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31)
31화. 쌍둥이 협곡 (4)
렘타나의 참사관, 엔리코 튜리스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두 눈을 지워버릴 기세로 세차게 비벼봐도 눈앞의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맙소사, 레밀리온이시여.’
참사관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마흔 평생 온갖 볼 꼴 못 볼 꼴을 다 보면서 살았다. 그는 이제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섣부른 오만이었다. 지금 그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쌍둥이 협곡을 막아선 트롤은 현재 엔리코가 당면한 최악의 골칫거리였다. 동쪽과 서쪽 길이 가로막힌 지금, 쌍둥이 협곡은 렘타나와 관할령의 남부를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원활히 조세를 걷고 구역을 관리하기 위해선 조속히 트롤을 토벌할 필요가 있었다.
본래 토벌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어야만 했다. 트롤은 물론 인간이 상대하기 버거운 괴물이지만 이 관할령엔 그보다 훨씬 막강한 병력이 있었으니.
베스타나 참사회에서 파견한 보좌관, 유미르 데밀.
그자는 그 해안도시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마탑 출신의 마법사였다. 그것도 풋내기가 아닌 컨저러(Conjurer), 마탑에서 3번째로 높은 등위의 마법사. 제대로 솜씨를 발휘한다면 트롤 하나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는 참사관을 돕지 않고 잠적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다른 참사회 소속인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으니까. 오히려 그 자식은 여기가 엉망이 되길 바라고 있겠지. 그러면 차기 참사관은 베스타나 참사회에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으니…….’
그는 돌아올 일 없는 마법사가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문제 해결에 손 놓고 있지 않았다. 가문과 소속 참사회에 몇 번이고 전령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전령은 매번 떠나자마자 실종되거나 돌아오지 않았다. 시체도 발견되지 않아 무슨 변을 당한 건지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결국 엔리코는 자체적으로 트롤을 토벌해야만 할 처지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렘타나에 또 다른 마법사는 없었다. 휘하의 참사군은 괴물을 사냥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엔리코는 상당한 현상금을 걸고 트롤 토벌에 응할 용병들을 모집했다. 벽에 붙인 공고문이 너덜너덜해질 즈음에야 겨우 의뢰를 맡겠단 용병단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보수가 5만 루덴이라 하셨지요? 흠, 흐음, 맡겨만 주시죠, 참사관님! 저희 용병단은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모두 숙련된 괴물 사냥의 귀재들입니다!’
어쩐지 마뜩잖았지만 도리가 없었다. 렘타나는 규모가 작고 인근에 괴물이 거의 없어 용병단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달 만에 나타난 수주처를 놓칠 순 없었다.
그렇게 엔리코는 자신만만한 용병단과 참사군 20명을 추려 트롤 사냥에 나서게 되었고……
뻐 – 억, 뻐 – 억!
“커헉!”
“아아아악, 살려줘!! 주, 죽기 싫…….”
“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용병단이 궤멸하는 꼴을 보게 되었다.
단언과 달리 용병단은 괴물을 사냥해본 경험이 전무했다. 단지 거액의 보수에 눈이 돌아가 무턱대고 의뢰를 받아든 것일 뿐.
석궁과 투창을 이용하면 안전하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첫 판단부터가 오판이었다. 트롤은 가죽에 꽂힌 화살과 창을 이쑤시개처럼 가뿐히 뽑아냈다. 기껏 입힌 상처도 갯벌에 구덩이를 판 것마냥 부지불식간에 아물었다.
– 쿠워어어어어!!
“어, 어어?”
도리어 섣부른 공격은 트롤의 성질만 돋구었다. 진열을 유지하고 방어 태세를 갖췄으면 그나마 피해가 적었겠지만 용병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광분한 트롤 앞에서 경험 없는 사람이 평정을 지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으허어어…….”
“끄아아악, 도, 도망쳐!!”
붕괴는 순식간이었다. 전열의 석궁수들이 달아나는 걸 시작으로 용병단은 개미떼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그나마 몇몇 중무장병은 자리를 지켰지만 트롤의 공격은 엉성한 방어 태세로 막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푹, 뻐 – 억!
“어헉!”
생채기 하나에 목숨 하나라는 어처구니없는 교환비. 기껏 입힌 상처도 얼마 가지 않아 재생되었다. 용감한 자들은 죽고 덜 용감한 자들은 달아나, 용병들은 눈 깜짝할 사이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다.
용병단이 전멸했으니 다음 먹잇감은 참사군이었다. 트롤은 무서운 기세로 병사들의 뒤를 좇았다. 몽둥이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팔다리가 비틀리고 내장이 터진 병사들이 망가진 인형처럼 진창을 굴러다녔다.
