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45)
245화. 땅, 물, 불, 빛, 그리고 강철 (1)
갈맷빛 이끼가 낀 쇠장식, 퀘퀘한 어둠으로 가득한 골방.
먼지가 껴 탁하지만 단호한 육성이 울려 퍼졌다.
“빛을 잃고 끝없는 어둠을 방황해온 황야의 딸들이여, 맹약은 맺어졌다……. 지금부터 나, ‘준칙의 무녀’ 아크샤가, 아탈라의 이름을 걸고 약조를 이행하겠노라…….”
강퍅한 인상의 노파가 바닥을 짚었다. 주술진이 싯누런 광채를 발하고, 벽면과 천장이 전율했다.
구구구구구구 – !!
“흡, 흐으읍…….”
애처로운 신음이 뒤따랐다. 소리의 근원은 술식 가운데 선 묘령의 여인. 얼굴의 절반을 헝겊으로 가렸음에도, 겁에 질린 티가 완연히 났다.
그러나, 광채가 가라앉을 무렵.
우우우우웅…….
여인의 자태가 돌변했다. 거짓말처럼 진정하고 신음을 멈췄다. 대신 희미하게 얼떨떨한 투로 물었다.
“……아, 다 된 건가요?”
“그렇습니다, 맹안의 무녀님…….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신지 한번 움직여 보시지요.”
“…….”
어색한 걸음으로 방 안을 거닐었다. 생경하단 듯이 제 몸뚱이를 더듬어보길 잠시. 끝내 여인은 가슴께를 꾹 껴안고, 목멘 소리로 흐느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이 은혜를 어떻게,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제가 감히,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두근, 심장이 여린 고동을 발했다. 마치 북받친 흐느낌을 달래듯. 원주인의 정신은 무의식 아래로 침잠했으나, 그 의지만큼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늙은 무녀는 한동안은 측은하단 듯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나 금세 엄혹한 경고를 덧붙였다.
“……잊지 마십시오, 무녀님. 그 황야의 딸은 육신을 무녀님께 아예 봉헌한 것도, 공으로 빌려드린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맹안의 무녀님이라 하셔도, 결코 아탈라의 이름을 걸고 한 맹약을 어기실 순 없을 겁니다.”
“예, 물론이죠……. 걱정마세요, 아크샤. 황야에 모래바람이 멎고 대양에 파도가 마르더라도, 제가 이 은인의 육신과 아탈라의 존명을 더럽힐 일은 없을 거예요.”
“…….”
미상불 노파심에서 비롯된 경고이긴 했다. 저 무녀는 만인이 약속을 어기라 종용해도 반드시 약속을 지킬 위인이었으니…….
‘준칙의 무녀’ 아크샤는 쿨럭, 잔기침을 내뱉고 물었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바로 대전사님을 만나 뵈러 가실 겁니까, 예브릴?”
“……예? 아아, 예. 맞아요, 예브릴……. 지금은 그런 이름이었죠…….”
“명심하십시오. 옛 이름은 버리셔야 합니다. 세상의 순리에 따라, 그 육신에 머무시는 동안은 오직 ‘시릴’이 아닌 ‘예브릴’로서만 행동하십시오.”
“…….”
시릴…… 아니, 예브릴은 숙연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2백여 년 전, 수많은 유적을 세우고 자취를 감췄던 ‘맹안의 무녀’ 시릴은, 새로운 ‘맹안의 무녀’를 매개로 삼아 현세로 귀환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모든 과정이 기적과도 같았다.
기약 없는 세월을 가로질러 대전사가 돌아온 것도, 그로 인해 자신의 신통력이 복원된 것도, 정처 없이 퍼뜨린 전음이 준칙의 무녀에게 닿은 것도, 유폐된 유적 안에서 함께 영혼을 덧씌우는 대주술을 준비한 것도, 그리고 끝내 적절한 매개자를 찾아 불러내 그 육을 빌린 것까지도.
하지만 이는 우연한 기적은 아니었다. 이건, 은연 중에 천리를 통찰하여 제 뜻을 이루는 경지에 이른 시릴의 신통력, 그리고 맹약을 맺어 약속한 대가 덕에 가능했던 기적이었다.
