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25)
225화. 은거울 호수의 사신 (4)
병사들은 순식간에 목단검에 찔려 잠들었다. 던컨은 허겁지겁 여인의 손을 잡아끌어 구출했다. 몇 차례나 다시 확인해 봐도 분명 몰타나에서 헤어진 제 아내가 맞았다.
“유, 율리아! 어떻게 된 거야? 당신이 왜 여기에…….”
“더, 던컨! 당신 맞아요? 당신이 왜 여기에…….”
똑같이 휘둥그레 눈을 치뜨고 말을 더듬는 부부. 마음을 가라앉히고 얘길 나누기까진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겨우겨우 아내에게 전해 들은 사정은 이러했다. 제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호송됐다 운 좋게 탈출했다는 것. 그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듣지는 못했다. 율리아가 안절부절못하며 이렇게 재촉했기에.
“던컨, 그보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빨리 ‘은거울 호수’로 가봐야 돼요!”
“어, 은거울 호수……? 거긴 왜……?”
“우리 아들은 아직도 그쪽에 남아 있어요! 거기서 운타나 시내로 호송된 건 저뿐이라서…….”
“……뭐?”
던컨은 멍하니 낯짝을 일그러뜨렸다.
당최 뭐가 뭔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 상황. 그렇지만 급히 정신을 다잡았다. 불안으로 벌벌 떠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아들이 혼자 남았단 건 빈말이 아닌 듯했다.
어차피 은거울 호수로 갈 작정이었으니 계획은 그대로였다만…… 상황은 보다 막막해졌다. 혼자서 삼엄한 경계를 뚫고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이젠 아내까지 챙겨 가야 할 판국이었으니.
그런데 뜻밖에도 율리아가 활로를 제시했다.
“던컨, 제가 아까 저쪽 성벽 밑에서 어떤 구멍을 하나 발견했거든요……? 거기로 빠져나가면 몰래 성 밖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었다. 성벽 구석진 곳에 정말로 개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심지어 도개교까지 훤히 길이 트여 있어, 두 사람은 걱정한 게 우스울 정도로 손쉽게 제국군의 감시망을 뚫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호수로 향하는 동안, 던컨은 이런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히 성에 들어오기 전에 둘러봤을 때는 저런 구멍 따윈 없었는데?
*
은거울 호수는 밤이 되자 또 다른 비경을 선보였다.
호수 위에 아득히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들이 깃들었다. 총총히 빛나는 별구름, 그리고 은하수들. 밤하늘은 투명한 빙판을 디딤돌 삼아 지상까지 화려한 옷자락을 드리웠다. 깨소금 같은 별빛이 낮 동안 산산이 부서지던 물비늘을 대신하여 고즈넉한 밤의 물가를 빛냈다
안타깝게도, 호수에 찾아온 두 방문객은 그 광경에 찬탄할 여유가 없었다.
“아들, 어디에 있니! 아들, 어디에 있어! 흐흑…….”
“…….”
애타게 사라진 아들을 찾는 중이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수색에 열성인 건 율리아뿐이었다. 던컨은 유심히 주변을 둘러보기만 했다. 그러다 당황이 역력한 얼굴로 아내를 바라봤다.
“자, 잠깐만, 율리아……. 어떻게 된 거야? 델루타나에서 피신 온 사람들은 다 이곳에 포로에 잡혀 있다며? 근데 이 주변에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분명히 이전에는 귀부인하고 그 자제들하고 다 여기 모여 있었는데…….”
“…….”
서서히 의구심이 깊어졌다. 기실 멀쩡한 성을 내버려두고 웬 호숫가에 포로들을 둔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 진정 아들이 여기 있는 게 맞는지 사연을 추궁해보려는 찰나였다.
첨벙, 첨벙 – !
물소리가 들려왔다.
“더, 던컨? 방금 소리 들었어요?”
“……엇.”
멀지 않은 물가, 빙판이 깨진 귀퉁이로 물보라가 치솟았다. 깜깜한 수면 밑으로 한결 더 거뭇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이 저기 빠졌나봐요! 어떡해! 빨리, 빨리 가서 구해줘요, 던컨!”
“…….”
진짜로 아들이 빠진 거라면 당장 가서 구해줘야겠지. 허나 던컨은 불현듯 과거 카딤에게 들었던 비유를 떠올렸다. 만일 가족들이 물에 빠졌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러면 넌 아들을 내버려두고 하던 일이나 계속 할 건가?’
눈매를 날카롭게 치뜨고, 발만 동동 구르는 아내를 노려보는 던컨.
“율리아…… 왜 당신이 직접 가서 구할 생각은 안 하는 거지?”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전 수영도 못하고, 당신보다 힘도 약하잖아요?”
“……그랬나? 그러면 내가 가기 전에, 우리 아들 이름이 뭔지 말해줄 수 있겠어?”
“아니, 던컨! 지금이 그런 거나 물어볼 때에요? 빨리 가서 일단 아들부터 구해야…….”
“아니, 아니, 이건 중요한 문제야……. 당신이 우리 아들 이름을 말해주기 전까진, 난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
율리아가 무기질적인 눈빛을 하고, 가소롭단 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카딤’이잖아요, 던컨. 설마 제가 제 배 아파서 낳은 아들 이름도 모르겠어요?”
