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47)
47화. 황야의 무녀 (3)
상스러운 욕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탈라의 전사가 맞으면 힘을 증명하라고? 그냥 눈치껏 알아보고 비켜서면 안 되나? 그렇게 면전에서 말하면 또 시련이니 고난이니 결실이니, 그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겠지?
그래도 저 말로 인해 많은 것들이 명확해졌다.
이 유적을 만든 건 황야의 무녀들이 확실하다는 것, 만든 목적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라는 것, 그 때문에 자신과 고고학자가 들어설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저 흙으로 빚어진 전사들을 죄다 쳐부숴야 한다는 것.
둥, 두둥, 둥, 두둥, 둥!
북소리가 바뀌자 전사 한 명이 부릅 눈을 치뜨더니 이쪽으로 돌격했다.
– 아탈라아아아아아!!!
음울하게 중얼대던 아까와는 영 딴판인 기백. 카딤은 내려치는 칼날을 모기로 틀어막고, 검신을 비틀어 떨친 다음 적의 복부를 깊숙이 찔렀다. 한데 전사는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다시 칼을 휘둘러 반격했다.
– 어림도 없다! 아탈라께서 나와 함께…….
쾅 – !
카딤은 칼날을 피하고 턱주가리에 섬광처럼 주먹을 먹였다. 굳은 점토를 후려친 것처럼 안면이 통째로 으지직 갈라졌다. 전사가 무릎 꿇자, 팔을 뒤틀어 꺾으며 후방을 점하고 폼멜로 뒤통수를 힘껏 내리찍었다. 머리가 완전히 박살 난 전사는 그제야 흙으로 돌아가 바닥에 엎질러졌다.
– 아탈라아아아!!
– 아탈라아아아아!!
둥, 두둥, 둥, 두두둥!
또 다른 전사 두 명이 달려들었다. 베기나 찌르기로는 큰 피해를 주기 힘들어 보였다. 카딤은 모기를 거두며 상체를 틀었다가 연어를 꺼내 투척했다.
패래래래래랙, 쿠구구구광 – !
세차게 돌아가는 회청색 도끼날은 머리통을 으스러뜨리며 관통하고 덤으로 그 뒤에 있는 머리통까지 몇 개 더 분쇄해 버렸다. 무형의 힘을 끌어당기자 도끼날은 회전에 다시 박차를 가하고 흙의 전사들을 파괴하며 주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패래래래래랙, 콰 – 앙!
– 아탈라아아아아!!!
허나 옆에 선 전사는 귀환하는 도끼날에 가슴팍을 꿰뚫렸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달려들었다. 구멍 난 상반신을 허위허위 흔들며 금세 목전에 이르는 전사.
육중한 철퇴가 카딤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카딤은 도끼머리가 뒤로 가도록 둔기처럼 붙들고 내려찍는 철퇴머리를 막아냈다.
카 – 앙!
벽을 타고 올라 공명하는 명징한 금속성.
한철로 만들어진 투척도끼야 당연히 멀쩡했다만, 흙으로 빚은 철퇴도 그다지 큰 손상을 입은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전사의 힘 역시 만만치 않아 카딤도 일순간 찌릿한 충격을 느꼈다.
‘……빌어먹게 좋은 흙을 쓰나 보군.’
급히 자세를 낮추고 발을 걸었다. 기우뚱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전사를 향해 용솟음치듯 도끼날을 올려 쳤다. 와장창 파편이 비산하며 머리가 박살 나고, 전사는 그대로 철퇴를 손에서 놓쳤다. 카딤은 입에 들어온 흙먼지를 툽 내뱉고 생각했다. 역시 머리통을 박살 내야 한다, 이건가.
채앵, 퍼 – 걱! 패래래래랙, 퍼거거걱!
칼을 튕기고 반격하여 한 놈의 대가리를 부수고 그놈의 몸을 집어 던져 세 놈을 동시에 쓰러뜨렸다. 쓰러진 놈들을 향해 도끼를 둥글게 내던져 연달아 머리를 터뜨렸다. 질감을 잃고 망가진 흙 인형들이 바닥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나 아군이 눈에 띄게 줄었는데도 흙 전사들의 기세는 쇠하질 않았다. 아니, 몸뚱아리가 반쯤 박살 난 녀석들조차도 아랑곳 않고 함성을 외치며 달려들었다.
– 아탈라아아아아아!!!
– 영원한 전쟁의 주관자에게 영광을!!
