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46)
46화. 황야의 무녀 (2)
비습한 어둠 속에서 이슬비가 흩날리는 새벽녘, 카딤은 떠날 준비를 갖췄다.
방어구는 늘 그렇듯 간소한 가죽 견갑이 끝. 무기는 모기와 연어, 지옥불 단검까지 모두 챙겼다. 악마의 피는 빙의종 악마의 피가 조금, 히드라의 피가 한 모금 남아 있었다. 어지간해선 쓸 일 없겠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다소 마음에 걸렸다.
‘가는 길에 적당한 악마라도 하나쯤 만나면 좋겠군.’
의뢰주가 알아채면 기겁할 만한 생각을 하며 여관 앞으로 나섰다. 일레니아는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차림새는 어제와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비를 피하기 위해 쥐색 망토를 뒤집어쓴 차림이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부지런도 하셔라.”
“그러는 그쪽이 더 일찍 일어난 것 같은데.”
“흐흐, 제가 원래 설레는 일이 있으면 전날에 잠을 잘 못 자거든요. 그럼 슬슬 출발할까요?”
목적지는 메센의 동쪽 평원 어딘가라고 했다. 말을 타고 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불가능했다. 일레니아는 멀미가 심해서 자신은 말 근처에도 못 간다고 진저리를 쳤다.
카딤은 유적의 위치는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일레니아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보란 듯이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석패(石牌)를 하나 치켜들었다. 석패의 가운데에는 새끼손톱만 한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뻗친 은은한 빛줄기가 화살표처럼 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황야를 떠돌다가 우연히 주운 물건인데 유적에 가까워지면 항상 그쪽을 가리키더라고요. 이게 없었으면 아마 무녀들의 유적을 찾아다닐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카딤의 눈초리가 꿈틀 떨렸다. 그는 저 물건이 무엇인지 보는 순간 직감했다.
‘저건…… 주물(呪物)인데.’
엘가의 사제가 성유물을 만들고 마법사들이 마도구를 만들듯, 황야의 무녀들은 신묘한 주술이 깃든 ‘주물’을 만들 수 있었다. 다만 제작 과정이 지극히 까다로운 데다 만들 수 있는 무녀의 수도 적어, 그 희소성은 성유물이나 마도구보다도 한층 더한 수준이었다.
‘일부러 찾아다녀도 얻기 힘든 주물을 ‘우연히’ 주웠다, 라…….’
의혹이 한층 더 깊어졌다. 정작 일레니아는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는 듯 생글거리며 석패의 효능을 자랑하기에 바빴지만.
빛줄기를 따라 걸어가다 보니 저 멀리 지평선에서 희부연 광조가 꿈틀대는 게 보였다. 그러나 두껍게 깔린 비구름이 여명을 가로막아 창공의 명암은 여전히 어둡고 흐릿한 빛깔을 벗어나지 못했다. 빗방울을 양껏 집어삼킨 흙바닥은 거듭 습하고 비릿한 내음을 토해냈다. 나란히 이어진 질척한 발자국 밑으로 이따금씩 지렁이가 튀어나와 몸을 뒤틀어댔다.
이슬비는 어느덧 가랑비 정도로 굵어졌다. 일레니아는 망토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지 않게 자락을 여몄다. 카딤은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건조하게 물었다.
“황야에는 무녀들을 찾기 위해 간 건가.”
“예? 아, 예! 황야는 모든 아탈라인의 고향이니까요. 무녀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면 그곳이 가장 가능성이 높을 거라 생각했죠.”
“그곳은 지금 어떻지. 이전에도 그다지 여행하기 좋은 곳은 아니었는데.”
“황야요? 물론, 여행하기 좋은 곳은 아니었죠. 심할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죽을 뻔한걸요? 갈증과 허기는 기본이고, 더위에, 독충에, 괴물에, 가끔씩은 악마까지……. 뭐,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된 거 아니겠어요?”
“…….”
“어, 그런데 용병님은 황야에 가 보신 적이 있으세요? 요즘은 아탈라인들 중에서도 가본 분들이 거의 없던데…….”
“……있었지. 오래전에.”
용사 일행이 마경으로 가기 위해 선택했던 길이 산맥을 넘고 황야를 가로지르는 경로였다.
