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35)
235화. 빛을 등진 별 (3)
전쟁터에서 창칼을 들지 않는 약자는 대우받지 못한다.
그건 묘령의 여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설령 군기가 바짝 잡힌 부대에 있어도 깍듯한 대우는 바라기 어려울 테고, 기강이 땅에 떨어진 곳에 있다면 끔찍한 노리개 신세를 면치 못할 터.
하지만 이곳, 동맹군 진영에서만큼은 예외였다.
이곳의 아탈라인 여인들은 노련한 전사 이상으로 극진히 대접받았다. 군세의 전사들은 황야의 계율을 따라 경의를 표했고, 참사군 병사들도 두려워하며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기실 먼 옛날, 그녀의 선조들이 척박한 황야에서 떨쳤던 위명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피와 문신으로 전사들을 축성하고, 영험한 주술로 악마들을 격퇴하던 아탈라의 사제들. 아탈라가 선사한 신통력이 돌아와 새로이 명맥을 잇게 된 ‘황야의 무녀’들.
하지만 명성이나 받는 대우에 비해, 그녀들의 능력은 아직 미흡한 감이 있었다.
“황야의 아버지, 아, 아탈라시여……. 도와주시옵소서, 도와주시옵소서……. 힘을, 어…… 장군님께 강력한 힘을 주시옵소서…….”
“예에, 강력한 힘을…… 엄청나게, 엄청나게 강력한 힘을 주시옵소서……. 장군님께 적장의 창을 꺾을 힘을 주시옵소서…….”
“…….”
어둑한 막사 안, 골타란은 조악한 주술진 위에 앉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무녀들이 중언부언 공염불에 가까운 기도를 중얼거렸다.
츠즈즈, 츠즈즈즈 – !
놀랍게도, 그 기도는 효과가 있었다. 노란 광채와 함께 근력을 강화해주는 문신이 몇 개 더 새겨졌다. 대단치는 않아도 일합에 생사가 갈리는 전장에선 꽤 도움 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골타란은 마뜩잖은 눈치였다.
과거, 그는 ‘진짜 황야의 무녀’와 함께한 적 있었다. 비록 정신은 온전치 못했다 하나, 그 능력은 단신으로 아곤 일대를 황무지로 만들고 투기장을 초토화시킬 정도였다. 고작 이 정도 사소한 이적으론 성에 안 차는 게 당연했다.
물론 이 풋내기 무녀들을 닦달할 순 없었다. 명맥이 끊겼다가 난데없이 신내림을 받은 탓에, 그녀들은 아무런 전승도, 주물도, 스승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주술을 쓰는 처지였으니.
“……수고했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하도록 하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녀들 중 절반이 탈진하여 풀썩, 쓰러졌다. 골타란은 한숨을 푹 내쉬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늘어난 문신은 서너 개 남짓. 굳이 시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론 결단코 그 엘가의 ‘별’에게 맞설 수 없다는 걸.
만만찮은 상대일 줄은 알았다만, 그 연로한 성기사의 강함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절륜한 무기의 화력, 그를 뒷받침하는 압도적인 무위…… 심지어 ‘엘가의 신기’나 ‘다른 능력’은 사용조차 하지 않았다. 왜 여태껏 자신을 죽이고 동맹령으로 진격을 안 했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아니…… 사실 짚이는 바가 한 가지 있긴 했다.
‘역시, 저 고강한 ‘별’마저도 대전사님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골타란 역시 전해 들었다. ‘악마 학살자’ 카딤이 전선을 돌파한 엘가의 별들을 떨어뜨렸단 소식을. 현재 그는 존재만으로도 다른 별들과 성전군이 진격하지 못하게 막는 억제력이 되어 있었다.
‘후우, 확실히 대전사님께서 거동하신다면…… 아무리 그 성기사라 해도 상대가 안 될 테지만…….’
그럼에도 카딤에게 도움을 청할 마음은 없었다.
어쩌다 보니 ‘국경의 도살자’라는 흉악한 이명을 얻었다만, 골타란은 이 전투를 카딤이 내린 ‘구호의 사명’을 실천하는 연장선으로 여기고 있었다. 최전선에서 제국의 공세를 막고, 위협적인 적들에 맞서 부하들의 생명을 지키고, 궁극적으론 모든 동포들과 동맹인들을 구한단 식으로.
