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50)
50화. 황금 가도 (2)
굳이 카딤만큼 귀가 좋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문밖에서 경비대장이 부하들을 닦달하는 목소리가 아주 생생하게 들려왔다.
‘이런, 병신 같은 반푼이 새끼들!! ……랬지, 누가 튜리스 가문의 참사관님이 오시는 걸 막으라고…….’
‘……하지만 대장님, 미처 알아볼 방법이…….’
‘……해야 됐을 거 아냐!!! 젠장, 다짜고짜 날붙이부터 들이미는 건 대체 어디서 배워 처먹은…….’
‘……윽, 아아악!!’
‘……아악, 악!’
윽박 끝에 구타와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엔리코는 헛기침을 하며 못 들은 체했다. 카딤은 시큰둥하게 듣다가 지나가듯 물었다.
“참사관이 생각보다 높은 자리인가 보군. 저렇게까지 설설 길 줄은 몰랐는데.”
엔리코는 고개를 내저었다.
“직위도 직위지만 더 주된 이유는 아마 내 가문 때문일 거요. 참사관인 내가 이쪽의 인사권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순 없지만, 중진 의원인 내 형님이나 튜리스 가문이 나서면 경비대장뿐 아니라 그 윗선까지도 파리 목숨일 테니.”
잠시 후, 벌컥 문이 열리고 몸집이 비대한 경비대장이 접객실로 들어왔다. 그는 대가리를 곧장 바닥에 때려 박는 미증유의 경례 방식을 선보였다.
쿵!
“충성! 황금의 도시에 영광을! 황금 가도 제2관문 경비대장, 그라딘 앵글로어가 참사관님을 뵙습니다! 저의 부하들이 무지하여 참사관님께 감히 씻을 수 없는 무례를 끼쳤습니다! 그 죗값은 직위를 파면하고 오체를 분시해야 마땅하겠지만, 부디 드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일어나게. 자네와 병사들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네. 애초에 처음부터 신분을 밝히지 않은 내 잘못도 있으니.”
“아닙니다! 참사관님께선 티끌만치의 잘못도 없으십니다! 저는 계속 이렇게 부하를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반성하며 참사관님의 말씀을 경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어나게. 목이 부러질까 걱정되니까.”
번거로운 실랑이가 이어졌다. 터질 듯이 머리통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나서야 경비대장은 몸을 일으켰다. 헉헉대며 힘겨운 숨을 내뱉는 그를 앞에 앉히고 엔리코는 물었다.
“아무튼 이제 좀 설명해 보게. 대체 왜, 누가 황금 가도에 봉쇄령을 내린 건가? 고작 하루만 틀어막아도 그 피해가 막심할 텐데?”
“허억, 헉, 그게, 저…… 그런데 외람되지만,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
“아, 이분은 내게 큰 도움을 주고 생명까지 구해주신 은인이라네. 어디 가서 들은 걸 떠벌릴 분은 결코 아니니 안심하고 얘기하게나.”
“…….”
외부인이 군사 기밀을 엿듣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참사관이 보증하는데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 경비대장은 땀을 훔치며 살진 턱을 푸르르 떨고는 조심스레 말문을 텄다.
“후우, 이미 아시겠지만…… 재확인차 말씀드리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쇼.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내용은 전부 대외비입니다. 이 이야기가 외부로 퍼져나가면 동맹령 전역에 큰 혼란이 초래될 겁니다.”
그는 비대한 상체를 참사관 쪽으로 한껏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황금 가도의 중앙부에 악마들이 창궐하였습니다. 그 수가 적지 않아 아직까지도 제압에 난항을 겪는 중입니다. 때문에 각 참사회에서 일제히 봉쇄령을 내렸고, 마물이나 악마의 종복들이 도로를 따라 전파되지 못하도록 각 관문마다 참사군이 방어선을 세우고 경계하는 중입니다.”
“……!”
경비대장은 창궐한 악마들의 세부적인 정보와 정확한 피해 상황은 파악 중에 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카딤은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꼈고, 엔리코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가를 짚었다.
“각 관문에는 대(對)악마전을 대비해 마탑의 마법사들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는가? 그들은 뭘 하고 있는 거지?”
“창궐 직후, 인근 관문의 마법사들이 초동 제압 부대로 투입되었으나 전부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합니다. 그 뒤로 다른 관문의 마법사들은 전부 방어선에 주둔한 채 방비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뭐? 그러면 예사 악마들이 아니란 것 아닌가? 마탑 측에서 고위 마법사를 파견했단 소식은 없나?”
