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30)
230화. 황금의 맹주 (3)
고요한 밤이 끝나고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듯.
침묵이 가신 회담장 안에 어마어마한 파란이 몰아쳤다.
“저게 대체 무슨 날벼락 처맞을 헛소리요!! 레밀리온 님의 목숨을 구했다니!!”
“어떻게, 감히!!! 어떻게 감히 동맹의 모든 대표들이 모이는 회담장에서 그런 망발을!!!”
“저 미친 자가 신성한 동맹의 시조를 모독하였소!! 저 미친 자를 당장 회담장에서 끌어내시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갈렌타나 측과 베스타나 측 의원 전체가 기립했다. 고성이 쩌렁쩌렁 울리고, 낯짝이 붉으락푸르락 물들고, 눈깔이 희번득하게 돌아갔다. 심지어 엔리코와 델루타나 의원들조차도 말문이 막혀 굳거나 일말의 적개심을 내비쳤다.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과거 제국에 정복당한 이후, 델루타나, 갈렌타나, 베스타나, 세 대도시는 오래도록 뿔뿔이 갈라져 각자도생하게 됐다. 그럼에도 딱 하나, 아직까지도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대륙 동부를 통일하고 자유도시 동맹을 건립했던 황금의 맹주, 레밀리온을 향한 절대적인 존경심.
동맹인들은 평생을 그 위대한 위인과 함께한다. 어릴 적엔 그의 모험담을 들으며 자라고, 서로를 축복할 땐 그의 황금을 빌어 축복하고, 반드시 지켜야 할 맹세를 할 땐 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자연히 뭇 동맹인이라면, 레밀리온의 이름을 종교에 준할 만큼 신성불가침하게 여긴다.
즉, 카딤의 발언은…… 엘가 교단 앞에서 ‘자신이 다 죽어가던 엘가를 살려줬다’라고 주장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참작할 여지가 있는 부분은, 레밀리온은 신격화된 인간이지 진짜 신은 아니란 점.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소리란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만.
“어떻게 삿된 망발을 내뱉어도 그딴 망발을 내뱉을 수 있는지 모르겠군! 당신이 뭐, 신의 축복을 받아 수백 년은 살았단 소리요? 아니 아니, 백번 천번 양보해서 그렇다 쳐도, 댁이 레밀리온 님을 구했단 걸 증명할 방법은 있소이까, 악마 학살자?
“그야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겠나.”
“제기랄, 미친 헛소리는 작작 하시오! 위대하신 황금의 맹주께선 벌써 2백 년도 전에 소천하셨단 말이오!”
“그자가 죽는 걸 직접 봤더냐. 아니면 무덤에 가서 시체라도 구경했거나.”
“제발, 제발 그 입 좀 닥치시오! 레밀리온 님의 봉영(封塋)은 동맹령 내에 존재하지 않소이다! 그분께선 알 수 없는 연유로 말년의 행적이 묘연하여…….”
“그럼 이 자리에선 내가 근황을 제일 잘 알겠군. 나는 그 작자가 살아있는 걸 봤거든.”
발언을 철회하고 수습해도 모자랄 판에, 카딤은 기름을 끼얹고 폭탄을 던졌다. 회담장은 방금 전까지의 난리는 화기애애한 회동처럼 보일 만큼 대규모로 난장판이 됐다. 광신에 찬 분위기 아래, 끝내 의원들의 분노는 야만인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넘어섰다.
결국 한 고위 마법사가 참지 못하고 선언했다.
“이 광인은 탑주님을 살해하고 동맹의 시조를 욕보여, 긴 세월 대륙의 한 축을 지탱한 자유도시 동맹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신비의 구도자이자 동맹의 일원으로서 더는 이 폭거를 좌시할 수 없는바!! 우리 마탑은 현 시간 부로 ‘악마 학살자’를 동맹의 공적으로 규정하고, 이 자리에서 즉결 처단하도록 하겠다!”
곧이어 마법사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꺼림칙한 흐름, 심장 속 마석으로 ‘마나’가 응집되는 기류가 보였다.
그 순간, 카딤도 도약했다.
콰 – 앙!
도약보단 비행이라 일컫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그 거체는 한 찰나에 30여 미터를 뛰어넘었다. 착지점에 있던 탁상이 형체도 없이 붕괴하고, 미리 펼쳐둔 보호막이 산산조각 나고, 무자비한 손아귀가 마법사의 뺨을 움켜쥐었다.