매개자, 예브릴이 맹약의 대가로 약속받은 건 다음과 같았다. 고대의 주술에 관한 지식들과 더 강한 신통력, 그리고 마음의 눈을 개안하는 고위 주술, ‘심안’.
그녀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고작 몇 달 육신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정체된 주술 능력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키고, 평생을 옭아맨 실명의 굴레에서도 벗어나게 될 테니까. 기실 대가 없이 이 위대한 선조를 돕는단 것만으로도 영광인 일이었다.
정작, 맹약을 제안한 쪽이 이득인지는 미지수였다.
한 육신에 여러 영혼이 머무는 건 순리를 어기는 일. 이 영혼을 덧씌우는 주술에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선 안 된다는’ 제약이 있었다. 기껏 수백 년을 애타게 기다린 대전사와 재회해도, 자신이 옛 동료란 걸 밝힐 수 없단 뜻.
맹약의 주선자, 아크샤는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떠나간 이유를 묻지도, 억눌린 한을 털어놓지도, 터놓고 회포를 풀지도 못할 텐데, 굳이 남의 몸을 차지하여 나선다니? 아무리 그 숭고한 ‘맹안의 무녀’라 하지만…… 무언가 자신이 못 알아챈 꿍꿍이가 있나 의심이 안 들 수 없었다.
허나 금세 괜한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아뇨. 일단은 대전사님보단, 골타란 장군이란 자부터 찾아 도와야겠지요. 그 장군은 제 은인의 은인. 은인께서 열성껏 주술을 익힌 이유부터가 자신을 믿어준 그분께 보은하기 위해서라 하셨으니까요.”
“…….”
맹안의 무녀는 여전히 자신보단 타인의 마음을 우선시했다. 심지어 몸을 빌린 이유도 단순히 대전사를 보고자 하는 사사로운 연정 때문이 아니었다.
“아크샤, 이 대륙에 다시금 끔찍한 ‘거악’이 도래할 거예요. 저는 3백 년 전에 그러했듯, 거악과 맞설 대전사를 곁에서 보필해야만 합니다.”
“거악……? 서, 설마…… 거악이라 하심은…….”
“예, 맞습니다. 머지않아, 지상에 ‘대악마’가 강림할…… 흐읏!”
돌연 머리를 싸매 쥐고 주저앉는 예브릴. 아크샤는 보자마자 즉각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차렸다.
“천기(天機)를 함부로 누설하지 마십시오! 그릇이 달라진 탓에, 이전처럼 직설적으로 천기를 말하고 신통력을 남용해선 안 될 겁니다!”
“흣, 흐으으…….”
‘신통력’은 이름대로 신과 통하여, 하늘의 뜻을 엿보고 구현하는 힘.
하지만 기도했더니 신이 이뤄줬다는 식의 간편한 획득은, ‘투쟁과 황야’라는 아탈라의 신성과 위배된다. 따라서 큰 고난 없이 신통력을 얻은 대부분의 무녀들은, 극히 간접적으로만 천기를 누설하고 이적을 일으키는 게 가능했다.
시릴은 그동안 그 제약에서 거의 유일한 예외였다. 대악마를 처단하는 여정, 그리고 치명적인 결손에도 꺾이지 않은 의지 덕에 막대한 ‘신통력’을 선사받았으니. 하지만 육신이 바뀐 이상, 그녀도 더는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죄송해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군요……. 앞으론 여러분들처럼…… 조심히 말하도록 유의해야겠네요.”
“…….”
아크샤는 심란한 안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만한 천기를 누설하고도 금방 회복하다니……. 여전히 대단한 신통력이긴 했다. 그렇지만 또 한 번 ‘대악마’에 맞설 만한 정도냐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그만두시지요, 예브릴. 그 몸으로 거악의 군세에 대적했다간, 당신과 그 몸의 원주인, 양쪽 다 모래알보다 잘게 부스러져 사멸할 겁니다.”
“아뇨, 그럴 순 없어요……. 그리고, 은인의 육신이 상하는 건 제가 어떻게든 막을 테니 걱정 마시고요.”
