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49)
49화. 황금 가도 (1)
나흘을 내리 쉰 끝에 참사관은 완쾌했다. 엔리코는 침대에 걸터앉아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으쯔쯔쯔…… 후우, 참사관이 된 후로 이렇게 오래도록 푹 쉬어본 건 정말 처음이오. 거의 무덤에 들어갔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로군.”
“다 나은 게 맞는가, 참사관? 또다시 앓아누우면 그땐 그냥 버려두고 가겠다.”
“아, 이런, 그대들에겐 정말 미안하게 됐소. 일정이 지체된 만큼 보수를 추가로 줄 테니 너무 노여워하진 마시오.”
“…….”
카딤은 대충 고개를 까딱였다. 보상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지만 준다는 돈을 안 받을 이유는 없었다.
참사관 일행은 곧바로 메센을 떠나기로 했다.
여덟 명의 일행은 수석 보좌관이 전해준 새 말을 타고 마을의 북쪽을 향해 빠져나갔다.
일찍 일어난 마을 사람들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 그 행렬을 주목했다. 하지만 금세 다들 시선을 거두고 문 앞을 쓸거나 여물을 나르거나 따위의 하던 일에 집중했다. 자경단이 사라진 후의 짧은 혼란도 사그라들고 한창 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되찾아가던 와중. 오가는 발길에 일일이 신경 쓰기에 이곳의 하루는 너무나도 짧았다.
메센의 북쪽도 오면서 보았던 것과 다를 바 없이 드넓게 탁 트인 평원이었다. 동틀녘의 햇살이 앞길에 융단처럼 내깔리고 구름을 어루만지던 바람이 땅으로 내려와 금빛과 초록의 너울을 만들어냈다. 복잡하게 헤매거나 어딘가에 경유할 필요도 없이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일직선으로 이틀만 내리 달리면 바로 목적지인 황금 가도였다.
이번엔 정말로 여정 중 별다른 문제가 터지지 않았다.
참사관은 완쾌를 과시하듯 기운차게 말을 몰았다. 병사들은 산뜻한 날씨와 풍광을 만끽하며 뒤따랐다. 행상인은 간만에 야만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수다를 떨었고, 대장장이는 이젠 정말 가족들과 재회할 거란 기대감에 부풀었다. 수 킬로미터 밖의 들풀이 흔들리는 것조차 놓치지 않는 야만인의 호위와 함께 그들은 쾌속으로 황금 가도를 향해 나아갔다.
– 이히히히힝!
– 푸르륵, 푸르르륵…….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자국이 풀 바닥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분홍빛 해가 뭉근하게 저물 무렵, 그들은 야영지로 적절한 곳을 찾았다. 옆으로 도랑이 흐르고 땔감으로 쓸 나무와 덤불도 충분해 하루쯤 묵기 딱 좋은 장소.
“오늘은 여기서 묵는 게 좋겠군, 참사관.”
“그래야겠소. 펠드릭! 오늘은 여기서 묵을 테니 짐을 풀거라!”
병사들은 말을 묶고, 짐을 풀고, 불을 피우며 부산하게 야영 준비를 했다.
느지막한 저녁 시간. 일행은 메센에서 챙겨온 호밀 파이와 훈제된 닭고기를 꺼내 먹었다. 병사들은 쓰고 있던 투구를 냄비 삼아 잡탕죽까지 끓여 먹었고, 엔리코와 카딤은 식후주로 포도주를 들이켰다. 던컨은 굴락이 무언갈 맛나게 들이키는 걸 보곤 호기심을 갖고 다가갔다가, 낯설지 않은 지린내를 맡고는 진저리를 치며 달아났다.
식사를 마친 다음, 병사 한 명이 경계를 서고 나머지는 자유 시간을 가졌다.