파차차차창 – !!
“우읍!!”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혀뿌리를 뽑겠다. 여분의 혀가 있다면 계속 말해 보거라.”
고위 마법사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아무런 외교적 수사 없는 진언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악마의 기운보다 흉험한 기세가 번졌다. 가까이 있던 다른 자들 역시 비명도 못 지르고 얼어붙었다. 허나 조금 떨어진 의원들은 괴성을 지르며 달아났고, 마법사들은 식겁하여 반격할 채비를 갖췄다.
“포, 포르실리온 님!! 괜찮으십니까!!”
“다, 다들 악마 학살자를 공격해라! [홀페라, 몰, 케틸리스, 아픽칸토, 엔…….]”
“[홀페라, 프레오르, 헤스락, 엔, 에르시니오…….]”
카딤은 미간을 슬쩍 구겼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저 마법쟁이 놈들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냥 싹 다 처죽여 버린다면 썩 후련하겠지만…….
한 번만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잠시 뒤면 말끔히 해결될 문제고, 의장석에 있는 엔리코가 수명이 반 토막 난 낯짝을 하고 있었으니.
“거기 있나, 던컨.”
“……예, 옙! 여깄습니다, 나으리!”
“네가 전부 처리하거라. 죽이진 말고.”
“아, 알겠습니다요!”
그늘진 구석에 숨어 있던 던컨이 튀어나왔다. 그림자처럼 등장한 신영에 마법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헉!! 네, 네놈은 누구…….”
“자, 잠 자랏, 시발!”
구우웅 – !
“끄어…….”
세계수의 단검이 질풍처럼 휘둘러졌다. 하나, 둘, 셋, 넷…… 마법사들이 잇따라 픽픽, 쓰러졌다. 행상인의 몸놀림은 이제 스스로도 놀랄 만큼 군더더기 없이 신속해졌다.
하지만 카딤이 보기엔 성에 차지 않았다. 목을 졸라 마법사들을 기절시키다 말고, 던컨에게 휘휘 손짓했다.
“너무 느리군. 그 나무 단검, 이리 건네보거라.”
“어, 어어, 옙…….”
단검을 건네받기 무섭게, 카딤은 그것을 힘껏 투척했다.
――― 쐐애애애액, 구우우우웅 – !
“억!”
“흐억!”
“컥!”
거진 아음속에 이르는 속도, 투사체가 줄줄이 목표물을 관통하고 벽면에 박혔다.
――――――― 콰 – 앙!!
열여덟 명, 단 한 번의 투척에 던컨이 찌른 것보다 많은 마법사들이 쓰러졌다. 그렇게 카딤이 두 차례 더 단검을 던지자, 주문을 외우던 마법사들은 전부 제압당해 잠들었다.
“단검은 가까이서만 쓸 수 있는 무기가 아니지. 나중에 여유가 되면 비도술도 연습해보거라.”
“…….”
던컨은 생각했다. 자신이 백 년 동안 밥 먹고 단검만 던져도, 저렇게는 못 던질 것 같다고…….
하여간 장내의 소란은 그렇게 깡그리 정리됐다. 정작 소란을 피해 달아난 자들이 모인 쪽은 아직도 난리였지만.
――――――― 휘오오오오 – !
기이한 울음을 발하는 문짝. 거센 기류가 문고리를 옭아매고, 문 앞엔 몸을 떠미는 강풍의 장벽이 쳐졌다. 유일한 출구가 막혀 회담장 전체가 봉쇄되고 말았다.
“뭐야, 이거? 이, 이것 때문에 나갈 수가 없…….”
“여, 열어주시오! 이거 치우시오! 계속 여기 있다간, 분명 죽게 될 거…….”
의원들은 처음엔 이게 카딤과 싸우던 마법사들이 벌인 수작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쓰러지고도 마법이 사라지지 않자 차츰 공황에 빠져 허둥거렸다.
카딤도 슬쩍 낯을 굳혔다. 어째서인지 저 마법은 다른 마법과 달리, 기척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의문이 오래 가진 않았다. 금세 돌풍과 함께 마법의 시전자가 나타났으니.
――――― 휘우우웅 – !