마경에서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도 제법 호된 고생을 해야 했다. 그 후로 카딤에게 황야는 아탈라인의 정신적 고향이 아닌 천재 소녀 마법사에게 쌍욕을 가르쳐 준 곳 정도의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하여간 황야에서 여자가 어떻게 생존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물쩍 넘어가는 걸 보아 다시 물어봐도 제대로 된 답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하여, 카딤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황야의 무녀들에겐 어쩌다 관심을 갖게 된 거지. 그쪽은 아탈라인도 아니면서.”
“…….”
일레니아는 망토를 좀 더 깊게 여몄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먼 산을 바라보듯 시선을 돌리곤 긴 침묵을 지키는 일레니아. 어렵사리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라죠. 승자가 걸어온 길은 금장과 화환으로 장식되어 길이길이 보존되고 기념되지만, 패자가 걸어온 길은 오물과 모욕으로 얼룩지고 때로는 아예 사람들의 뇌리에서 영영 잊히기까지 해요.”
“…….”
“그런데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 법칙이 왜 신과 그 추종자들에게까지 적용되는 건지. 어떤 신의 사제들은 대륙 전체에 위세를 떨치며 번영을 누리게 되고, 어떤 신의 사제들은 핍박받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그 차이를 가르는 기준은 대체 무엇인지.”
“…….”
“……그래서 저라도 잊힌 자들의 흔적을 찾아내고 기록하자 결심했을 뿐이에요. 일평생 탐구와 고찰의 길을 걷는 고고학도로서요. 아, 뭔가 좀 부끄럽네요! 사실 제가 그렇게 거창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닌데, 흐흐…….”
끝부분에 이르러 일레니아의 목소리는 다시 이전처럼 경쾌한 음색으로 돌아왔다. 카딤은 그녀의 얼굴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언뜻 들어선 자연스레 이어지지만, 되짚어보니 상당히 위화감이 드는 대답이었다.
“…….”
하지만 그 부분을 딱 짚어 지적하기는 애매했다. 결국 카딤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나아갔다. 일레니아도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이 목적지에 도달한 건 정오 즈음이었다.
*
마지막 황야의 무녀들이 남긴 유적을 관람한 카딤의 소감은 이러했다.
“……이게 유적이라고?”
“예, 정확히 말하면 유적의 입구…… 라고 추정되는 곳인데…….”
일레니아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유적의 입구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거대한 석문이나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는커녕 조그마한 주춧돌조차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목적지의 풍경은 그냥 오면서 보았던 흔해 빠진 평원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일레니아는 굴하지 않았다. 석패를 들고 인근을 한참이나 떠돌더니, 빛줄기가 가장 강해지는 지점에 이르자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카딤을 불렀다.
“여기, 여기 보세요! 여기 있잖아요. 황야의 무녀들이 남긴 유적! 무슨 무슨 ‘입구’라고 적혀 있는 거 보이시죠?”
“…….”
그곳에는 알 수 없는 고대 문자가 적힌 석판 하나만이 파묻혀 있었다.
카딤은 희미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사실 1회차 때부터 황야의 무녀들에 대한 카딤의 감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대립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들은 아탈라의 대전사인 카딤에게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는 명백한 아군이었다. 허나 그 조언과 도움이 지극히 귀찮고 간접적이고 난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어 목이 마르다고 말하면, 삽을 내어준 다음 우물을 파기 적절한 위치가 적힌 지도가 파묻힌 곳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붙잡혀간 괴물이 그득한 동굴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식.
시련과 고난이 수반되지 않으면 결실도 없다는 게 아탈라의 뜻이라던가. 하지만 게임적으로 보자면 퀘스트를 쥐어짜기 위한 편의주의적인 설정일 테고,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었다.
‘……저들이 신통력이 부족한 걸 쓸데없는 헛고생과 겉만 번지르르한 신비주의로 애써 포장한 거지.’
하여간 이 또한 그와 비슷한 짓거리로 보였다.