– 쿠워어어어어어!
“끄아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가아아!!“
“어헉, 아파, 너무 아파…….”
엔리코는 침음을 흘렸다. 애초에 참사군은 호위 및 트롤의 잔해 수습을 위해 데려온 것. 트롤에게 맞설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곧바로 후퇴를 지시하려 하는데……
그 순간, 느닷없이 협곡 사이에서 야만인이 나타났다.
쩌걱, 쩌걱, 끄저적!
그자는 순식간에 홀로 트롤을 제압하고 숨통을 끊었다.
– 꺼어어…….
무심한 도끼질 끝에 모가지가 떨어졌다. 트롤의 주먹만 한 매부리코가 진흙탕에 처박혔다. 야만인은 덤덤하게 눈가에 튄 핏물을 닦았다.
“…….”
절대 쓰러뜨릴 수 없을 것 같았던 무적의 괴물이 소돼지처럼 가뿐히 도축되는 광경. 엔리코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참사관도 당황스러웠지만 사실 그보다 더 당황한 건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저 괴물이 얼마나 강력한지 몸소 체감했다. 철갑을 둘둘 두른 용병들조차 감당을 못 하던 괴물을 혼자서 잡았다고? 그것도 칼과 도끼 한 자루만 든 맨몸으로? 너무 허황되서 농담으로 써먹기에도 부적절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직 당황하긴 일렀다. 진정 당혹스러운 광경은 그 이후에 나타났다.
쯔 – 걱.
야만인이 트롤의 배를 가르더니 그 속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
“……우읍.”
울컥울컥, 치솟는 핏물이 발치에 웅덩이를 만들고 혈향이 퍼졌다. 쥐어뜯긴 내장이 진흙탕 위에서 펄떡거렸다. 지옥의 연회를 한 폭 잘라내 현세에 재현한 듯한 광경. 그들은 자신의 등 뒤로 흐르는 게 진땀인지 빗물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트롤의 몸뚱이를 온통 걸레짝으로 만든 후에야 끔찍한 카니발이 끝났다. 야만인은 선지피로 물든 괴괴한 낯짝을 들이밀며 병사들에게 물었다.
“너흰 누구지? 누가 너희들의 대장이냐?”
병사들은 파들파들 떨며 참사관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엔리코는 그의 부하들보단 훨씬 나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참사관답게 조속히 평정을 되찾고 담대하게 나아왔다.
“내가 지휘관이오. 렘타나의 참사관, 엔리코 튜리스라고 하외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카딤이다. 이 트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전부 설명해줬으면 하는데.”
“…….”
참사관은 제국으로 치면 영주에 가까운 지위. 다짜고짜 저런 식으로 묻는 건 터무니 없는 무례였다.
하지만 엔리코는 이 순간에 예법을 따질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저자가 아니었으면 병사들은 이미 고기 반죽이 되었을 테니. 그저 이 괴물 같은 은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차근차근 대화해 보자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
병사들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트롤의 잔해를 수습하는 동안, 카딤은 협곡 앞에서 엔리코와 회담을 가졌다.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카딤은 눈살을 찌푸리고 반문했다.
“근래에는 이 협곡에 트롤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고?”
“그렇소이다. 기록을 찾아보니 내가 부임하기 한참 전에 대대적인 토벌령이 있었더군. 마탑에서 근방에 있는 괴물들의 씨를 거의 말려 버렸소이다 그 후로 이쪽 지방에선 트롤은커녕 고블린조차도 보기 힘들게 되었소.”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그 넓은 숲을 가로지르면서도 마물은 한 번도 안 마주치지 않았던가? 비록 성기사와 팔이 세 쌍 달린 나병자, 기형 독사 무리와 머리 아홉 달린 악마를 만나긴 했다만…….
‘……차라리 마물을 만나는 게 나았겠군.’
카딤은 잡념을 떨치고 재차 물었다.
“그럼 트롤이 왜 갑자기 또다시 나타난 거지?”
“그건 나 역시 모르겠소. 차라리 괴물 출현이 잦은 지역이었으면 평소에 대비를 했을 텐데, 없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엔리코는 참사군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사망자는 적었지만 절반쯤은 부상자가 된 걸 보아하니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평상시에 훈련과 괴물 사냥을 부지런히 했다면 돌팔이 용병단에 속을 일도,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터였다.
한편 카딤은 심각한 얼굴로 손깍지를 꼈다. 두 번째 트롤의 내장을 파헤쳤을 때도 처음과 같이 거뭇한 잔영을 발견했다.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근방에 혹시 악마가 있나?”
