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13)
213화. 별 분쇄자 (2)
북녘으로부터 차게 식은 바람이 불어와, 마른 잔디 위에 영근 이슬로부터 얼음꽃을 피워냈다.
대륙의 북부와 남부를 가로 짓는 경계는 애저녁에 지났다. 남부의 미지근한 공기에 웅크렸던 동장군은 이젠 완연히 어깨를 활짝 폈다. 그 맹위에 콧등이라도 얼어붙어 떨어질까, 풀벌레들은 흙 속에 깊숙이 숨고 나무와 식생들은 꽃떨기를 떨군 채 묵도를 올렸다.
바야흐로 강건한 육체미를 자랑하던 야만인들마저 살아남기 위해 가죽옷을 칭칭 동여매는 계절이다. 이런 때에 공연히 고뿔에 들지 않으려면, 바닥에 한번 앉더라도 모포 한 겹 더 깔고 앉고, 숨을 한번 쉬더라도 차분하게 쉬는 편이 좋다는 건 애들조차 아는 상식이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내는 그 상식을 정면으로 거슬렀다. 서리 내린 냉바닥에 덜렁 드러누운 채, 마구잡이로 폐부에 겨울 칼바람을 쑤셔 넣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한숨이라도 더 안 들이키면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던컨은 계속 풀린 눈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꼴딱 넘어갈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헉, 끄윽, 허어어…….”
그래도 그 정도 계절에 대한 반항은 양호한 수준이었다. 그의 일행은 아예 얼어 죽으려는 것마냥 웃통까지 홀라당 벗고 있었으니.
물론 그래도 상관이 없으니 그런 꼴을 한 것이었다. 그는 활화산마저 설산으로 만드는 극빙의 한파가 아니고서야, 더는 추위라는 걸 느낄 여지가 없는 자였으니. 카딤은 목에 새겨진 ‘불과 얼음의 가호’를 슬쩍 쓸어내렸다.
우웅, 우웅, 우웅 –
멜리사의 유산과 드래곤의 선물은 제값을 했다. 가운데 박힌 보석이 마나를 흡수하고 신비 문자가 훈훈한 열기를 퍼뜨려 한기를 완벽히 상쇄했다. 뭐, 지금은 워낙 몸에서 열이 많이 나, 이것이 없었더라도 별로 안 추웠을 테지만…….
그와 던컨은 닷새 만에 대륙의 절반을 종단한 참이었다.
평범하게 걸어가면 한두 달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그야말로 상식을 훌쩍 뛰어넘은 쾌속의 행군. 온 대륙을 통틀어봐도 이토록 빠르게 이동할 방법은 아크팔라딘의 광휘마나 순간 이동 대마법 정도밖에 없지 않을까 싶었다.
던컨이 이 비상식적인 속도의 행군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카딤의 피를 받아들여 향상된 체력, 짐을 떠넘겨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 그리고 어떻게든 가족들을 구해야 한단 초인적인 정신력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터무니없는 가혹함에 발가락 끝도 까딱 못할 만큼 탈진하고 말았지만…….
반면 카딤은 몸에서 김이 펄펄 날 뿐, 몸짓이나 호흡은 아침 산보라도 마친 것마냥 평온했다. 이대로 왔던 거리를 그대로 되돌아가라 해도 거뜬히 해낼 만한 모습.
하지만 그는 오늘만큼은 푹 쉬고 가기로 결정했다.
목적지인 ‘델루타나’에 닿기 전, 일행의 체력을 회복시켜 놓는 편이 좋을 테니.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가도록 하지. 내일 해가 뜰 때 다시 출발해서, 중천에 닿기 전에 델루타나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허억, 허억…… 예에에…… 알겠습니다요…….”
“모포를 덮고 누워라, 던컨. 그렇게 땀 흘린 채 찬 바닥에 뻗어 있으면 근육이 굳는다.”
주섬주섬 모포를 깔고, 삭정이와 낙엽을 모아 군불을 피우고, 육포와 말린 야채로 죽을 끓여 끼니를 떼웠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다 보니, 금방 죽을 것처럼 헐떡대던 던컨의 상태가 한결 나아졌다.
기실 이렇게 급박하게, 빨리, 멀리 이동한 건, 카딤도 2회차에 이른 후론 처음이었다. 불현듯 스치는 감상에 잠겨 지나가듯 읊조렸다.