저 석판은 진짜 어디론가 들어서는 입구의 표지가 아닐 터였다. 아마 죽음은 새로운 삶의 입구, 따위의 현학적인 헛소리를 새겨 놓은 물건이겠지. 감춰 놓은 수수께끼를 파헤치면 무언가 보상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들이는 수고에 비하면 턱없이 소소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예측이 틀릴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았다. 황야의 무녀 중에서도 딱 한 명, 그렇지 않은 예외는 있었으니까.
그 누구보다 뛰어난 신통력을 지녔기에 번거로운 과정 없이도 경이로운 이적을 일으켰던 무녀가.
“…….”
카딤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일레니아는 유적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한동안 부산을 떨었다. 가방에서 고대 문자가 새겨진 부적, 기괴한 쇠 장식, 녹슨 청동 방울 따위가 줄줄이 튀어나왔다.
“아르, 델ㄹ- 키아? 로ㅅ덴 게- ㅁ라, 스-데ㅂ…….“
골동품들을 나란히 늘어놓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거나 땅을 더듬대며 개처럼 기어 다니는 일레니아. 어떻게 봐도 맛이 간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카딤은 시큰둥하게 그 꼬락서니를 지켜보았다. 그만둘 기미가 없자 아예 자리에 눌러앉았다. 몸을 받치려 뒤를 짚는 손길에 우연히 석판이 닿았다.
돌연 세상의 질감이 변했다.
“……!”
끄저저저저저저적…….
너덜거리는 벽지를 한 꺼풀 뜯어내는 것처럼 흐릿한 하늘과 축축한 들판의 풍경이 벗겨졌다. 그 너머로 천천히 드러나는 흑단 같은 어둠. 추적추적 쏟아지던 빗줄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고 혼탁한 공기만이 폐부로 스며들었다.
시야가 암순응하려는 찰나 벽에서 횃불이 피어올랐다. 양옆이 틀어막혔고 긴 통로처럼 뻗은 공간,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매끈한 바닥과 벽면, 그리고 얼떨떨한 고고학자의 면면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뭐, 뭐죠? 뭘 하신 거죠? 무슨 일이 벌어진…… 아니, 여긴 대체…….”
“…….”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 메센의 동쪽 평원에서 정체불명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카딤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투척도끼를 치켜들었다. 그 역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한 맥락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축적된 경험과 본능이 일러바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꽤나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진 것 같다고.
“이쪽으로 와라. 그 잡동사니들은 빨리 다 챙겨 넣고.”
“예? 아, 아, 예!”
카딤은 뒷길로 가보았다. 얼마 가지 않아 출구 없이 꽉 막힌 벽이 나타났다. 가까이 가 두들겨봐도 공음(空音)은 들려오지 않았다.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기만을 종용하는 통로였다.
고개를 돌리자 설명을 바라듯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카딤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말했다.
“나도 무슨 일이 생긴 건진 모른다. 뭔가 불가사의한 주술이 작동한 것 같군. 다만, 이대로 있을 순 없으니 안으로 가서 출구를 찾아볼 생각이다. 내가 먼저 가서 살펴볼 테니 여기 남아 있어도 좋다.”
“아, 아뇨, 저도 따라가겠어요! 가만 있는다고 안전하리란 법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가는 길에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주의하거라. 절대로 아무거나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예, 알겠어요.”
촉각을 곤두세우고 느릿하게 걸음을 내딛는 카딤. 다행히 당장 위협적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일레니아도 혼란을 추스르곤 야만인에게 발걸음을 맞췄다. 벽면에 규칙적으로 횃불이 늘어서 있어 공간은 마치 자연석을 깎아 만든 회랑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평이한 감상이었다. 수백 걸음쯤 나아간 후, 두 사람은 이곳이 결코 그렇게 범상한 공간이 아니라는 걸 절감하게 되었다.
“…….”
“…….”
빼곡하게 들어찬 새빨간 고대 문자, 형체가 일그러진 사람의 신영, 뒤틀린 무기의 윤곽, 포효하는 괴물과 악마들의 그림자…….
흡사 강박증에 걸린 광인이 휘갈겨 놓은 듯, 기괴한 문양들이 손톱만 한 여백조차 남겨놓지 않고 빽빽하게 벽면과 바닥을 메우고 있었다.
