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46)
246화. 땅, 물, 불, 빛, 그리고 강철 (2)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은 말문이 막혀 벙어리처럼 변한다.
감정을 감추고, 가면을 쓰는 데 능숙한 잊힌 신의 사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레니아는 수 분이 흘러서야 간신히,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보다 자세한 존교(尊敎)를 베풀어주시길 청합니다, 총대주교님. 이는 저희 교단뿐 아니라, 지상과 천상의 운명을 바꿀지도 모를 중대 사안으로 사료됩니다.”
“…….”
잠시 뜸 들인 끝에, 고든이 전말을 털어놓았다. 묵직한 말투 밑에는 날벼락과도 같은 내용이 도사렸고, 청자가 느끼는 충격은 점차 태산처럼 배가됐다.
허황된 얘기는 절대 아니었다. 세계수지기가 꿈결 속에서 미래를 보듯, 총대주교는 어둠 속에 파묻힌 진실을 내다 본다. 하지만 도무지 믿을 만한 내용이 아니었고, 사건과 인과가 군데군데 비거나 뒤죽박죽 섞인지라, 일레니아는 생각을 쉬이 정돈하질 못했다.
모쪼록 신의 이름을 없앤 원흉을 파악했으니, 그다음엔 총대주교가 ‘어둠을 삼키는 별’을 처단할 방도를 논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이번에도 또 빗나갔다.
“‘빛을 등진 별’이라…… 생각지도 못한 성과로군요.”
“……?”
“빛을 보고, 어둠을 보고, 오랜 세월 무수한 신비와 이적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그자가 이룩하는 일들은 저를 경탄하게 합니다. 아니, 어쩌면 놀라긴 이를지도 모르겠군요. 금시야말로 태초의 어둠께서 내리신 ‘계시’가 제 궤도에 오르는 시점일 테니.”
멍하니 있던 일레니아는, 뒤늦게 저게 거짓된 태양을 떨어뜨리리란 ‘계시의 전사’에 관한 말이란 걸 깨달았다. 급작스레 튀어버린 화제에 당황을 금하기 어려웠다.
“예, 계시의 전사의 위업이 무저갱을 메울 만치 혁혁한 건 저 또한 통감하는 바입니다. 하오나 당장은 우선 신명을 말소한 흉성을 처단하고, 잊힌 신의 존명을 복원할 방도를 모색할 때이지 않나 싶습니다, 총대주교님.”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름 없는 작은 어둠이여.”
“……예?”
“저희들의 힘으론 처단할 수 없습니다. ‘어둠을 삼키는 별’은 그저 신명을 말소하기만 한 게 아닙니다. 그자는 ‘잊힌 신’의 신격을 강탈하고, 초월을 넘어 반신(半神)의 경지에 오른 존재입니다.”
“……!!”
머릿속에 드리운 뇌운이 줄벼락을 내려쳤다. 도무지 감당할 만한 정보가 아니었다. 머지않아 낭떠러지로 떨어지듯 사고가 걷잡을 수 없이 불길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렇다면 설마…… 그자가 바로 세계수지기께서 강림을 예견한, 심연에서 되돌아온 ‘대악마’인 것입니까?”
“…….”
잠시간 묘연한 눈빛을 보내는가 싶더니.
고든은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일레니아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렇지만 뒤이어 이런 의문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악마도 아니면서 신의 신격을 강탈했다면, 그 존재는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총대주교는 어째서 이토록 태연자약하단 말인가? 잊힌 신과 교단을 몰락시킨 최흉의 숙적을 밝혀냈음에도, 그 존재를 어찌할 수 없단 사실이 드러났는데…….
숙고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갈 퍼뜩 떠올렸다.
“설마 총대주교님께선…… 계시의 전사가 그자마저 능히 쓰러뜨리리라 여기시는 겁니까?”
이번엔 칼 같이 답변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아무리 계시를 내려받고 놀라운 위업을 이룩했다 한들, 그 전사는 아직 갓 초월의 문턱을 넘은 인간. 반신의 경지에 이른 초월자를 홀로 상대하긴 버겁겠지요.”