“확실히, 말이 있으면 좋을 뻔했군.”
“……예? 말 말입니까?”
“그래, 겨우 그것 좀 뛰었다고 네놈이 이렇게까지 빌빌댈 줄은 몰랐다.”
“…….”
이자가 제 가족들을 생각해 서둘렀단 사실을 되뇌이며, 던컨은 목구멍까지 치솟은 나쁜 말들을 욱여넣었다.
“후우…… 그래도 어쨌든 이렇게 달려온 게 맞는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요, 나으리……. 말은 어디서 찾을지 막막하기도 했고, 결과적으론 진짜 세상 그 어느 말보다 빨리 달려오기도 했으니까…….”
“글쎄, 이보다 빨리 달리는 말도 있긴 하다만.”
“음? 아, 아아! 그 성기사들이 타는 빛나는 말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 말 말고 다른 말. 이 세상이 아닌 곳에 있는, 여물 대신 땅에서 난 기름을 마시는 말.”
“……?”
“……그런 놈들이 있다. 몸뚱이는 철로 됐고 바퀴가 달린 놈들인데, 그 신속함은 성기사 놈들이 타는 말조차도 우습게 여길 정도지. 아마 그놈을 타고 전력으로 달렸다면, 우리가 며칠간 달린 거리를 이틀도 안 돼 왔을 거다.”
행상인은 얼떨떨하게 눈을 꿈뻑거렸다. 뭐지, 아탈라인들의 신화에 나오는 얘기인가? 내용만 들어선 진정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였지만…… 목소리 밑에 깔린 뜻 모를 먹먹함 탓에 감히 토를 달 수가 없었다.
다른 세상에서 온 야만인도 거기까지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복잡한 속사정을 털어놓긴 썩 좋지 않은 때였다. 그런 얘길 들었다간, 분명 오늘 밤 동안 맘 편히 쉬어갈 수가 없겠지.
잠시 침묵을 타 스며드는 바람, 그 결을 따라 산산이 흩날리는 불소리.
후우우우웅…….
멍하니 지난 며칠간의 기억을 되짚던 던컨이 문득 화제를 돌렸다.
“어, 그런데 말입니다, 나으리. 나으리의 그 지병…… 그러니까 ‘광증’ 말입니다. 혹시…… 요즘은 좀 어떠십니까?”
“……왜 그런 걸 묻지?”
“아니, 그러니까 그게…… 나으리가 전보단 꽤 괜찮아지신 것처럼 보이셔서 말입니다. 막, 혼잣말을 하시거나 몸에 칼질을 하시지도 않고, 피를 따로 챙겨 드시지도 않고, 심지어 어젠 악마를 죽이기만 하고 그냥 지나치시기까지 해서……. 혹시나, ‘광증’이 조금 호전되신 건가 싶어서…….”
그럴 리가 있나. 어제 피를 안 챙긴 건, 그놈이 그냥 피라미 하급 악마라서…….
……라고 답하려 했던 카딤은 입을 다물고 유심히 턱을 쓸었다.
“…….”
그러고 보니 그렇긴 했다.
최근엔 엄습하는 광기를 떨치려 애쓴 적이 별로 없었다. 피를 향한 갈망도 적당히 딱 참을 만한 수준으로 약해졌고. 완전히 ‘광증’의 증세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전보다 훨씬 덜해진 것만은 분명했다.
‘뭐지. 광증은 계속 되돌릴 수 없이 악화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1회차와 2회차를 통틀어 처음 겪어보는 일.
잠자코 생각해 보니, 짐작 가는 원인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지옥에 가서 악마의 피를 원 없이 포식한 것, 다른 하나는…… 거기서 빛 덩어리가 된 게일이 혈기와 광기를 제거해준 것.
전자는 미진했던 갈망을 미어터지도록 충족시켰단 면에서, 후자는 피의 부작용을 한 차례 말끔히 씻어냈단 면에서 효과가 있을 법했다. 1회차의 힘을 거의 다 수복했는데, 광증은 도리어 완화됐다니……. 어쩌면, 지금이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진 이래 최고의 상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긴장을 푸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아직도 눈에 선했다. 피를 과도하게 마실 때마다 늘 보는 환상, 삽질로 구덩이를 잔뜩 파헤쳐 난장판이 된 마경의 광경. 만일 그 밑에 감춰진 ‘정체불명의 존재’가 드러날수록 광증이 강해진단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 평화는 필시…… 폭풍전야의 고요와도 같은 것일 터.