뜸 들이길 잠시. 엔리코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소. 악마가 있었다면 유미르가 가만 있지 않았을 거요. 마탑은 엘가 교단만큼이나 악마 사냥에 적극적이니까.”
“유미르가 누구지?”
“아, 유미르는 내 보좌관 중 하나요. 나와는 정치적 입장이 달라 별 도움은 못 받고 있지만…… 그래도 솜씨 하난 뛰어난 마탑의 마법사지. 아마 악마가 나타났다면 그자가 가장 앞서 처치하고 나섰을 거요.”
카딤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혹시 트롤이 협곡을 막아서는데 그자가 관여했을 가능성은 없나? 마법 같은 걸로 말이지.”
흠칫, 엔리코는 어깨를 떨었다.
그는 관자놀이를 짚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메마른 입술이 떨어졌다.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소. 마법 중에는 사람이나 괴물의 정신을 조종하는 것도 있다고 들었으니.”
“그럼 그자가 악마와 계약했을 가능성은?”
“그러진 않았을 거요. 그런 짓은 마탑에서도 엄중히 금하고 있소이다. 마법사들이 혼을 죄다 악마에게 팔아먹었으면 진작에 제국의 성기사들이 나서 동맹 전체가 쑥대밭이 되지 않았겠소? 유미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랬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
무언가 이상했다.
마법의 근원은 대기에 떠도는 초자연적 에너지, 마나. 악마의 마기와는 명백히 구별되는 기운이다. 보통의 마법만으로 마기와 유사한 잔영이 남을 리가 없었다.
하여, 카딤은 당연히 악마와 계약한 마법사가 트롤에게 수작을 부린 거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랬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니?
“…….”
찜찜하긴 하다만 더 이상은 뚜렷한 단서가 없었다. 일단은 처리한 일의 보상을 수령하는 게 우선.
카딤이 몸을 일으켰다. 엔리코는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무언가 할 말을 집어삼킨 기색. 대신 그는 감사 인사를 꺼냈다.
“……아무튼 렘타나와 모든 관할령의 주민들을 대표하여 감사드리오. 트롤을 처치하지 못했으면 한참은 더 길이 막혀있었을 거요. 그대가 곤경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소이다.”
“고마워할 필요 없다. 에클의 촌장으로부터 보수를 약속받고 한 일이니까. 그쪽도 사정이 많이 급했거든.”
“아, 이런. 그런 사연이…….”
카딤이 일어선 걸 보고 던컨이 쪼르르 다가왔다. 다친 병사들의 응급 치료를 돕다가 온 것이었다. 카딤은 우물쭈물 뒤돌아보는 던컨과 지친 병사들을 번갈아 보다가 엔리코에게 제안했다.
“부상자들이 많은데 일단 가까운 에클로 가서 요양하는 게 어떤가? 어차피 나도 보수를 받아야 해서 거기로 돌아가야 되거든.”
“아, 좋은 생각이로군. 어차피 그쪽에는 한번쯤 들릴 생각이었는데……. 기꺼이 그대의 제안을 따르겠소.”
카딤과 엔리코가 행렬의 선두에 섰다. 부상자들과 던컨이 중앙을 지켰고 그나마 멀쩡한 병사들이 후방을 경계했다. 비좁은 협곡으로 들어서는 내내 병사들은 어깨를 바짝 움츠린 채 거듭 카딤을 흘겼다.
봄비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간만에 사람의 발길이 닿은 협곡 사이로 습윤한 미풍이 스며들었다. 성벽처럼 웅대한 바위 절벽이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양옆에 똑같은 형상으로 쌓인 황토빛 지층은 이곳의 지명이 마냥 헛된 게 아니라고 대변하는 듯했다.
엔리코는 주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야만인의 정체, 그리고 자신의 보좌관에 대한 사념에 잠겨 있었다. 병사들은 너무 지쳤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는 심신의 여력을 모조리 앗아갔다. 이전에 협곡을 가로질러 본 던컨은 부상자를 부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였다. 이질감을 눈치챈 게 카딤밖에 없었던 이유는.
위치는 입구도 출구도 멀찍이 떨어진 협곡의 정중앙. 지형은 양옆이 틀어막힌 비좁은 길. 별안간 절벽 위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진동이 미세하게 느껴지고 열기에 떠밀려 뿌옇게 뒤섞이는 아지랑이가 보였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유황 냄새.
“…….”
카딤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건 돌발적으로 일어난 화재의 징조 따위가 아니었다. 도망칠 수 없도록 누군가 일부러 파놓은 함정.
