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34)
34화. 쌍둥이 협곡 (7)
병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비켜섰다.
“어, 어엇…….”
“예, 옙! 알겠습니다!”
“모, 모두 물러서! 어서 자리를 비켜 드려라!”
희미한 헛웃음을 흘리고는 장검을 맨손으로 들어 올리는 카딤. 손바닥이 지글지글 타올랐지만 이내 서서히 재생되었다. 지켜보던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딤은 곧 반대쪽 손으로 드워프제 도끼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있는 힘껏 도끼날로 붉은 검신을 내리쳤다.
까 – 앙! 화르르륵 –
신병이 날카로운 울음을 흘렸다. 배척의 불길이 날카롭게 치솟았다. 그러나 야만인은 무심하게 도끼날을 연달아 내려칠 따름이었다.
까 – 앙, 까 – 앙, 까 – 앙!
신병의 재질은 적철(赤鐵). 오직 남부의 화산 지대에서만 나는 매우 굳건한 금속이다. 거기다 엘가의 축복까지 깃들어 어지간한 무기로는 검신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드워프제 도끼의 재질은 한철(寒鐵). 적철 이상으로 뛰어난 강도를 자랑하는 한지의 금속이다. 또한 검이란 무기는 구조적으로 측면의 충격에 약하기 마련. 여타 검보다 검신이 긴 장검인지라 충격을 버티는 능력이 더욱더 떨어졌다.
틱, 티딕, 깨 – 앵!
거센 도끼질 끝에 금이 가고 한 차례 검이 부러졌다. 카딤은 멈추지 않고 계속 검신을 부숴 나갔다. 불티와 파편이 폭죽처럼 튀어 오르고 길쭉했던 붉은 검신은 어느덧 짤막한 여섯 개의 철편으로 나뉘었다.
화륵, 화르르륵…….
조각이 분산된 만큼 거부 반응의 화력도 훨씬 약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어지간한 화덕보다 강렬하긴 했다만. 카딤은 씨익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병사들에게 명했다.
“성기사의 갑옷을 가져와라. 그건 내열성이 있으니 그 안에 이 조각들을 넣고 나르면 될 거다.”
병사들은 군소리 없이 지시를 따랐다. 조심스레 철편을 주워 흉갑 안에 집어넣었다. 과연 카딤의 말대로 버틸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열기밖에 새어 나오지 않았다. 장갑 낀 병사들이 보물 궤짝 나르듯 조심스레 흉갑을 든 채 앞서나가고, 다른 병사들은 나머지 잔해를 들고 뒤따랐다.
카딤은 생각했다. 기회가 되면 저 쇳덩이들을 무기처럼 가공할 수 있는 대장장이를 찾아봐야겠다고.
봄비는 그쳤다. 아스라이 잿더미가 흩날리고 검게 그을린 협곡 사이로 번득한 노을빛이 스며들었다. 피와 불꽃으로 얼룩진 긴 하루의 끝. 줄 지어선 행렬은 말로 못다 할 경이의 여운에 압도된 채 나아갔다.
*
동맹령 외곽의 벽촌, 에클에는 때아닌 경사가 겹쳤다.
첫 번째 경사는 쌍둥이 협곡의 트롤이 퇴치된 것.
렘타나와 마을을 잇는 유일한 길이 비로소 다시 트였다. 그들은 참사관의 손길과 교역로를 되찾았다. 이제 유랑 용병단이 마을에서 패악질을 벌이거나 생필품의 부족으로 주민들이 고역을 겪는 일은 없을 터였다.
두 번째 경사는 거기에 얹어 돈까지 굳었단 것.
렘타나의 참사관, 엔리코는 촌장이 카딤에게 약조했던 보상을 대납해 주기로 했다. 물론 밀린 공납과 세금을 지불하느라 비슷한 지출이 들었지만, 이중으로 지출이 나갈 뻔했던 주민들의 입장에선 환영해 마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세 번째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숲에서 산불이 번졌을 때만 해도 다들 마을이 싸그리 불탈 줄 알고 겁에 질렸다. 허나 그 불길은 마을 어귀에 이르러 느닷없이 저 홀로 소화되었다. 산불의 위협이 사라지고 화마의 잔해를 치우자 드러난 건 비옥한 평지. 흉흉한 소문이 들끓던 숲은 사라지고 농사짓기 좋은 넓은 땅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이런 일이 하나만 일어나도 동네잔치를 벌일 판이다. 그런데 셋이나 동시에 벌어졌다니, 자연스레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하하, 좋은 아침입니다!”
“어휴, 다들 이것 좀 가져가서 드세요!”
“크하하, 이따가 저녁에 술 한잔 어떤가?”
