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53)
253화. 단출한 역습 (7)
“그래서…… 네놈들 생각엔 어느 쪽으로 가는 게 나아보이나?”
카딤이 일행들에게 물어보았다. 북적이지만 안전한 고르덴 백작령, 한적하지만 위험한 섬돌바위 평야. 둘 중 어느 쪽으로 갈지.
돌아온 대답은 각기 달랐다.
“고르덴 백…… 작령…….”
“섬돌바위 평야 쪽으로 가는 게 좋아 보입니다, 대전사님.”
전자는 던컨의 것이요, 후자는 예브릴의 대답이었다. 던컨이 뜨악한 눈으로 무녀를 바라봤다. 마치 그렇게 붕대를 감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냐는 듯이.
예브릴은 차분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고르덴 백작령은 북쪽으로 직행하는 길, 말씀하셨다시피 거리도 가깝고 길도 잘 닦였으나 보는 눈이 많지요. 서쪽보다 월등히 땅의 울림이 빽빽한 걸 봐선 확실합니다. 게다가…….”
막힘없이 말하던 무녀는 마지막 한 가지 근거로 쐐기를 박았다. 바로 섬돌바위 평야 쪽에 옛 무녀들이 거하는 ‘유적’이 꽤나 많다는 것. 그 말이 사실이라면, 데카그램의 성흔이나 고위 악마의 피뿐 아니라 ‘각인의 바늘’을 모아 문신을 대거 강화하는 것까지 기대해 볼 만했다.
탄탄한 상대편의 주장에 맞서는 던컨의 근거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고, 고, 고위 악마나 데카그램과 마주치면, 놈들과 맞서느라 시간을 많이 낭비하지 않겠습니까? 그 유, 유적? 예, 유적도 한번 들어가면 시간을 잔뜩 잡아먹을 테고요! 저희는 한시가 바쁜 입장인데,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다간…….”
“길어 봐야 한두 시진이면 끝날 거다. 데카그램을 족치는 것이든, 유적을 통과하는 것이든. 그 정도면 시간을 크게 낭비한다 보긴 힘들 텐데.”
“그, 그, 그래도 어쨌든 낭비하는 건 낭비하는 것이니 말입디다! 게다가 만약, 만약 도중에 누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즉사에 이를 만한 중상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제가 신통력을 빌어 간단한 재생 주술도 쓸 수도 있고, 상처를 회복시키는 ‘영약’도 조금 만들어온지라…….”
한 번은 전사의 반박, 다른 한 번은 무녀의 반박, 다른 일행들이 번갈아 가며 더듬대는 행상인의 주장을 타파했다. ‘최고의 길잡이’라는 호칭이 무색하게 던컨은 맥을 추질 못하고 휘둘렸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위험천만한 길로 끌려갈 게 뻔했다. 쩔쩔매며 허둥대던 던컨은, 논리적으로 패배한 논객들이 으레 그러하듯 감성적으로 호소하는 필살기를 동원했다.
“저, 저, 저 아빠가 될지도 모릅니다요, 나으리!”
“…….”
“…….”
정적이 내려앉았다. 예브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카딤은 동네 미친놈 구경하는 눈빛을 보냈다.
“너는 이미 아버지다. 아홉 살배기 맹랑한 네 아들내미의 존재를 잊은 건가.”
“어…… 아, 아, 그렇긴 한데…… 그, 그렇다면 새 아빠가 될지도 모릅니다요, 나으리!”
“……둘째가 생겼단 말인가?”
“예, 예에……. 그, 아직 확실한 일은 아니긴 한데…….”
듣자 하니 전말은 이러했다.
던컨의 아내, 율리아는 ‘단출한 역습’ 작전을 시행하기 바로 전날에야 사정을 전해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극비였으나, 그녀는 남편이 또 지극히 위험한 사지로 뛰어든다는 걸 곧장 알아차렸다.
처음엔 담담히 받아들이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이별주라도 나누자며 술잔을 가져오고, 갑자기 분기탱천하여 고래고래 소리 지르더니, 만취하여 서럽게 훌쩍이다가, 신세 한탄을 하다가, 던센이 고아원 아이들과 놀더니 동생을 갖고 싶어 한다고 말하다가, 뜬금없이 냅다 입맞춤을…….
