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5)
25화. 돌아올 수 없는 숲 (5)
히드라.
악마는 세 개의 뿔이 자라야만 비로소 이름을 갖게 된다. 그러나 고작 두 개의 뿔밖에 자라지 않았음에도 불구, 용사 일행은 이 악마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주었다. 어지간한 고위 악마보다도 더한 고초를 겪게 했으니 이름을 얻을 자격이 있긴 했다.
이 악마는 확실히 이름의 원래 주인인 그 신화 속 괴물과 공통점이 많았다. 머리가 아홉 개나 된다는 것, 잘라도 목이 다시 재생한다는 것, 심지어 불에 지지면 재생할 수 없다는 것까지도.
하지만 원전에 잿가루도 남기지 않고 불태웠는데 그 괴물이 다시 살아났단 얘기 따윈 없었다.
카딤은 몸이 떨리지 않게 배에 꽉 힘을 주었다. 그러곤 히드라의 가운데 머리를 노려보았다.
“분명 전부 불태웠는데 어떻게 되살아난 거지.”
기다렸다는 듯 갈라진 혓바닥이 튀어나왔다. 히드라는 뻑적지근하게 목 근육을 비틀며 고개를 낮췄다.
– 쉬시익…… 그걸 내가 왜 대답해줘야 하지? 이전에는 내 목숨을 빼앗았고, 지금은 내 부하의 목숨을 빼앗은 녀석한테?
“…….”
– 그 문둥이는 생각보다 쓸 만한 녀석이었어. 인간들은 고작 뱀 따위에 물리는 것보다 팔다리가 아홉 개 달린 나병자에게 죽는 걸 훨씬 더 끔찍해하더군. 덕분에 한동안 쏠쏠하게 고통과 절망을 모을 수 있었지.
“…….”
– 뭐, 그래도 죽은 것에 큰 유감은 없어. 놈은 끝까지 자기 몫을 했으니까. 그렇게 볼품없는 몸뚱이면서 삶에 대한 집착은 또 어찌나 강한지, 완전히 의식이 끊어질 때까지 절망을 아주 충만하게 발산하더군. 쉬시이익…….
카딤의 낯빛에 낭패감이 드리워졌다. 히드라는 야만인을 오시하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 보아라, 황야의 아들아. 네 무자비함이 빚어낸 승격의 증표를.
눈동자 뒤로 솟은 온전한 두 개의 뿔.
그중 하나는 뿌리 쪽에 각륜(角輪)이 있고 색이 다른 쪽에 비해 훨씬 옅었다. 녀석이 고통과 절망을 촉매로 삼아 ‘상급 악마’로 진화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증거였다.
카딤은 까득, 이를 악물었다.
문둥병자를 죽인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가 이렇게 크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아마 그는 무리해서라도 다른 선택을 내렸을 것이었다.
상급 악마는 완성에 이른 존재다. 하급 악마나 중급 악마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힘과 능력을 지녔다. 1회차의 힘과 무기, 동료들도 없는 지금, 카딤이 상급 악마를 상대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악마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서늘한 목소리에 오만한 여유가 묻어났다.
–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인간은 길어봤자 백 년이면 죽지 않던가? 어떻게 300년이 흘렀는데도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지? 그 미개하고 흙먼지 냄새나는 신의 축복이라도 받은 게냐?
“…….”
– 뭐, 그때 봤던 녀석들 중 살아 있는 게 너 혼자는 아니긴 하다만…….
“……!”
정수리에 벼락이 내리꽂히는 느낌.
카딤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칼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간교한 악마의 혀놀림에 놀아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나 말고, 다른 녀석을 본 적 있는 거냐?”
늘름늘름 안팎을 오가는 혀.
악마는 원수의 약점을 움켜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음험한 혓바닥이 조롱을 품고 가식적으로 움직였다.
– 쉬시식…… 그것이 알고 싶은 게로구나? 아, 알려주기 어려운 것도 아니지. 그렇지만 맨입으로 가르쳐줄 순 없고…… 아까 보니 새로운 일행이 생겼던데…….
“…….”
– 보아하니 아주 쓸모없는 녀석이더군. 뱀의 시체만 보고도 벌벌 떠는 겁쟁이라니. 그 잘나신 동료들은 어쩌고 대체 왜 저런 쓰레기와 동행하고 있는 건지 의아할 정도였어. 아, 스스로가 아주 강한 인간이라고 우월감이라도 느끼고 싶었던 건가?
“…….”
– 하지만 뭐…… 그 녀석에게도 딱 하나, 장점이 있긴 있더군. 삶에 대한 집착만큼은 아주 강한 것 같아.