“후흐…… 과연, 듣던대로 보통내기가 아니로군.”
듬성듬성한 머리칼, 게슴츠레한 눈깔. 면상에는 신비 문자와 주름이 빽빽이 새겨져 있었다. 겉보기엔 그저 괴팍하게 생긴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으나, 새카만 로브와 남은 마법사들의 반응이 노인의 비범한 신분을 입증해줬다.
“자, 장로님! 웨, 웬디고트 장로님!”
“뭐? 무슨 장로님이 이곳에…… 어, 어어? 장로님?”
“끄, ‘끝없는 광풍’께서 친히 거동을…….”
마탑 장로회 2석, ‘끝없는 광풍’ 웬디고트.
마탑주와 수석 장로가 부재한 현재, 마탑 내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장로였다. 예기치 못한 거물의 등장에 장내가 술렁였다. 정확히 정체를 모르는 자들도 심상찮은 존재감을 느끼곤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딱 한 명, 카딤만 빼고.
“못 보던 파리가 한 마리 더 있었군.”
“…….”
“네놈도 그 장로회에 속했다는 마법쟁이 중 하나인가.”
예의범절 따윈 말소된 질문에, 별 유감 없이 응하는 웬디고트.
“그렇지. 드디어 만났군, 악마 학살자. 장로회 차석 장로인 ‘끝없는 광풍’ 웬디고트라고 한다네.”
“……어째 지난번엔 마탑에서 못 본 것 같은데.”
“그땐 탑주님을 따라 솔타나로 시찰을 나가는 바람에 말이지. 뭐, 그런 난리가 날 줄 알았다면, 애초에 마탑을 떠나지도 않았겠지만…….”
대수롭잖은 투로 얘기했으나, 그 한꺼풀 밑에는 언제 터질지 모를 긴장감이 팽배했다. 살얼음판을 걷듯 대화를 주고받길 잠시. 카딤이 출구를 막은 바람의 장벽을 턱짓했다.
“그런데, 저건 어떻게 한 거지. ‘마기’가 전혀 안 느껴지는 게, 네놈들이 보통 쓰는 마법과는 다른 것 같다만.”
“……!”
웬디고트가 눈매를 팍 뒤틀었다. 찬찬히 카딤의 자태를 훑다가, 김 빠진 웃음을 흘렸다.
“후흐흐…… 이건 뭐, 눈썰미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해답은 자네의 목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네만?”
“…….”
카딤은 ‘불과 얼음의 가호’를 슬며시 쓸고는, 작게 헛웃음을 삼켰다. 아, 그런 거였나.
마탑의 마법사들은 마기가 섞인 ‘마나’로 ‘고대 마나’를 대체했다. 때문에 마나 감응력이 젬병인 카딤도 마법의 전조나 낌새를 느끼는 게 가능했다. 허나 멜리사의 죽음으로 세상에 ‘고대 마나’가 돌아왔고, 저 장로는 벌써 그것을 활용한 마법을 익힌 모양이었다.
간만에 마주한, 술수를 예측하기 힘든 마법쟁이.
그뿐 아니었다. 지난번의 장로들과 역량이 비슷하다면, 이자의 마법 또한 도시 한 구역 쯤은 너끈히 갈아버릴 터. 게다가 웬디고트는 카딤을 상대할 대비까지 단단히 하고 온 참이었다.
“여하간, 혹시나 해서 몰래 회담장까지 따라와봤는데 그러길 잘했구만. 탑주님과 두 장로를 살해한 걸 실토하고, 황금의 맹주를 구했다고 하고, 순식간에 이렇게 많은 마법사들을 쓰러뜨리기까지……. 후흐흐, 덕택에 말년에 흔치 않게 재미난 구경을 했으이.”
“…….”
“뭐, 대답이 어떨지 예상은 간다만, 예의상 한번만 권해보겠네. 고분고분 나를 따라와 죗값을 치를 마음은 없나, 악마 학살자? 내, 자네를 죽일 생각까진 없고, 한 20년 내지 30년 정도만…… 어떻게 되어 먹은 몸뚱이인지 마탑에서 구석구석 연구해본 다음 풀어주겠네.”
“…….”
“후흐, 유감스럽게도…… 거절이란 선택지는 없다네.”
장로가 입매를 비틀고 소매를 걷었다. 손등에서 팔뚝을 넘어 등짝까지, 빼곡히 적힌 마법진 술식이 드러났다.