“예, 뭐……. 어…… 그래서 그날 밤에…… 그렇게 됐습니다요.”
““…….””
원치 않게 너무 개인적인 속사정을 듣게 된 일행들의 감상은 간단했다.
“……여장부로군.”
“여장부시군요…….”
던컨이 뒤늦게 멋쩍은 기분이 되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물론 후사는 고작 하룻밤 만의 거사로는 알 수 없는 일. 진정 던센에게 동생이 생겼는지…… 확인하기 위해선, 작전을 다 마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던컨에게 희소식이 있다면, 지금은 일행 중 천기를 엿보는 무녀가 있단 사실이었다.
“봄날을 부르는 바람이 느껴지는군요.”
“……예?”
“새 생명들이 움트는 계절입니다. 뿌린 씨앗은 미래의 결실이 되고, 부푼 기대는 기쁨이 되어 돌아오겠지요. 돌아가는 길에는 세 사람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직접적이진 않은 암시였으나,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엔 충분했다. 서서히 얼굴을 펴다 끝내 함지박만한 미소를 짓는 던컨. 다만 카딤은 과도하리만치 뛰어난 무녀의 능력에 일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모쪼록 던컨이 한사코 위험한 길을 피하고자 했던 이유가 드러났다. 기껏 둘째를 보게 생겼는데, 또다시 아내를 청상과부로 만들어선 안 되니까.
그러나 카딤이 신랄하게 발상의 맹점을 찔렀다.
“우리가 위험한 길로 가야만 네 가족들이 안전할 거다.”
“예? 그, 그게 무슨 말씀…….”
“우리의 존재가 발각당하면, 엘가쟁이들은 마음 놓고 국경을 넘어 동맹을 침략하겠지. 그러면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델루타나가 최우선 표적이 될 테고. 거기 머무는 네 가족들을 안전히 지키려거든,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반드시 인적이 드문 길로 가야만 한다.”
“…….”
제 생각이 얕았음을 깨닫곤, 돌덩이처럼 굳어 있길 잠깐.
던컨은 이내 섬돌바위 평야로 가는 것에 동의했다. 마지못해 수긍한 태도가 아니었다. 눈동자 속에서 결연한 각오가 빛났다. 제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가족들을 지키겠단 각오가.
일행은 망설임없이 해가 기우는 서쪽으로 향했다. 가던 중 던컨이 넌지시 물었다.
“근데, 나으리……? 이 대주교를 처단하는 작전은…… 나으리가 레밀리온 맹주님께 제안한 것이 맞습니까?”
“그렇다만.”
“혹시 이런 작전을 생각하게 된 계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뭐, 전쟁이야 빨리 끝나면 빨리 끝날수록 좋은 것입니다만…… 그래도 뭔가 되게 갑작스레 작전을 추진하신 것 같아서…….”
“…….”
파르르, 홍채가 붉게 물들어 흔들렸다. 카딤은 급히 한쪽 눈을 감았다. 수통을 움켜쥐고 충동을 삭이다가, 슬쩍 뒤따라오는 여인의 자태를 흘겼다.
“……별다른 계기는 없다. 늦기 전에 이 일을 끝마쳐야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아. 아아, 그건 그렇지요…….”
“…….”
던컨은 별 이상을 눈치 못 채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녀가 눈을 가린 붕대를 매만지며 조용히 걸음을 재촉했다.
*
처음 예브릴이 합류했을 때만 해도, 던컨은 그녀를 내심 껄끄럽게 여겼다.
3백 년 전 카딤의 동료였던 ‘맹안의 무녀’를 계승한 후예란 말을 듣긴 했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온갖 고락 끝에 겨우겨우 가치를 인정받고 일행이 된 던컨으로선, 선조에게 물려받은 이름 덕에 편히 합류한 그녀를 마냥 고운 눈으로 보긴 힘들었다.
사실 카딤에게 암살조의 일원으로 지목받았을 때도, 던컨은 한편으론 가슴이 철렁했으나, 다른 한편으론 일말의 자부심을 느꼈다. 그래, 역시 나으리만 한 분을 도울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하고. 한데 저 뒤늦게 지목당한 무녀의 능력은 자신보다 몇 곱절은 뛰어난 수준이었다.