이건, 대전사님께서 감히 대전사를 참칭한 죄를 사하며 내린 사명이었다. 그걸 감당하기 어렵다고 그분께 의존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어떻게든 자력만으로 그 성기사를 꺾고 동맹을 지킬 방도를 찾아내야만 했다.
방법이 숫제 없는 건 아니었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두 가지가 있었다. 어떻게든 무녀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법, 혹은…… 목숨을 버리고 공멸하는 방법.
우선 전자부터 물색해보기로 했다.
골타란은 병영을 가로질렀다. 바삐 경례를 올리는 병사들을 지나 구석에 있는 한 천막으로 다가갔다. 퀘퀘하게 떠도는 먼지 사이로 꼬질꼬질한 행색을 한 아녀자 한 무리가 얼굴을 드러냈다.
“고, 골타란 장군님? 이런 누추한 곳까진 무슨 일로…….”
“예브릴은 어디로 간 거지. 무녀들 사이에는 없던데.”
“예? 예브릴…… 님 말입니까?”
황야의 무녀들이 죄다 어설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얼뜨기들 사이에도 옥석은 있었다. 반년 전까진 유빅 대단주의 노예였던 여인, 예브릴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다른 무녀들보다 뛰어난 신통력과 직감을 타고났다. 무녀들이 근력을 강화하는 문신이나마 새길 수 있게 된 것도 다 그녀가 먼저 깨우치고 가르쳐준 덕분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선천적으로 눈이 먼 데다, 극도로 겁이 많고 소극적인 성정을 가졌다는 것.
혼자서는 밖을 나돌긴커녕 식사조차 제대로 못 했다. 외간 사내들은 물론, 비슷한 처지인 무녀들에게조차 심하게 낯을 가렸다. 그녀를 전장으로 데려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예일 적부터 함께 하던 여인들을 몽땅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모쪼록 예브릴에겐 그만한 특별 대우를 받을 만큼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그녀가 모종의 계기로 능력을 월등히 발전시킨다면, 저 엘가의 ‘별’에 닿을 만한 타개책을 찾아낼지도 몰랐다.
그런데 골타란의 질문에 여인들이 당황하여 수군거렸다.
“어……? 예브릴은…… 아, 아니, 예브릴 님은 틀림없이 아까…….”
“다 같이 천막 앞까지 안내드리고 돌아왔는데…….”
“예, 예브릴 님께서 장군님을 돕는다 하셔서, 아까 무녀분들이 계신 천막 앞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만……. 저, 정말 그쪽에서도 못 보셨습니까?”
“…….”
골타란은 꿈틀, 이맛살을 떨었다. 급히 튀어나와 영내에서 행방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병사들도, 무녀들도, 심지어 관문을 지키는 초병조차도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이윽고 골타란은 모든 전사들과 여인들을 집합시키고 준엄하게 명했다.
“……예브릴을 찾아라. 만약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책임이 있는 자들은 군율에 따라 엄중히 처벌하도록 하겠다.”
*
엘가의 별, ‘데카그램’에게 불만을 품는다.
그것도 5좌 위의 ‘상위권 데카그램’에게 불만을 품는다.
이것은 엘가를 숭상하는 성전군에게 있어선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명제였다. ‘데카그램’은 엘가의 창이자 엘가의 의지, 으뜸가는 대행자이자 지상에 떠오른 찬란한 별. 빛의 계율에 따르면, 그건 엘가를 대놓고 거역하는 신성 모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교리적인 사정뿐 아니라 현실적인 까닭으로도 그러했다. 하위권의 ‘별’조차도 홀로 대군을 쳐부수고 아크팔라딘 여럿을 상대할 만한 무력을 지녔다. 하물며 그와도 궤를 달리하는 상위권의 ‘별’에게 불만을 표한다면…… 어떤 참극이 벌어질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일.
그러나 불경하게도, 현재 국경 지대의 성전군 진영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빛을 위하여.”
“모든 것은 빛을…….”
“모든 것은…… 위하여.”
