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32)
232화. 황금의 맹주 (5)
그날, 델루타나의 회담장 내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심지어 현장에 있었던 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담이 끝날 무렵엔 과반수가 기절하고, 탈진하고, 오열하고, 넋이 나가는 바람에 멀쩡한 몰골로 빠져나간 의원은 채 한 줌도 되지 않았다.
외부에서 지켜본 보좌관들의 증언도 제각각이었다. 웬 폭풍이 몰아쳐 문짝을 막았다느니, 괴물 머리가 현장을 덮쳤다느니, 지진이 일어나 단상을 부쉈다느니, 드래곤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느니……. 증언만 들어선 흡사 회담이 아니라 단체로 만취해 환각을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
허나 그마저도 비교적 현실적인 일이었다. 회담 결과 체결된 조약의 내용에 비한다면.
델루타나, 갈렌타나, 베스타나, 세 도시의 참사회는 피로써 혈맹을 맺고, 외세의 침략이 있을 경우 모든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대적한다. 이를 어기는 도시는, 소유한 영토와 황금 가도의 지분을 잃고 10억 루덴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등 무수한 불이익을 감수한다.
‘자유도시 동맹 재결성 조약’. 맹주가 사라지고 제국에게 정복당한 이후, 근 2백 년간 분열됐던 동맹을 도로 하나로 규합하는 조약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동안 세 대도시가 얼마나 극심히 알력 다툼을 해왔는지는 코흘리개조차 빤히 아는 사실. 한 구역에 살던 트롤과 오크와 고블린이 형제의 연을 맺은 거나 매한가지였다.
특히나 마탑의 존재로 늘상 기고만장했던 베스타나까지 조약에 참여했단 게 제일 놀라운 부분이었다. 혹자들은 아예 장로회 2석 장로인 ‘끝없는 광풍’ 웬디고트가 누군가에게 목을 졸려 기절하고, 누군가에게 큰절을 올리는 것까지 봤다고 했으나…… 그 진위 여부까진 불투명했다.
좌우간, 뿔뿔이 갈라졌던 동맹의 합일로 제국이 일으킨 ‘성전’은 극적인 분수령을 맞이했다.
이 사건은 물론 공으로 일어난 게 아니었다. 이 역사적인 화합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건, 오롯이 그에 앞서 신화적인 대사건이 선행한 덕분이었다.
회담에 참여한 의원들은 대부분 못 버티고 도중에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힘겹게 끝까지 버틴 소수의 인원은 기어코 듣게 되었다. 말미에 이르러 회담장 내에 울려 퍼진 단연한 선언.
“들어라, 통치자를 참칭한 모략꾼들이여. 네놈들은 손에 움켜쥔 금화 한 닢에 눈이 멀어 피 흘리는 형제를 백안시했다. 그러나 앞으론 결단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동맹은 하나로 합일되어 정당한 군주의 통치를 받을 것이다. 고귀한 황금의 피가 흐르는 모든 동맹인들을 거느리고, 대수림 끝자락에서 북부의 문턱까지 온 동맹령을 다스리는 합당한 지배자…….”
훗날, 모든 동맹인들이 토씨 하나 빠짐없이 외우게 되는 기념비적인 선언을.
“……황금의 맹주가, 제 온당한 보좌 위에 돌아왔음을 선포하노라.”
*
폭풍에 휩쓸려 대양을 일주한 듯, 도무지 정신 차릴 틈이 없었던 대회담이 종결된 직후.
회담의 주역들은 튜리스 가문 저택에 다시 모였다.
‘악마 학살자’ 카딤, ‘운타나의 구원자’ 던컨, ‘참사회 의장 대행’ 엔리코, 그리고…… ‘황금의 맹주’ 레밀리온. 이젠 회동만으로도 역사서에 기록될 만한 거물들이 접객실의 자리들을 차지했다.
딱히 실질적으로 중요한 대화가 오가진 않았다. 다 같이 무언가를 더 논의하기엔, 오늘 하루 이미 너무 많은 일들을 치른 뒤. 모임은 던컨이 감격받다 못해 흐리멍덩해진 낯으로 레밀리온에게 조아리고, 엔리코가 결과를 정리하며 모두에게 일일이 감사를 표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다만, 두 사람만큼은 계속 자리에 남았다.
