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4)
4화. 무고한 죄수 (3)
카딤은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죄수들 또한 학살하기 시작했다.
머릿수는 더 많았지만 처리하는데 드는 수고는 크지 않았다. 죄수들의 팔이 온통 쇠사슬로 묶여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탓이었다.
“허억, 허억, 왜, 왜 이러는 거야! 우리가 뭘 잘못했…… 끄억!”
“으아아아아악!!”
“으헉, 끄허어어…… 살려주…….”
푹!
다만 서서히 버프가 사라져 이제 맨주먹만으로 때려잡는 건 무리였다. 카딤은 죄수들의 심장에 창을 꽂거나 머리를 돌덩이로 후려쳐 숨통을 끊었다. 망가진 조형물처럼 평원 위에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섰다.
카딤이 죄수들을 죽인 건 그들이 파렴치한 흉악범들이라서가 아니었다. 죄의 무게로 따지면 외려 병사 십수 명을 처죽인 자신이 훨씬 흉악할 터. 더한 죄인이 덜한 죄인을 심판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언어도단이었다.
죄수들을 죽인 건 그저 이것 때문이었다. 병사들과 같은 이유,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이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간…… 필시 자신이 목격한 걸 사방에 떠들고 다니겠지.’
아무리 윽박지르고 협박해도 소용없을 터였다. 취한 자의 주둥이는 매춘부의 가랑이만큼 쉽게 열리기 마련. 술집에서 몇 잔만 들이켜도 거나하게 들떠 무용담을 늘어놓을 게 분명했다. 악마의 피를 마시고 성기사와 병사들을 도륙한 어느 한 야만인에 대해.
아직 이 세계에 대해 카딤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교도란 이유만으로 체포되는 곳에서 그런 소문이 돌면 무슨 일이 벌어질진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수배령이나 현상금이 걸리는 건 양호한 정도. 최악의 경우엔 고위 성기사의 부대가 추격대로 붙을지도 모르는 일.
‘……아직 그런 위험을 무릅쓸 순 없다.’
현장을 목격한 증인을 말소해야만 했다. 카딤은 사무관이 서류를 결재하듯, 백정이 짐승을 도축하듯 기계적으로 죄수들을 사냥해 나갔다.
다른 죄수들은 모두 처리했다. 이제 마지막, 덤불 아래 웅크리고 파들파들 떨고 있는 저 죄수의 차례. 카딤은 날카로운 창을 꼬나들고 천천히 다가갔다.
“저, 전 정말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으리! 제발 사, 살려 주…… 우웨엑, 우엑, 우웨엑!”
극심한 공포와 긴장으로 인해 죄수는 구토를 했다. 속에서 끊임없이 신물이 치솟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바지 앞섶도 이미 흥건하게 젖어 든 지 오래였다.
카딤이 죄수를 바로 찌르지 않은 건 그런 구차한 모습을 보고 동정심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아까 저자가 몇 가지 정보를 알려 주었다는 게 떠올랐을 뿐.
지금 죽이나 정보를 더 캐내고 죽이나 큰 차이는 없었다. 카딤은 잠시 창을 내려놓았다. 행상인은 섧게 흐느끼며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 살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으리. 끄윽, 으흐흑…….”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 이름이 뭐지?”
“던컨, 던컨 휠레드입니다. 자유도시 동맹의 몰타나 출신이고 여기저기 떠돌며 물건을 파는 행상인입니다. 흐윽, 국경 인근을 떠돌던 중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붙잡혔습니다. 풀어만 주시면 이쪽은 다신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
“아니, 네놈의 사연에는 관심 없다. 앞으론 묻는 말에만 답하도록.”
“끅, 옙!”
카딤은 질문을 계속했다.
“아까 했던 말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었으면 하는데.”
“어, 어떤……?”
“루카오니아가 제국이 되었다는 거. 내 기억 속 루카오니아는 분명 왕국이었거든. 여기의 루카오니아는 만들어졌을 때부터 제국이었나? 아니라면 언제 제국이 된 거지?”
던컨은 자신의 처지도 잊고 다시 한번 의아한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 야만인은 루카오니아가 제국이 된 지가 언제인데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던컨의 자신의 의문 속에 해답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 야만인. 저자는 정말 산맥 너머의 황야에서 온 야만인일지도 몰랐다. 대륙에 완전히 정착한 야만인들과 달리, 산맥 너머의 야만인들은 소식이 몇백 년 전에 두절되었을 수도 있으니.
다만 묻는 말에만 답하라 했으니 이쪽에서 사정을 물어볼 수 없었다. 던컨은 얌전히 대답이나 내뱉었다.
“올해가 제국력으로 248년…… 그러니까, 건국제가 루카오니아 제국을 세운 원년으로부터 248년쯤 흘렀습니다. 그전까지 루카오니아는 분명히 왕국이었습죠.”
“……제국력? 일월력으로 따지면 몇 년도지?”
“어, 어, 글쎄요? 그런 고력(古曆)은 이제 사람들이 사용을 잘 안 해서…… 한 1130년쯤 되려나?”
