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40)
40화. 마법사 사냥 (6)
푹!
붉은 글자가 새겨진 모기의 검신이 쓰러진 곰올빼미를 꿰뚫었다. 악착같이 그 안의 피를 빨아들여 주인에게 바쳤다.
– 구웅, 구웅…….
곰올빼미가 단말마의 신음을 흘리고 카딤의 몸에선 미약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좁은 통로 안에는 그에게 피를 바친 괴물의 시체가 수십 구나 널려 있었다.
카딤은 목을 뚝뚝 풀었다. 피로는 그대로였지만 부상은 거의 다 나았다. 회복을 마쳤으니 슬슬 되돌아가기로 했다.
요새의 심부, 꺼진 촛불로 가득한 방에 도달했다. 방의 한가운데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거한이 누워 있었다.
– 쿠억, 죽여라……. 이제 그만 빨리, 죽여 줘…….
팔다리의 힘줄을 죄다 끊어 버리고 그 사이에 돌덩이를 잔뜩 쑤셔 넣었다. 심장의 일부가 남은 덕에 목숨은 부지하고 있지만 재생과 거동은 불가능했다. 오우거는 끔찍한 고통으로 신음하며 어서 죽여 달라고 거듭 재촉했다.
당연히, 카딤은 녀석을 순순히 죽일 생각 따윈 없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질문에만 똑바로 대답하거라. 질문에 모두 답변을 마치면 그때 편히 죽여 주도록 하겠다.”
– 쿠윽, 쿠어억…….
“만일 거짓으로 답하거나 쓸데없는 말을 한다면, 그때마다 네 녀석의 고통을 더욱 길게 연장시켜 주도록 하지.”
일그러진 눈매가 한층 더 깊게 찌그러졌다. 오우거는 이미 ‘모기’를 손에 쥐고 억지로 살아나는 과정을 겪었다. 저 말이 빈말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인간의 몸을 버린 이상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이 상태로 기이한 권능을 다루는 저 야만전사를 이길 수도 없었고. 유미르는 무슨 질문이든 간에 최대한 빨리 답하고 안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카딤은 적당한 돌덩이에 걸터앉았다. 벽장 위의 수많은 꺼진 촛불들을 죽 둘러보곤 심문을 시작했다.
“지극정성으로 꾸며놨군. 여기서 괴물들을 모아놓고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단순히 참사관에게 훼방을 놓으려고 했다기엔 너무 거한 머릿수였는데.”
– ……쿠욱, 괴물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다. 토벌령 때 포획한 놈들을 사육하던 공간이었으니……. 단지 내가 오고 나서야 ‘계획’에 진척이 있었던 거지.
“계획?”
– 그래, 괴물의 정신을 대규모로 제어하여 군대로 만드는 계획. 나는 애초에 그 계획의 실현을 위해 이곳에 보좌관으로 부임했던 거다. 성공만 한다면 창궐한 악마들을 멸하고 다른 참사회와 제국까지 복속시킬 수 있을 만한 원대한 계획이었는데…… 쿠욱, 네놈 때문에 모든 게…….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죽인 거냐? 어떤 방에 시체가 잔뜩 쌓여 있던데.”
– ……괴물은 머릿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제어가 힘들어진다. 하지만 ‘넋을 쥐어짜는 쇠사슬’로 인간의 정신을 추출하여 괴물의 몸속에 불어넣으면, 인간과 괴물의 정신이 격렬히 충돌하여 자아의 공백이 생기지. 그러면 보다 원활하게, 훨씬 더 많은 수의 괴물들을 제어할 수 있다.
“…….”
– 쿠욱, 물론 나처럼 인간이 괴물의 몸을 아예 장악한 경우엔 폐기 처분해야 했지만…….
카딤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지탄할 만한 입장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인간이라기보단 악마에 가까운 발상이었다. 거기다 이어서 튀어나온 말은 더더욱 그러했다.
– 쿠욱, 네놈 때문에 모든 게 허사가 되었다……. 네놈이 그 수많은 인간들의 희생을 헛되게 한 거야……. 마탑의 진보를 위한 가치 있는 희생이, 네 녀석 하나 때문에 가치 없는 개죽음으로 변모했다! 필시 죽은 녀석들도 저승에서 너를 원망하고 있을…….
카딤은 오우거의 발톱 사이로 도끼날을 집어넣고 쩍, 떼어냈다.