“…….”
샛노랗게 반짝이던 눈동자가 실의를 머금었다. 허나 총대주교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
“인간은 독존(獨存)하는 악마들과 달리, 공존(共存)하는 존재. 다른 자들이 도와준다면 얘기는 달라질 겁니다. 비록 오래전 함께한 저와 옛 동료들은 떠났으나, 그자의 곁에는 여전히 훌륭한 조력자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말하지 않아도 알 만했다. 누구누구를 일컫는 건지.
잊힌 신의 간택을 받은 행상인, 동맹을 건립한 드래곤의 친우, 옛 이름을 버린 동맹의 장군, 새로이 합류한 빛을 등진 별, 그리고 다름 아닌…… 일레니아, 자기 자신.
여인의 입꼬리가 꿈찔거렸다. 차오르는 벅찬 사명감, 그리고 전사에게 인정받았던 순간의 황홀함으로 미소를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기쁨의 시효는 짧았다. 짙은 책망감, 그리고 막막한 심정이 밀려들었다. 자신은 이미 전사가 천벌에 맞도록 하는 실책을 저질렀고, 일신의 능력만 따지면 쟁쟁한 다른 조력자들에 비해 한미하기 그지없는 존재였으니까.
고든이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 저의를 도통 가늠키 힘든 나락처럼 깜깜한 눈동자로.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나직히 입을 뗐다.
“이름 없는 작은 어둠이여. 그대가 누구였는지, 황야를 떠돌기 전에는 무엇을 했는지…… 잊어버린 과거에 대해선 무언가 떠올린 바가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그럼 근래에 ‘망국의 은화’ 없이 성력을 이끌어내거나, 잊힌 신에 관한 영적인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 또한, 아직 없습니다, 총대주교님.”
혹시 전사를 돕는 사명을 다른 자에게 맡기진 않을까, 일레니아는 조바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그럼 어쩌면, 이번 임무가 그대가 망각한 과거를 깨우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
“너무 큰 걱정은 마십시오. 그대가 깨우침만 얻으면, ‘어둠을 삼키는 별’마저 능히 역으로 삼킬 길을 찾아낼 테니. 그렇지만, 명십하십시오. 결코 그대의 궁극적인 목적을 잊어선 안 됩니다.”
“…….”
“물심양면으로 계시의 전사를 돕되, 지나치게 사사로운 감정을 주지는 마십시오. 그랬다간 ‘계시’의 종지부를 찍을 마지막 순간에 일을 그르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이름 없는 사제가 즉각 무감정한 추종자의 가면을 썼다. 결연히 인사를 마치고, 곧장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고든은 일순 생도를 전장에 내보내는 엄격한 교관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측은한 어린 양을 바라보는 목동과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한데 은신처를 빠져나가기 직전, 일레니아가 돌연 몸을 돌려 물었다.
“외람되오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총대주교님?”
“무엇입니까?”
“은신처 안에 이렇게 물을 채운 못을 만드신 연유가 무엇인지요? 이전에는 못 보았던 것 같습니다만…….”
혹시 모를 침입자를 막을 함정이란 설명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늪지대나 왜곡 구멍도 아니고, 왜 하필 물웅덩이를 마련했나 의아함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그러자 불현듯 먼 천장을 바라보는 고든.
“……‘세상을 사르는 겁화’를 기억하십니까?”
일레니아의 눈시울이 흠칫 뜨였다. 그답지 않게, 총대주교의 동공 속에는 삭막한 우수가 어렸다.
“그 여인이 아직 잔불 같은 소녀였을 무렵, 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너는 ‘물’이라고, 물에 물 탄 것처럼 맹탕 같고, 정처 없이 흐르며 줏대 없이 흔들릴 놈이라고.”
“…….”
“당시 독실하게 엘가만을 섬겼던 저는 그말을 이해하지 못했지요.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녀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습니다.”
우웅 – !