적을 파악하는 척후병 역할은 물론, 천기를 엿보는 주술사, 상처를 회복시키는 치유사, 심지어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길잡이 역할까지……. 두 눈이 멀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다재다능함이었다. 가진 재주가 기척을 숨기는 것뿐인 던컨으로선 위기감을 안 느낄 수가 없는 상황.
하지만 그 껄끄러운 감정은 단박에 반전되었다. 그녀가 던컨의 새로운 2세를 점지해준 덕에.
“저, 무녀님……? 오늘도 제 아내하고 뱃속의 아이는 잘 지내고 있습디까?”
“혹시…… 아이가 아들내미인지 딸내미인지도 알 수 있습디까? 둘 다 좋습니다만, 기왕이면 귀여운 딸내미가 더 좋을 것 같은데, 흐흐흐…….”
“저희 애가 크면 뭘 시키는 게 좋을깝쇼? 던센 요놈은 뭔가 몸 쓰는 일을 하고 싶어 하니까, 그 동생은 돈 굴리는 법을 가르쳐서 온 대륙을 주름잡는 대상인으로…….”
지난번의 대화 이후, 던컨은 기회가 날 때마다 무녀에게 들러붙어 치근거렸다. 늘상 알쏭달쏭한 답변만 돌아와도 아랑곳 않고 질문 폭탄을 쏟아부었다. 결국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한 예브릴이 그를 조곤조곤 타일렀다.
“마음은 이해합니다, 던컨 님. 하지만 계속 이렇게 천기를 엿보느라 신통력을 허투루 썼다간, 정말로 주술이 필요할 때 난항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식의 앞날을 확인하는 건 미래의 기쁨으로 간직해두시지요.”
반박을 불허하는 정론. 던컨은 바로 깨갱하여 무녀 곁에서 떨어졌다. 대신 이번엔 카딤 쪽에 들러붙어 치근덕댔다.
“그, 그, 나으리? 혹시 제 둘째 놈의 이름을 지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으리처럼 위대한 전사께서 이름을 주신다면, 저에게나 그 아이에게나 더할 나위 없이 큰 영광일 것 같습니다!”
카딤은 잠시 고민하다 몇 가지 예시를 내뱉었다.
“던컨투.”
“던센투.”
“던두르마.”
“던전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군.”
“…….”
행상인의 낯짝에 황망한 표정이 떠올랐다.
잠시 깜빡하고 있었다. 저자가 못 하는 게 없는 위대한 전사지만, 남의 칼에다가 ‘면도칼’이란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작명 감각만큼은 절망적이라는 걸…….
한데 이어지는 말에, 이번엔 카딤 쪽에서 황당하단 표정이 떠올랐다.
“아, 아니, 근데 왜 예시가 죄다 던으로 시작하는 겁니까? 저, 저희 가문의 성씨는 ‘휠레드’지, ‘던’이 아닙니다요, 나으리!”
“…….”
그럼 니 아들 이름은 왜 던센인데.
……라고 물으려다가 카딤은 말을 도로 삼켰다. 어쩐지 진지하게 따지면 패배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기에. 결국 둘째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지는 나중에 결정하기로 하고 흐지부지 넘어갔다.
이런저런 소란이 있는 와중에도 카딤 일행은 착실히 나아갔다.
던컨이 마침내 카딤의 행군 속도를 따라잡은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건, 무슨 술수를 쓴 건지 예브릴도 두 사람에게 뒤처지지 않고 속도를 맞췄단 것. 덕분에 일행은 불과 하룻밤 만에 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를 주파하여 섬돌바위 평야에 이르렀다.
‘섬돌바위 평야’는 딱 이름대로 커다란 돌과 바위가 섬처럼 드문드문 널려있는 지대였다. 위에서 평면도로 바라본다면야 확실히 ‘평야’처럼 보이긴 하겠다만, 땅에서 발을 딛고 바라보는 입장에선 무슨 돌산 중턱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게 척박하거나, 흉해 보인단 뜻은 아니었다. 규칙과 불규칙을 오가며 나열된 돌덩이들은 나름 예술적인 정취를 발했다. 또한 그 틈새로 솜털처럼 치밀어오른 새싹들이 삭막한 공기를 한결 덜어줘, 평야는 어떤 면에선 솜씨 좋은 조각가의 정원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카딤은 간만에 풍경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그땐 이름도 없는 땅이어서 몰랐다만, 이곳, 1회차에 와본 적 있는 지역이었다. 멜리사와 합류하고 대륙 동부를 벗어났을 때, 시릴이 있는 마을을 찾아가다 길을 잃었을 무렵. 그 돌이 그 돌인 것처럼 보여 한참토록 같은 자릴 맴돌다가, 결국은 지쳐서 웬 돌덩이 위에 앉았더니…….
