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5)
5화. 고블린, 악마, 아이들 (1)
던컨은 여러모로 극한의 상황에 몰려 있었다.
길동무가 생긴 건 좋았다. 안 그래도 혼자서 제국령을 빠져나가긴 위험하다고 느꼈던 차. 이제 허접한 괴물이나 노상강도 따윈 터럭만큼도 두렵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그 동행하게 된 ‘길동무’였다.
괴물이나 노상강도가 두렵지 않은 건 그 이상으로 야만인이 훨씬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사람인 이상 어떻게 악마의 시체를 파먹고 홀로 수십 명을 도륙 낸 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던컨은 행여 야만인의 심기가 불편해질까 매 순간 노심초사했다. 하루 종일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치껏 질문을 던졌다.
“시, 식사하시겠습니까, 나으리? 육포와 말린 감자가 있습니다.”
“여기 누우시겠습니까, 나으리? 제, 제가 따뜻하게 불을 피우겠습니다.”
“저, 근데 나으리는 어쩌다 제국령에…… 아, 알겠습니다. 조용히 하겠습니다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골똘히 살펴봐도 저 야만인의 속내는 도무지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꼭 필요한 것 외엔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긴장을 풀고 호의를 살 틈 따윈 없었다.
말도 잘 안 하고 은연중에 살기를 풀풀 풍기니, 이건 사람이 아니라 흡사 맹수라고 봐도 좋았다. 매일매일 사자의 아가리 안에 대가리를 넣고 곡예를 부리는 기분. 신경쇠약으로 던컨의 두 눈은 날이 갈수록 퀭해져 갔다.
그래도 그것만 문제였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터.
더 큰 문제는 야만인의 어처구니없는 행군 속도였다.
던컨의 직업은 행상인이었다. 그건 즉, 발이 날래고 지치지 않기론 여간해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이 야만인에 비하면 자신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나 다름없었다.
가는 방향을 알려 주면 야만인은 어느새 멀찍이 앞서 나갔다. 겨우 따라잡으면 무심하게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또다시 떠났다.
“가지.”
“가자.”
“느리군.”
“헤엑, 헉, 허억, 허어억…….”
야만인은 그러고는 던컨이 도착할 때까지 쭉 노려봤다. 마치 늦게 오면 대가리를 터뜨리겠다고 위협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자신이 길잡이라서 망정이지, 야만인이 길잡이였다면 두 사람의 거리가 벌써 수십 킬로미터는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지치지도 않는 야만인을 보며 행상인은 혀를 내둘렀다.
‘아이고, 죽겠네……. 아니, 저 인간은 다리가 뭐, 강철로 만들어지기라도 했나?’
그에겐 행군 속도를 늦춰 달라고 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혹독한 여정은 깔깔한 눈칫밥과 놀라운 상승 작용을 일으켜 불과 며칠 만에 던컨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던컨은 결심했다. 죽지 않으려면 이거, 조만간 달아나야겠다고. 어떻게든 도망칠 기회를 엿봐야겠다고.
그리고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자욱한 구름이 달빛을 집어삼키고 빛이라곤 사그라드는 잉걸불밖에 남지 않은 밤. 야만인은 나무둥치 쪽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잠들기 전 창에 찔린 상처에 약초를 짓이겨 넣어 주었는데 아프지도 않은지 곤히 잠들어 계속 저 상태였다.
던컨은 숨죽인 채 반 시진쯤 야만인의 동태를 살폈다. 뒤척이지 않는 걸 보니 깊이 잠든 게 틀림없었다. 도망치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음…….’
행상인의 시선이 잠시 나무둥치 옆에 놓인 커다란 가방에 머물렀다.
저 안에는 그의 전 재산이 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름 양초, 양털 담요, 부싯돌, 비누, 건조 식량, 은거울, 골동품 반지……. 다 합치면 도시에 노점상 하나쯤은 마련할 수 있을 만한 값어치의 물건들.
하지만 목숨보다 귀한 건 아니었다. 괜히 나무둥치 쪽으로 다가갔다간 곤히 잠든 맹수를 깨우게 될지도 몰랐다. 던컨은 깔끔하게 가방을 포기했다.
자세를 낮추고 바닥에 쌓인 나뭇잎을 살살 쓸어 내며 기어가는 던컨. 풀밭이 나타나자 그제야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조금씩 속도를 내어 잰걸음으로 나아가다, 숲 밖에 이르자마자 허겁지겁 발길을 재촉했다.
흐릿한 하늘 아래 사방에는 어둠뿐. 눈을 감으나 뜨나 똑같은 풍경만이 펼쳐졌다. 도무지 눈에 뵈는 게 없는 질주. 던컨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앞으로만 달려 나갔다.
굵은 땀방울이 목덜미를 스치고 폐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심장이 성난 방문자처럼 가슴팍을 쿵쿵 두드리고 관절은 삐걱삐걱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입을 다물 힘이 없어 턱 밑으로 침이 뚝뚝 흘렀다.
