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49)
249화. 단출한 역습 (3)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으나.
카딤에게 지목당한 후로, 던컨은 거짓말처럼 굳어버렸다.
“…….”
그걸 보고, 그냥 적당한 안목을 지닌 의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저자가 정말 그 ‘운타나의 구원자’가 맞나? 생각보단 너무 볼품없어 보이는데? ‘악마 학살자’의 역량은 의심할 바가 없다만, 과연 저렇게 겁에 질려 벌벌 떨던 자가 이토록 막중한 임무를 잘 해낼 수 있을지…….
하지만 예리한 통찰력을 지녔고, 생각이 깊은 소수의 의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과연, ‘은거울 호수의 사신’……. 설마 다른 자가 대주교의 목을 차지하게 될까 불안에 떨더니, 자신이 맡는단 말을 듣자마자 바로 차분해졌군. ‘악마 학살자’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저쪽도 겉보기와 달리 만만찮은 강심장의 살인귀…….
……물론 어느 쪽도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린 건 아니었다.
모쪼록 대주교 암살조에 던컨이 간택된 것에 관해선 다들 이견이 없었다. 다만 그 외에 누가, 얼마나 많은 자들이 추가로 구성될 될지는 눈여겨볼 문제였다. 한 의원이 조심스레 그에 관해 카딤에게 물었다.
돌아온 건 상상치도 못한 답변이었다.
“이미 말하지 않았나. 뭘 들은 거지.”
“……무, 무슨 말씀이시오?”
“저 녀석, 그리고 나. 이렇게 두 명이 끝이다. 늙다리 엘가쟁이 모가지 하나 꺾는데 굳이 떼거지로 우르르 몰려갈 필요는 없지.”
정적.
회담장에 나란히 얼빠진 낯짝들이 진열됐다.
나름 특출난 장점이 있는 구성이긴 했다. 머릿수가 적은 만큼 발각 위험은 크게 낮아질 테고, 또 그렇다고 전력이 크게 떨어지는 조합도 아니었으니까. 저 둘은 벌써 각기 ‘데카그램’을 처치한 영웅들이지 않았던가? 이 전쟁의 성패가 초인적인 개인들에 달려있단 엔리코의 말에는 다들 공감을 표했던바.
그렇지만,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두 명은 너무 하지 않나 싶었다.
대륙에서 가장 큰 세력의 수괴를, 독단으로 전쟁을 일으킨 제국의 실세를, 천상의 신에게 총애받는 대주교를, 단 둘이서 적진 한복판까지 찾아가 암살한다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말인지…….
“잘못 말했군. 두 명이 다가 아니다.”
“여, 역시 그렇지요? 그렇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인원들이 함께 갈지…….”
“한 명 더, 저 무녀도 같이 간다.”
카딤이 회담장 구석, 여태껏 있는 줄도 몰랐던 한 여인을 가리켰다. 붕대로 감싼 두 눈을 떨구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무녀.
‘맹안의 무녀’ 예브릴이었다.
““…….””
좌중들은 할 말을 잃었다.
초인적인 강자를 잔뜩 대동해도 모자랄 판에, 웬 앞도 못 보는 소경을 달고 간다니? 맙소사, 레밀리온이시여, 이게 대체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
그 우려는 호출당한 당사자가 일축했다.
“카딤 공이 이르길, 저 무녀는 과거 가장 신통력이 뛰어났던 무녀를 계승한 후예라더군. 그 능력은 골타란 장군을 도와 중부 전선을 사수하여 입증했다 하니 다들 불필요한 걱정은 하지 말도록.”
레밀리온이 능력을 보증하자 의원들의 성토는 금방 가라앉았다. 다만 모든 의문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외람되오나, 맹주님. 그래도 역시 둘, 아니, 셋은 인원이 과하게 단출하지 않나 싶습니다. 부득불 골타란 장군이나 웬디고트 장로님, 혹은 저…… ‘빛을 등진 별’과 같이 뛰어난 전력들을 동행시키지 않는 연유를 여쭤봐도 될는지요?”
“걱정 말게. 그들에겐 다른 임무를 맡길 거라네.”
