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12)
212화. 별 분쇄자 (1)
델루타나를 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다.
라뮬렉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그 제국에 맞선다는 게 말이나 되는지. 고위 성기사 몇몇만 나서도 모든 대도시가 쑥대밭이 될 텐데……. 벌써 광휘마가 멋대로 국경을 침범한 사례까지 있는데……. 동맹은 그동안 오롯이 제국의 자비와 타산만으로 존속해온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튜리스 형제는 미치광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제국과의 전쟁을 대비하자니? 그 두 사람은 권력에 눈이 멀어 이성을 상실했다. 이대로 그 전쟁광들을 따라 제국에 맞선다면, 델루타나와 ‘불굴의 군세’가 한낱 불쏘시개처럼 불타 사라지는 건 불가피한 미래였다.
그러니까 자신이 남몰래 제국과 야합하고, 엘가 교단 측에 정보를 밀고하고, 다른 도시의 협조를 못 얻게 이간질하고, 성문을 열고 항복할 준비를 갖추던 건…… 전부 델루타나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구국의 결단이었다…….
……라는 항변을 들은 후, 아탈라인 전사가 보인 반응은 간단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 그렇지 않소? 하하, 그대, 반쯤 짐승 같은 그대의 수장과는 달리 꽤나 명석한 편…….”
“그러면 방금전 했던 그 말을, 이제 델루타나 중앙 광장과 참사회 대회관에 가서 똑같이 해보도록. 나는 펠리코 의원님과 골타란 수장님께 들은 걸 그대로 보고하도록 하지.”
“…….”
라뮬렉의 얼굴이 썩은 과일처럼 뭉그러졌다.
제국에게 정복당한 후라면 모를까, 한창 전쟁을 대비하고 있는 이 시국에 저런 의견을 표명한다? 잘하면 홀로 참수형이고, 못 하면 삼대가 멸족일 게 뻔했다.
배신을 작당한 의원은 전사에게 붙잡혀 호송당하는 중이었다. 제국에 밀고한 내용을 다 들켜 시침을 떼기도 늦었다. 아무리 자신을 풀어달라 어르고 달래봐도 쇠귀에 경전 읽기. 유일한 소득은 이자가 누군가의 명으로 제 뒤를 밟았단 걸 알아낸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이 단련된 전사에 비해 키나 완력도 뒤떨어지고, 무기도 하나 없는 맨손이었으니. 제 맹견들을 호위 삼아 데려오지 않은 게 이토록 한스러울 줄은 몰랐다.
모쪼록 이대로 델루타나까지 끌려간다면…… 중앙 광장은 조만간 자신과 개들과 가솔들의 모가지 전시회장으로 새단장하게 될 터.
결국 라뮬렉은 최후의 수단을 택했다.
‘만일 그대의 헌신이 발각당해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이 ‘복음’을 외우시오. 다만 주의해야 될 거요. 이 ‘복음’은 반드시 진심을 다해, 엘가를 향한 간절한 믿음으로 외워야만 할 터이니…….’
그와 연락하던 아크팔라딘이 일러준 방법, 반신반의하던 위기의 타개책.
“태초로부터 이 땅을 굽어살피고 빛을 밝혀온, 온 세상의 합당한 주인은 오롯이 엘가뿐이시니……. 그분께선 구원을 갈망하는 뭇 여린 미물들에게 빛의 예복을 지어 입히시고, 복토로 인도하시는도다…….”
“……뭐 하는 거냐, 네놈.”
전사가 도끼날로 목을 찍어눌러도 멈추지 않았다. 이 낭독을 도중에 멈추면 죽는다고, 오직 살길은 이것 하나뿐이라고, 피 말리는 간절함을 담아 끝까지 복음을 읊조렸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마침내 어딘가에 닿았다.
그곳이 천상인지, 지상인지, 지옥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우우우웅 – !
……한미한 의원에게 가공할 힘을 준 것만은 확실했다.
스 – 응!
“흐읍!”
전사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정체 모를 섬광에 오른팔을 베였다. 살가죽이 확 벌어지고, 갈라진 근육결에서 울컥울컥 핏물이 솟았다.
그 상처를 낸 건 다름 아닌, 라뮬렉의 등짝에서 솟아난 빛줄기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해초 같기도, 커튼 같기도 한 새하얀 빛의 피륙들.