현재 델루타나를 이끄는 엔리코, 그리고 곧 동맹 전체를 이끌지도 모를 레밀리온. 두 수장에겐 시급히 현실적인 문제를 논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한데 엔리코는 쉬이 말꼬를 트지 못했다.
그가 평생토록 지녔던 상식에 의하면, 지상에 강림한 신을 독대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 새삼 믿기 힘들단 듯이 돌아온 맹주를 바라보다, 그마저도 불경하단 생각이 들어 눈을 깔길 반복했다.
말문이 트인 건 한 식경쯤 흐른 뒤였다.
“금화 한 닢으로 도시를 구한 자, 드래곤을 물리치고 되돌아온 자, 온 동맹령을 다스리는 합당한 지배자, 온 동맹인들의 찬미를 받아 마땅한 위대하신 황금의 맹주시여……. 황송하오나, 감히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두 번 말하다간 혀가 마르겠군. 낯 간지러운 수사는 떼고 편히 묻게나, 참사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진정 맹주 자리에 등극하고 제국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할 계획이십니까?”
되돌아온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군”
“……예?”
“흐음, 홧김에 저질러 버렸네만, 솔직히 나도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잠깐 외출했다 뿐이지, 나는 원래 있던 곳에서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네. 망가진 대수림도 복원해야 하고, 엘프와 다크 엘프의 교류 협정도 주선해야 하고, 초주검이 된 드래곤도 돌봐야 하고…….”
“…….”
엔리코의 동공이 아득히 초점을 잃었다. 이 와중에 황금의 맹주가 사라진다면 대관절 뒷수습을 어찌해야 할지…….
다행히, 레밀리온은 그가 혼절하지 않도록 여지를 남겨줬다.
“하지만, 동맹이 마주한 위기를 좌시할 수도 없겠지.”
“……!”
“일단 나를 동맹의 간판으로 세우고, 실질적인 통치는 자네를 비롯한 당무자들이 맡는 방향으로 해보세나. 그것만으로도 동맹인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한마음 한뜻으로 제국에 맞서도록 만들기는 충분할 걸세.”
레밀리온이 선언했던 대로 진정 동맹의 절대군주를 자처한다 한들, 그 사실에 반기를 들 자는 거의 없을 터.
하지만 2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며, 그는 권위나 패권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 됐다. 단지 이번엔 권위를 앞세워야만 얘기가 먹힐 듯하여 그리 한 것일 뿐…….
한데 엔리코는 뭔가 마음에 걸린단 눈치였다.
“음,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뇨, 그…… 외람되지만, 역시 맹주님께서 실권을 차지하고 통치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맹주님은 과거 대륙 동부를 통일한 데다, 후세까지 이르러 동맹을 규합하는 위업을 이룬 영웅이시지만…… 저는 혈육의 죽음으로 의장직을 떠맡은 일개 참사관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
자신감을 잃고 낙망한 참사관을 묵묵히 바라보길 한참.
레밀리온은 품속에서 무언갈 꺼내 건넸다.
팅 – !
“이게 무엇인지 아나?”
“이건…… 이전에 보여주셨던, 델루타나를 구한 금화 아닙니까?”
“아니,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나.”
성유물을 다루듯 조심스레 관찰했다. 잠시 후, 진실을 알아차린 엔리코가 양 눈을 부릅 치떴다.
흙을 묻히고 흠집을 냈다 뿐이지, 이건 틀림없이 근래에 만들어진 금화였다.
“나는 대륙 동부를 통일한 후, 금화를 들고 다시 찾아온 경비대장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네.”
“……!!”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약속한 황금을 건네준 다음 도적으로 위장시킨 병사들을 보내 회수했지. 정복한 국가들을 달래기 위한 유화정책을 펼칠 예산이 절실한 시기였거든. 진짜 도시를 구한 금화는 결국 그자의 저승길 노잣돈으로 바친 탓에, 자네들을 속이려거든 그렇게 가짜 금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지.”