이번엔 쉬이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빛을 등진 별’은 과거 제국 측의 핵심 전력이었던 인물. 제국령의 지리와 교단의 사정에 능통하니, 이번 임무에 누구보다도 적격자라 할 만했다. 게다가 그는 성도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있어 임무를 맡을 의지도 강할 터인데…….
틀린 추측은 아니었는지, 헨다르크의 눈동자에 얼핏 씁쓸한 회한이 스쳐 갔다. 하지만 뒤따르는 레밀리온의 말에 즉각 불식되었다.
“웬디고트 장로, 헨다르크 공, 그대들은 마법사와 병사들을 이끌고 골타란 장군을 지원해 중부 전선에서 총공세를 가하게.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끌던 제국의 겁쟁이 놈들이 정신이 번쩍 들도록. 그리고…… 카딤 공과 일행들이 침투한 걸 적들이 티끌만치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중요한 작전을 숨길 땐 연막작전만 한 것이 없긴 했다. 아니, 레밀리온의 지시는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최고로 훌륭한 연막작전은 더는 연막작전이 아니게 되어 버린 연막작전. 아예 전선을 밀고 제국령을 침공해도 좋으니, 최대한 공격적으로 공세를 가하란 명이 떨어졌다.
“후흐…… 신 웬디고트, 알량한 목숨과 찬란한 지식을 걸고 그 명 받들겠나이다…….”
“아탈라의 이름에 맹세코, 그릇된 빛을 섬기는 자들이 더는 내일의 태양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겠습니다.”
‘끝없는 광풍’은 지팡이를 움켜쥐고 간만에 몸이 근질거린단 내색을 했고, ‘빛을 등진 별’도 창대를 쥐고 투쟁심에 불타는 눈빛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근심을 떨치지 못했다.
이쪽이 그렇게 나선다면, 결국 저쪽도 비대칭 전력을 동원할 터. 대관절 ‘악마 학살자’도 없이 어떻게 데카그램을 막을지 막막해졌다.
레밀리온은 잊지 않고 준비를 톡톡히 해뒀다. 뒤쪽에 손짓하자 보좌관들이 삐까뻔적한 수레들을 끌고 나왔다.
“드래곤에게서 빌려온 보물들일세. 이거라면 참사군 병사들은 물론이고, 마탑의 마법사들도 전력이 크게 증강될 테지.”
““……!!””
신화의 시대에 드워프 장인들이 만든 무기, 고대의 마법사들이 빚은 마도구, 그 유례를 가늠키 힘든 지보들까지……. 그 가치를 알아본 자들은 죄다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레밀리온이 대수림에 다녀온 이유가 바로 이것들을 위해서였다. 저것들로 무장하면, 필시 평범한 참사군도 드워프 유물로 중무장한 북부의 유물병 못지않은 전력이 될 테고, 고위 마법사들은 숫제 아크팔라딘과 비견할 만한 역량을 발휘할 것이었다.
장내에 단연한 맹주의 읊조림이 울려 퍼졌다.
“때가 되었네. 피 흘린 형제들의 핏값을 갚고, 광신으로 만인을 현혹한 대주교를 단죄할 때가. 위대한 황금의 피가 흐르는 그대들의 활약 하에 이 전쟁은 필시 우리의 승리로 종식될 걸세.”
““……””
“작전의 이름은 흐음…… 그래. ‘단출한 반격’ 정도로 하는 편이 좋겠군.”
공기가 서서히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언가 역사에 남을 대사건이 일어나고 있단 직감에 모두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남은 문제는 ‘시간’이었다. 계획의 성공 확률을 높이려면, 어쨌든 암살조는 최대한 빨리 침투하고, 최대한 늦게 발각돼야만 했다. 의원들이 앞다투어 계획한 이동 수단과 침투로에 관해 물었다.
카딤은 건조한 투로 답했다.
“뛰어서 갈 거다.”
“……뭐? 바, 방금 뭐라 하셨소?”
“뛰어서 간다고. 나와 이 친구는 대수림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를 닷새 만에 주파했다. 어쭙잖게 말 같은 걸 타는 것보단 그쪽이 훨씬 빠르겠지.”
“아, 아니…… 그런……. 그렇다면 침투로는 어느 쪽으로 가실 것이오? 북부, 중부, 남부, 지금은 국경의 어느 쪽이든 적의 눈을 피하기 힘들 텐데……. 그렇다고 최북단이나 최남단으로 돌아서 가자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테고…….”