광경에 압도당한 일레니아는 슬그머니 카딤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설마 여기가…… 정말 마지막 황야의 무녀들이 만든 유적일까요? 그렇지만 지금까진 단 한 번도 들어오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어째서…….”
“…….”
카딤은 묵묵히 생각했다. 자신의 예측이 틀렸다고.
그 석판은 정말로 ‘입구’가 맞았다. 주술로 빚어낸 이 기이한 공간으로 사람을 소환하는 ‘입구’. 황야의 무녀, 그 작자들이 설마 그렇게 정직하게 안내 문구를 적어 놓았을 줄은 미처 몰랐다.
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멈춰 설 순 없었다. 카딤은 옷자락을 붙든 손을 매정스레 뿌리치고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일레니아는 멋쩍게 입꼬리를 말다가 재차 뒤쫓았다.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불길한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더니, 곧 까마득한 어둠의 저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둥…….
“이게 무슨 소리죠? 북소리?”
“…….”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통로의 끝에 이르러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지름은 긴 걸음으로 마흔 걸음은 가야 할 만큼 넓고, 화관처럼 천장 맡에 둘려진 횃불이 불그스름한 조명을 비추는 방.
그 한구석에 붉게 칠해진 가죽 북과 연주자도 없는데 저 혼자 떠올라 가죽을 두들기는 북채가 있었다.
둥, 둥, 둥, 둥!
“뒤로 물러나라. 조짐이 좋지 않군.”
“엇!”
카딤은 일레니아의 팔을 잡아끌어 완전히 물러나도록 했다. 소품과 지형만 봐도 알 수 있듯 무언가 나타나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칼과 도끼를 매섭게 치켜들고 정신을 바짝 집중했다.
과연 예상을 배반하지 않고 무언가가 나타났다.
쿠드득, 쿠득, 쿠득…….
밑에서부터 치밀어올라 정체 모를 형상을 빚어내는 흙.
카딤은 멍청하니 저것이 완성되길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곧장 흙더미를 향해 도끼를 집어 던졌다.
패래래랙, 퍼 – 걱!
먼지와 자금자금한 알갱이가 튀었다. 흙더미는 산산이 박살 나며 그 형체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방 안에선 다른 흙더미들도 동시다발적으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카딤은 둥글게 인력을 휘어잡으며 팔을 넓게 옆으로 뻗었다.
패래래랙, 퍼거거거거걱!
반달을 닮은 호를 그리며 되돌아오는 ‘연어’. 그 궤적에 휩쓸린 흙더미들이 연달아 먼지를 폭발시키며 형체를 잃고 무너져내렸다.
카딤은 다시금 연어를 내던지는 동시에, 칼자루를 길게 내뻗고 모기를 휘둘렀다. 피를 머금지 못한 칼날은 불만족스럽다는 듯 진동하면서도 스스로 자라나는 흙을 착실히 부수었다. 쇠붙이의 난장에 흙이 우수수 휩쓸리며 카딤을 중심으로 자욱한 토사의 폭풍이 몰아쳤다.
퍼거걱, 퍼걱, 콰과과과과 – !
하지만 방은 넓었고 자라나는 흙더미는 너무 많았다.
카딤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것들이 마침내 그 형상을 완성했다. 두 발로 꼿꼿이 선 흙더미는 흙의 질감을 벗어던지고 가죽과 강철, 그리고 구릿빛 살덩이로 이루어진 표면을 갖추었다.
카딤의 눈매가 꿈틀 떨렸다. 그는 완성된 형상이 그리 낯설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그야 자신과 같은 동족의 모습이었으니까.
– 패배를 모르는 만병의 주인, 아탈라에게 영광을…….
– 영원한 전쟁의 주관자, 아탈라에게 영광을…….
음울한 어조로 그들의 신을 칭송하며 무기를 치켜드는 전사들.
둥, 둥, 둥, 둥!
잇따른 북소리가 심장을 두들겼다. 이윽고 내면에 명징한 의지만으로 퍼져나가는 울림이 들려왔다.
[아탈라의 대전사여……. 그대가 맞는다면, 시련을 극복하고 그 힘을 증명하거라.]카딤은 부득 이를 악물었다.
‘지랄맞은 무녀들, 또 개같은 수작을 벌여놨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