자신의 안위를 전혀 돌보지 않는 자살 돌격의 파도. 카딤조차도 모든 공격을 막을 순 없었다. 뺨을 긁히고, 팔뚝과 다리를 베이며 자잘한 부상이 늘어갔다. 이런 일 대 다수의 난전에선 항상 ‘흡혈’로 상처를 치유했는데 피가 없는 놈들인지라 이번엔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히드라의 피를 마시고 휩쓸어 버려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둥, 두둥, 두둥, 둥!
문득, 카딤은 저 북소리가 무척 거슬린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 저 북이 버프라도 주고 있는 건가.‘
확인해봐서 나쁠 건 없었다. 허리춤에서 지옥불 단검을 꺼내 쏜살같이 투척했다.
쐐 – 액!
그러자 팽그르르, 전사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가더니……
– 아탈라아아아아아!!
퍼 – 걱! 화르르르륵 –
……한 녀석이 날렵하게 투신하여 단검을 막아냈다.
불에 휩싸인 전사는 바싹 그을리며 딱딱하게 굳었다. 다른 전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북을 엄호하는 진형을 갖추었다. 버프를 주는 건지 뭔진 모르겠지만, 저 북이 저들에게 중요한 물건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목표물이 확정됐으면 저들이 아무리 막아 봤자였다. 카딤은 한 손에 연어를 들고, 한 손엔 지옥불 단검을 쥐었다. 도끼를 던져 흙 전사의 장벽을 붕괴시키고 그 후에 단검을 던질 작정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홀연히 나타난 신영이 먼저 북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기에.
쩌저저저적!
“제가 처리했어요, 용병님! 여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찢어진 북을 쳐들고 이리저리 흔드는 일레니아.
카딤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는 분명히 보았다. 그녀의 손에서 흐릿한 자욱이 튀어나왔다가 도로 사라지는 걸. 무슨 감춰둔 유물이라도 사용한 건가?
의문이 들었지만 남은 전사들을 처치하는 게 먼저였다. 버프를 주는 게 맞았는지 북이 찢어지자마자 전사들은 기백을 잃고 병자처럼 비실거리기 시작했다.
– 아탈라아아아…….
– 아탈라아아아아…….
퍼거거거걱 – !
흙으로 빚어진 아탈라의 전사들은 더 이상 피와 땀이 흐르는 대전사의 맞수가 되지 못했다. 카딤은 줄 지어선 항아리를 박살 내듯 거침없이 적을 휩쓸어 버렸다. 모든 전사들이 흙으로 돌아가기까진 불과 한 식경도 걸리지 않았다.
전투는 끝났다. 심호흡을 하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슬그머니 일레니아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산더미 같은 전사들의 잔해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야만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연신 혀를 내둘렀다.
“경이롭네요. 흙으로 만들어진 용맹한 전사들과…… 그 막강한 군세를 단신으로 쳐부순 아탈라의 용병……. 꼭 신화나 전설 속의 이야기를 엿본 듯한 기분이에요.”
“…….”
“아, 이런, 제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요. 괜찮으세요? 어디 크게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괜찮다. 그런데 아까는 어떻게 북을 찢은 거지.”
“흐흐, 험지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이 모르는 무기 하나쯤은 만들어 둬야 하니까요. 적의 얼굴에 던지려고 제가 감춰두었던 ‘돌멩이’를 썼다고 치죠.”
“…….”
일레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싱긋 웃었다.
카딤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던컨에게 말해준 내용은 또 어떻게 엿들은 거지. 그러다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일레니아가 처음으로 있었던 입구, 그 부근에는 분명 자신이 쓰러뜨린 게 아닌 흙 전사의 잔해가 서너 구 정도 있었다.
‘저만한 힘을 감추고 태연하게 호위를 요청했다, 라…….’
그냥 넘어가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아군인지 적군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계속 그 속내와 능력을 감추고 자신을 염탐하는 놈을 옆에 둘 순 없었다. 카딤은 칼자루를 꾹 손에 쥐었다. 여자의 진의와 정체를 추궁해 보고 답하지 않으면 물리력을 동원할 생각으로.
간발의 차로 그 생각을 실천하는 데 실패했다.
목소리가 아닌 의지만으로 퍼져나가는 울림. 아까처럼 벽지를 벗겨내듯이 주변 풍경이 뜯겨져 나갔다.
끄저저저저저저적…….
“엇, 아니, 용병님……!”