“허억, 허억, 허억……. 켁, 케헥, 허어억…….”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찍어 누르며 던컨은 생각했다. 이쯤이면 괜찮을 거라고.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도 모르니까 찾는 데 한참 걸릴 거라고. 이제 자신은 자유의 몸이라고.
섣부른 착각이었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는 거지?”
오금을 잡아채는 중저음의 목소리. 던컨은 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크게 휘청였다. 싸늘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미끄러졌다.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살벌한 윤곽이 나타났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말이 되질 않았다. 그토록 빨리 달아났건만 도대체 어떻게 따라잡았단 말인가? 그것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서? 올빼미처럼 야음을 꿰뚫고 날아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사실 이미 따라잡힌 이상 부질없는 의문이었다. 던컨은 구토감을 억누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허억, 끄윽, 아, 아니, 그, 그게…… 저…….”
“달아나는 건가? 왜 달아나는 거지?”
“헉, 허억, 나, 나으리, 그게 아니라…….”
“약속한 보수가 필요하지 않은 건가?”
구름이 걷히며 월광이 반투명한 옷감처럼 쏟아졌다. 야만인의 허리춤에 매달린 칼날이 선뜩한 빛을 발했다. 던컨의 목숨이 아직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상기시키는 빛이었다.
던컨은 맹렬한 요의를 참고 흙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나으리!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목숨을 살려주신 은혜를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리석은 제가 방만하게…….”
카딤은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곤 행상인의 말을 끊었다.
“아니, 내가 원하는 건 사죄가 아니라 이유다. 그 이유를 고치지 않으면 네가 또 달아날 것 아닌가? 설명해라. 왜 달아난 거지?”
던컨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 그게 저…… 나으리의 걸음이, 제가 따라잡기엔 너무 빨라서 말입니다요……. 계속 따라갔다간 곧 쓰러질 것 같아서…….”
“…….”
카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던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저 칼날이 자신의 목을 내려쳐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뜻밖에도 카딤은 던컨을 힐난하지 않았다.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말했을 뿐.
“돌아가자. 앞으론 조금 느리게 걷도록 하지.”
“……!”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카딤은 달빛을 등지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던컨은 잠시 넋을 놓고 멍하니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다시 구름이 달을 집어삼킬 즈음,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드넓은 야만인의 등을 쫓았다.
*
감정의 기본값은 조급한 마음. 잰걸음은 1회차에서 얻은 습관이었다.
만물이 척박하고 적대적인 마경, 식량과 식수는 단 한 번도 넉넉했던 적이 없었다. 거기다 악마의 피를 마시며 차츰차츰 정신이 망가지기까지.
휴식과 여유는 아득한 단어였다. 시간의 지체는 곧 파멸을 의미했다. 언제 야만인이 광기에 집어삼켜질지 몰라, 카딤과 동료들은 밥 먹고 자는 시간까지 아껴 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후우.’
카딤은 심호흡을 하고 심신을 가라앉혔다.
주변은 그리 위험하지 않았다. 식량과 식수도 충분했다. 광증도 언젠가 다시 재발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거기다 걸음을 늦춰야만 할 이유도 있었다. 행상인이 꽤 쓸 만한 길잡이라는 것.
카딤의 머릿속엔 꽤나 세세한 대륙의 지도가 있었지만 그건 3백여 년 전의 지도였다. 강산이 변해도 서른 번 가까이 변했을 세월. 유능한 길잡이 없인 결코 제대로 길을 찾아다닐 수가 없었다.
카딤은 행상인의 속도에 맞추어 느지막이 걸음을 뗐다. 행상인은 그제야 겨우 숨통이 트였다. 어느 정도 후엔 지도를 살펴보고 때때로 카딤에게 의견을 제시할 만한 여유까지 생겼다.
“지금 제국과 동맹의 국경은 이런저런 마찰이 꽤 잦아서 말입죠, 자칫하다간 성기사들과 마주칠 우려가 있습디다. 괜히 또 억울하게 사로잡히면 안 되니까…… 조금 돌아가도 경계가 다소 허술한 쪽으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으리?”
대부분의 성기사들은 이교도를 보는 족족 잡아들인다고 했다. 야만인이 발 뻗고 잘 수 있는 건 자유도시 동맹의 영토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일.
‘300년 전의 엘가 교단은 이렇지 않았건만…….’
시대에 낙오해 버렸다는 게 다시금 실감이 났다. 되도록 빠른 길로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카딤은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까딱였다.
카딤과 던컨은 남부를 향해 나아갔다. 그들은 제법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쪽으로 가면서도 수일 동안 무기 빼어 들 일이 없었으니.
마찰이 없다는 건 상주하는 병사가 적다는 거고, 병사가 적다는 건 즉 치안이 좋지 않다는 뜻. 던컨은 안도의 미소를 짓고 여기서 싸울 일이 생기지 않는 건 기적 같은 일이라 말했다.
카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가죽 수통 안, 딱딱하게 굳어 가는 핏덩이들을 바라보며 착잡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이 피는 곧 못 쓰게 되겠군. 만약을 대비해 신선한 악마의 피를 확보해야 할 텐데…….’