너울거리는 무른 외관과 달리 그 서슬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불러낸 당사자가 얼떨떨하게 굳은 동안에도 빛의 피륙은 제 스스로의 의지로 적에게 맹공을 펼쳤다.
스 – 응! 승 – ! 스 – 응!
전사는 민첩하게 칼로 무기를 바꿔 들고 대처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흑! 크흑, 흡!”
첫 일격에 오른팔을 잃은 여파가 너무 컸다. 자신은 왼손에 든 칼 한 자루, 상대방은 낭창하게 휘둘러지는 십여 다발 빛의 연검(軟劍), 도무지 수지가 맞질 않는 교전이었다. 순식간에 측두부를 베이고, 어깨를 찍히고, 복부까지 갈리며 수세에 몰렸다.
하릴없이 적과 공멸할 각오로 칼을 버리고 도끼를 던졌으나…….
패래래래래…… 스 – 겅!
……날 대 날로 맞부딪히는 순간, 피륙 날에 잘려 도끼머리가 반 토막이 났다.
무방비해진 전사에게로 성난 피륙이 날아들었다. 전신에 가차 없이 칼집이 새겨지고, 핏방울이 분무처럼 튀었다. 끝내 양팔과 다리 힘줄마저 끊긴 전사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크흑, 크허어으윽…….”
“…….”
그때까지도 라뮬렉은 제정신을 못 차렸다. 한데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천천히 피투성이 전사에게 다가가, 누군가가 주입한 말들을 제 입으로 내뱉는 라뮬렉.
“[이교도여, 내가 외웠던 ‘복음’을 복창하라. 그리하면 네 영과 육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구원받아, 나와 같이 엘가가 선사한 ‘빛의 예복’을 두르게 될 것이다.]”
공명하는 목소리, 은은하게 빛나는 안광, 날개처럼 일렁이는 등 뒤의 피륙……. 그렇게 말하는 라뮬렉의 자태는 흡사 계시를 내리는 천사와도 같았다.
못내 성스러운 권유에 대한 전사의 응답은 간단했다. 척박한 황야의 계율을 따라, 만신창이가 된 몸일지라도 죽을 때까지 맞서는 것.
“흐아아아아압!!”
그 발악은 허망하게 종결되었다.
스 – 겅!
빛의 피륙이 순식간에 목울대를 갈랐다. 새빨간 핏줄기가 솟구치고, 복음을 거부한 자의 머리통이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빛의 피륙을 두른 의원이 경건하게 성호를 그었다.
“[그 낯짝은 영원히 일그러진 채, 그 영혼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 채로 남게 될지어니…….]”
라뮬렉의 내면엔 이제 배신을 작당하던 의원의 인격이 거의 남지 않았다. 피륙을 선사한 의지에 정신을 완전히 장악당했다. 점차 모든 일에 대한 의구심이 희박해져 갔다. 엘가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과, 새 생명을 선사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단 사명감만이 가득 차올랐다.
첫 복음의 전파에 실패한 건 아쉽지만, 낙망할 필요는 없었다. 저기 저, 멀지 않은 곳에 무수한 불신자가 범람하는 대도시가 있었으니. 뭇 죽음의 위기 앞에서 간절한 믿음으로 ‘복음’을 외우는 자라면, 죄다 이 몸뚱이처럼 엘가의 뜻을 따르는 ‘복음체’로 만들 수 있을 터.
그러니 ‘성전’은 제국과 동맹의 경계가 아닌, 바로 이곳으로부터 시작될 것이었다.
우우우웅…….
라뮬렉은 등짝 안에 빛의 피륙을 감췄다. 그러곤 델루타나를 향해 발걸음을 뗐다.
등줄기에 십각성 문양의 ‘성흔’을 빼닮은 낙인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졌다.
*
델루타나에도 본격적으로 전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미 공공연히 알려졌던 ‘성전’의 발발 소식은, 참사회 의장의 공식 발표로 기정사실화되었다. 반 제국 정서가 충만한 자들은 분노와 흥분으로, 대부분의 시민들은 낙망과 체념으로 그 소식을 받아들였다.