“……쿠어어어어억! 쿠어어어어억!!”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훨씬 더한 고통을 겪었다 해서 모든 고통에 면역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오우거는 파들파들 떨며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하지. 어째서 악마의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거냐? 대체 왜 마법의 원료로 마나가 아닌 희석된 마기를 사용하는 거지?”
오우거는 ‘악마’와 ‘마기’란 말을 듣고 움찔 몸을 떨더니 무언가 켕기는 표정을 했다.
– ……마기?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나는 여지껏 마나만을 사용했는데…….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내가 말하는 ‘마나’는 정령들이 사용하는, 대기에 떠도는 초자연적인 기운을 말하는 거다. 잡스러운 걸 잔뜩 뒤섞은 악마의 기운이 아니라.”
– 정령들…… 대기에 떠도는…… 아, 설마, ‘고대 마나’를 말하는 건가?
“……뭐?”
– 쿠욱,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고대 마나’는 벌써 몇백 년 전에 완전히 고갈됐다. 정령들도 사멸한 옛 존재가 된 지 오래지. 이제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은, 오로지 심장에 마석을 박고 거기서 마나를 끌어 쓰는 것뿐이야…….
오우거가 쿨럭, 피가 섞인 기침을 내뱉었다. 광전사의 얼굴 위로 혼란스러운 파문이 일었다. 그로서는 저 말의 진위를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나를 티끌만치도 느낄 수 없었으니까.
다시 입을 연 카딤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나…… 아니, ‘고대 마나’는 왜 고갈된 것이냐?
– 쿠욱,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에 관한 정보는 오로지 마탑주와 장로회의 마법사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거든.
“…….”
– 다만 어깨너머로 듣기로는…… 누군가 단번에 세상의 모든 마나를 고갈시킬 만큼 어마어마한 ‘대마법’을 시전해 그리되었다는 풍문이 있더군……. 쿠욱, 그렇게 엄청난 ‘대마법’이라니, 그리 현실적으로 들리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거짓말 마라. 멜리사가 대악마를 상대하며 ‘대마법’을 수없이 시전했을 때도 마나는 고갈되지 않았거늘.]”
돌연 방 안의 공기가 변했다.
카딤의 목소리는 마치 깊은 동굴로 가라앉은 것처럼 울리고 있었다. 마치 찰나에 인격이 바뀐 듯한 위화감. 오우거의 얼굴 근육이 희미하게 경련했다.
– 뭐? 쿠욱…… 그게 무슨 소리…….
“[여전히 간교한 혓바닥이로구나. 거짓으로 답하지 말라고 이미 경고했을 텐데.]”
꺼림칙한 감각이 목덜미를 타고 돌았다. 간신히 고개를 틀어보니 야만인의 눈이 기괴한 적광을 발하고 있었다. 미증유의 공포가 유미르의 정신을 잠식했다.
– 메, 멜리사? 초대 마탑주를 말하는 건가? 쿠욱, 그 이름은 왜 갑자기…….
“[멜리사는 악마를 세상 그 무엇보다 혐오했다. 그런데 그 후예들이 마기를 마법의 원료랍시고 쓰고 있다니……. 하긴, 애초에 그것부터가 말이 안 됐어.]”
– 대체 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난 거짓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야, 약속대로 편하게 죽여 줘야…….
“[닥쳐라, 악마야. 같잖은 수작은 거기까지다. 네놈의 살과 뼈를 갈기갈기 찢고 그 피를 전부 마셔 주마.]”
도통 말이 통하질 않았다. 준엄하게 도끼를 치켜들고 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 유미르의 내면에서 안식을 바라는 마음은 싸그리 소멸했다. 남은 것은 오직 저 미쳐버린 야만인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뿐.
– 쿠억, 쿠어억, 쿠어억!!
어떻게든 도망쳐 보려고 발악했다. 한 뼘도 달아나지 못했다. 힘줄이 끊긴 부분에 박힌 돌덩이들이 더욱 굳게 파묻히기만 했다.
써 – 걱!
– 쿼허허어어억!!
결국 싸늘한 도끼날이 오우거의 목가죽을 갈랐다.
광전사는 베어내자마자 재생되는 상처를 또다시 난자했다. 가죽과 근육을 누더기로 만든 후, 툭 불거진 울대뼈를 쥐어뜯어 으스러뜨렸다. 오우거의 양 눈이 시뻘겋게 충혈됐다. 거대한 육신이 펄떡거리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천장과 바닥이 흔들렸다.
– 쿼헉, 쿼어어어억!
쿠궁, 쿠궁, 쿠구구구…….