카딤은 속내를 애써 감추곤 담담하게 답했다.
“지옥의 공기를 쐬고 온 게 몸에 좋았나 보군. 다음번엔 꼭 한번 같이 가보도록 하지.”
“…….”
던컨은 쓸데없는 질문을 던진 1분 전의 자신을 속으로 맹비난했다.
급히 화제를 돌리기 위해 델루타나에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에 관한 얘길 꺼냈다. 렘타나의 일을 수습하기 위해 거기로 간 참사관 엔리코, 며칠간 같이 지내며 친해진 참사군 병사들, 가족들과 재회할 기대에 부풀었던 쇠망치 영감 굴락, ‘아곤의 성난 뿔’이란 옛 이름을 버린 골타란까지……. 다들 잘 지낼지 있을지 궁금하다고 중얼거리는 던컨.
그런데 카딤이 갑자기 쯧, 혀를 찼다.
“……어쩌면, 네 가족들이 델루타나에 없을지도 모르겠군.”
“엑?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설마 무사히 도착을 못 했을 거라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다. 이전에 네가 네 아내더러 그 골타란이란 놈을 찾아가라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그자가 전쟁에 대한 소식을 미리 듣고는, 네 가족을 챙겨 다른 도시로 피신했을 수도 있으니까.”
“……아!”
탄복은 짧았다. 던컨은 빠르게 당황에 젖어들었다.
“그, 그러면 어떡합지요, 나으리? 그자들이 여길 떠났다면 누구한테 행방을 물어봐야…….”
“참사관이나 쇠망치 영감 쪽을 통해 수소문해 봐야 할 테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낸다면, 뭐, 그쪽으로 곧장 다시 뛰어가면 될 테고.”
“…….”
가족의 안위를 고려하면 미리 피신했다는 건 기뻐할 만한 일이겠지만…… 이 순간, 대륙의 절반을 닷새 만에 종단한 행상인은 어쩔 수 없이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했다.
율리아, 던센……. 제발, 제발, 엄한 데 가지 말고 델루타나에서 안전하게 기다리고 있어다오…….
*
델루타나의 위기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전쟁을 반대하는 친 제국파 의원들의 쿠데타, 군수품 징발에 분노한 시민들의 봉기, 파죽지세로 국경을 돌파한 성기사와 성전군의 기습 공격……. 그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찬란한 위용을 자랑하던 황금의 도시를 아비규환의 난장으로 만든 근원은 바로 이것들이었다.
첫 번째는, 새하얗게 빛나는 늑대만큼 거대한 개들.
– 커헝, 컹, 컹!!
– 크르르르르, 크륵, 크륵 – !
“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두 번째는, 괴인들이 전파하는 엘가의 ‘복음’.
“[불신자여, 간절한 진심을 담아 이 ‘복음’을 외우거라. 그리하면 네 영과 육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구원받고, 엘가가 선사한 ‘빛의 예복’을 입게 되리니…….]”
“아아, 아아아아…….”
하얀 맹견들이 거리를 쏘다니며 보이는 모든 자들을 갈기갈기 물어뜯고 찢어발겼다. 겨우 죽음의 위기를 피해 숨은 자들 앞에는 어김없이 등짝에 빛의 피륙이 돋은 괴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종이 한 장을 들이밀며 살고 싶거든 그것을 낭독하라고 강권했다.
“태, 태초로부터 이 땅을, 하악, 끅, 굽어살, 굽어살피고…… 빛을 밝혀온…… 온 세상의 합당한 주인은…… 끅, 오롯이 엘가…….”
그러나 단순히 낭독만 한다고 능사는 아니었다.
“[이 불경한 불신자 같으니라고!! 내, 진심을 담아 외우라고 똑똑히 말했거늘!!!]”
스 – 겅!