전시 체제로의 전환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골병이 든 참사회 의장이 사퇴하고, 중진 의원 펠리코가 압도적인 득표율로 그 뒤를 이었다. 참사회는 즉각 참사군 병력을 추가 차출하고 군수 물자를 비축했다. 참사군과 불굴의 군세는 반으로 분할되어, 절반은 델루타나에 남기고 절반은 국경 인근으로 출병되었다. 골타란이 장군의 자리에 올라 국경으로 출병하는 모든 병력을 인솔했다.
도시의 풍경 역시 역시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전운이 온 거리에 안개처럼 내리깔렸다. 사방에 군홧발 소리와 갑옷 절그럭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시민들은 시시때때로 모여 유용한 정보와 유언비어를 공유했다. 사치품을 값싸게 팔아치우고 생필품을 찾는 자들이 늘어났다. 매일 밤, 관문 인근에서 허가 없이 탈출하는 시민들과 인력 유출을 막는 경비병들 사이로 목숨을 건 술래잡기가 벌어졌다.
하지만 딱 한 곳, 전쟁이 나든 말든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곳이 있었다.
깡 – ! 깡 – ! 깡 – ! 화르르르륵…….
‘쇠망치 영감’ 굴락의 공방. 이곳의 일원들은 그저 평소처럼 계속 눈코 뜰새 없이 쇠를 녹이고 두들기고 빚어낼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겉만 그런 것일 뿐, 전쟁의 영향은 이 공방 속에도 착실히 스며들고 있었다.
“뭐여? 람두크, 이 머저리는 왜 또 안 나왔어?”
“……그 아저씨도 어제 도시 뜬 것 같습니다, 공방장님. 어젯밤에 두브렌 형님이 가서 확인해 보니까 온 집안이 다 텅텅 비어 있었다네요.”
“…….”
공방에서 도망간 대장장이가 람두크가 처음은 아니었다. 마지막일 리도 없었고.
델루타나의 대장장이들은 전시에 병역을 면제받는다. 대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급으로 병장기와 장비를 만들어야만 했다. 시민권을 포기하더라도 다른 도시로 도망가 쇠쟁이 노릇을 하는 편이 이득이라는 건, 셈에 어두운 코흘리개 도제조차도 빤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대부분의 대장장일들이 자리를 지켰다. 애향심 2할, 가족애 4할,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 대한 의리 4할 정도로 남아있는 것. 하지만 그것도 언제 효력이 다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릿수가 줄어들수록, 전쟁이 길어질수록, 남은 자들의 짐은 살인적으로 무거워질 테니.
공방장, 굴락은 씁쓸하게 공방의 일원들을 바라봤다.
쇳물에 데어 팔 가죽이 벗겨진 놈, 망치에 찧어 손가락 한 토막이 아작 난 놈, 눈병이 도져 눈탱이가 팅팅 부은 놈……. 떠난 자들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어느 한 놈도 쉬질 못하고 일하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일 하다간 몇 사람 잡을 게 뻔했다.
마음 같아선 오늘 하루는 자신 홀로 모든 작업을 감당하고, 저 머저리들은 집에 가서 싹 다 쉬라 말하고 싶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굴락은 오늘도 딱 일 인분의 일감의 일만 끝내곤, 급히 절뚝대며 제 작업실로 향했다. 그 꼴을 본 중늙은이 대장장이가 참다 못해 소리쳤다.
“어이, 공방장 영감님! 거, 여기서 손바닥에 쇳가루 좀만 더 바르고 갑시다! 요 새끼 쇠쟁이들이 몇 사람 몫 하느라 다 죽어가는 꼴도 안 보이십니까?”
“얼씨구, 이 절뚝발이 노인네를 얼마나 더 부려 먹어야 직성이 풀리겠는감? 내 더 일하다간 남은 다리마저 박살 나게 생겼으니까, 오늘은 이쯤 하고 가서 쉬어야…….”
“아따, 거짓말할 거면 입에 침이나 좀 바릅시다. 고놈의 둥지에 콕 박혀서 하루 종일 애먼 쇳덩이만 만지작댈 거 다들 빤히 아는데……. 사람 쓸 쇠붙이만 만들기도 바쁜데, 사람이 휘두르지도 못할 쇳덩이를 그렇게 공들여 만드는 까닭이 대체 뭡니까, 영감님? 예?”