굴락이 장비를 손봐 주겠다고 하자 병사 두 명은 부리나케 단검과 쇠 장갑, 망가진 허리띠 따위를 가져왔다. 나머지 병사 한 명은 던컨과 나무 작대기로 대련을 벌였는데 놀랍게도 박빙의 승부 끝에 던컨이 패배했다.
“아악! 아니, 제가 안 봐드렸으면 이겼을 겁니다요, 병사님! 한 판만, 한 판만 더 붙어보시죠!”
“크하하학!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십쇼! 제 날카로운 칼이 이미 던컨 씨의 목을 쳤는데, 설마 시체랑 또 싸우란 말입니까?”
병사는 나무 작대기를 하늘 높이 들고 뻗댔다. 고작 행상인을 이긴 것임에도 그는 전설적인 전사와의 혈투에서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 다른 병사들과 굴락은 장비를 손보다 말고 두 사람을 구경하며 껄껄댔다.
한편 카딤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하루 종일 내색은 안 했다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터질 듯이 복잡했다.
악마의 창궐과 부활, 교단의 아크팔라딘, 데카그램, 마탑과 마기를 다루는 마법사들, 유적과 황야의 무녀들, 베샤카, 아곤의 성난 뿔, 시릴, 나머지 1회차의 동료들, 거기다 자신을 염탐하고 작위적으로 보상을 쥐여 주는 정체 모를 녀석들까지…….
“…….”
해답을 찾기 위해 시작한 여정이건만 갈수록 의문만 늘어가는 것 같았다. 과연 마탑에 이르러 멜리사의 기록을 본다 해서 모든 의문에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카딤은 결코 그렇진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마음이 쉬이 정리되지 않아 눈을 감고 있는데 슬금슬금 누군가 불가로 다가왔다. 불청객은 흘끗 눈치를 보다가 모닥불과 같이 붉게 달아오른 카딤의 문신을 발견하곤 의문에 찬 어조로 물었다.
“음? 원래 그런 문신을 갖고 있었소? 이전에는 못 봤던 것 같은데…….”
“…….”
“흐흠, 뭐, 어쨌든 굉장히 멋진 문신이로군. 아탈라인들에겐 문신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단 얘기를 들어본 적 있소. 아마 적에게 맞설 용기와 활력을 준다고 했었나? 하하, 정말 그렇다면 나 또한 그렇게 생긴 문신을 하나쯤 새겼을 텐데…….”
“내 호의를 사기 위해 억지로 얘깃거리를 찾을 필요 없다, 참사관. 할 말이 있다면 사족은 집어치우고 곧바로 말하거라.”
“……크흠.”
속내를 읽힌 엔리코는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공연히 땔나무를 집어 모닥불을 쑤시다가 나지막이 본론을 꺼냈다.
“질문하기에 앞서, 설명 없이 물었다간 그대가 지난번처럼 노할지도 모르니 미리 맥락을 말하겠소. 물론 지금부터 말하는 얘기는 다른 사람에겐 절대 비밀이라오.”
카딤의 눈길이 슬쩍 돌아갔다. 엔리코는 몸을 숙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혹여 당신도 이미 알지 모르겠소. 대부분의 동맹 사람들은 ‘아곤의 성난 뿔’을 전설적인 투기장의 챔피언 정도로만 알지만, 그건 반쪽뿐인 진실이외다. 그는 투기장의 챔피언인 동시에 휘하에 ‘특별한 힘’을 지닌 아탈라인 전사들을 잔뜩 거느리고 있는 무장 세력의 수장이지.”
“…….”
“나도 아곤의 성난 뿔과 그 부하들이 정확히 어떤 ‘특별한 힘’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들리는 바론, 아곤을 관할령에 둔 갈렌타나 참사회는 이미 그들을 참사회에 직속시켜 마탑과 교단에 대항할 준비를 하고 있다더군. 그로 보아 필시 전사 한 명 한 명이 일당백의 힘을 지녔다는 뜻이겠지.”
“…….”