쩌걱, 꽈드득, 쩌 – 걱!
도끼날이 더욱 넓고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두껍고 질긴 동맥이 손쉽게 끊어지고 진한 핏물이 솟구쳤다. 그 역동적인 분출을 목격한 카딤의 눈빛이 한층 더 괴이해졌다.
손에 잔뜩 튄 핏물을 핥았다. 간만에 얻은 신선한 악마의 피를 마실 기회다. 시시하게 몇 방울 핥는 걸로 그만둘 순 없었다. 아예 동맥을 직접 물어뜯어 피를 취하기까지 했다. 한번 물어뜯은 뒤론 망설임 없이 거듭 물어뜯고 손으로 찢고 도끼로 베었다.
핏물이 눈으로 튀며 시야가 온통 시뻘겋게 물들었다. 시각과 미각과 후각이 온통 비릿한 핏물에 절여지도록 정신없이 피를 들이켰다. 그래도 흡혈을 그만두지 않았다. 목에 구멍이 난 것처럼 갈증이 채워지질 않았다. 더 많은 피, 더 많은 피, 더 많은 피…….
– 쿠어어어어…….
오우거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후에야 카딤은 정신을 차렸다.
“…….”
이건 악마가 아니었다. 단지 마법사의 정신이 깃든 괴물에 불과했다.
마지막 촛불마저 꺼지고 숙연하게 가라앉은 정적. 카딤은 입가에 잔뜩 묻은 피를 소매로 훔쳤다. 홀연히 고개를 쳐들고 음습한 어둠과 눈을 맞췄다.
‘히드라의 피를 마시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고.’
마치 뇌를 파먹는 기생충이 지나간 것처럼, 광증의 여운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
자유도시 동맹의 대도시, 베스타나.
명목상 이 도시의 최고 권력자는 참사회의 의장이다. 하지만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세 살 배기 코흘리개부터 여든 살 노인까지 그 누구나, 심지어 참사회 의장 본인조차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도시의 진정한 주인은 따로 있다는 걸.
바로 이 새하얗고 거대한 탑의 주인.
“…….”
참사회 의장은 살찐 목을 꺾어 드높은 마탑을 올려다보았다. 투실한 배를 꿀렁대며 속으로 마른침을 삼키고 있자니, 입구의 문이 열리고 젊은 여마법사가 나타났다.
그녀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의장을 안내했다.
“환영합니다, 의장님. 이리 오시면 됩니다.”
“그래, 고맙…….”
우웅 –
한데 입구에 발을 들이자마자, 배경이 뒤바뀌며 여마법사의 신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어둑한 복도만이 나타났다.
“…….”
불빛이 점등되며 나아가야 할 길이 드러났다. 복도의 끝에 신비 문자와 복잡한 마법진이 부조된 석문이 있었다.
이젠 익숙해질 만한데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긴장된 걸음으로 끝에 이르자, 석문이 열리고 이내 마탑의 최상층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 오게나, 의장. 여기 앉으면 되네.”
눈부시게 허공을 수놓는 오색 광채, 내부에서만 외부를 내다볼 수 있는 투명한 벽, 구름을 발치에 두고 있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 그리고 기묘한 힘이 실린 목소리.
하얀 두건을 깊게 뒤집어써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내가 투명한 의자에 앉아 의장을 맞이했다. 그는 서슴없이 하대를 했고 의장은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탑주님.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별고야 많지. 그것 때문에 자넬 부른 것 아니겠나.”
“…….”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도록 하지. 렘타나 인근의 지하 요새에 문제가 생겼네. 안에 있던 괴물들은 죄다 몰살당했고, 아마 유미르 데밀까지 죽은 것 같아.”
“예? 그게 무슨…….”
의장은 동그랗게 눈을 치떴다.
유미르는 마탑 내에서도 두 손 안에 꼽을 만한 고위 마법사였다. 그냥 혼자만으로도 강력한 자였지만, 최근 괴물의 대규모 제어에 성공하여 그 위상이 일인군단에 가깝게 부상했다고 들었다. 그런 그를 대체 누가 죽였단 말인가?
“렘타나에 그만한 병력이 있었을린 없고……. 설마 고위 악마라도 나타난 겁니까? 아니면 제국의 아크팔라딘이나 ‘데카그램’이 국경을 침범했다던지…….”
“아니, 전부 아니다. 정확한 정체는 나도 아직 모르겠군. 어쩌면 델루타나나 갈렌타나의 잡류배들이 물 밑에 감춰두었던 병기를 꺼낸 건지도 모르겠어. 유미르에게는 거는 기대가 꽤나 컸는데… 안타깝게 되었지.”