“……돌덩이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게 조심해야겠군요. 그중에 고대의 골렘들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니.”
“……!”
“옉?”
카딤과 던컨이 동시에 눈먼 무녀를 주목했다. 무심결에 꺼낸 말인지 예브릴 본인도 얼떨떨한 낌새였다.
“아뇨, 그저…… 노파심에 해본 말입니다. 이런 평야에 이유없이 이렇게 많은 돌이 있을 것 같진 않아서요. 사실 고대의 골렘들의 동력원은 고대 마나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욘 없지요. 그보단 확실히, 대전사님의 말씀대로 이 돌 사이에 숨어 있을 악마들이나 성전군을 주의하는 편이…….”
“…….”
카딤은 눈매를 지그시 좁혔다. 한눈에 골렘들이 섞여 있음을 간파한 무녀의 눈썰미도 미심쩍지만, 그보다 골렘들의 동력원이 고대 마나란 말은 즉…….
한데 돌연, 요란한 빛줄기가 뻗어나와 생각을 끊었다.
우웅, 우웅, 우우우웅 – !!
빛줄기를 발한 근원은 다름 아닌 카딤의 허리춤, 허리띠에 묶어둔 ‘유적을 좇는 석패’였다. 가운데 박힌 보석에서 비롯된 광선이 세 갈래, 아니, 선명한 세 갈래와 희미한 두 갈래로 분광되어 빛났다.
처음 보는 현상에 의아하여 가만히 있자니, 예브릴이 설명을 베풀었다.
“……예. 또한 이곳은 대륙의 중앙인 데다, 암석이 많이 널려있는 지대다 보니, 유적으로 통하는 석판을 은밀히 배치해 놓기도 용이한 지역이었지요. 하여 말씀드렸다시피, 선대 ‘맹안의 무녀’께서는 이 부근에 집중적으로 유적과 옛 무녀들, 그리고 ‘각인의 바늘’을 안배해 놓으셨습니다.”
“…….”
카딤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예상이 거하게 빗나갔다. 많아 봐야 유적이 두세 개쯤 있을 줄 알았건만…….. 지금까지 찾아낸 유적이 딱 다섯 개인데, 단숨에 그와 똑같은 수를 찾아내다니…….. 작은 허탈감, 그리고 크나큰 기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놓쳐선 안 될 기회였다.
당장 문신으로 새길 피는 없다만, 이젠 ‘각인의 바늘’에 새로운 활용법이 있단 걸 알아냈다. 기존에 새긴 문신들을 강화하는 것만 해도 그 활용 가치는 충분했다. 그뿐 아니라, 더 늦기 전에 3백 년을 기다려온 무녀들에게 안식을 줄 필요도 있었고…….
곧바로 떠날 것처럼 무기를 챙기는 카딤. 예브릴도 떠나는 전사를 보조할 채비를 했다. 그 모습을 본 던컨이 슬쩍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나, 나으리? 무녀님? 설마, 그 유적 다섯 군데에 다 다녀오실 겁니까요?”
“그래,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 그러지 말고, 한두 군데 정도만 다녀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 절대 제가 혼자 있다가 골렘을 만날까봐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
“걱정 마라, 금방 다녀올 테니까.”
카딤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보였다. 던컨은 설마 이틀이나 여기 혼자 있어야 되나 싶어, 침을 꿀꺽 삼키며 바윗돌들을 바라봤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아탈라의 대전사는 예상을 뛰어넘는 약속을 했다.
“두 시진, 해가 중천에 닿기 전에 다 정리하고 오지.”
“……!”
말도 안 되게 짧은 시간에 던컨이 기겁하는 찰나.
――――― 콰 – 앙!!
한쪽 어깨엔 아탈라의 심판, 한쪽 어깨엔 맹안의 무녀. 양쪽에 짐짝을 들쳐멘 카딤이 단숨에 거대한 바위 너머로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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