돌아온 지휘관을 향해 성기사와 병사들이 경례를 올렸다. 목소리엔 맥아리가 없고 눈빛은 음울하게 번들거렸다. 군기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모습.
“…….”
‘진실을 꿰뚫는 별’ 헨다르크는 말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거리가 멀어지자, 등 뒤로 부글거리는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성토가 들려왔다.
안 들어도 알 만했다. 어떤 불평불만들을 내뱉고 있을지.
기실 불만이 없는 게 이상한 상황이긴 했다. 앞으로 진격하지도, 뒤로 후퇴하지도, 적장과 결판을 내지도 않고 허송세월한 지도 어느덧 한참. 우유부단한 지휘관의 행보 아래 이곳, 중부 전선은 아군 측의 희생만 차츰 늘리고 있었다. 위대한 엘가의 별이 지휘관이 아니었다면, 진작 부관들의 반동이나 불복이 일어났어도 놀랍지 않은 상황.
심지어 헨다르크는 어린 제자들을 인질로 잡혀있는 처지였다. 계속 이렇게 시간을 끌어댈 경우…… 대주교가 또다시 그에게 어떤 ‘선물’을 보낼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진실을 꿰뚫는 별’은 도통 진격할 엄두를 못 냈다.
심장에 자리매김한 중대한 의문 탓에.
이 전쟁의 진정한 목적은 엘가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악하기 그지없는 한 인간의 야망과 복수심을 채우기 위함이거늘…….
……엘가는 어째서, 에렌스코 대주교에게 천벌을 내리긴커녕 더욱더 큰 성력과 권능을 주고 있는가?
교단의 경전엔 적혀 있다. 신의 뜻은 가장 깊은 심해보다도 그윽하여, 한낱 피라미만도 못한 인간이 절대 헤아릴 수 없다고. 헨다르크는 어릴 적부터 그 구절을 마음속에 품고 인간사의 불합리를 꿰뚫는 창으로 삼았다. 허나 이번에 마주한 불합리만큼은 도무지 타파가 불가능했다.
불가해(不可解), 일평생 독실한 신앙을 지킨 끝에 마주한 신의 면모는 거대한 불가해로 이루어진 장벽이었다. 그 앞에서 헨다르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이렇게 성전군의 진격을 늦춰 무고한 희생을 막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대장님,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지금 바로 맞이하러 가시지요.”
“……무슨 말이지? 지원을 요청한 기억은 없네만.”
“제가 종군 사제들 편을 통해 대주교님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더 희생이 커지기 전에 ‘국경의 도살자’와 결판을 짓고 나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부대장 노릇을 하던 아크팔라딘이 일방적으로 고했다. 명백한 월권 행위였으나, 헨다르크는 부대장을 지탄하지 않았다. 이미 대주교의 눈 밖에 난 데다 아군의 목숨을 내버리던 지휘관에겐 아랫사람을 문책할 의지도, 자격도 없었다.
허나 그 지원군이 누군지 확인하곤 부대장을 말리지 않은 걸 후회했다.
“간만에 뵙습니다. 진실을 꿰뚫는 별.”
“…….”
무뚝뚝한 육성이 울렸다. 민둥한 머리, 움푹 팬 눈과 뭉툭한 코, 우람한 덩치가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사람보단 무쇠로 만든 골렘에 근접한 인상. 헨다르크는 이 사내가 누군지 지나치리만큼 잘 알았다.
데카그램 제9좌, ‘평화를 부르는 별’ 팍스탄 엘 라툼 마스타리우스.
별들의 아홉 번째 자리를 차지한 성기사이자, 이단심문성의 서열 2위 격인 특급 심문관이었다.
“경께선…… 남부 전선 쪽에 계시지 않았소? 어떻게 이곳, 중부 전선까지 오시게 됐소?”
“남부 전선은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이젠 이곳 차례입니다.”
“……‘평화’를 되찾았다 함은, 적들을 전부 죽였단 뜻이오?”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생할 겁니다.”
팍스탄은 아무런 감정의 고저 없이 단조로이 답했다.
“지옥 불구덩이에서, 엘가께 귀의하지 않은 걸 영원토록 후회하며.”
헨다르크의 미간에 어둑한 골이 패였다.
