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22)
222화. 은거울 호수의 사신 (1)
피난 행렬은 눈길을 끄는 일 없이 신속히 목적지로 대피해야 한다.
지난 며칠간, 델루타나에서 운타나로 향하는 고위층 일가들은 그 상식을 박살 내고 싶어 안달 난 자들 같았다.
오밤중인데도 야영지는 대낮처럼 시끌벅적했다. 황금 등잔으로 둥글게 둘러싸인 커다란 천막 안, 광대들은 재담 보따리와 함께 익살을 떨고, 악사들은 백파이프를 불고 하프를 치며 선율을 빚고, 귀부인과 그 자제들은 차와 미주와 간식을 음미하며 간드러진 웃음꽃을 피웠다.
‘어머, 부인? 그 목걸이, 예전에 넬드렌 공방에서 특별히 딱 하나만 만들었다고 했던…….’
‘호호호, 맞아요. 저는 뭐, 괜찮다고 했는데, 저희 의원님께서 당분간 고향을 떠날 테니 위로의 선물이라고…….’
오늘 밤도 어느 이름 없는 들판은 델루타나 사교계의 한복판으로 탈바꿈했다. 한겨울 맹추위나 전쟁의 피비린내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안온한 열기와 달콤한 미식과 사치스런 향락만이 가득한 세상이 나타났다.
그 별세계에 모두가 초대받은 건 아니었다. 하인과 노예들, 그리고 참사군 병사들. 그들은 윗사람들의 열락을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뒤치다꺼리를 하거나 천막 밖에서 칼바람을 쐬며 보초를 섰다.
아예 상관없이 동떨어진 자들도 있었다. 가죽옷을 동여맨 험상궂은 전사들, 그리고 기워 붙인 케이프를 두른 어느 부인의 일행들. 그들은 인접한 공터에 모여앉아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아탈라인 전사들은 소란이 끊이지 않는 천막을 바라보며 미간을 팍 찌푸렸다.
“저 천막, 슬슬 철거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인. 저렇게 또 밤새 부어라 마셔라 놀면 내일도 못 떠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뇨, 그냥 두세요……. 저 사람들도 갑자기 고향을 떠나 불안할 텐데 위안거리 정돈 있어야죠.”
“그렇다면 부인께서도 천막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바람이 많이 찹니다.”
“괜찮아요. 지난번에 들어가 보니까, 너무 사람도 많고 혼잡스러워서 정신이 없어 가지고…….”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도끼를 들고 안에 있는 자들을 전부 쫓아내겠습니다. 그러면 부인과 식솔들만 들어가서 한적하게…….”
“아, 아뇨, 아뇨, 그러지 마세요. 애초에 저 천막을 제가 가져온 것도 아니고…….”
“…….”
영 마뜩잖은 눈치였으나 전사들은 더 토를 달진 못했다. 휠레드 부인, 율리아는 착잡하게 시선을 깔았다.
그녀라고 저들의 꼬락서니가 좋게 보이는 건 아니었다.
전쟁을 피해 달아나면서 매일매일 연회를 일삼다니? 물자 낭비는 물론, 한번 자리를 깔면 떠날 줄을 몰라 시간 낭비까지 막심했다. 단순히 상식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단체로 미친 게 아닌지 의심해야 할 수준.
율리아에겐 능히 저 연회를 중단시킬 권위와 능력이 있었다. 애초에 이 피신 행렬의 구심점은 그녀였고, 불굴의 군세 전사들도 완벽히 그녀의 명을 따르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이지, ‘그래도 된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권위는 스스로 쟁취한 게 아니었다. 오로지 뒷배인 골타란 장군, 그리고 엔리코 참사관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 자신이 고위층의 가솔들에게 함부로 굴었다간, 나중에 델루타나로 돌아갔을 때 도와준 자들의 입장이 곤란해지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귀부인과 자제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무시하기 딱 좋은 꾀죄죄한 몰골임에도, 아무도 대놓고 율리아나 던센에게 무례하게 굴진 못했다. 그랬다간 무식한 야만전사들에게 도끼 세례를 받을 게 뻔했으니.
대신, 그들은 보다 ‘사교계’다운 방식을 택했다.
“어머, 휠레드 부인? 왜 여기 계세요?”
“세상에, 이렇게 추운데 여태 밖에 계셨던 거예요?”
이름 모를 귀부인 둘이 모닥불 곁으로 다가왔다. 율리아는 애매한 미소를 떠올렸다.
“뭐, 그렇게 춥지도 않은 걸요. 이렇게 불 앞에만 있으면 따뜻해서…….”
“아아, 그러셨구나! 어쩜, 저희보다 바깥 생활 경험이 많으셔서 그런지, 역시 이런 추위에도 잘 적응하시고…….”
“맞아요, 지난번에도 말씀하시는 거 듣고 내심 부러웠던 거 있죠? 어휴, 저희들은 저 천막 안에서도 추워 가지고 혼났는데…….”
“…….”
