딘가의 비밀스러운 처소에 봉인되어 있다는데, 세계가 멸망할 때가 되어야만 봉인을 풀고 현신하실 거라더군.’
‘…….’
허황된 헛소리였다. 그랬으면 대악마가 강림하거나 균열이 생겼을 때 나타났어야지. 그 나이 먹도록 그런 얘길 믿느냔 시선을 보내자, 헨다르크는 저도 타계한 수석 대주교에게 전해 들은 말이라며 황급히 변명을 주워섬겼다.
하여간 헨다르크의 얘기에 거짓은 없었다. 카딤은 사라진 광휘마의 자취에서 등 돌리고 목을 뚝뚝 풀었다. 던컨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광신과 타락에 물든 엘가 교단의 성기사들을 박살 내기 위해, 그리고 겸사겸사 ‘또 다른 목적’도 시험해보기 위해…… 곧장 델루타나로 떠나려는 참이었다.
던컨이 없어졌다.
“……?”
분명 헨다르크와 얘기할 때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지금 보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인벤토리와 하사한 무기들까지 죄다 자리에 남겨둔 채. 카딤은 주변을 휙 둘러봤다가, 눈매를 슬몃 좁혔다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러곤 짐을 챙기고 땅을 박찼다.
쾅 – !
아무리 기척을 감추고 몰래 떠나 봤자였다. 걸어간 자취만큼은 고스란히 남았으니. 얼마 가지도 않아 짓눌린 수풀에서 그 꽁무니를 따라잡았다.
“허억!”
허공에 손을 휘젓자, 까만 망토 자락이 벗겨지고 행상인의 자태가 드러났다. 카딤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뭐 하는 짓이냐, 던컨. 왜 짐을 다 두고 달아난 거지.”
“나, 나으리…… 그, 그게…… 그게 말입니다…….”
“…….”
던컨은 뭐라 말도 못 하고 어물거렸다. 짐을 두고 갔으니 뭘 빼돌리려는 의도도 아니고, 새삼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꼈을 리도 없고, 이자가 제 가족을 버리고 달아날 만한 자도 아니고…… 카딤으로선 도통 이해가 안 가는 상황.
진상이 드러난 건 갈팡질팡하던 당사자가 실토한 뒤였다.
“그, 그게 말입니다요, 나으리……. 나으리께선 또 다른 동료분을 찾으러…… 얼른 서쪽의 황야로 가보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근데 델루타나는 서쪽이 아니라 북쪽에 있는데…… 그렇게 곁길로 새면 시간이 엄청 오래 지체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지.”
“그, 그러니까 그냥…… 이번 일은 저 혼자 해결하겠습니다. 제국의 성기사들에 맞서고, 무고한 자들을 구하고, 제 가족들을 구하는 건, 제, 제 힘만으로 해결할 테니… 나으리께선, 그냥 본래 목표했던 대로 동료분을 찾으러 가십시오. 만일 그분께서 살아계신다면 지금도 얼마나 애타게 나으리를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
“예, 이건, 나으리의 투쟁이 아닙니다. 이 투쟁은 제가 감당할 테니, 부디 나으리께선 나으리께서 가시던 길로 계속 나아가십시요. 저번엔 결국 나으리의 도움을 받아 제 가족을 구했지만… 이번만큼은 반드시, 제 힘만으로 구해보겠습니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면서도, 애처로이 벌벌 떨면서도, 꿋꿋이 주먹을 쥐고 할 말을 마치는 던컨.
비로소 행상인의 의중을 깨닫게 된 카딤은, 그 깊고 갸륵한 뜻에 감동하여 탄복하……
……는 게 아니라, 어처구니를 상실했다.
“……잘 들어라, 던컨.”
“예?”
“네 아내가 물에 빠졌다. 그런데 네 아들이 네 쪽을 살피더니, 너무 바빠 보인다고 홀로 아내를 구하러 물에 뛰어들었다. 그러면 넌 아들을 내버려두고 하던 일이나 계속할 건가?”
“어…… 그럴 리는 없겠지요?”
“잘 알고 있으니 됐군. 그럼 어서 같이 델루타나로 가도록 하지.”
“…….”
던컨은 한 박자 늦게 말뜻을 이해했다.
물가에 내놓은 애새끼처럼 굴지 말고, 잠자코 도움을 받으란 의미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