대륙 전역에 악마들이 창궐했다는 것치곤 썩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던컨은 이렇게 말했다. 실적에 미친 성기사들이 인근의 악마들을 눈에 불을 켜고 퇴치하고 있다고. 카딤은 씁, 짧게 입맛을 다셨다.
여정은 계속됐다. 푸른 평원과 우거진 숲을 가로지르자 어느새 해 질 녘. 제비꽃이 흐드러진 풀밭 사이로 작은 개울이 나타났다. 개울의 끄트머리에는 작달막한 크기의 오두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출발한 이래로 처음 보는 마을. 던컨은 꼬깃꼬깃한 지도를 펼쳐 들고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흠,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고…… 보아하니 화전민들이 사는 곳 같은데…… 오늘은 저기서 식량과 묵을 곳을 청해 보는 게 좋겠군요, 나으리.”
벌레가 들끓는 낡은 집이라도 찬 이슬 맞으며 노숙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간만에 겉옷 젖을 걱정 없이 잘 생각에 행상인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야만인의 직감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카딤은 티끌만치도 들뜬 기색 없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불을 피우는 곳이 아무 데도 없군.”
“……예?”
“저녁 시간인데, 어떤 집도 불을 피우고 있지 않아.”
그 말대로였다.
투박한 지붕 사이 굴뚝만 십수 개인데 연기는 한 줌도 피어오르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이 멀쩡하게 살고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던컨의 입꼬리가 점차 밑으로 처졌다.
“……버려진 마을인 걸까요, 나으리?”
“모르지. 가서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가, 가 보실 겁니까? 괴물이나 악마가 나타나서 전부 달아난 걸지도 모르는뎁쇼……?”
그 말을 듣은 야만인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그거, 반가운 소식이군.”
보는 이의 심장을 섬뜩하게 만드는 미소. 말릴 틈 따윈 없었다. 카딤은 아연실색한 행상인을 등지고 인기척 없는 마을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
가까이 다가가 보자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을씨년스러운 정적. 사람의 그림자 한 조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두막 앞뜰에 놓인 쇠스랑과 괭이는 녹슬어 있지 않았다. 잡초를 베어 터놓은 길에 분주한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분명 사람이 여기 살고 있고, 방금 전까진 있었다는 증거였다.
‘시체는 한 구도 없다. 괴물에게 몰살당한 건 아닐 테고…… 습격을 미리 알아채고 달아난 건가?’
어쩌면 주기적인 습격이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화전민이라면 분명 수년마다 거처를 옮겨 다닐 터. 멋모르고 괴물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오두막 안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 키엑…… 키이이…….
그리 낯설지 않은 울음소리였다. 큼직한 손바닥이 칼 손잡이로 향했다. 허리춤의 칼을 빼어 들고 망설임 없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서는 카딤.
겨우 허리까지 오는 낮은 신영이 그를 덮쳤다.
– 키에에에엑!!
어설픈 칼질이 날아들었다. 카딤은 당황하지 않았다. 급습이 있을 것은 문을 열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바. 허리 밑에서 가볍게 칼을 올려 쳐 녹슨 칼날을 튕겨 냈다.
챙 – !
– 키익!?
야만인에겐 가벼운 반격이었지만 괴물에겐 아니었다. 반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크게 뒤로 휘청이는 괴물. 카딤은 그 틈을 타 종방향으로 세차게 칼을 내리찍었다.
콰직 –
단말마의 비명도 남기지 못했다. 야만인이 휘두른 칼은 단번에 괴물의 대가리를 양단해 버렸다. 지나치게 강한 힘이 실린 탓에 그 단면도는 마치 위에서 꾹 짓누른 것처럼 기묘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녹색 난쟁이가 바닥에 쓰러져 팔다리를 꿈틀거렸다. 절반으로 나뉜 얼굴 근육이 제각각 일그러졌다. 피와 뇌수가 성긴 판자 사이로 스며들었다.
카딤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고블린이라, 참으로 시의적절한 괴물이었다. 그래, 무슨 여정이건 처음 만나는 괴물은 항상 고블린이어야 마땅하지.
한데……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이 세계의 고블린은 현실에서 접한 숱한 매체들과 달리 그리 난폭하지 않았다. 외려 어지간한 날짐승보다 겁이 많고 경계심이 많은 편이었다. 오죽하면 고블린은 갓난아이 울음소리만 들어도 달아난다는 얘기가 있을까?
고로 이런 식으로 민가를 습격하고 선공하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그리고 이 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건, 대개 ‘어떤 존재’가 개입했다는 걸 의미했다.
붉게 물든 고블린의 눈동자. 저 꺼림칙한 빛깔 또한 또다른 증거였다. 그 존재에게 영향을 받으면 괴물들의 눈동자는 으레 저런 색으로 물드니까.
칼을 움켜쥔 손에 슬며시 힘이 들어갔다.
‘……하, 잘 찾아왔군.’
신선한 악마의 피를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야만인의 입가가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