상상도 못 한 전설의 이면이 드러났다. 엔리코는 별안간 물벼락을 맞은 듯한 표정이 됐다.
“그, 그렇지만 그 얘기를 통한 증명을 요구한 건 볼타루드 가문의 의원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미리 아시고 대비를…….”
“나에 관한 유명한 전설들을 추리고,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했지. 도시를 구한 이야기는 이 금화, 드래곤의 보물을 훔친 이야기는 이 갑옷, 불 뿜는 사자들에 맞선 이야기는 등짝에 난 화상을 증거로 보여 주려 했다네. 물론 그것들은 다 다른 사정으로 생겨난 것들이고.”
“그, 그렇다면 설마, 말년에 드래곤을 찾아 나선 것과 다크 엘프의 피로 연명했단 말씀도 거짓인 겁니까?”
“아니, 그 얘기들은 모두 진실이라네. 거짓은 진실의 토대 위에 지어졌을 때 더 효과적인 법이지.”
“…….”
불식간에 엄습한 환멸과 혼란에, 엔리코는 말문이 막혀 굳어버렸다. 그를 바라보는 맹주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내걸렸다.
“그래……. 자네들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고결한 영웅도, 위대한 위인도, 신적인 존재도 아니라네. 그저 갈라진 동부를 통일하겠단 야망만을 쫓아 진흙탕을 구른 야심가일 뿐이지.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키란 것 또한 어떤 신성한 가치에서 발로된 불문율이 아니라, 어떻게든 얼기설기 엮어낸 ‘동맹’을 유지하려고 고안한 미봉책에 불과하다네.”
“…….”
“영웅이란 실로, 황금과도 같은 거지. 그것은 인간들이 멋대로 떠받들고 숭상하여 보물이 됐을 뿐, 그 본질은 고작 반짝이는 돌멩이에 불과하잖나? 마찬가지로 추종자들에 의해 부풀려진 명성을 덜어낸다면, 나 역시 금일 내가 호되게 꾸짖은 후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지.”
엔리코는 거듭 입술을 떨었으나,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그가 아무리 황금의 맹주가 이룬 업적에 대해 잘 알아도, 당사자보다 더 잘 알진 못할 테니까. 레밀리온은 허심탄회하게 천장을 바라봤다. 황금빛 눈동자에서 피어오르던 맹렬한 기세는 꺾인 지 오래.
하지만 그가 결코 영웅의 가치를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황금’은, 사람으로 하여금 불가능한 일을 해내도록 만든다네. 그것을 위하여 사람들은 기꺼이 원수와 형제의 연을 맺고, 지옥불이 넘실거리는 불구덩이로 뛰어들고, 심지어 목숨을 위협하는 강적에게조차 겁먹지 않고 맞서곤 하지.”
“…….”
“그러므로 ‘황금’은 모든 사람의 앞에서, 언제나 올곧게 빛나야만 한다네. 그들이 갈망하는 모습으로, 흠결과 티끌을 말끔히 감추고, 환상과 신앙을 채워주는 불변하는 찬란함으로. 그래야만 그들 모두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하나 되어 협력할 테니까.”
“…….”
“생각해 보게나. 만일 불순물과 흠결을 고스란히 내비추는 황금이 있다면, 누가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진짜 신’을 등에 업은 제국에 맞서겠나?”
엔리코의 눈동자에 흐릿한 이채가 어렸다. 눈앞의 사내를 신처럼 바라보던 허울은 벗겨졌다. 대신 알 듯 말 듯 무언가 어렴풋한 깨달음을 얻은 눈치.
레밀리온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판 역할을 맡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동맹의 전력을 강화할 방법도 찾아보겠다 첨언하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아무리 위명이 높다 한들, 나는 과거의 인물일세. 물론 이 세상엔 카딤 공과 같이, 세월의 흐름을 초월하는 진정한 초인도 있네만…… 모름지기 새 시대의 기록은 새 시대의 인물이 써 내려가야 하는 법이지.”
“…….”
“제국이 침략했을 당시, 재빨리 피난 구역을 지정하여 더 큰 참변을 막았다 않았던가?”
“예, 하지만 그건…….”