야만전사의 눈초리가 가늘게 떨렸다.
대륙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던 연력이 고력이 되었다니?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주먹을 꾹 쥐고 연달아 질문을 쏟아붓는 카딤.
“지금 대륙의 정세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지? 엘가 교단은 왜 저렇게 되었나? 마경은 어떻게 됐고?”
던컨이 무지렁이 흉악범에 불과했다면 저 모든 질문들에 답하진 못했을 터. 다행히 식견 넓은 행상인은 얕게나마 답할 수 있었다.
3백여 년 전 루카오니아 제국이 대륙 통일을 이뤘다. 하지만 지금은 실질적으론 대륙이 삼분할되어 있는 형국이다. 엘가 교단은 악마의 창궐을 계기로 세를 불리다 저리되었다. 마경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도통 사정을 알 수가 없다…….
카딤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경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니? 균열을 넘어 사라진 자신은 그렇다 쳐도, 대악마를 함께 처치한 다른 동료들은 대체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게일, 멜리사, 고든, 시릴. 혹시 이 이름을 들어보았나?”
“……아뇨? 완전 처음 들어봅니다, 나으리. 어…… 멜리사란 이름은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초대 마탑주의 이름이 멜리사라고 했었나……?”
눈을 감고 손으로 이마를 짚는 카딤.
마경을 정복하고 대악마를 처단한 용사들이 잊혀지다니. 이건 말이 되질 않았다. 정말로 1회차와 이어지는 세계관이 맞긴 한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었다.
“그럼, 대체 왜 대륙에 악마들이 왜 창궐한 거지?”
말을 하다 보니 긴장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던컨은 초연하게 대답을 읊조렸다.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요, 나으리. 엘가가 타락한 세상에 내리는 천벌이라는 말도 있고, 미친 대마법사가 다른 세상의 문을 열었다는 말도 있고, 끔찍한 거악(巨惡)이 조만간 세상에 강림할 징조란 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뭐가 맞는 말인지는 아무도 모릅디다. 진실은 오직, 저 구름 위 전능한 신의 눈꺼풀 뒤에만 있겠지요.”
“…….”
카딤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정도면 적당히 정보를 캐냈다. 종합해 보니 이런 결론이 나왔다.
‘이곳은…… 아마 1회차로부터 300년쯤 흐른 시점의 대륙.’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외의 다른 결론은 없었다.
카딤은 망연히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늘진 표정. 메마른 황야를 닮은 얼굴이 발작적으로 꿈틀거렸다.
원래 살던 세계에서 쫓겨난 것도 모자라 기껏 발붙인 시대에서도 쫓겨났다. 머릿속의 지식들은 수백 년도 더 된 낡은 것이 되었다. 아직 헤어진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기억에 남아 있는 모든 자들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단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현실의 추방자, 시대의 낙오자, 이방인들의 이방인이 되어 버린 처지.
카딤은 고개를 들었다. 가슴을 집채만 한 납덩이들이 짓눌렀다. 강박적으로 도살한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근원적인 의문들이 머릿속을 할퀴었다.
또다시 저렇게 수많은 생명을 처죽이고, 역겨운 악마의 피를 받아마시고, 정신을 좀먹는 광증을 억누르며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무슨 짓을 해도 현실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는데?
어떻게든 이 세계의 엔딩을 보면 그땐 ‘New Game ++’가 나올지도 몰랐다. 그다음에는 빌어먹을 신께서 보우하사, ‘New Game +++’가 나올지도 모르지. 참으로 매번 신선하기 짝이 없는 무한한 굴레였다.
카딤의 족속, 아탈라인들에게는 이런 전승이 있었다.
일평생 도끼날을 피로 벼리며 살아 온 용맹한 전사들은 죽은 후 위대한 황야와 투쟁의 신, 아탈라와 싸울 기회를 부여받는다. 그 전투에서 아탈라에게 조그만 상처라도 입힌다면 비로소 전쟁과 연회가 끊이지 않는 전사들의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
카딤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이 세상에 가둔 게 엘가인지, 아탈라인지, 아니면 또 다른 절대자인지. 그렇지만 기회가 된다면, 조그만 상처만 입히는 게 아니라 아예 그자의 팔다리를 분지르고, 골통을 부수고, 심장을 파먹고, 내장을 찢어발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요원한 소원이다.
카딤은 질끈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장창으로 자신의 목젖을 겨누었다. 던컨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어어? 나, 나으리! 무얼 하시는 겁니까?”
또다시 여정을 시작하면 발목을 붙잡는 무수한 미련들이 남을 터. 죽음을 맞이하려면 지금보다 적절한 때가 없었다.
기약 없는 여정에 지친 야만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부디 사후세계에서 자신을 마주하는 게, ‘Game Over’라는 글자가 적힌 출구 없는 방만은 아니길 바라며.
그런데 목젖을 깊숙이 찌르려는 찰나.