“그래서, 어쩌겠단 겁니까.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거악을 무찌른다 한들, 당신이 얻게 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전사는 끝까지 당신의 존재조차 모를 테고, 모든 공로와 영광은 새로운 맹안의 무녀가 차지하게 될 테지요. 대관절 본래의 육신으로 나서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대답 대신 돌아온 건, 아스라한 쓴웃음.
노쇠한 눈망울이 부릅 뜨였다. 뒤늦게 저 무녀가 백 개의 유적을 만들고, 다른 무녀들을 모두 보내고, 영육이 극도로 쇠한 뒤에야 스스로를 유폐했단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설마, 저희들만큼도…… 육신을 보전하질 못하신 겁니까?”
“…….”
“아니, 대체, 대체 왜……? 무녀님께선 대전사님과의 재회를 고대하셨던 게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대체 왜, 육신을 보전할 여력조차 안 남기시고…….”
아크샤는 어떻게든 당장 대전사에게 구조와 도움을 청하길 권했다. 변함없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구름을 거니는 달무리처럼 어슴푸레한 미소만이 이어지고.
긴 침묵 끝에, 아득한 세월을 담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래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어요. 어느 불꽃처럼 순수하고 따스했던 소녀에게.”
“…….”
“언니는 ‘땅’이라고. 빗물이 괴고, 가뭄이 들고, 벼락이 내려치더라도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황야처럼 황폐해지고,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아도 묵묵히 계속 헌신할 거라고. 예…… 저는 그 소녀가 정확하게 보았다고 생각해요.”
헝겊으로 가려진 눈길이 바닥을 향했다. 그 시야는 땅을 보지 못하되, 땅의 가치와 노고를 보았다.
“나그네가 위를 거닐어도, 땅은 아무런 말을 않죠. 단지 잠자코 그 발걸음을 지탱하기만 할 뿐. 만약 가꿔주길 청하거나 늪처럼 발목을 붙잡는 땅이 있다면, 나그네는 결코 무사히 여정을 계속할 수 없을 거예요”
“…….”
“그렇지만 나그네가 사명을 마친 순간, 마침내 고단한 삶의 여정을 다하고 종점에 이른 순간, 그는 깊은 땅속에 몸을 누이며 비로소 깨닫게 되겠죠.”
“…….”
“네가, 여기 있었구나. 네가, 항상 나와 함께 했구나. 나는…… 혼자가 아니었구나, 하고.”
아크샤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예브릴은 마음의 눈으로 먼 천장을 우러렀다.
“저는, 그래야 한다 생각해요. 그분이 절 돌아보지 않고, 그저 발밑의 도움만을 받으며 ‘투쟁의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생각해요. 그분의 뜻은 묻지 않는, 제멋대로 구는 이기심일지도 모르지만…… 마땅히 그래야 한다 생각해요.”
“……진정, 그것으로 족한 겁니까.”
“예, 언젠가 약속한 곳에서 미소 짓고 재회할 수만 있다면…… 그분이 당장은 제 존재조차 모른다 해도, 저는 충분히 족해요, 아크샤.”
할 말을 잃고 망연한 표정을 짓는 늙은 무녀.
척박한 황야의 계율은 말한다. 황야의 무녀들은 바람을 희롱하며 떠도는 먼지요, 이름 없이 살다 파묻힐 흙이라고. 그러니 지상의 모든 성취와 인연을 덧없다 여기고 하늘이 준 사명만을 받들라고. ‘준칙의 무녀’ 아크샤는 그동안 그 계율을 엄격히 견지하여 유폐의 세월을 견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세상을 구하고 3백 년의 세월을 인내했음에도,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할 무녀를 마주한 바로 이 순간.
처음으로, 그 계율이…… 불합리하단 생각이 들었다.
*
축축한 음영이 일렁이는 바닥, 빛을 불허하는 어둠이 드리운 은신처.
그림자처럼 사늘하지만 청명한 육성이 울려 퍼졌다.
“태양이 저물지 않는 백야에도 볕을 피할 그늘을 찾을 수 있기를. 이름 없는 어둠의 종복이 총대주교님을 뵙습니다.”
빛무리를 등진 여인이 무릎 꿇었다. 입구가 닫히며 그 신영도 어둠에 파묻히고, 눈동자만이 남아 노란 잔광을 발했다.