마을 사람들은 길 가다 조약돌만 봐도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껄끄러웠던 이웃과도 얼싸안고 어깨춤을 췄다. 아이들은 간만에 모여서 뛰어놀고 아낙들은 음식을 나누며 수다를 떨었다. 사내들은 시시때때로 ‘에클의 만찬’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여관 주인은 귀한 벌꿀주를 아낌없이 풀었다.
고립의 여파를 수습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모두의 눈에 앞날이 더없이 선명한 장밋빛으로 보였다.
그리고 알음알음 소문이 번져나갔다. 누구 덕분에 이런 겹경사가 벌어지게 된 건지.
“허, 정말로 트롤 두 마리를 혼자 잡으셨다더군…….”
“정말로? 참사군이 도와줘서 겨우 잡은 거 아냐?”
“아냐, 병사들이 입을 모아 말하더라고. 저 용병 나으리 아니었으면 자기들은 죄다 죽은 목숨이었다고…….”
“맙소사, 예의 그 깡패 자식들을 죄다 때려잡을 때부터 직감하긴 했다만…… 인간이 아니구만, 인간이.”
“내가 듣기론 산불이 꺼진 것도 저 용병 나으리 덕분이라 하던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라 주술까지 부리신단 건가?”
“몰라, 나도 병사들한테 어깨너머로 들은 얘기인지라…….”
소문은 입에서 입을 거칠 때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처음엔 트롤 두 마리를 잡는 대단한 용병 정도로 알려졌던 카딤의 정체는, 나중에 이르러선 아탈라인들이 모시는 투신(鬪神)의 현신이자 날씨와 불꽃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대주술사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 말을 모두가 진지하게 믿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그 위대한 전사의 얼굴을 다시 보길 원했다. 카딤이 기거하는 촌장의 집 근처는 항상 흥분에 들뜬 구경꾼들로 들끓었다.
그러나 카딤은 한동안 칩거하며 쉬이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저 소란을 원치 않는다고 촌장을 통해 대신 뜻을 전했을 뿐. 구경꾼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흘끔흘끔 뒤돌아보며 뿔뿔이 흩어졌다.
도리어 그 유명세에 이득을 본 건 다른 사람이었다.
카딤의 유일한 길동무, 자칭 유능한 길잡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행상인, 던컨. 그는 어느샌가 마을의 어딜 가도 환대받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던컨은 ‘에클의 만찬’에서 공짜 밥과 술을 얻어먹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랬더니, 맙소사! 그 뱀을 닮은 태산처럼 거대한 악마가 갈기갈기 찢긴 채 늪지에 파묻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약한 피가 철철 흘러넘쳐 늪지가 범람하고 숲의 흙이 온통 붉게 물들 정도였습니다!”
“허어!”
“그 정도였단 말이오?”
“세상에, 믿기지가 않는구만…….”
이미 십수 번도 넘게 들은 이야기임에도 불구, 마을 사람들과 참사군 병사들은 생전 처음 듣는 것처럼 경탄했다. 이야기는 자신과 가깝게 느껴질수록 더욱 큰 힘을 발휘하는 법. 저 전설적인 일화의 주인공이 자신들의 마을에 묵고 있다 생각하니 집중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초롱초롱한 눈빛들을 보고 던컨은 직감했다. 그래, 바로 지금이다. 미리 챙겨온 묵직한 자루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감람빛 비늘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때 나으리께서 도륙 내었던 그 악마의 비늘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 신비로운 빛깔, 냉혹한 기운, 강철 같은 굳기!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제 몇 개 안 남았습니다! 지금이라면 이 신화적인 전리품을 한 개에 1천 루덴, 한 조각에 1백 루덴에…….”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처음 비늘을 보여줬을 때와 완전히 달라졌다. 그 누구도 저 비늘이 정말로 그 태산처럼 거대하고 흉악한 악마의 비늘임을 의심치 않았다.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돈은 바로 가져올 테니까…….”
“나부터 주시오! 세 조각, 아니, 네 조각 사겠소!”
“한 개 주시오! 여기, 돈은 여기 있소!”
마을 사람들은 물론, 병사들마저도 비늘을 한 조각이라도 얻기 위해 앞다투어 쌈짓돈을 털었다. 던컨은 주머니에 쌓여 가는 돈을 보며 속으로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질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악마의 부속물을 팔았단 누명을 쓰고 성기사에게 잡혔던 던컨은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다.
*
어둑하니 흔들리는 등불, 탁자 앞에는 숙연하게 표정을 굳힌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촌장과 가솔들은 부탁을 받고 잠시 자릴 비웠다. 인기척이 안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딱히 이야기를 엿듣는 자는 없어 보였다.