생글생글 웃는 면면, 호의적인 어조. 그러나 그 밑엔 미천한 길바닥 출신이라 비꼬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
이어서 그래도 천막에 들어오란 권유가 뒤따랐다. 율리아는 최대한 좋게 좋게 거절했다. 그저께 애원하는 걸 못 이겨 따라갔다가, 신기한 짐승이라도 된 것마냥 인파에 둘러싸여 시달린 걸 떠올리면 아직도 진절머리가 났다.
허나 곧 마음을 바꿔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 부인께서 어떤진 모르겠는데…… 옆에 계신 꼬마 신사분께선 꽤 추우신 것 같은데요?”
“어휴, 가엾어라. 아직 갈 길도 먼데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일 텐데…….”
“픙, 프흥……. 아뇨, 저, 저, 저도 하나도 안 추운데…….”
코를 먹으며 설득력 없는 말을 내뱉는 던센. 비교적 남쪽인 몰타나에서 자란 여덟 살배기 꼬마에게 동맹령 북단의 삭풍은 제법 혹독한 것이었다.
결국 율리아는 마지못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귀부인들이 반색을 하며 앞장섰다. 다행히 걱정과는 달리, 천막 안에서도 이전처럼 율리아와 던센에게 큰 관심을 갖는 자들은 없었다.
정말로, 단 한 사람조차도.
“몽드메드 부인, 샤세르 부인! 어휴,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베스타나에서 가져온 진주를 보여주신다 해서 다들 아까부터 목 빠지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머, 어머, 내 정신 좀 봐! 죄송해요, 깜빡했네요!”
“휠레드 부인?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주시겠어요? 금방 다시 돌아올 테니까…….”
“…….”
두 귀부인이 급한 일이 생긴 척 휠레드 모녀를 연회장 한가운데 두고 떠났다. 그러자 그제와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거짓말처럼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제까진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어줬던 연로한 귀부인도, 친절히 쿠키와 차를 대접했던 중년의 귀부인도, 어떻게 골타란 장군과 알게 됐냐 호기심을 표했던 젊은 귀부인도, 던센더러 귀엽다고 연신 호들갑을 떨었던 영애들도…… 전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 뚝 떼고 모른 체를 했다.
“예, 좋아요. 나중에 델루타나로 돌아가면, 저도 저희 의원님 데리고 같이 찾아뵐 테니까…….”
“역시, 볼가루이스 부인께선 어쩜 이리 지혜로우시고 박식하신지…….”
“맞아요, 델루타나도 여기 동맹에서나 최대 도시인 거지, 그 광활한 루카오니아 제국의 성도에 비한다면야…….”
“…….”
낮잡아 보는 시선이나 험담조차도 없는 완벽한 무시.
금방 돌아온다던 귀부인들은 암만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민망함을 못 이긴 율리아가 먼저 몇몇 사람들에게 말을 붙였다. 당장은 사근사근한 답변이 돌아오긴 했으나 딱 그때뿐, 답을 마치면 사교계 인사들은 슬그머니 등을 돌리고 저들끼리만 계속 밀담을 나눴다.
추레한 불청객들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연회장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였다. 율리아는 애써 의연한 태도를 지키며 던센을 내려다봤다.
“던센, 뭐라도 좀 먹을래? 쿠키 좀 가져다 줄까?”
“응, 아니……. 그보다 엄마, 우리 여기 나가자. 여기 너무 시끄럽고 더워…….”
눈치 빠른 아들이 손부채질을 하며 나가고 싶단 시늉을 했다. 율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막을 막 벗어나는 순간, 그들을 안내한 귀부인이 기다렸단 듯이 나타났다.
“어머, 벌써 가시게요, 부인?”
“조금만 더 있다 가시죠? 아직도 몸도 제대로 못 녹이셨을 텐데…….”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했어요, 부인들. 저흰 이만 가볼게요.”
마음에도 없는 제안을 단호히 뿌리쳤다. 아들의 손을 꾹 붙들고 터덜터덜 모닥불가로 돌아갔다. 두 귀부인은 은근한 조롱을 품은 미소를 떠올리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재잘대고 깔깔대며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악사들의 음악 소리는 동이 터 오를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
사실 그 정도 수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율리아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볼가루이스 가문의 안주인, 볼가루이스 부인의 행태.
그녀의 아버지는 현직 참사회 의장이고, 그녀의 남편, 라뮬렉 의원은 한때 유력한 차기 의장 후보였다. 자연히 사교계 내에 그녀의 입지는 공고했으며, 피난길을 나선 후론 아예 귀부인들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했다.
한데 근래 그 부인의 거동이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시시때때로 귀부인들을 불러 모으곤, 제국에 대적하는 튜리스 가문의 행보를 비난하는가 싶더니, 자신들이 고생하는 게 다 그들 탓이라 몰아가더니, 끝내 제국과 엘가 교단도 그리 나쁜 곳이 아니란 식으로 여론을 호도하기 시작했다.
제국과 내통한 게 아닌지 의심할 만한 모습. 더구나 율리아는 의혹을 뒷받침할 유력한 증거까지 갖고 있었다.
델루타나를 떠난 첫날, 라뮬렉 의원이 몰래 볼가루이스 가문의 마차에 숨어 있다 튀어나오는 걸 보았단 것.