“때문에 나는 이전에 그대를 그 전사 중 하나로 생각하고 혹시 ‘아곤의 성난 뿔’과 모종의 접점이 있냐고 물었던 것이오. 그만큼이나 상식을 벗어난 초인적인 힘을 가진 아탈라인을 이전까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카딤은 침묵했다. 의외의 사실이었으나 별 감흥은 없었다. 하기야 대전사를 사칭하려면 따르는 무리와 기이한 힘 정도는 있어야겠지.
“……이제 물어보겠소. 그대는 어째서 ‘아곤의 성난 뿔’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그토록 화를 낸 것이오? 혹여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게요?”
날벌레들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따라 추접스러운 축제를 벌였다. 참사관의 낯짝에는 살얼음판을 걷듯 조마조마한 긴장이 어려 있었다. 카딤은 어지러이 뒤얽히는 불꽃과 연기와 별빛의 난장을 비스듬히 응시했다.
불티가 미물처럼 스러지고 굳은 입술이 떨어졌다.
“그는 내가 가져야 할 것을 훔쳤다.”
“……어떤?”
“‘아탈라의 대전사’란 칭호. 그건 그 구경거리 광대 녀석의 것이 아니라 본래 나의 것이다. 주인이 없는 동안은 멋대로 썼을지 몰라도 그 주인이 돌아왔으니 이젠 마땅히 이름을 돌려받아야겠지.”
엔리코는 말문이 턱 막혔다.
무수한 인간군상을 마주하고 가늠했던 참사관은 얄팍하게나마 통찰할 수 있었다. 야만인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불티를 헤집고 밤하늘을 헤매는 야만인의 눈빛, 그 안에 담겨있는 무게는 지금까지 살면서 보아왔던 그 누구의 것보다도 무겁다는 것.
어쩌면 자신이 터무니없는 인물을 마주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직감과 함께 먹먹한 경외심이 밀려들었다.
“당신은……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대체 누구길래…… 투신(鬪神)의 대전사를 정당히 자칭할 수 있는 것이오?”
답변이 이미 질문 안에 있는 질문이었다. 카딤은 구태여 그걸 지적하는 대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팅 – !
“혹시 그 은화에 새겨진 문양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참사관.”
“……으음? 이건 어디서 난 화폐요?”
“어떤 고고학자에게 받은 것이다. 아는 게 있으면 말해줬으면 하는데.”
“아니, 잘 모르겠군. 어디 참사회나 가문의 상징도 아니고…… 완전히 처음 보는 문양이오. 고고학자가 주었다면 멸망한 고대 국가의 것이 아닐까 싶구려.”
“…….”
카딤은 은화를 되돌려받고는 추가 보수 대신 이 문양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가문의 정보력이 동맹 전역에 닿는단 말이 허언이 아니라면 무언가 성과가 있을 터. 기꺼이 그러겠다는 대답이 선뜻 되돌아왔다.
“슬슬 병사와 교대해 줘야겠군. 나는 이만 보초를 서러 가 보도록 하지. 내일도 하루 종일 달려야 하니 일찍 쉬거라, 참사관.”
카딤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에 대한 첨언 따윈 일절 없었다. 엔리코는 그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다가 슬며시 시선을 거두었다.
춤추는 불꽃은 사그라들 기미가 없었다. 영원히 타오를 것처럼 어둠 속으로 허위허위 갈라진 손길을 내뻗었다. 불이 끼얹는 따스한 온기 뒤로 미지근한 밤공기가 목덜미를 스쳤다.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 이야기를 푸는 행상인의 목소리, 두들기는 쇳소리와 탁탁 튀는 불소리, 청승맞은 풀벌레 소리가 왁자하게 뒤섞여 귓가에 맴돌았다.
잠들지 못하는 야영지의 밤은 그렇게 조금씩 깊어만 갔다.
*
자유도시 동맹은 루카오니아 제국에 비해 거의 모든 부분이 뒤떨어진다.