‘대악마를 무찌른 다음엔 뭘 할 거냐고? 음, 글쎄…… 마법사들을 가르치는 탑이라도 하나 세울까?’
1회차에서 엿들었던 동료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카딤은 두 눈을 부릅뜨고 던컨에게 물었다.
“멜리사라는 이름은 들어봤다고?”
“어, 어…… 예. 확실하진 않은데, 초대 마탑주의 이름이 멜리, 멜리자? 멜리사? 그,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탑은 어디로 가면 있지?”
“마탑은 자유도시 동맹의 동쪽 끝 도시, 베스타나에 있습니다. 여긴 제국령에 대륙 중부니까…… 말이 없으면 아무리 빨리 가도 두 달은 걸릴 겁니다, 나으리…….”
던컨은 불길한 조짐을 느꼈다. 말이 좋아 두 달이지, 온갖 변수들을 감안하면 서너 달이 훌쩍 넘을지도 모를 여정이었다. 부디 이 야만인이 안내를 청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카딤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련이 남지 않길 바랐건만 이미 발목을 붙잡힌 뒤였다. 까마득한 과거, 자기 몸통만큼 커다란 책을 들고 다니던 마법사 소녀를 향해 가벼운 불평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녀석. 왜 그런 말을 꺼내서…….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게…….’
멜리사는 사소한 것도 전부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녀가 맞다면, 필시 자신이 사라진 후 있었던 일에 대해 세세히 기록을 남겨 놓았을 터.
이제 그걸 확인하지 않고선 도무지 편히 눈을 감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야만전사는 장창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기어코 행상인이 듣고 싶지 않았던 부탁을 내뱉었다.
“행상인이라면 길은 대충 알겠지? 나를 마탑까지 안내해라. 되도록 가장 빠른 길로.”
“예, 예? 그, 그렇지만 나으리, 저, 전 고향에 딸린 식구가 있는 몸입니다. 길 안내로 오랫동안 시간을 허비할 순 없…….”
던컨은 말꼬리를 흐렸다. 카딤은 던컨을 멀거니 바라봤다. 행상인의 사정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일을 맡기려면 적절한 보수를 줘야겠지.
“그런가? 그럼 보수로,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귀한 걸 주도록 하지.”
“그, 그게 무엇입니까, 나으리?”
“목숨.”
히끅, 던컨은 잔뜩 질린 얼굴로 딸꾹질을 했다.
한창 대답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저 야만인의 기분이 수틀리면 정말 자신의 모가지쯤은 갈대 꺾듯 꺾어 버릴 수 있다는 걸. 이렇게 된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출발 전, 짐을 챙기고 필요한 물건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던컨은 성기사에게 빼앗겼던 자신의 가방을 되찾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카딤은 시체의 품을 뒤지고 쓸 만한 무기를 찾아다녔다.
제일 탐나는 무기는 단연 성기사의 창이었다. 한기를 머금은 저 창은 게임처럼 등급을 매긴다면 레어 정돈 될 만한 것이었다.
문제는 저 무기가 ‘축병(祝兵)’이라는 점이었다.
엘가의 사제가 축성한 ‘축병’은 오직 무기를 수여받은 성기사 본인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사용했다간 아까와 같이 거부 반응이 일어나기 마련. 안타깝지만 저 창을 가져가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회차에 내가 쓰던 도끼를 가져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가져와 봤자 어차피 여기로 넘어오는 순간 사라졌을 터였다. 신체 능력을 초기화시키면서 장비는 남겨 줄 리가? 카딤은 짧게 혀를 차고 다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곧 십인장의 품에서 그럭저럭 온전한 칼을 한 자루 찾을 수 있었다. 카딤은 가죽끈으로 허리춤에 대충 칼을 묶었다. 달이 완전히 모습을 감춘 밤, 카딤의 또 다른 고유특성을 활용하면 ‘축병’만큼은 아니어도 이 칼을 제법 쓸 만하게 벼려 낼 수 있을 터였다.
악마의 시체에서 피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선한 피보다 효과는 떨어져도 없는 것보단 나을 터. 되도록 쓸 상황이 오지 않길 바랐지만 대비는 해야 했다.
이쪽의 준비는 끝났다. 빵빵한 가방을 짊어지고 쪼르르 내달려 오는 던컨. 복장은 여전히 토사물과 소변으로 얼룩진 채였다. 카딤은 지그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 옷은 갈아입는 게 어떤가? 저기 갈아입을 옷도 많은데.”
굵직한 손가락은 시체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던컨은 해쓱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나으리……. 저, 저는 이 옷이 편합니다요……. 더러워진 건 냇가에서 빨면 되니까…….”
“그런가? 그럼, 뭐.”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떼는 두 사람.
행상인은 흘끔흘끔 야만인의 눈치를 보며 앞장섰다. 야만인은 무심한 걸음으로 뒤따랐다. 어느덧 날은 저물어, 게슴츠레하게 세상을 엿보던 태양은 지평선 밑으로 서서히 눈길을 내리깔고 있었다.
석양을 등진 두 사람의 앞으로 기나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