“……!!”
어처구니를 상실하고 입을 쩍 벌린 것도 잠시.
던컨은 돌연 흐리멍덩하게 눈을 흐리고 혀를 떨었다.
“극, 그그극, 그극…… 마, 맞아……. 정말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 맞았구나…….”
“그럼 제가 저 말고 또 있겠어요! 얼른 가서 물에 빠진 게 카딤이 맞는지 확인하고 구해오기나 해요!”
“어, 어어…… 응, 알았어…….”
뭔가 계속 아내가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기분 탓이었던 모양이었다. 괄괄한 말투에다 수영도 못하고, 아들 이름까지 똑바로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틀림없이 ‘진짜 율리아’가 맞았다.
가까이 갈수록 그림자가 보다 또렷이 보였다. 커다랗고 시커먼 것이, 어쩐지 해자에서 보았던 큰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형상. 던컨은 조심조심 경사면을 따라 물가로 내려갔다.
그런데 별빛이 내리쬐어, 수면에 자신과 똑 닮은 상이 비친 순간.
그 상이 급작스레 자신에게 손을 뻗었다.
푸확 – !
“으하아악!!”
한 끗 차이로 손길을 피하고 뒤로 물러났다. 놀란 맘을 추스르기도 전에 배후에 나타난 손길이 등을 떠밀었다.
“뭐 하는 거예요! 제대로 들어가 살펴봐요, 던컨!”
“으허어억!”
던컨이 그 손길까지 피할 수 있었던 건, 오롯이 숱한 위기를 겪으며 단련된 생존 본능 덕분. 되레 반사적으로 손목을 붙잡고 업어 매치는 바람에, 등 뒤를 떠밀었던 쪽이 요란하게 물속으로 입수했다.
푸화아아 – !
“푸후우…….”
한바탕 잠수를 마친 후, 율리아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히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기이하게도 머리칼 끝조차 안 젖은 모습.
“너무하네요, 던컨. 이렇게 추운 겨울에, 사랑스러운 아내를 물속으로 내던지다니…….”
“당신…… 뭐야? 무, 물속에 저거는 뭐고…… 당신은 왜, 왜 내 등을 밀친 거…….”
“그건, 네 실존적 허구성을 입증하기 위해서였지. 아쉽게 됐어. 한 걸음만 더 나아갔다면, 네게도 진실된 형상을 찾아줄 수 있었거늘.”
“……뭐?”
율리아의 모습을 한 무언가는 같잖은 연기를 그만뒀다. 눈시울에서 광채가 빛나고, 입술 사이로 엄숙한 육성이 흘러나왔다.
“들어라, 악귀의 종복아. 알량한 인간들의 기치에 따르면, 온 세상의 빛은 허상이요, 수면은 그 허상을 담는 도화지다. 인간들은 빛의 상으로 반사된 제 모습을 거짓된 형상으로 여기며, 오로지 따뜻한 피와 살, 비천한 체온과 촉감으로 인지되는 피사체만을 진실된 모습으로 여긴다.”
“…….”
“그러나 지엄한 빛의 계율에 따르면, 빛만이 가장 참된 가치요, 진실에 다다르기 위한 외길일지어니……. 엘가께서 내게 주신 축복의 표식에 의해, 수면에 비친 빛은 실존의 개념을 역전한다. 나는 파생 실재에 불과한 피사체를 습윤한 매질 너머에 가두며, 그 존재가 자각하지 못하던 참된 형상을 취하고 물질의 허구성과 빛의 진실성을 입각한다.”
“…….”
대가리를 얼어붙게 만드는 헛소리에 던컨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율리아가 간단한 몸짓으로 제 장광설을 요약했다.
“바로 이렇게.”
푸화아악 – !
물보라가 일고, 율리아의 모습이 거듭 일변했다. 던센으로, 운타나의 참사관으로, 볼가루이스 부인으로, 참사군 병사로, 아탈라인 전사로…… 그러다 마지막엔 도로 율리아로.
쓰르릉 – !
천의 형상을 가진 무언가가 장검을 쳐들었다. 그 이마에서 십각성 문양, ‘성흔’이 찬연히 빛났다.
“너 자신의 비존재함과 무가치함을 깨닫거라, 악귀의 종복아. 데카그램 제10좌, ‘수면을 비추는 별’ 리플렉투스가 친히 네 그릇된 표상을 비추노라.”
“……!”
던컨의 낯짝이 시체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온몸에 힘이 쭉 풀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절대 정면 승부를 벌여선 안 될 최고위 성기사와 바로 앞에서 대면하다니……. 당장 뒤돌아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으나, 가족들을 생각하여 간신히 참아냈다.
“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내 아내와 아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천의 형상을 가진 존재는 다시금 율리아를 뻔뻔하게 연기했다.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던컨? 당신 아내는 바로 당신 눈앞에 있잖아요?”
“아, 아니…… 그, 그그극, 그극, 그그…… 어, 그렇긴 한데…….”