“내가 보기엔, 자네도 ‘황금’이 될 자격은 충분한 것 같군.”
말을 마치기 무섭게, 황금의 맹주가 자취를 감췄다. 아스라한 광채와 의미심장한 화두만을 남긴 채. 엔리코는 잠자코 앉아 자리를 지켰다.
홀로 남은 참사관에게 찾아드는 숙고의 시간.
황금처럼 빛나는 영웅이 남긴 잔상을 쫓고, 그가 남긴 금언을 되새겼다. 형제가 앉았던, 이제는 자신이 앉은 자리를 조심스레 손으로 짚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산더미 같은 조약 서류를 낱낱이 늘어놓고, 맹금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부 사항과 조율할 부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장장 2백여 년 만에, 동맹을 떠났던 맹주가 되돌아온 어느 역사적인 날.
한쪽 날개를 꺾인 참사관의 눈에도 서늘한 총기가 되돌아왔다.
*
“세월의 흐름을 초월하는 초인이라니, 지나친 과찬인데.”
접객실을 떠나던 중, 레밀리온은 뜻밖의 인물과 재회했다. 외양은 악귀가 따로 없을 정도로 흉악하나, 그 실상은 자신의 목숨과 세계를 구원해준 은인인 자.
“하하하, 그대가 해낸 일들을 감안하면 전혀 과장이 아닌 말이네만……. 그나저나 아직도 안 떠났을 줄은 몰랐군. 무언가 내게 용무가 있는가?”
“그래, 괜히 기다리는 것보단 바로 물어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카딤은 담담하게 레밀리온에게 다가갔다.
간단한 용건이었다. 대수림 쪽은 근황이 어떠한지. 지금은 사정이 생겨 동맹 쪽을 돕고 있다만, 멜리사의 업보를 짊어지기로 약속했으니 그쪽도 마냥 내버려둘 순 없었다.
이윽고 별다른 일은 없단 답변이 돌아왔다. 세계수는 무사히 수복되어 균열을 막고 있고, 엘프와 다크 엘프들은 열심히 망가진 대수림을 복원하고 있고, 라퓨스트란도 차근차근 천벌로 입은 부상을 회복해나가고 있다고.
허나 카딤은 용인의 얼굴 너머에서 희미한 심마를 읽었다.
“정녕 별다른 일이 없는 게 맞나. 괜찮은 표정이 아닌데.”
“…….”
슬며시 눈길을 돌렸다가, 공연히 비늘을 긁적였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한탄하는 레밀리온.
“후우…… 역시 그대의 눈은 못 속이겠군. 오늘은 이런저런 소란이 많았으니 내일 얘기해주려고 했네만…… 기왕 들통난 김에 지금 바로 말해주도록 하지.”
“…….”
지금 바로 말해주겠다 해놓고는, 레밀리온은 쉬이 제 말을 지킬 못 했다. 어둡게 낯짝을 굳히곤 한참토록 마른침을 삼키며 머뭇거렸다. 그 우유부단하게 근심하는 모습은 낮에 단호하게 귀환을 선언한 황금의 맹주와는 생판 딴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내용을 들은 후론, 카딤도 레밀리온이 보인 작태를 이해했다.
“그…… 세계수지기, 릴리아가 말일세, 세계수의 권능으로 가끔씩 예지몽을 꾸지 않았던가?”
“……그랬다고 했지.”
“그 꿈에서, 릴리아가…… ‘대악마’를 보았다네. 그게 언제인지, 어디서 나타나는지, 어떻게 강림하는지, 모든 게 불명이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지. 릴리아가 꾼 예지몽이 빗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
전사의 눈매가 귀신처럼 부릅 뜨였다. 그 공허한 동공의 밑바닥에서 악몽보다도 어둡고, 악마의 기운보다도 악독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한데 레밀리온이 가져온 소식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 말고 또 다른 예지몽도 하나 꾸었다는데…….”
“…….”
“……혹시 그대의 옛 동료 중에, 두 눈에 붕대를 감은 황야의 무녀가 있었던가?”
먼 곳으로부터 날아든 황량한 밤바람이 뒷목을 스쳤다.
카딤은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고, 황야의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