뱀의 입매가 선뜩한 곡선을 그리며 찢어졌다
– 그놈을 여기로 데려와라. 그리고 두 눈을 뽑고 팔다리를 전부 뜯어버리거라. 내장을 갈기갈기 찢거나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대관절 그놈이 아주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기만 한다면…… 너에게 옛 동료의 행방을 가르쳐 주도록 하겠다.
카딤은 입술이 터지도록 세게 깨물었다.
악마의 제안은 언제나 그렇듯, 놓칠 수 없는 미끼의 이면에 날카로운 바늘을 걸고 있었다.
“…….”
객관적으론 행상인의 목숨을 바치는 게 옳았다.
악마들은 제안과 계약에 있어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행상인을 죽이면 동료의 행방을 말해 준다는 건 분명 진실일 터였다.
카딤은 행상인에게 정이 들지 않았다. 꼴랑 한 달 같이 지냈다고 정들 만큼 그의 정신이 무르진 않았다. 행상인에게 동정심이 들지도 않았다. 고향에 처자식이 있다고 살려 줄 거였다면 카딤은 지금까지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터였다.
행상인이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체불가능한 재주가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언가 경의를 표할만한 일면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에겐 어느 유약한 사내의 목숨보다 함께 대악마를 처단한 동료의 행방을 알아내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기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버려질 거란 행상인의 분석은 정확했던 것이다.
“…….”
하지만 행상인이 그의 손에 죽는 일은 절대 없을 터였다.
객관성은, 나약한 자들의 핑계에 불과할지어니.
이는 좁쌀만치도 승낙할 여지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런 건 결코 아탈라의 대전사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니까.
카딤에게 악마는 제안을 받아들여 거래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 악마는 그저 살갗을 갈기갈기 찢고, 살점을 뜯어버리고, 뼈를 으깨고, 내장을 후벼파고, 대가리를 터뜨리고, 동맥에 단검을 찔러넣어 그 피를 받아 마셔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잠깐이나마 흔들렸던 스스로의 꼬락서니가 우스웠다. 무얼 망설이는 걸까? 늘상 택해 왔던 해결책이 눈앞에 있는데 이제 와서 지레 겁먹고 적과 협상한다고?
비겁자가 되어 살아남느니 끝까지 맞서 싸우다 산화하는 게 나았다. 카딤은 세로로 갈라진 동공을 바라보며 비뚜름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딴 헛소리 말고 내 제안을 들어보는 건 어떠냐.”
– …….
“지난번보다 깔끔하게 죽여주는 대신, 내 동료의 행방을 말해주는 것.”
치르르, 비늘을 따라 일어나는 성난 파도.
열여덟 개의 눈동자에 노기가 깃들었다. 아홉 개의 머리가 서슴없이 다가왔다.
– 백치처럼 아둔하게 죽는 길을 택했으니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겠군.
섬뜩한 살기를 내세우며 가운데 머리가 쇄도했다.
– 쉬익!
――――― 쩌 – 억!!
습기를 머금은 바닥이 무참히 터져나갔다. 단번에 깊은 고랑을 만들어 낸 머리가 비틀리며 또다시 카딤을 노리고 쏘아졌다.
– 쉬익!
낮게 몸을 숙임과 동시에 칼을 치켜세우는 카딤. 검신이 악마의 목 언저리에 닿았다. 이번에도 돌진이 빗나간 탓에 칼날은 감람빛 표면을 길게 쭉 긁고 지나갔다.
트드드득 – !
그러나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모기’의 서슬은 철갑처럼 단단한 비늘을 전혀 꿰뚫지 못했다.
히드라는 같잖다는 시선을 보내며 혀를 날름거렸다.
– 형편없는 검이구나. 여염집 부엌에서 쓰던 걸 가져온 게냐?
“…….”
또다시 득달같이 달려드는 머리.
– 쉬익!
– 쉬익!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곁가에 있던 네 번째 머리와 여섯 번째 머리가 독니를 드러내고 격하게 몰려들었다.
―――――― 쩌 – 억!
거의 몸을 던지듯이 굴러 회피. 여섯 번째 머리는 바닥을 내리찍었다. 네 번째 머리는 그렇게 내리꽂히는 대신 공중에서 유연하게 방향을 틀었다.
카딤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눈알을 노리고 칼을 내뻗었다. 그러나 네 번째 머리는 유인책에 불과했다. 히드라는 그걸 뻗는 척하며 뒤에서 세 번째 머리를 철퇴처럼 휘둘러 후방을 강타했다.
――――――― 퍼 – 억!
“크윽!”
척추가 부러질 만한 충격이 엄습했다. 카딤은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르고 나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가운데 머리가 고개를 낮추고 의아한 눈빛을 했다.
– 영문을 모르겠군. 고작 이 정도 기습도 피하지 못한다고? 300년 동안 노쇠하진 않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약해진 게냐?
“…….”