카딤은 찌뿌둥한 어깨를 뚝뚝 풀고는 엔리코의 앞에 앉았다.
“간만에 다시 보는군. 무슨 용무인가, 참사관.”
“……음, 일단 이것부터 받으시오.”
쩔그렁, 참사관이 올려놓은 주머니가 묵직한 울림을 발했다. 카딤은 눈썹을 꿈틀 떨고는 그것을 건네받았다. 안을 살펴보니 역시나 금화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돈이 좀 많군. 약속했던 보수는 2만 루덴 아니었나?”
“본래 내쪽에서 트롤 토벌의 현상금으로 걸었던 돈이오. 5만 루덴. 의뢰를 마치면 어느 용병단에 주기로 약속했던 돈이었다만…… 그놈들은 죄다 죽거나 달아났으니 마땅히 의뢰를 수행한 자에게 돌아가야지.”
카딤은 말없이 참사관을 바라보았다. 축제라도 하듯 들뜬 마을 사람들과 달리 그는 요 며칠 사이 부쩍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천천히 턱을 쓸었다. 돈을 많이 받은 것 자체는 나쁠 게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목적 없이 오가는 돈은 없다. 2만 루덴만 줘도 아쉬울 게 없다면 2만 루덴을 주는 것이 인간. 그럼에도 참사관이 5만 루덴을 줬다는 건, 필시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겠지.
엔리코도 자신을 훑는 시선을 알아챘다. 거칠게 마른 세수를 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대의 예상이 맞소. 그저 돈 자랑이나 하려고 드린 돈은 아니외다. 이유가 있어 드린 돈이지.”
“…….”
“참사관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협상과 계약과 밀약과 담판을 맺어봤소. 그런 자리에선 서로의 의중을 떠보는 전초전과 외교적 수사로 점철된 대화가 필수 교양이지. 하지만 지금 그건 과감히 생략하겠소. 어쭙잖은 수작을 부렸다간 그대의 도끼가 날아들지도 모르니까.”
“…….”
“솔직하게 말하겠소. 그대에겐 갚을 수 없는 은덕을 입었지만, 나는 굉장히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소이다. 고위 성기사의 죽음은 일개 변방의 참사관이 무마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오. 아니, 내가 소속된 델루타나 참사회라 할지라도 무마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지.”
제국의 아크팔라딘이 동맹령을 침범했다. 이 경우엔 명백히 제국 측의 과실만 있다. 하지만 제국의 아크팔라딘이 동맹령을 침범하여 격살당했다? 이 경우엔 동맹 측의 과실이 훨씬 더 커지고 만다. 자치권을 주었을 뿐, 엄밀히 따지면 동맹도 여전히 제국에 속한 세력이니까.
“……병사들에겐 성기사의 죽음에 대해 철저히 입막음을 시켰소. 하지만 마을 사람 몇몇이 이미 성기사의 판금 갑옷을 목격했소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단 측에서 조사를 나오면 진상이 드러나는 건 시간 문제지. 아마 교단은 어마어마한 배상금과 범인의 신병 인도를 요청할 거요.”
“…….”
“그렇게 된다면…… 우린 어떻게든 그대를 붙잡아 교단에 넘길 수밖에 없소. 그러지 않으면 전쟁이 터질 테니까. 신의 이름을 앞세운 제국의 불길이, 다시금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낙엽처럼 불태워 버릴 테니까.”
카딤은 무미건조하게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단순히 자세를 고쳐잡은 것임에도 그 행동은 버티기 힘든 위압감을 주었다. 등불을 받은 엔리코의 눈빛이 위태롭게 번들거렸다.
“……하지만 나는, 전쟁을 원치 않는 것만큼이나 그대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도 않소. 아니, 오히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
“그대만 한 전사를 내 두 눈으로 본 건 처음이오. 그 정체와 기이한 힘의 근원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더군. 성기사는 그대를 악귀라 칭했지만, 내가 본 그대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소. 오히려 나는 그대가 다른 쪽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소이다. 예를 들면, ‘아곤의 성난 뿔’ 쪽과 모종의 접점이 있는 게 아닌지…….”
갑자기 공기가 일변했다. 카딤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는 탁자를 쾅, 내려쳤다.
“넝마처럼 찢겨 죽고 싶지 않거든, 두 번 다시 그 이름을 내 앞에서 꺼내지 마라.”
간담이 서늘해지는 경고. 그리 세게 친 것 같지도 않건만 탁자는 반으로 쪼개지고 다리까지 와지끈 박살 났다.