굴락의 낯짝에 진 주름이 두 배로 늘었다. 노쇠한 눈동자 속에 화덕불 같은 불길이 깃들었다. ‘역작’을 모욕당한 장인은 보기 드물게 진중한 목소리를 냈다.
“있다네, 이 양반아.”
“……예?”
“있다고, 저거 휘두를 만한 작자가. 맘만 먹으면 제국의 성기사도 맨손으로 찢어버릴 만한 작자가. 그 작자가 ‘큰 거’ 하나 만들어달라 해서 만드는 건데, 필시 저 정돈 돼야 손맛 한번 좋다고 만족할 게 틀림없네.”
“…….”
대장장이는 황당하단 표정이 되었다. 그야, 굴락이 만들고 있는 무기는 웬만한 공성추 저리 가라 할 크기였으니. 저런 걸 혼자 맨몸으로 들고 휘두른다면, 그건 이미 사람이 아니라 인두겁을 쓴 괴물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굴락은 더 말을 섞지 않고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이제는 정말 ‘역작’의 완성이 코앞이었다. 적어도 이 작품을 빚는 동안은 현실에 흔들리지 않고 싶었다. 정결한 마음으로 끝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게 늘그막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 공방의 철문을 벌컥 열고 뛰쳐 들어왔다.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 잠까, 잠깐만요!”
근래 공방의 잡무를 돕느라 덩달아 바빠진 굴락의 손녀였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 왔는지, 한 겨울인데도 앳된 얼굴이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할아버지!! 헥, 헤엑…… 큰일,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이냐, 아가? 주문 수주 관련된 거라면, 나중에 따로 얘길 들을 테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예요!! 빨리 여기서 도망쳐야 되요!! 지금 거리에, 거리에서!! 막 뭔가, 이상한 것들이…….”
더 얘기를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정문이 열림으로 인해, 쇳소리와 불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던 거리의 비명과 괴성이 생생하게 공방 안으로 덮쳐왔으니.
‘꺄아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 ……르르르, 크르르르…….
대장장이들은 화들짝 놀라 일제히 거리를 내다보았다.
머지않아 화덕의 열기로 인해 흐르던 비지땀이 싸늘하게 식고, 공포와 경악으로 인한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
전력 질주하는 카딤의 뒤를 쫓아 동맹령을 횡단하는 동안.
던컨은 도합 48번의 현기증, 13번의 구토, 8번의 호흡 곤란 증상, 3번의 부정맥 증상, 4번의 경도 염좌, 2번의 실신, 그리고 1번의 토혈을 겪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진작 죽고도 남았을 극한의 여정. 하지만 던컨은 조금만 천천히 가자고 말도 못 했다.
“흐아악, 흐아아악…… 허억, 허어…… 나, 나으리……… 이, 이 기운은……?”
오소소, 섬찟하게 살결에 와닿는 마기의 감각.
근처에 악마가 있는 모양이었다. 비교적 둔감한 자신이 느꼈을 정도이니 카딤이 못 느꼈을 리는 없었다. 던컨은 찔끔, 흐르는 눈물을 닦고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허어, 허어…… 악마, 악마가 주변에 있는 모양이구만요……. 후우…… 피를 받을 수통을 비워놓겠습디다……. 어서, 빨리 가서 잡고, 피를 받은 다음 다시 출발을…….”
“…….”
카딤은 그러는 대신, 뇌격을 보이지도 않는 머나먼 어딘가로 던졌다.
쐐래래래래래래……
……후 – 웅, 후웅, 훙, 턱 – !
뇌격은 순식간에 수 킬로미터를 왕복하고 되돌아왔다. 도끼날에 악마의 피 찌꺼기를 흥건히 묻힌 채로. 카딤은 마른 풀을 뜯어 도끼머리를 닦아낸 다음 무덤덤히 말했다.
“피는 버리고 그냥 가도록 하지.”
“……예?”
“네놈의 가족을 구하는 게 우선이지 않나. 다른 악마나 마물이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 빨리 지나가는 편이 좋겠군.”
“……!!!”
흡사 피를 거부하고 단식하는 흡혈귀를 본 듯한 기분.
던컨은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조차 잊고, 입을 쩍 벌린 채 얼어붙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