– 쉬시익…… 설마 힘을 아끼고 있는 건가?
힘을 아끼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초인의 경지에 이른 1회차에 비하면 이 육신은 그저 조금 단련된 필멸자 정도에 불과해서 그런 것일 뿐.
그렇지만 카딤은 무언가 ‘수단’을 감추고 있긴 했다.
그건 아직 사용할 수 없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결정적인 기회가 왔을 때 사용해야만 했다. 카딤은 묵묵히 다시 ‘모기’만을 치켜들었다.
히드라는 날카롭게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 우스운 짓거리는 그만두어라.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곧 네놈의 시체가 늪바닥에 처박히게 될 터이니.
– 쉬익!
– 쉬시익!
그리고 이어지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파상 공세.
아홉 개의 머리는 제각기 안개 같은 마기에 몸을 감추고 있다가 벼락처럼 튀어나와 카딤을 공격했다. 비단 기습만을 일삼는 것도 아니었다. 울음소리만 거듭 내어 위협하거나 때때로 보란 듯이 육신을 드러내고 공격하여 혼란을 가중했다.
– 쉬익, 쉬익!
방향을 가리지 않고 덮쳐오는 공격. 땅 위에만 있어선 공격을 다 피할 수가 없었다. 카딤은 높이 도약하여 머리를 짓밟거나 몸통 위로 올라탔다 뛰어내리는 식으로 회피를 일삼았다.
그러나 피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완벽한 회피란 결국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콰직!
종이 한 장 차이로 내려찍는 독니를 피했다. 하지만 카딤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돌진에 몇 번이나 강타당해 빗장뼈와 갈비뼈가 부러졌다. 지독한 마기 때문에 쉽지 않았던 호흡이 한층 더 힘들어졌다.
“후우, 후우…….”
그래도 이만하면 시간은 적당히 끌었다.
흘끗 뒤쪽을 내다보자 수풀 사이로 다가오는 불빛이 보였다. 카딤은 다리가 부서져라 그쪽으로 내달렸다. 왜인지 히드라는 뒤쫓는 일 없이 우두커니 카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카딤이 눈앞에 이르자, 던컨은 땀을 뻘뻘 흘리며 횃대를 내밀었다.
“나으리, 나으리, 죄, 죄송합니다! 습기가 많아 불이 잘 안 붙어서…… 여기 횃불…….”
“달아나라, 행상인. 악마에게 공격당하기 전에.”
카딤은 횃대를 낚아채며 던컨을 밀쳤다. 그러곤 칼을 집어넣고 허리춤에 매달린 투척도끼를 꺼내 들었다.
한 손에는 횃불, 한 손에는 도끼. 자욱한 마기를 돌풍처럼 가르고 내달리며 초연하게 각오를 다졌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우웅웅 –
착각일까. 손끝에 징징 울리는 진동이 와닿았다. 피를 갈구하는 도끼의 울음. 굳이 말하자면 그런 느낌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숨 가쁜 질주 덕에 가속력은 충분히 실었다. 부연 장막 너머로 흐릿한 잔상이 보였다. 목표는 히드라의 핵심 중추인 가운데 머리. 비죽 솟은 두 개의 뿔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폭발적인 힘을 실어 도끼를 내던졌다.
패래래래랙 – !!
만개하는 금속의 날개, 도끼는 또 한 번 목표물에 정확히 명중했다.
―――――― 쩌 – 걱!!
도끼날은 감람빛 비늘을 가볍게 분쇄하고 미간을 터뜨렸다.
충격에 밀려 양쪽 눈알이 뽑힐 듯 비어져 나왔다. 독낭과 두개골이 찢겨나가며 피와 독액, 뇌수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예상치 못한 피해에 히드라는 격한 울음을 내며 온몸을 비틀었다.
– 쉬시이이이익!!!
그러나 저런 중상도 금방 회복할 터였다. 재생을 막기 위해선 불로 태울 필요가 있었다. 카딤은 허리춤에 손을 뻗어 동백기름이 담긴 병을 손에 쥐었다.
난동을 부리는 머리를 향해 힘껏 기름병을 투척.
그리고 머리가 땅 쪽을 향하길 기다렸다가 비호같이 달려들어 횃불을 집어던졌다.
화르르르르륵 – !
– 쉬시이이이이이익!!
불길이 옮겨붙었다. 고통의 몸부림은 한층 더 격해졌다. 살갗이 지글지글 타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음습한 마기와 매캐한 연기가 뒤섞여 상공은 기이한 농도 변화를 그렸다.
“후우…….”
카딤은 깊이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핵심 중추인 머리가 불탔으니 다른 머리들은 본능에 따라서만 움직일 터였다. 그것들은 한숨 돌린 다음 차근차근 잘라내고 불길로 지져도 상관없었다.