“‘돌아올 수 없는 숲’.”
“……!”
“국경 남부 하단에 어느 악마가 만든 광활한 숲이 있다. 이전에 내가 제국령을 탈출할 때도 거길 지나서 왔지. 숲을 만든 악마는 그때 죽여 버렸다만, 숲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여전히 제국 놈들의 눈을 피해 가긴 좋을 거다.”
카딤은 슬쩍 그 악마가 남긴 유산을 바라봤다. 그동안 셀 수 없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던 ‘히드라의 문신’.
터무니없는 경험담에 얼이 빠진 것도 잠시. 의원들은 걱정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것마냥 마지막 우려를 제기했다.
“하, 하지만 그 숲을 벗어나 제국령에 이르면 결국 금세 누군가에게 발각되지 않겠소? 예를 들면, 바로 그 앞의 땅을 다스리는 영주라던지…….”
“상관없다. 목격자는 죄다 죽여버리면 되니까.”
“…….”
말은 그렇게 했다만, 사실 딱히 피를 안 봐도 해결 가능한 문제였다. 무언갈 눈치챈 던컨이 퍼뜩 눈시울을 치켜떴고, 카딤은 가볍게 픽 콧숨을 내쉬었다.
돌아갈 수 없는 숲, 그 앞의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는 바로…….
*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코끝을 맵게 스치던 칼바람이 잦아들었다. 언 땅에서 싸늘하게 피어오르는 한기가 한풀 꺾였다. 떠나는 동장군에게 작별을 건네고 다가오는 봄날을 맞이하듯, 어느 중년의 여인이 메마른 꽃을 들고 무덤가에 섰다.
영주의 자리에 오른 지도 어언 1년.
그녀에겐 유달리도 험난했던 한 해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됐다고 하는 편이 좋을까. 그래…… 겨울. 모든 시작은 지난겨울, 수백 명의 병사들에게 영지가 습격당하면서부터였다.
습격한 병사들의 수장은 인근을 다스리던 어느 자작. 그릇된 모함을 명분으로 삼았던 그는, 넉 달에 이르도록 성을 포위하고 영지민들에게 큰 고통을 줬다. 만일 어느 떠돌이 용병의 활약과 선대 영주였던 남편의 희생이 없었다면, 이곳은 그때 그대로 멸망의 길을 걸었을지도 몰랐다.
지아비의 생육을 바쳐 움튼 봄날, 여인은 그 유지를 이어받아 영지의 새로운 주인이 됐다. 도중에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만, 모진 바람 끝에 낟알이 영글 듯 어엿한 영주로서 성장해나갔다. 허전한 봄과 찌는 여름과 소박한 가을을 지나 보다 풍성한 소산을 거둘 다음 한 해를 기약했다.
그러나 또다시 다가온 겨울, 광신에 물든 전쟁의 그림자가 간신히 새싹을 피워내던 땅에 암운을 드리웠으니…….
몰덴의 영주, 델피나가 삭연히 무덤가를 흘겼다.
“봄이 왔어요, 당신.”
하루에 거르지 않고 묘비 앞에 찍혔던 사람들의 발자국들은 다소 희미해졌다. 잿물로 물들인 검은 조기(弔旗)만이 처량하게 하늘거렸다.
“당신이 가장 아끼던 보물, 당신이 그토록 귀중히 여기던 몰덴에 다시 봄이 왔어요.”
메마른 꽃을 묘비 아래 내려놓았다. 흙더미 사이에서 작년에 심어놓은 구근들이 얼핏 푸릇한 기운을 비쳐 보였다. 하지만 이 꽃들이 만개할 순간은 어쩐지 요원하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봄이 온 것 같지가 않네요. 아이들이 뛰어놀질 않고, 어른들이 왁자하게 떠들질 않고, 꽃무리가 피어나질 않고, 당신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들리질 않아 봄이 온 것 같지가 않네요.”
그늘진 눈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차례나 가혹한 겨울을 지샌 땅은 윤택한 과거를 잊고 바싹 말라 있었다. 흐릿한 먹장구름을 지붕 삼은 거리, 벽 판자에 붙은 서리를 긁어먹던 아이들이 꾸벅 인사를 올리고는 사라졌다.