“아! 하하, 혹시 피와 살로 된 거짓된 형상들 말하는 거예요? 그거라면 다들 저기에 갇혀 있죠!”
휘우웅 – !
장검이 지휘봉처럼 휘둘러졌다. 수면의 별빛들이 응집했다. 어둑한 호수 밑에서 그림자처럼 일렁이는 것들의 정체가 선명히 드러났다.
델루타나에서 피신 온 고위층 일가, 참사군 병사와 군세의 전사들, 그리고…… 율리아와 던센. 수면에서 튀어나온 손길에 붙잡혀 그대로 물속에 갇힌 신영들.
그러나 제 입으로 데카그램이라 실토하는 걸 듣고, 진짜 가족들이 호수 안에 있는 걸 보았음에도, 던컨은 도통 뭍에 있는 율리아를 ‘가짜’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새하얗게 물든 뇌리에 섬광처럼 누군가의 말이 스쳤다.
‘진실을 꿰뚫는 별’ 헨다르크가 해줬던 조언.
‘비록 데카그램의 말석이라 하나, 10좌인 리플렉투스 경은 특별히 주의하는 편이 좋을 거요. 그가 가진 성흔, ’수면을 비추는 별’의 효과는……’
수면에 비친 자를 물속에 가두고, 자신이 자유롭게 그 형상을 취하는 것.
그리고 형상을 취한 동안은, ‘절대’ 자신을 가짜라 의심치 못하게 하게 인식을 뒤틀어버리는 것.
그 조작의 강제성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의심할 때마다 기억이 개변됐고, 저렇게 대놓고 정체를 드러내도 가짜라 여기는 게 불가능했다. 율리아의 모습을 한 ‘수면을 비추는 별’ 리플렉투스가 천천히 턱을 쓸었다.
“흐음, 운타나에 들어섰을 때부터 몰래 지켜봤는데…… 당신의 솜씨, 꽤나 놀랍긴 했어요. 무려 아크팔라딘인 페란트 경을 혼자 처치하다니! 역시 그 ‘악귀’가 괜히 당신을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니까요?”
“그그극, 극, 그극…… 아니, 뭐, 흐흐, 그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
“그렇지만 엘가의 대행자를 능멸한 죗값은 치러야겠지요? 어서 물가로 가서 얌전히 당신의 형상을 바치세요, 던컨. 안 그러면 이걸로 목을 베어버릴 테니까.”
“극, 그극, 그극…… 어억, 그게 무슨…….”
리플렉투스가 장검을 쳐들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초승달처럼 휘어진 미소가 선뜩하게 빛났다. 던컨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샌가 명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 한쪽으로는 여전히 치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 인식 조작에 속지 않는 법, 아내의 형상을 훔친 적에게 맞설 방법, ‘수면을 비추는 별’의 파훼법.
카딤과 헨다르크가 나눴던 대화를 필사적으로 되새겼다.
‘……무슨 그딴 능력이 있지? 가짜인 걸 알아도 가짜라고 여길 수가 없다고?’
‘그렇소. 성흔의 권능은 절대적이오. 그보다 ‘격’이 압도적으로 높은 자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죄다 속수무책이라 봐야겠지.’
‘그럼 이미 속아 넘어간 상태에서 파훼할 방법은 없나?’
‘뭐, 없진 않은데, 썩 쉬운 방법은 아니외만…….’
던컨은 눈시울을 부릅 치켜떴다.
그러곤 호수로 가던 발길을 틀어, 쏜살같이 리플렉투스를 기습했다.
채 – 앵!!
‘면도칼’의 칼질은 가뿐히 가로막혔다. 투명한 칼일지라도 최고위 성기사의 허를 찌르긴 무리였다. 허나 리플렉투스의 낯짝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지? 두뇌의 사고 과정에 심대한 결함이 생긴 건가? 왜 자기 아내를 공격하는 거지?”
“…….”
“설마…… ‘성흔’의 효과를 극복했을 리는 없고…….”
맞는 말이었다. 던컨은 인식 조작에서 벗어난 게 아니었다. 그저 헨다르크의 조언을 떠올렸을 뿐.
‘눈에 보이는 그자 자체가 미쳤다고 생각하시오……. 뭘 잘못 먹었거나, 악마에 홀려 단단히 정신이 나갔다고 믿으시오……. 그리고 두들겨 패야 제정신을 차릴 거라고 명명백백히 ’확신’한다면, 비록 가짜라 여기진 못할지언정 ‘수면을 비추는 별’에게 저항하거나 대적할 수 있을 거요.’
비뚜름한 미소를 짓고, 제정신을 잃은 제 아내를 바라보는 던컨.
“아니, 미친 건 당신이지, 율리아.”
“……뭐?”
“당신, 아무래도 악마한테 단단히 홀린 것 같아. 머릿속의 마구니를 쫓아내려면, 당분간 좀 흠씬 두들겨 맞아야 쓰겠어…….”
“…….”
새카만 망토 자락이 펄럭, 휘날렸다. 던컨은 어둠 속에 신영을 감추고 재차 기습할 기회를 노렸다.
‘수면을 비추는 별’ 리플렉투스도 표정을 굳히고 응전할 태세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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