야만전사는 신화 속 영웅담과 같이 또 한 번 히드라를 불태워 처치할 수 있었……
– ……같은 수작에 또 당할 줄 알았더냐, 어리석은 황야의 아들아?
콰 – 직!
돌연 독니가 팔뚝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팔뚝을 파고들었다는 표현은 사실 그다지 적절한 표현이 아니었다. 이빨이 원체 거대해서 왼팔이 단번에 끊어지고 말았으니까. 그의 전완근과 이두근은 이제 달랑 살가죽 한 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워낙 갑작스레 일어난 일인지라 카딤은 제대로 고통을 느끼지도 못했다. 두 번째 머리는 여전히 팔뚝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황망한 눈길로 눈앞을 바라보았다.
재생을 마친 가운데 머리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 300년 전, 불타는 네놈의 도끼에 목을 잃은 후 나는 결심했지. 다음 생이란 것이 있다면 반드시 불길에 휩싸여도 재생하는 육신을 얻으리라고.
“…….”
– 새 뿔을 얻고 진화하여 나는 비로소 그 염원을 성취했다. 이제 내 재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설령 지옥의 업화가 이 숲을 뒤덮는다 해도, 나는 움트는 새살로 허물을 벗고 나아가 온 세상을 도탄에 빠뜨리리라.
비장의 수단은 가로막혔다. 적은 조그마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자신은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길 없는 외통수.
카딤은 작게 한숨을 토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이야기가 게임 속 시나리오나 신화 속 영웅담 같은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오만 역경을 마주하지만 언제나 찬란한 기지로 극복하는 이야기. 원하는 것들이 기막힌 기연으로 알아서 찾아오는 이야기. 고난을 딛고 일어서 원하는 모든 걸 성취하는 이야기. 결국은 예정된 해피 엔딩으로 수렴하는 이야기.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런 식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세계에 예정된 해피 엔딩 따윈 없었다. 한 번쯤 실패해도 푹신하게 받아줄 만한 안전장치 따위도 없었다. 그는 사시사철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 있는 외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야만 했다. 심지어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오게 되어 이젠 이 길에 끝이란 게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자신 또한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겐 찬란한 기지도, 알아서 찾아오는 기연도, 영웅의 고결함도 없었다. 모든 인연들을 직접 찾아나서야 했고, 모든 일을 스스로 판단해야 했고, 모든 적을 후환을 남기지 않고 섬멸해야 했다. 그 결과, 끝내 발자국마다 피 웅덩이가 고이는 수라의 혈귀가 되고 말았다.
인간성이라곤 티끌만치밖에 남지 않은 삶.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고통과 절망밖에 남지 않는 서사.
지독하리만큼 잔혹하고 끔찍하고 가열차기만 한 이야기.
“…….”
그러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결코 패배에 굴복하고 스러지는, 나약한 인간의 실패담도 아닐지어니.
– 쉬익?!
두 번째 머리가 새된 울음을 흘리며 급히 물러났다. 입천장을 따라 핏줄기가 줄줄 흘러내렸다. 가운데 머리는 동공을 가늘게 찢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 ……어떻게?
카딤은 천천히 독니에 관통당한 왼팔을 들어 올렸다.
구멍에 뼈와 살점이 차오르고 부상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느릿하게 손에 쥔 검을 치켜드는 카딤.
걸신스레 피를 집어삼킨 칼날이 희미하게 불그스름한 빛을 발했다. 이젠 전투 중에도 얼마든지 악마의 피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한 번만 찌를 수 있다면 ‘모기’가 알아서 피를 삼켜 주인에게 바칠 테니까.
재생하는 고유 성질을 가진 악마답게 재생 효과 버프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허나 그것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었다.
근육이 거침없이 팽창하고 뼈가 강철보다 굳게 경화되었다. 감각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다져지고 강렬한 혈기가 척수에서부터 말단 신경까지 뻗어나갔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향한 갈망과 적을 도륙 내고자 하는 살의가 충만하게 차올랐다.
‘상급 악마’의 피답게 여러 가지 강력한 버프들이 중첩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카딤은 흉살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혀는 더러워도 피는 쓸 만하군.”
– 쉬시익…….
“하지만 아직 한참 모자라. 좀 더 목을 축여야겠어.”
뱀의 싯누런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헤아릴 수 없이 오랜 과거의 주마등이 빛살처럼 세월을 가로질러 뇌리에 꽂혀왔다.
이글거리는 도끼를 치켜들고, 지옥불보다 사납게 살육의 열망을 불태우며, 아홉 개의 목을 모조리 참수하고 자신의 피를 받아마시던 어느 광전사의 모습.
히드라는 마른 혀를 달싹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핏빛 안광을 발하는 광전사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300년 전, 마경에서 마주했던 그 모습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