살아남기 위해선 반드시 내면에 그 ‘복음’이 자신을 살려줄 거란 진실된 믿음이 있어야만 했다. 반신반의하거나 간절함 없이 외우는 자들은, 전부 괴인이 휘두른 빛의 피륙에 목이 달아나는 꼴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누군가 진심으로 그 ‘복음’을 낭독했을 때 발생했다.
“[아, 아아, 이는 진실로 참된 복음이로다……. 엘가만이 이 세상의 합당한 주인이시니…… 나는 지금부터 기꺼이 이 복된 말씀을 전파하는 빛의 첨병이 되겠노라…….]”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그런 자는 본래의 인격을 잃고 등짝에서 피륙이 돋아나, 자신에게 복음을 권한 괴인과 똑같은 존재, ‘복음체’가 돼버렸으니까.
그렇게 ‘복음체’가 된 자들에 의해, 온 도시에 역병처럼 ‘복음’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대체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가 무엇인지는 의견이 분분했다만, 정확히 원인을 파악할 여유 따윈 없었다. 당장 터진 참사에 대처하는 게 급선무였으니.
죽을 위기에서 ‘복음체’로 거듭나는 자들은 열 명 중 한두 명 꼴이었다. 그러나 델루타나는 자유도시 동맹에서 제일 인구가 많은 대도시. 발원점인 북문 인근의 한 구역에서만 무려 수백 명에 이르는 ‘복음체’가 탄생했다.
수가 많다고 무력이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괴인과 새하얀 맹견들은, 평범한 시민들은 물론 참사군 병사들조차도 상대가 되질 않았다. 도시 내에서 그들에게 맞설만한 전력은 기껏해야 잔류한 ‘불굴의 군세’의 전사들, 혹은 미처 마탑에 복귀하지 못한 마법사들 정도.
“아탈라아아아아아!!”
“황야의 아버지께 영광을 – !!”
“[그라덴, 몰, 델그시움, 사밀락토…….]”
– 커헝, 컹, 컹! 커헝!
“[불경한 이교도들에겐 엘가의 심판이 있으리라!!]”
하지만 적들에 비해 그들의 머릿수는 턱없이 적었다. 또한 복음체는 점점 더 증식하는 데 반해, 그들은 부상을 입고 사망하여 수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실적으로 모든 구역을 지키는 건 불가능했다. 참사회 의장, 펠리코 튜리스는 동문 일대를 피난 구역으로 지정하고, 모든 생존자와 병력을 그곳에 집중시켰다.
도시의 머리인 참사회관에, 도시의 심장인 중앙 광장에, 온갖 중요 시설과 주거 시설을 죄다 포기해야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애들이건, 어른이건, 시민이건, 대장장이건, 병사건, 의원이건, 어떻게든 다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급히 피난 구역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도시 어딘가에는, 죽음의 위기마저 무릅쓰고 사명에 몰두하는 자도 있었으니…….
델루타나 북부, 이미 괴인과 맹견들에게 장악당한 구역의 어느 공방.
철겅, 철겅, 치르륵…….
자물쇠를 걸고 쇠사슬에 칭칭 감겨 봉쇄됐던 공방의 철문이 느닷없이 도로 열렸다.
드르르르륵, 콰 – 앙!
어둑했던 공방으로 잔잔한 역광이 쏟아졌다. 모루에 대충 놓인 망치, 널브러진 대갈마치, 거치대에서 떨어진 병장기들, 우르르 무너진 골탄 무더기……. 급하게 도망가느라 엉망진창 어질러진 작업장의 풍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쯧, 명색이 대장장이란 놈들이…… 저들한테 한평생 쇳밥 먹여준 연장한테 고마운 줄도 모르고…….”
노인은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섰다. 대장장이들이 버리고 떠난 연장과 병장기를 대강 정돈하고는 작업실로 향했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가 오늘따라 더 위태롭게 휘청였다. 끊어진 한쪽 발꿈치만 해도 충분히 무거운 걸림돌이거늘, 이젠 거리에서 죽어가던 자들이 지르는 비명소리와, 제발 피난 구역에서 떠나지 말라고 오열하던 손녀의 울음소리까지 발목에 매달려 있었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절대 마무리 짓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후우…….”
‘쇠망치 영감’ 굴락은 정결히 마음을 추스르고 망치를 휘어잡았다.
그러곤 다시금, 완성까지 한 걸음 남은 ‘역작’의 제작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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