악마 학살자가 장로들과 마탑주를 살해했단 정황은 거의 확실했다. 도무지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겠다만, 웬디고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대책 없이 나섰다간 필시 자신도 그들과 비슷한 꼴을 볼 거라고.
그런고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바로 이렇게, 온몸에 언제든 발동 가능한 ‘대마법’의 마법진을 새겨서.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었다. 그저 발동을 원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즉시, 천지를 분쇄하는 폭풍이 강림하여 저 덩어리진 야만인을 찢어발길 터였다.
더구나 이 ‘대마법’의 동력원은 ‘고대 마나’. 핵심 기운이 무엇인지 발각당한 ‘마나’와 달리, 아직 밝혀진 게 거의 없는 미지의 기운이었다. 일반적인 마법처럼 파훼당하거나, 마기가 소거돼 중단당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 확신했는데…….
그 투철한 준비가 단번에 물거품이 됐다.
쿠구구구구구…….
“……흡?”
모든 신비와 이적을 집어삼키는 ‘불가지의 포식자’에 의해.
터 – 헙! 쿠후우우우우…….
거대한 괴물체가 회담장을 덮치고 사라졌다. 모두의 얼굴에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 떠올랐다. 오직 델루타나 의원들 몇몇만이 희미하게 경탄하는 표정을 떠올렸다. 그들은 이미 복음체 사태 당시, 저 괴물체에 수천 마리의 복음체가 일거에 절멸당하는 걸 본 적 있었으니.
우우우웅…….
‘아큘라노스의 문신’이 발하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웬디고트는 뒤늦게 낙서장 같았던 제 몸이 말끔해졌단 걸 깨달았다.
“어, 어어…… 무슨, 내 마법이……? 켁!”
“…….”
거친 손아귀가 목을 졸랐다. 애써 준비한 마법진을 잃은 장로는 고작 5초도 못 버티고 혼절하여 쓰러졌다.
새삼 흐르는, 숨소리조차 소거된 고요.
“…….”
“…….”
‘끝없는 광풍’이 쓰러지며, 출구를 막던 바람의 장벽도 사라졌다. 그러나 의원들 중 그 누구도 빠져나갈 엄두를 못 냈다. 근육이 풀리고, 뼈가 굳고, 피가 얼고, 신경이 마비돼, 한 발짝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누가 뭐래도 마탑은 동맹 내 최강의 무력 집단, 그리고 ‘끝없는 광풍’ 웬디고트는 현재 그 마탑 내에서 실질적인 최강자라 할만 했다. 그런데 그자가 저렇게 허망하게 제압다는 것은 즉…….
어렴풋이 인지하던 사실을, 이젠 모두가 영혼 깊이 절절하게 통감하게 됐다.
저자는 불가항력이었다. 저자는 절대적인 무력이었다. 저자는 법 위에, 질서 위에, 신앙 위에, 신비와 이적 위에 군림하는 개인이었다. 저자가 그 어떤 폭거를 저지른다 한들, 그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여기 있는 모두를 도륙 내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레밀리온이시여…… 무슨, 무슨 세상에 저런 괴물이…….”
“허억, 허어, 허어…….”
“나, 난, 살려줘……. 나는 여기서, 여기서 죽기는…….”
생존 본능이 유달리 강한 의원 몇몇이 겨우겨우 몸을 돌렸다. 두 발로 걷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기에, 필사적으로 굼벵이처럼 기어 출구로 향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얼마 가지도 못해 난관에 부딪혔다.
난데없이 번쩍이는 신영이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음…… 자네들 여기서 뭐 하나?”
“……어?”
“……다, 당신은 또 누구시오?”
“어…… 흐음, 글쎄…… 말해줘도 자네들이 믿을진 모르겠다만…….”
황금빛 갑옷을 걸친 사내는 투구를 벗고, 멋쩍게 등짝의 피륙 날개를 긁적였다.
“동맹을 세운 맹주이자 드래곤의 친우, 레밀리온이라고 한다네. 그, 자네들이 동맹인들이 맞다면…… 내가 자네들의 시조가 되는 셈이지.”
“…….”
하늘을 날도록 진화한 동맹의 시조는, 장장 2백여 년 만에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형태로 퇴화한 후손들과 조우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