고든이 투박한 손을 휘젓자, 못 위로 작은 불빛이 피어났다. 웅덩이가 반짝이며 잠시 찬란한 빛을 머금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손가락을 튕긴 순간.
후우웅…….
허망하게 불빛이 사그라들고, 수면엔 도로 먹장 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물’은, 가장 순수한 변절자입니다. 빛이 드리우면 한사코 빛만을 품지만, 어둠이 드리우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둠을 품지요. 스스로는 독실하게 한 명암을 유지한다 믿겠지만, 사실 그건 수면 위의 사정에 휘둘리는 헛믿음에 불과합니다.”
“…….”
“저는 간신히 거짓된 빛을 등지고, 어둠의 품으로 흘러와, 이렇게 교단을 이끄는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건 제가 투철히 신앙을 지킨 덕이 아닌, 오롯이 진리의 어둠께서 저를 비추신 덕에 가능했던 일이지요. 그 사실을 잊지 않고 항상 되새기기 위해…… 은신처에 저렇게 물웅덩이를 둔 것입니다.”
무겁게 흐르는 메아리, 그 뒤로 먹먹한 물소리가 덧씌워졌다.
여인은 잠시 고민하다 의아하단 투로 물었다.
“제게 주신 ‘하사품’을 만들며…… 그녀, 멜리사에 관한 기억은 전부 잊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과거의 인물을 똑같이 재현하는 ‘회상의 분신’, 그 대성법엔 제물로서 대상에 대한 모든 기억이 들어간다. 이내 사내의 그늘진 입가에 쓴웃음이 내걸렸다.
“기억은 사라져도, 기록은 남으니까요. 그녀의 어릴 적 버릇을 따라 해, 옛 동료들에 대한 기록은 따로 전부 남겨두었습니다.”
“…….”
할 말을 잃고 빛을 등진 사내를 바라보길 한세월.
일레니아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재차 성호만을 표하곤 어둑한 물이 고인 은신처를 빠져나왔다.
*
이글거리는 열기가 살갗을 쥐어뜯었다. 매캐한 증기가 숨통을 옥죄었다. 그악스러운 비명이 귀청을 찔렀다. 거머리를 닮은 악마가 침을 질질 흘리며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 퀘루루루루루룩!!
이 피와 불꽃이 들끓는 대지에서 악마들은 포식자요, 인간들은 피식자라는 건 불변하는 진리다. 그 진리를 거슬러 포식자가 되었던 인간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단 두 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악마에게 불운한 소식이 하나 있다면……
콰 – 앙! 화르르르르륵 – !!
……이번에 간택한 먹이가, 그 둘 뿐인 예외 중 하나였단 것.
– 퀘에에, 퀘헤레레렉 – !!
폭발하는 화염구를 삼킨 악마는 침 대신 핏물을 푸짐하게 쏟으며 널브러졌다. 그 주변엔 이미 비슷한 시체가 십여 구나 널려 있었다.
여인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되도록 오물이 안 묻게 주의하며 싸웠는데도 온몸이 피범벅이 됐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원래부터 붉었던 머리칼 쪽은 별 표가 안 난단 것 정도일까.
“후우……. 쿨럭, 쿨럭…….”
지옥에 떨어진 지도 어느덧 한세월.
대마법사, 멜리사는 모질게 악마들과 맞서는 여정을 이어 나가는 중이었다.
아니, ‘대마법사’란 호칭은 이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은 이렇게 화염구 하나만 달랑 불러내는 정도가 한계였으니까. 그나마도 과거에 지옥을 떠돌며 흩뿌렸던 마나의 부스러기를 싹싹 긁어모아서 가능했던 거고, 그마저 고갈되면 도로 무력한 먹잇감이 될 운명이었다.
당연히 대체재를 찾으려는 노력이야 하고 있었다. 마탑에 남겨둔 후예의 발상에서 착안해, 악마의 ‘마기’를 마나 대신 써먹어 볼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그 발상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마기’를 생짜로 쓰다간 육신이 없더라도, 영혼이 오염돼 악마에게 홀릴 것이라는 점.