여인의 앞에는 먹물처럼 검은 못이 있었다. 그 못 너머에는 좁다란 통로가 있었다. 그 통로 안쪽에는 그림자를 깎은 삭연한 보좌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보좌 위에는.
검붉게 해진 옷을 걸친 남자가 앉아 있었다.
“…….”
“…….”
남자는 제법 덩치가 큰 편이었다. 윤곽은 완연히 어둠에 녹아들었으나 위엄 어린 기척이 그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웅장한 체구와 잠잠한 자태 탓에, 그는 인간보단 어떤 종교적인 상징물과 같은 분위기를 발했다.
오래 기다려도 거동하는 낌새가 없었다. 결국 무릎 꿇은 여인, 일레니아는 그대로 보고하러 온 내용을 고했다.
“계시의 전사와 중앙 전선에 출전한 흉성들이 결착을 냈습니다. 9좌 ‘평화를 부르는 별’은 제약을 어기고 천벌을 맞아 소산됐습니다. 그리고 3좌 ‘진실을 꿰뚫는 별’은…… 엘가 교단을 등지고 동맹군 측으로 전향했습니다.”
“…….”
“……정황상, 계시의 전사께 저 ‘굽어살피는 눈’의 진상을 전해듣고 설득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소식이 몰고 온 파란은 어마어마했다.
엘가의 별, ‘데카그램’은 죄다 신앙이 돈독하기 그지없는 광신도들. 전향하도록 설득하긴커녕, 엘가에 관해 사소한 의심만 제기해도 단칼에 목을 끊는 작자들이었다. 근 백여 년간 물 밑 작업으로 회유를 시도하다 죽은 잊힌 신의 추종자만 물경 세 자릿수에 이르렀다.
한데 그런 데카그램을, 그것도 무려 3좌의 데카그램을 전향시키다니?
드래곤을 가축화하고, 엘프들을 방화범으로 만들었다 해도 이보다 놀랍진 않았을 터였다. 소문은 잊힌 신 교단 내에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그 결과, ‘계시의 전사’에 대한 추종자들의 지지는 하늘을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그를 재앙의 근원으로 여기던 이단 분파들마저 슬금슬금 태도를 바꾸고 있었다.
특히나 저 보좌에 앉은 사내, 교단의 총대주교는 감흥이 더욱 남다를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이자는 ‘계시의 전사’와 해묵은 인연이 있는 데다가……
“사족이지만, 그 엘가의 별은 총대주교님의 옛 이명을 본 딴 것인지…… ‘빛을 등진 별’이라 불리고 있다더군요.”
……앞서 진상을 깨닫고 엘가를 등진 선구자이기도 했으니.
“…….”
“…….”
일레니아는 조심스레 눈을 흘겼다. 어둑한 침묵 아래, 통로 너머의 자태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총대주교는 도통 종잡기가 힘든 위인이었다. 평상시엔 마음씨 좋은 노인처럼 인자하거나, 술 취한 한량처럼 호탕했다만, 어떨 땐 또 이단심문관 저리 가라 할 만큼 엄격했고, 아주 가끔씩은 악마보다도 음험했다. 어떻게 보면 진정 ‘어둠과 혼돈의 신’을 모시는 사도에 걸맞은 면모였다.
그래도 이 얘기는 원체 충격적인 소식인지라, 뚜렷한 반응이 나올 줄 알았건만…… 예상이 단단히 어긋났다. 총대주교는 계속 목석처럼 꿈쩍도 않고 있었다. 일레니아는 뒤늦게 그가 양손으로 눈을 덮어 성호를 취하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슬슬 무릎 꿇은 여인의 다리에 쥐가 오를 무렵, 마침내 눈가를 가린 손이 떨어지고 굳게 닫혔던 입술이 열렸다.
그리고, 일레니아는 자신이 전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됐다.
“……잊힌 신의 신격을 훼손하고, 신명(神名)을 말소한 원흉을 찾아냈습니다.”
“……!!”
깨질 듯이 흔들리는 눈동자, 엄숙하게 이어지는 육성.
“데카그램 제2좌, ‘어둠을 삼키는 별’. 그자가 원흉입니다.”
가장 독실한 배교자, ‘빛을 등진 고든’이 그림자를 딛고 두 눈을 치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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