그런데 이젠 일레니아까지 풍경 안에 포함되어, 나풀거리는 종이 인형처럼 접히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이번엔 자신만이 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드넓은 원형의 방이 사라지고 드러난 곳은 비좁은 공간. 음각으로 새겨진 문양들이 반딧불처럼 은은한 빛을 발했고, 쇠 장식이 덩굴처럼 벽과 천장을 타고 올랐다. 판석 위에 그려진 불규칙한 형태의 주술진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노파가 보였다.
노파는 기척을 느끼곤 게슴츠레 눈을 치켜떴다. 천 년의 가뭄을 견딘 땅처럼 메마르고 갈라진 목소리가 노쇠하여 늘어진 성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영겁의 강을 가로질러 다시 돌아왔구나, 대전사여. 세월의 격류 속에 삶은 한 방울의 물만도 못하나니, 어떤 모진 운명의 풍파가 그대를 떠돌게 하였고 그대는 무엇을 얻었는가? 끊이지 않는 굴레는 이젠 그릇된 피로 얼룩졌는가, 아니면 여전히 투쟁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는가?”
“…….”
우두커니 황야의 무녀를 바라보길 잠시, 카딤은 뚝뚝 어깨와 목을 풀었다.
그러곤 냅다 투척도끼를 던졌다.
패래래래래래랙, 콰 – 앙!!!
……쿠르르릉 – !
도끼는 바로 무녀의 머리 바로 옆에 박혔다. 벽면이 쩍쩍 갈라지며 공간 전체가 묵직하게 진동했다. 무녀는 흡, 주름진 눈을 치켜떴다. 단순한 위협이 아닌 진득한 살의가 실려 있는 공격이었다.
저의를 숨기고, 간을 보고, 멋대로 사람을 시험하고, 선문답을 내뱉고, 카딤은 이 온갖 음습한 짓거리에 진절머리가 났다. 손을 뻗어 도끼를 회수하며 사늘하게 선언했다.
“증명을 마쳤으니 대화의 규칙은 내가 정한다. 이제부터 질문은 오직 나만 할 수 있다. 알맹이 없는 헛소리는 금지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확실히 답해라.”
“…….”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이 도끼날이 부수는 건 벽이 아니라 그 쪼그라든 머리통과 뇌수일 것이다.”
사나운 질감을 가지고 흐르는 공기. 경악을 가라앉힌 무녀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군. 내 기나긴 여정으로 그대의 심신이 지쳤음을 충분히 감안치 못했네……. 이젠 대화에 불필요한 수사 따위를 곁들이지 않을 거라 약속하지.”
“…….”
늙은 무녀가 저자세를 취하자 카딤도 어느 정도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는 도끼를 회수하고 심호흡한 후, 가부좌를 틀고 무녀와 마주 앉았다.
“이 유적을 만든 이유는 무엇이지. 안내한 녀석이 말하길 이런 유적이 대륙 곳곳에 있다고 하던데.”
“기약 없는 세월을 가로질러 그대를 맞이할 공간이 필요했다. 황야의 무녀들은…… 힘을 잃어 가고 있었어. 완전히 힘을 잃기 전에 그나마 남은 신통력을 끌어 유폐를 택한 거지.”
“……힘을 잃었다니? 이유가 무엇이지? 아탈라가 내어준 힘을 거두기라도 했단 말인가?”
“글쎄,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혹자는 무녀들이 아탈라의 노여움을 산 거라 말했고, 혹자는 아탈라가 우리에게 내리는 시련이라 말했고, 혹자는 아탈라와 우리를 잇는 ‘대전사’가 사라져서 그런 거라 말했지. 허나 진실은 오직 전쟁과 연회가 끊이지 않는 곳의 주인만이 알고 있을지어니……. 혹여 바깥세상에서 힘을 되찾은 무녀들을 보았는가?”
“아니,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비좁은 골방에 갇힌 망령들을 제외하면, 황야의 무녀들은 세상에서 영영 사라진 게로군.”
처진 눈두덩에 파묻힌 눈동자에 아릿한 반사광이 스쳐 지나갔다. 신으로부터 버려지고 이젠 영원히 그 대가 끊겼음을 깨달은 사제의 눈빛.
섣부른 판단이었다. 카딤은 ‘모기’와 ‘연어’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아탈라가 완전히 우릴 버린 건 아니더군. 미약한 수준에 불과하지만, 보다시피 난 여전히 그 축복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로군.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들의 기다림도 마냥 헛되지는 않은 듯하이.”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한 거지. 정말 황야의 무녀들은 ‘아탈라의 대전사’가 돌아오면 신통력을 되찾을 거란, 그 사소한 가능성만을 믿고 수백 년의 유폐를 택했단 말인가? 이 터무니없는 계획을 처음으로 세운 자가 대체 누구지?”