사실 그것도 해결책이 있긴 했다. 육신이 홀리는 일을 막으려면, 인간의 육신을 완충재로 쓰면 된다. 같은 원리로 영혼이 홀리는 일을 막으려면, 인간의 영혼을 완충재로 쓰면 된다.
즉, 이 지옥에 있는 죄인들의 영혼을 써먹으면…… 악마에 홀리지 않고도 ‘마기’를 다루는 게 가능했다.
“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아, 꺼어어…… 거어어……. 엄마아아, 엄마아아…….”
“…….”
그러나 그건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이미 씻지 못할 죄악을 저질렀다. 셀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을 죽이고, 세계의 명운마저 위협했다. 이건, 카딤의 말마따나 온몸을 바쳐 속죄하는 과정이었다. 무고한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횃불을 쳐드는데, 그 죄인들을 땔감으로 써먹는 건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였다.
꺼지지 않는 ‘불’을 잘못 퍼뜨렸던 대가는 진작 절절히 치렀다. 너무 늦었으나, 지금이라도 올바른 불길을 지펴야만 할 때.
“으흑, 흐으으……. 살려, 살려줘……. 쿨럭, 쿨럭…….”
“엄마아아아……. 나 아파…… 거어어, 그윽, 그으으…….”
“……시체들 때문에 냄새나긴 해도, 되도록 이곳에 오래 머무는 편이 좋을 거예요. 여길 떠나면 또 다른 악마들과 마주하게 될 테니까.”
불을 닮은 여인은 고통받는 죄인들에게 사소한 구원을 베푼 후,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나아가는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살아있을 적에도 균열을 통해 들어와 반백 년을 버텼던지라, 지옥의 지리에는 능통했다. 십여 마리쯤 악마들을 더 터뜨리고, 반나절을 훌쩍 넘도록 걸어간 끝에, 마침내 첫 번째 목적지라 할 만한 아치형 관문을 찾아냈다.
지옥의 다음 구역, ‘골가타’로 향하는 입구.
지옥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붉은 유황의 불꽃이 타오르는 ‘게헨나’, 하얀 부패의 불꽃이 타오르는 ‘골가타’, 그리고 검은 소멸의 불꽃이 타오르는 ‘그리모스’.
그중 그녀가 찾는 사람은 ‘골가타’나 ‘그리모스’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여 악마들이 적은 길만을 노려 ‘게헨나’를 몇 달이나 뱅뱅 돌아와, 마침내 이곳에 이르게 된 참.
여태까진 맛보기에 불과했고,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지옥의 시작이라 봐도 좋았다. 심장은 없다만, 비슷하게 긴장으로 혼백이 맥동 치는 기분을 느꼈다.
틀림없이…… 게일을 쉽게 찾진 못하겠지. 어쩌면 악마들을 피해 몇 년을 도망다니고, 몇십 년이나 행방을 찾아 헤매야 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옛 동료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멜리사는 관문에 들어섰다.
한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어?”
문턱을 넘기 무섭게, 그녀는 곧장 기이한 물체와 마주했다.
새하얀 불꽃이 타오르는 언덕 아래, 그보다 더 찬란한 순백을 두른 신영. 원체 빛이 강해 이목구비는 흐렸으나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게, 게일? 게일, 너 맞아?”
“[…….]”
만개하는 광휘, 일렁이는 광채 틈으로 잔잔한 곡선이 번지고.
‘빛’이 된 사나이가 처음으로 입술을 떼었다.
“[아닐세].”
*
비릿한 샛바람이 부는 어느 오후. 치솟는 혈기를 가라앉히고, 전장이란 푸줏간에 고이 납품된 시체들을 바라보다가, 카딤은 문득 생각했다.
슬슬 이 전쟁을 끝내야겠다고.
“…….”
빈 수통을 내버리고 입가에 묻은 피를 훔쳤다.
끄드득…….
‘강철’보다도 굳건한 손아귀가 망치자루를 꾹, 움켜쥐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