대처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콰 – 앙!
폭음이 터지고 절벽 위에서 무더기로 잔해가 떨어졌다. 활활 타오르는 거목들이 낙석과 뒤섞여 추락했다.
――――― 쿠구구구구, 쿵, 콰과광, 콰과광!
충돌의 여파로 대지가 뒤흔들리고 자욱하게 분진이 일어났다. 나무와 암석에 붙은 불꽃은 지면에 내리꽂히고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전면은 대번에 타오르는 방벽으로 틀어막히고 말았다.
“으허어억!”
“뭐, 뭐야, 이건 또!!”
“조심해! 뒤에도 떨어진…….”
콰 – 앙!
후면도 마찬가지였다. 굉음이 귓전을 울리고 화염을 품은 잔해들이 넘을 수 없는 방벽을 형성했다. 협곡을 가로지르던 일행은 순식간에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목전에 한 줄기 불벼락이 떨어졌다.
――――――― 화르르르륵, 콰 – 앙!
협곡의 그림자를 일시에 불사르는 열광(烈光). 태양이 강림한 듯한 강렬한 빛에 모두가 눈을 질끈 감았다. 폭염이 솟구치고 불길의 파도가 발치로 흘러내렸다. 뜨거운 열기가 살갗을 할퀴고 숨통을 옥죄었다.
광휘가 느릿하게 걷히며 불벼락의 정체가 드러났다.
일렁이는 적금빛 머리칼, 홍염의 망토처럼 전신을 에워싼 신기, 용암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판금 갑옷, 광포한 기세로 지옥불을 퍼뜨리고 있는 붉은 장검.
흡사 신의 분노를 그대로 의인화한 듯한 자태의 여인.
병사들은 경악하여 외쳤다.
“서, 성기사……! 엘가 교단의 성기사다!”
“성기사가 어째서 이런 곳에…….”
녹옥빛 눈동자가 한쪽에 고정되었다. 절벽 위에서 기다릴 때부터 강습을 가할 때까지, 그녀의 이목은 단 한 번도 다른 쪽을 향한 적이 없었다.
아크팔라딘, 헬리아 뮤넬은 짓씹어 뱉듯이 읊조렸다.
“드디어…… 드디어 만났구나, 인두겁을 쓴 악귀여.”
“…….”
“네 악행의 업이 독충이 들끓는 심연과도 같도다……. 이제 광명의 심판이 당도한즉, 이 칼의 지옥불이 네놈의 썩어빠진 영혼을 티끌조차 남기지 않고 살라 먹을 것이다…….”
카딤도 묵묵히 성기사를 마주 보았다. 그러다 슬쩍 뒤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크팔라딘이 국경을 넘을 일은 없다고 않았나, 던컨?”
“예? 어, 어어…… 그게…… 으, 으어…… 저, 저도 이게 대체, 어, 어찌 된 일인지…….”
던컨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쩔쩔맸다. 카딤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일어나야 하지 말아야 할 이변이 일어났다. 가능성은 둘 중 하나로 보였다. 저 아크팔라딘이 기적적인 속도로 동맹과 외교적 합의를 이뤘거나, 그러지 않고 국경을 넘을 정도로 미쳐 버렸거나.
어느 쪽이건 정면충돌은 불가피했다. 지금 달아났다간 언제 또다시 급습을 당할지 몰랐다. 승산이 낮은 싸움일지라도 붙어보는 수밖에.
절대 후환을 남기고 떠나지 마라. 카딤은 언제나 명심하고 있는 행동 원칙을 되새겼다. 커다란 손이 슬며시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수통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오! 당신은 제국의 성기사가 아니오? 어째서 성기사가 동맹의 영토에서 이런 만행을 벌이는 것이란 말이오!”
격분한 중년인이 겁도 없이 불길로 나아오고 있었다. 헬리아는 지그시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만, 너는 누구지? 지금 나는 신성한 사명을 집행하는 중이다. 부외자는 관여하지 말고 비키도……”
“나는 델루타나 참사회 소속 렘타나의 참사관, 엔리코 튜리스요! 이곳은 나의 관할령이고, 당신에 대해선 사전에 전혀 들은 바가 없소! 이건 명백한 국경 침범이외다!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참사회를 통해 교단에 정식으로 항의 서신을 보내겠소!”
“……!”
엔리코는 델루타나 참사회의 문장이 그려진 반지를 들어 보였다. 그가 이 구역의 참사관임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헬리아의 얼굴 위로 불꽃만큼 명징한 당혹감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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