땅덩이도 좁다. 사람도 적다. 대도시의 부호들이 축적한 부도 황제와 대귀족의 것에 비하면 우스운 수준이고, 마탑의 마법사와 용맹한 참사군도 엘가 교단의 사제와 성기사들에 비하면 빈약한 무력에 불과하다.
허나 그럼에도 딱 하나, 제국이 동맹을 결코 이길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교통.
갈기갈기 찢어져 있던 세력들이 동맹의 이름하에 통합한 이래, 동맹인들은 상업과 교역의 발전을 역사적 사명으로 삼았다. 장차 제국에 대항할 기틀을 닦는단 일념만으로 숱한 민초들이 피땀 흘려 노력하고 헌신하길 한세월, 마침내 동맹에는 주요 거점을 잇는 수많은 도로들이 만들어졌다.
그 도로들 중에서도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가 바로 이 교역로, ‘황금 가도’였다.
델루타나, 갈렌타나, 베스타나. 동맹에서 가장 큰 대도시 세 곳을 단번에 잇는 동맹의 핏줄. 잔가지로 뻗어나가는 길까지 포함하면 다른 주요 도시까지 거의 전부 포함됐다. 오죽하면 다른 도로의 이용자를 전부 다 합쳐도 그 머릿수가 이 ‘황금 가도’의 이용자만 못하다는 얘기가 떠돌 정도였다.
그리고 그 명성에 걸맞게 황금 가도로 들어서는 관문 앞에는 어마어마한 줄이 늘어서 있었다.
소달구지에 드러누운 일가족과 보따리 짐을 짊어진 노인, 그 앞에 바큇살을 고치고 있는 마부와 마차 창가에 기댄 부루퉁한 여인, 그 앞에 새치기하는 용병과 성을 내는 여행자, 그 앞에 힐끔힐끔 주머니를 노리는 부랑아, 흙바닥에 옷을 펼치고 아예 드러누운 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아, 무슨 일이 있는지…….”
“……이런 젠장, 이젠 놀랍지도 않을 정도…….”
“아니, 내가 이쪽에 먼저 서 있었는데…….”
그들이 빚어내는 덩어리진 군중의 소음. 그리고 그들로부터 풍기는 흙먼지와 땀, 동물적인 악취, 고되고 오랜 기다림의 냄새. 저마다의 여정과 일정을 짊어진 자들이 끝이 보이지 않은 줄을 이루며 겹겹이 늘어서 있었다.
카딤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면서 줄이 제법 길 거란 얘기를 듣긴 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하루 종일 기다려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한데, 놀란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난리랍니까.”
“맙소사, 레밀리온이시여…… 이 인파는 대체…….”
나머지 일행들도 늘어진 줄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평소엔 줄이 이 정도까진 아닌가?”
“그렇소.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펠드릭, 기다리는 행인들에게 가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거라.”
“알겠습니다!”
펠드릭이란 병사가 말을 몰아 군중에게 다가갔다. 여러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묻고는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관문이 봉쇄되었다더군요. 경비병이 출입을 전부 통제하고 있답니다. 저들도 이 앞에서 기다린 지만 벌써 사흘째랍니다.”
“……뭐? 관문은 왜 봉쇄된 거지?”
“그건…… 행인들도 이유를 모르더군요. 경비병들에게 물어봐도 가르쳐 주질 않는다고…….”
엔리코의 미간이 느릿하게 구겨졌다. 이유도 모르고, 언제 관문이 열릴지도 모르는데 저 행렬에 줄을 서 기다리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일단 관문 앞으로 간다. 경비병에게 가서 직접 이유를 물어봐야겠군.”
“…….”
참사관 일행은 줄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
종종 행인들의 불만에 찬 시선이나 항의 따위가 날아들기도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뒤따르는 거구의 험악한 야만인을 보자마자 절로 사그라들었으니. 카딤은 그저 존재만으로도 불필요한 시비와 위협을 억제하고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촉구하는 탁월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관문을 지키는 경비병에겐 아니었다.