무녀는 병든 거북처럼 목을 내빼고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마른 입술에서 나올지도 모를 거라 예상했던, 그러나 차마 그러지 않길 바랐던 호칭이 튀어나왔다.
“‘맹안(盲眼)의 무녀’님을 기억하는가.”
심장이 멎은 듯한 고요.
카딤은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언갈 꽉 묶고 있던 끈이 탁 풀리는 느낌과 함께 바람 빠지듯 잊을 수 없는 이름이 새어 나왔다.
“시릴.”
“……그래, 그런 존함이셨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잊고 있었군.”
“시릴이 이 계획을 세운 건가.”
“그렇다. 그분께서 계획의 골자를 세우고 대부분을 이행하셨다. 우리들은 사실 그즈음 신통력을 거의 다 상실해 아주 작은 도움밖에 드리지 못했지. 이 유적에 그분의 주술이 깃들지 않았더라면 이 노구는 벌써 먼지만도 못한 티끌이 되어 바스라졌을 게야.”
“보다 자세히 사연을 설명해 보아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걸.”
카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무녀는 쓸쓸한 눈길을 높이 쳐들었다. 지금, 이곳을 떠나 하염없이 머나먼 과거를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마른 입술을 뗐다.
“대악마를 토벌하고 그대가 사라진 후, 그분께선 단장의 고통과 그리움을 견디며 그대를 찾아 빛이 들지 않는 기나긴 낮과 밤을 헤매었다. 전사들과 무녀들이 그분의 지팡이를 자처하자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발 가죽이 닳고 피범벅이 되도록 방황하셨지. 허나 그 어디서도 그대의 발자욱 하나 찾을 수가 없었어.”
“…….”
“그렇지만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선 비록 지금은 그대를 찾을 수 없어도, 그대가 언젠간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우리의 품으로 돌아올 거라 믿으셨다. 하여 그때를 위해 그대에게 필요한 물건을 예비하기로 하셨지.”
“…….”
“그분은 오래도록 그것을 빚는 데만 몰두하셨다. 먹지도 마시지도 잠들지도 않고 기도 드리길 백 일, 오지와 험지를 떠돌며 정순한 제물을 모으길 천 일, 혼백을 무아경에 던지고 신통력을 소진하며 의식을 치르길 만 일……. 일이 끝나갈 즈음 몸은 누더기처럼 망가졌고 정신은 모래 위의 성처럼 불안정해졌지. 그렇게 가장 위대한 무녀의 정기를 수십 년이나 갉아먹은 끝에 어떤 ‘주물’들이 완성되었어.”
“…….”
“그분은 그러고도 휴식하지 않으셨다. 일을 마치고는 마지막으로 온 대륙에 이와 같은 유적을 만들고 나와 같은 무녀들을 전령으로 세워두셨다. 그대가 이 세상의 어디로 돌아오든, 언제 돌아오든, 반드시 이 이야기와 물건들을 전달받을 수 있도록.”
“…….”
“물론 우리들이 전령의 역할을 자처한 건, ‘대전사’가 돌아오면 잃어버린 힘도 돌아올 거란 그분의 말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은 탓이었지. 그렇게 지금까지 수백 년의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지게 된 게야.”
“…….”
“그것이…… 이 유적이 세워지고 내가 그대를 맞이하게 된 사연의 전말이다.”
아득한 세월의 먼지가 더께를 이룬 듯 텁텁한 뒷맛과 함께 무녀의 이야기가 끝났다.
카딤은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힘을 너무 꾹 쥔 탓에 손톱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어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카딤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육신의 고통 따윈 바닥없는 늪에 가라앉는 듯한 이 먹먹함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무녀는 작게 날숨을 토하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 위에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 같은 섬광이 찬연하게 빛났다.
“‘각인의 바늘’. 이것이 바로 빛을 잃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방황하다 스러진 어느 무녀의 고통과 헌신이 담긴 결실이다. 다시는 만들 수 없고, 다시는 만들어져선 안 되는 비극의 주물이지.”
카딤은 피를 문질러 닦고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래서, 그 주물의 효과는 무엇이냐.”
흘러내린 눈두덩 너머 혼탁했던 동공에 날카로운 예기가 돌아왔다. 황야의 무녀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그 기나긴 세월을 견뎠다는 듯, 음절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찍어 누르며 답했다.
“이것에 악마의 피를 찍어 문신을 새기면, 악마의 피를 마시지 않고도 그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