데카그램 9좌는 3좌에 비해 월등히 낮은 자리다. ‘성전’이 개전되기 전까진, 헨다르크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능히 이자의 여생을 뒤바꿀 만한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젠 입장이 바뀌었다.
헨다르크가 버려진 별 취급을 받게 된 사이, 그는 떠오르는 샛별처럼 앞날이 창창해졌다. 7, 8좌가 공석이 되어 어부지리로 승위가 확정된 데다, 에렌스코 대주교가 이단심문성의 대심문관직을 겸해 사실상 직속 부관이 되었기에.
즉, 지금은 이자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제지하기가 어렵단 것.
게다가 헨다르크는 켕기는 덜미까지 잡혔다.
“소식은 대강 들었습니다. 경께서 그런 분인 줄 몰랐는데…….”
“…….”
“……앞으로 밀고는 삼갔으면 합니다. 제 성흔은 뭐, 적에게 알려져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만.”
팍스탄이 덤덤히 제 이마에 새겨진 성흔, ‘평화를 부르는 별’을 쓸었다.
아무래도 대주교에게 성흔의 정보를 누출했단 얘길 전해 들은 모양. 헨다르크는 지그시 입술을 짓씹었다가, 착잡한 투로 물었다.
“그럼 여기서도…… 곧바로 ‘평화’를 전파할 계획이오?”
“예, 이쪽 전선이 지지부진하다 들어서. 경이 안 나서면 저라도 나서야겠지요.”
“……그럴 필요 없소. 몸이 안 좋아 시간이 조금 지체됐을 뿐이외다. 상태가 회복되는 대로 내가 다 정리할 테니, 그대는 후방으로 돌아가 부대 정비나…….”
“허락을 얻으러 온 게 아닙니다. 진실을 꿰뚫는 별.”
팍스탄이 결연히 자신의 신병, ‘평화주의자’를 들어 올렸다. 끄트머리에 평화의 상징이 매달린 커다란 지팡이…… 아니, 비둘기 모양의 쇳덩이가 달린 철퇴를.
“몸이 안 좋으면, 가만히 보고나 계시지요. 곧장 이교도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전파하고 오겠습니다.”
*
한 여인이 전장과 멀지 않은 벌판을 떠돌았다.
“하아, 하아, 하아…….”
갓 스물쯤 되어 보이는 아탈라인 여인. 걸음 따라 가쁜 숨결이 부옇게 일어나고 하얀 머리칼이 너울거렸다. 변변찮은 무장도 없고 연신 겁먹은 듯 떠는 것이, 홀로 이런 험지를 떠돌긴 영 부적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여인이 누런 헝겊으로 양눈을 가렸단 것.
그녀, 예브릴은 태어날 때부터 앞이 안 보인 소경이었다. 그 반대급부인지, 얼마 전 신내림을 받아 ‘황야의 무녀’가 되고, 동맹군을 이끄는 장군에게 큰 신임을 받게 되었다만…… 아직 잃은 시야를 대체할 만한 능력을 얻은 건 아니었다.
예브릴을 이곳으로 오도록 충동한 요소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가르침이 없어 벽에 부딪힌 주술 능력,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자신을 믿어준 장군에게 보답하고 싶단 마음, 그리고 마지막은…… 도와주겠다며 애틋하게 그녀를 부르는 정체불명의 목소리.
헤매던 발길은 어느 석판 앞에 닿았다. 예브릴은 몸을 숙였다. 그 표면엔 우둘투둘하게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딱히 읽을 수 있는 건 아님에도,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듯이 연신 양각된 문자를 더듬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끄저저저저저저적…….
갑자기 거칠게 가죽을 쥐어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찬바람이 멎고, 텁텁하게 밀폐된 공기가 물씬 밀려들었다. 쿰쿰한 먼지 냄새가 비강을 가득 메웠다. 예브릴은 어깨를 움츠리고 어리둥절하게 갸웃거렸다.
“어? 어어…….”
이윽고 내면에 명징한 의지로 메아리치는, 그녀를 이곳으로 인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오시지요, 빛을 잃고 끝없는 어둠을 방황해온 황야의 딸이시여……. 그대가 오기만을 오래도록 기다렸습니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