“돌아가라, ‘황금 가도’는 봉쇄되었다. 다른 길을 찾거나 얌전히 줄로 돌아가 봉쇄령이 풀릴 때까지 대기하고 있도록.”
“……이유가 무엇이지?”
“말해줄 수 없다. 네놈 따위에게 말해줄 이유도 없고. 귀찮게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라, 야만인.”
경비병은 기골이 장대한 야만인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뻣뻣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의 탄탄한 강철 흉갑에 새겨진 델루타나 참사군의 상징이 바로 그 용기의 근원. 저 야만인도 이 상징이 무얼 뜻하는지 모르진 않을 테니 하등 겁먹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상징이 무얼 뜻하는지 모르는 카딤은 다시 물었다.
“이유 정돈 말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미 말해줄 수 없다고 답했을 텐데. 혹시 멍청해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 한 번만 더 물으면 고의로 업무를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야만인.”
“정말로 답할 수 없는 건가? 답하지 않으면 네놈의 아가리를 찢어 버린다 해도?”
“……뭐라!?”
경비병은 분노하여 손에 쥔 창을 내뻗으려 했다. 하지만 야만인의 동공을 마주하는 순간 미지의 공포에 사로잡혀 도중에 우뚝 멈춰 섰다. 이 창을 내뻗으면 무언가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그런 동물적인 직감.
경비병은 결국 카딤을 찌르지 못했다. 허나 소요가 일어난 걸 알아챈 다른 경비병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딤은 그들을 등지고 챙 모자를 눌러쓴 참사관에게로 돌아왔다. 그러곤 짐승이 그르렁거리듯 사납게 뇌까렸다.
“이봐, 참사관. 둘 중 하날 고를 기회를 주지.”
“……어떤?”
“저 병사들이 죄다 내 손에 찢겨나가는 꼴을 보거나, 이제 슬슬 정체를 드러내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
카딤으로선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계약은 황금 가도까지의 호위였으니 의무는 이미 다 이행했다.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물리력이나 권력의 동원이 불가피했다. 참사관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거라 말했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특별한 경우’ 아니던가?
침음을 흘리며 고민하길 잠시, 엔리코는 후자를 택했다. 그는 경비병들을 향해 홀로 다가갔다.
“무기를 치우고 관문을 봉쇄한 이유를 밝혀라, 병사들. 그리고 경비대장에게로 나를 안내하거라.”
“뭐?”
“무슨 헛소릴 하는 거냐?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경비병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층 더 위협적으로 무기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엔리코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너희들에겐 그럴 의무가 있으니까.”
저들도 이 상징이 무얼 뜻하는지 모르진 않을 테니.
그는 챙 모자를 벗고 델루타나 참사회의 문장이 그려진 반지를 내밀었다.
“렘타나의 참사관, 엔리코 튜리스다. 황금 가도의 정당한 관리주체인 델루타나 참사회의 일원으로서 다시 한번 명하겠다. 무기를 치우고 관문을 봉쇄한 이유를 밝혀라. 그리고 경비대장에게 나를 안내하거라.”
“……!!!”
경비병들의 낯짝이 파리하게 질렸다. 날벼락을 맞은 듯이 발발 떨며 굳어 있다가, 삽시간에 태도를 전환하여 무기를 거두고 우렁찬 목소리로 경례를 올렸다.
“추, 충성! 황금의 도시에 영광을!”
“충성! 황금의 도시에 영광을!”
“충성! 황금의 도시에 영광을!”
제일 계급이 높아 보이는 경비병이 내달려 와 고개를 조아렸다.
“충성! 황금의 도시에 영광을! 황금 가도 제2관문에 방문하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참사관님! 미처 알아뵙지 못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지금 바로 경비대장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엔리코는 한숨을 푹 내쉬며 챙 모자를 다시 뒤집어썼다.
카딤과 나머지 병사들은 손에서 칼자루를 놓고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