“다…… 제가 부족한 탓이겠죠. 많이 보고 싶어요, 당신.”
그렇게 쓸쓸한 넋두리를 마친 후.
델피나는 ‘악마 남작’이란 오명을 집어던지고, ‘몰덴 남작’으로서 명예로이 죽은 남편의 무덤에서 발길을 돌렸다.
내성에도 휑뎅그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드문드문 남은 초병이나 하인들을 제외하면 인기척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교대 인원이 줄어 업무가 과중된 탓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면면에 짙은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그나마 나은 처지였다. 한때 그들과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죄다 전쟁터로 끌려간 처지였으니까.
자작의 병사들에 포위되어 기근에 허덕일 때만 해도, 엘가 교단은 몰덴을 거들떠도 안 봤다. 하지만 ‘성전’을 개전하자마자 귀신같이 소집령을 내려 병사와 하인들을 반강제로 징집해 갔다. 덕분에 몰덴엔 핵심적인 인력이라 할 수 있는 청년들이 반수도 남지 않게 됐다.
당연히 보상 따윈 없었다. 그건 엘가의 영광을 드높인단 신성한 기치 아래 행해진 징집이었으니. 아니, 보상은커녕 헌납품이란 명목으로 되레 물자를 더 뜯어가기나 했다.
델피나는 무거운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퀭한 눈을 한 집사장이 다가왔다.
“영주님, 성의 곳간에 비축해둔 식량이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파종할 씨앗도 지난번에 누군가에게 도난당한 뒤로 못 되찾았고, 기실 씨앗이 있다 쳐도 밭을 일굴 인력이 턱없이 모자란 상황입니다…….”
“……지난번에 세바르 남작님께 보냈던 서신은 답장이 돌아왔나요?”
“예, 그쪽도 상황은 비슷한 모양입니다. 원체 먹을 게 없어 거느린 식솔들마저 굶주리다 속병이 들었다더군요.”
“…….”
“영주님, 진정 외람된 말씀이지만…… 역시 아들렌 영애님과 접촉하여 황실 쪽에 어떻게든 도움을 청해보는 게 어떨지…….”
델피나는 주먹을 꾹 그러쥐었다.
아들렌 자작가의 차녀, 아들렌 영애는 4황자와 눈이 맞아 황실 쪽에 인연이 있었다. 비록 작금은 교단의 위세에 짓눌렸다 하나, 황실이 괜히 황실은 아니니 확실히 그쪽에 도움을 청하면 유의미한 지원을 얻게 될지도 몰랐다.
허나 델피나는 지금까지 그럴 엄두도 못 냈다. 아들렌 영애의 친부, 아들렌 자작이 바로 몰덴을 침략하고 그녀의 남편을 죽게 한 원흉이었으니까. 게다가 아들렌 자작은 침략의 실패로 이곳에서 전사했으니, 영애와 그녀는 서로가 서로에게 불구대천의 원수라 할 만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도무지 더 이상은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영지민들이 깡그리 굶어 죽을 게 뻔했다. 그러면 결국 목숨을 바쳐 이 땅을 지키고자 했던 남편의 헌신마저 허사가 되어 버릴 테니…….
결국 새로운 몰덴의 영주는 결단을 내렸다.
“집사장님. 창고에 남은 패물 중 선물로 보낼 만한 물건을 추리고, 지금 바로 아들렌 영애 편으로 서신을…….”
한데 명을 내리려던 순간.
“여, 영주님! 허억, 허억…… 영주님!”
한 병사가 돌연 다급히 내달려왔다.
어지간히도 급하게 달려왔는지 이마가 땀범벅이었다. 의문 어린 눈길로 바라보자, 즉각 기척도 없이 집무실에 들어선 사유를 고했다.
“성 밖에, 성 밖에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영주님! 방금 전에 막, 찾아오셨는데…….”
“손님? 어떤 손님 말이죠? 미리 기별하셨던 분은 없었는데…….”
“그, 그게, 아무래도 직접 나가서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아니, 아예 제대로 정복을 차려입고 맞이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제넘은 간언에 집사장이 엄하게 핀잔을 줬다. 다만 델피나는 말없이 미간을 좁혔다. 저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만큼 귀한 손님이라니?
대체…… 어떤 손님이길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