마탑주는 손 밑에 놓인 반투명한 수정구를 쓸었다.
‘칼리스토의 눈’. 앉은 자리에서 온 세상을 살필 수 있는 마도구였다. 단점이 있다면 거리가 멀수록 상이 흐릿해지고 재사용 대기시간이 꽤 길다는 것 정도일까.
다시 입을 연 마탑주의 목소리는 보다 비장해져 있었다.
“미지의 적이 나타났고 전력에 큰 손실이 생겼네. 하여 마탑의 전력을 보다 확충하고자 하네. 다음 분기 참사회의 지원 예산을 좀 더 증액하여 편성하고 악마의 부속물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게나. 악마와 제국의 성기사들에 이어 다른 도시의 병기까지…… 우리가 장차 상대해야 할 적들이 아주 많겠어.”
“……알겠습니다. 의원들을 설득하고 인근의 참사관들에게도 관련하여 지시를 하달하겠습니다.”
이미 참사회 예산의 대부분을 마탑에 쏟아붓고 있지만 의장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그는 마탑주의 제안을 거절했던 선대 의장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원하는 걸 내주고 다른 걸 얻기 위해 찔러보는 편이 훨씬 나았다.
“한데…… 탑주님. ‘황금 가도’에 창궐한 악마들 때문에 아직도 다른 지역과의 교역이 원활하지가 않습니다. 외람되지만, 혹시 마법사를 좀 더 파견해 주실 순 없으신지…….”
“그곳엔 이미 인보커 등위 마법사들을 많이 보내지 않았는가? 뭔가 착각하나 본데 황금 가도의 지분은 우리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다. 설마 내버려 두면 다른 도시가 알아서 해결할 일에 컨저러 이상의 인력을 낭비하라는 건 아니겠지?”
“…….”
얼마 전, 동맹의 주요 도시를 잇는 교역로인 ‘황금 가도’에 악마들이 창궐했다. 그 수가 적지 않을뿐더러 낌새도 심상치 않았다.
‘확보한 정보에 의하면, 뿔이 두 개인 상급 악마들까지 다수 목격되었다던데…… 그러면 다른 도시의 병력들로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의장은 말을 아꼈다. 이는 악마를 마주하고 반쯤 미쳐 버린 정보원이 전한 정보인지라 진위 여부가 불투명했다. 괜히 확실치 않은 정보를 전했다가 훗날 틀린 걸로 밝혀지면 자신의 목이 달아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마냥 휘둘리기만 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의장은 아슬아슬하게 목이 위험하진 않은, 그러나 마탑주가 매우 껄끄러워하는 화제로 말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항상 마탑의 인력이 부족한 게 안타깝기만 할 따름입니다. ‘초대 마탑주’님만큼 대단한 대마법사가 아직 살아계셨으면 현대 탑주님의 부담도 훨씬 덜하셨을 텐데…….”
“…….”
의장은 슬쩍 눈치를 살폈다. 마탑주는 가늘게 눈을 치떴다.
“초대 마탑주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너도 마탑의 최하층에서 그녀의 무덤을 보지 않았더냐?”
“예, 맞습니다, 탑주님. 다만, 최근 남부의 대수림 쪽에서 계속 이상한 소문이 들려와서…….”
“이전에 있던 일은 벌써 잊은 건가, 의장.”
“…….”
서릿발 내린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두건 아래의 눈동자에 귀기가 어렸다.
“명심해라.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천치처럼 아무 생각 않고, 개처럼 복종하며 살겠다고 엎드려 빌었던 비굴함이 네 목숨을 살렸다. 분수에도 맞지 않게 머리 굴리지 말고 지금처럼 네 본분에만 충실하거라, 콘라드.”
“…….”
본명을 불린 의장은 주인에게 걷어차인 돼지처럼 힘없이 눈길을 떨구었다. 마탑주는 싸늘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번뜩이는 섬광이 일고 배불뚝이 의장의 모습이 탑 바깥으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탁 트인 공간에 혼자 남은 마탑주는 홀로 세계의 비밀을 깨달은 선지자처럼 고독해 보였다. 그는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감정들을 곱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짐을 지고 구름이 보이는 바닥 위를 거닐다가, 저 멀리 남쪽을 내다보며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무의미한 기다림은 그만두시지요. 당신이 바라는 자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멜리사…….”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