그리고…… 그 뒤를 추적하러 나선 전사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단 것.
그 신의 깊은 아탈라인 전사가 명을 어기고 달아났을 리는 없을 터.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등골을 타고 돌았다. 그러나 확실하게 진상을 규명할 방법이 있는 게 아니었기에…… 초조하게 볼가루이스 부인만 예의주시하고 있을 즈음…….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휠레드 부인. 저희, 운타나가 아니라 ‘은거울 호수’ 쪽으로 먼저 가도록 하죠.”
“예……?”
“왜, 그 운타나 옆에 있다는 유명한 호수 있잖아요. 거기 겨울 설경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더라고요. 한번 운타나 성내에 들어서면 다시 나오기도 번거로울 테니, 먼저 그쪽으로 가서 호수 구경도 하고, 차도 한 잔 마신 다음 가시는 게 어떨지…….”
“…….”
정신 나간 제안에 할 말을 잃었다. 여정을 더 지체해선 안 된다며 단칼에 거절하는 율리아.
하지만 그럴 줄 알았는지, 볼가루이스 부인은 이미 일행의 의견을 전부 규합해놨다. 여기저기서 귀부인들의 불만 어린 시선과 압박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율리아가 마음을 바꾸지 않자, 그녀는 의미심장한 어조로 첨언했다.
“흐음, 부인. 지금 바로 운타나로 가시면…… 많이 후회하실 텐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뇨, 뭐, 아름다운 풍경을 못 봐서 아쉬울 거란 얘기지요. 그렇게까지 서둘러 운타나로 가실 필요가 있나요? 하기야, 뭐, 건장한 사내들이 그렇게 많이 곁에 있으니, 어서 남의 눈이 없는 곳으로 가시고픈 마음도 이해 못할 건 아닙니다만……. 호호호…….”
“…….”
여지없는 모욕에 아탈라인 전사들이 진노하여 도끼를 들었다. 그에 맞서 귀부인 측의 참사군 병사들도 머뭇머뭇 창칼을 들었다.
골타란 장군에게 충성하는 ‘불굴의 군세’와 달리, 참사군은 의장의 친딸이 내린 명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 군세의 전사 30여 명 대 참사군 병사 50명, 두 집단 사이로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적 열세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아탈라인 전사들은 혼자서도 충분히 병사 열 명을 상대할 만한 무력을 지녔다. 양측이 충돌하면 당연히 이쪽의 낙승이겠지만…….
불필요한 피를 보고 싶진 않았다. 율리아는 전사들을 자중시키며 탄식하듯 말했다.
“……마음대로 하시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 저와 제 일행은 곧장 운타나로 향할 겁니다.”
“어머, 아쉽네요……. 그러면 저희의 동행은 여기까지겠군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휠레드 부인. 부인의 남은 여정에 부디, 지엄한 빛의 인도가 있기를.”
제국에서나 쓸 법한 작별사를 남기곤 등을 돌리는 볼가루이스 부인. 남은 명가의 가솔들과 참사군 병사들도 줄줄이 그녀를 뒤따라 사라졌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기분. 불길한 예감이 성큼 더 크게 자라났다. 그렇지만 멈춰있을 순 없었다. 율리아는 동요하는 식솔들, 그리고 분노로 이를 가는 전사들을 진정시키고 서둘러 운타나로 가려 했다.
그런데 떠나기 직전, 난데없이 아들이 바닥에 쪼그려 있는 걸 발견했다.
“던센, 뭐 하니 지금?”
“응, 우리가 가는 쪽으로 금화를 묻어 두고 있어.”
“……금화?”
“응, 1천 루덴 금화. 아빠는 금화 좋아하잖아. 나중에 아빠가 우리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발자국이 나뉘어도 헷갈리지 말고 우리 쪽으로 잘 찾아오라고.”
“…….”
율리아는 금화 한 닢을 정성스레 땅에 세워 파묻는 아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순수하다 해야 할지, 대견하다 해야 할지, 안쓰럽다 해야 할지…… 북받치는 감정에 입술을 달싹거리다, 결국 말없이 아들을 쓰다듬고 꾹 안아줬다.
이윽고 율리아 일행도 발걸음을 재촉하여 떠났다.
방문객들이 떠난 겨울 벌판에는 오직 금화 한 닢만이 남아 말갛게 빛났다.
*
그리고 며칠 후.
그 벌판에 어느 염소 수염을 기른 사내가 닿았다.
“아, 아니…… 이건!!”
쏜살같이 검은 망토를 벗었다. 옹색한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렸다. 거친 입김이 부옇게 공기를 흐렸다. 손을 달달 떨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사내는, 황급히 몸을 숙이고 딱딱하게 굳은 땅을 맨손으로 파헤쳤다.
잠시 후, 겨우겨우 흙 묻은 금화 한 닢을 캐냈다. 사내는 그것을 소매로 싹싹 닦은 다음,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아싸, 꽁돈 주웠다!!”
고된 여정으로 축 처졌던 던컨의 입가에 간만에 해맑은 미소가 걸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