엔리코는 얼떨떨하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저자가 그 전설적인 투기장의 챔피언의 밑에 있는 용병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 관련이 없다 하여도 기실 아탈라인 중에 ‘아곤의 성난 뿔’을 싫어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는 아탈라인의 위상을 드높인 영웅이니까. 그런데 어째서 저런 반응이?
“알겠소, 내 명심하지……. 실언을 사과드리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입을 열기까진 꽤나 큰 용기가 필요했다.
“아무쪼록 나는 수일 동안 깊이 고민했소. 어떻게 해야 이 일을 무사히 무마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은인을 배신하지 않고, 제국과의 마찰을 넘기고, 전쟁의 불길까지 피할 수 있을까.”
“…….”
“그러다가 오늘, 마침내 방법을 찾아낸 것이오.”
카딤의 눈이 슬쩍 크게 뜨였다.
그조차도 성기사를 죽인 건 뒷수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제국과 동맹의 외교 문제는 알 바 아니지만 분명 자신에게도 귀찮은 일이 일어날 거라 예측했다. 한데 이 참사관이 방법을 찾아냈다 하니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엔리코는 상체를 내밀고 목소리를 은밀하게 낮추었다.
“유미르, 기억하시오? 내 밑에서 일한다고 했던 마법사 보좌관 말이오.”
“기억한다. 댁과는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했지, 아마.”
“그렇소. 내 생각해 봤는데, 역시 트롤을 쌍둥이 협곡에 밀어 넣은 건 그 작자의 짓이 맞는 것 같소. 트롤이 나타난 시기와 그의 부임 시기가 절묘하게 일치하고, 지원 요청을 위해 보낸 전령을 막을만한 사람도 그자밖에 없거든. 게다가 무엇보다, 유미르 데밀이 ‘정신’ 계열 마법에 능하다는 게 가장 큰 단서였소.”
“…….”
“설마 괴물의 정신까지 조종할 수 있을 거란 상상은 못 했는데 그자를 원흉이라 치니 많은 일의 아귀가 맞더군. 그 작자를 내버려 둔다면 아마 이와 비슷한 일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겠지.”
참사관은 결코 뜬금없는 화제로 말을 돌린 게 아니었다. 카딤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어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직감했기에.
엔리코는 결연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내 판단에, 동맹 측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순 없소. 다시 말해 아크팔라딘과 동등한 급의 희생양이 필요하단 말이오. 같은 피를 흘렸다면 제국 측에선 우리에게 큰 책임을 묻기 어렵지. 애초에 사건의 발단은 그 성기사가 무단으로 국경을 침범한 것이니.”
“…….”
“그리고 유미르 정도면 충분히 고위 성기사와 급을 견줄 만하오. 그는 이 구역의 보좌관일 뿐 아니라 마탑에서 3번째로 높은 자리인 컨저러 등위의 마법사니까.”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유미르 데밀을 죽여주시오. 그러면 내가 그림을 만들어놓겠소. 성기사와 마법사가 서로 맞서다 죽은 것으로. 이 사건에서 그대의 흔적을 말끔히 일소하겠소이다.”
국경을 침범한 교단의 고위 성기사, 그것을 막아선 마탑의 고위 마법사, 치열한 혈투, 결과는 양쪽 다 치명상을 입고 사망. 카딤을 빼놓는다 해도 사건은 무리 없이 앞뒤가 들어맞았다.
엔리코가 말한 그림은 그런 것이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닌 만큼 맨입으로 부탁할 생각은 아니오. 25만 루덴의 보수를 추가로 주도록 하지. 그리고 그대의 목적이 무엇이든 전력으로 지원하겠소.”
“…….”
“비록 나는 변방의 참사관에 불과하지만 나의 가문은 그렇지 않소. 튜리스 가문의 명성은 델루타나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이고, 내 형님께선 다선 의원이며 차기 참사회 의장직을 노리고 있소이다. 그 정보력과 영향력은 동맹 전역에 닿을 정도이니 분명 그대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요.”
“…….”
“나도, 그대도,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틀어쥘 테니 배신당할 걱정 따윈 할 필요 없소. 나는 정적을 제거하고, 그대는 추적을 면하고, 동맹은 전쟁의 불길을 피한다. 이거야말로 아무도 손해 보는 일 없는 완벽한 거래 아니겠소?”
엔리코의 눈에서 서늘한 총기가 번뜩였다. 그는 더 이상 어딜 가나 흔히 있는 수척하고 피곤한 중년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육신의 힘은 카딤에 비하면 개미만도 못했지만 그의 진정한 힘은 다른 곳에 있었다.
괜히 참사관의 자리에 오른 게 아니었던가. 카딤은 슬며시 입매를 비틀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 보면, 악마도 인간의 교활함을 따라잡기엔 아직 모자란 게 아닌가 싶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