“그게…… 마탑과 베스타나 참사회에서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듯합니다. 마법사들을 추가로 투입하였다고 하긴 했는데, 그중 컨저러 등위 이상의 고위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다더군요.”
“…….”
“이건 사족이지만, 일각에선 다른 도시가 알아서 해결하길 바라고 일부러 투입하지 않았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나 갈렌타나 같은 도시는 창궐 지역과 바로 인접한지라 악마의 위협이 목전에 닥치면 곧장 총력전에 나설 테니까요.”
부득, 엔리코는 어금니를 갈았다.
이는 지극히 부당한 처사였다. 마탑에서 마법사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여태껏 다른 참사회가 그쪽의 몫까지 ‘황금 가도’의 관리 비용을 대신 부담해 오지 않았던가?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마탑이 나서서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그런 것이었는데?
경비대장도 그걸 모르진 않는지라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다만 행여 참사관의 심기가 더 언짢아질까 싶어 급히 첨언했다. 현재 마탑이 투입한 마법사들도 충분히 강한 병력이고, 악마가 창궐한 지역은 갈렌타나와 베스타나 방향인지라 여기서 델루타나까진 무사히 갈 수 있다고.
엔리코는 그 얘기를 듣고도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자신은 아니어도 야만인이 가려는 방향이 바로 그쪽이었으니까.
“…….”
일단 정보를 다 얻었으니 경비대장은 물러가게 했다. 그는 한 번 더 거나하게 뒤룩뒤룩한 허리를 굽히고는 빠져나갔다. 접객실 안에는 한동안 토도독, 토도독 참사관이 탁상을 두들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고민을 마친 엔리코는 신중한 어조로 카딤에게 제안했다.
“……북서부, 그러니까 델루타나의 위쪽으로 우회하여 베스타나로 가는 건 어떻겠소? 기간이 좀 더 길어져도 그쪽 길이 훨씬 안전할 거요.”
“아니, 시간은 충분히 끌었다. 여기서 더 지체하고 싶진 않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오. 마탑의 마법사들이 제압하지 못했을 정도면 정말 예사 악마들이 아니란 뜻이오. 물론 그대의 무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번만은 신중을 기하는 게 어떨까 싶소. 어쩌면 뿔이 두 개인 상급 악마나 그 이상의 악마가 있을 수도 있으니…….”
엔리코는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당황하여 흠칫 어깨를 떨 수밖에 없었다.
야만인이 겁먹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이자는 트롤과 괴물의 군세를 도륙 내고, 고위 성기사와 고위 마법사까지도 단신으로 찢어발긴 무패의 전사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야만인이 이 얘기를 듣고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카딤은 이보다 더한 기쁜 소식은 있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주 잘 됐군. 마침 좋은 피가 필요한 참이었는데.”
악의과 살의로 얼룩진, 어떤 깊숙한 피 구덩이의 밑바닥을 엿본 듯한 기분.
엔리코는 아랫입술을 터지도록 꾹 깨물었다. 턱 끝을 덜덜 떨며 생경한 공포를 내색하지 않기 위해선 응당 그래야만 했다.
*
동행은 끝났다. 야만인과 행상인은 베스타나로, 나머지는 델루타나로. 이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떠날 시간.
엔리코는 카딤이 마찰 없이 방어선을 넘을 수 있도록 경비대장을 시켜 통행증을 발급하도록 했다. 경비대장은 카딤의 안위를 위해 이를 만드는 줄 알았으나 실은 그 반대였다. 이는 방어선을 지키는 병사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통행증.
하여간 참사회의 문장과 경비대장의 인장이 떡하니 찍혀 있으니, 어지간해선 이번처럼 경비병들에게 제지당할 일은 없을 터였다.
병사들은 던컨과 헤어지는 걸 못내 아쉬워했다. 그동안 이 성격 좋고 입담 좋은 행상인과 나름 정이 붙었기 때문. 친근감 있게 어깨를 툭툭 치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던컨 씨!”
“나중에 꼭 다시 렘타나에 들리십쇼! 그땐 아주 후하게 대접해드릴 테니!”
“……아, 아, 예.”
하지만 던컨은 웃으며 작별할 여유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과 달리 그는 황금 가도가 봉쇄된 이유를 카딤에게 전해 들었다. 평화로운 여정은 끝이고 이젠 악마가 들끓는 생지옥으로 뛰어든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저리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었다.
한편 굴락은 헤어지기 전 카딤을 따로 불렀다. 그는 쇠망치를 손에 쥐고 빙빙 돌리며 유심히 턱수염을 쓸었다.
“용병 양반, 이전에 했던 약속 기억하나? 내가 자네를 위한 ‘역작’을 만들어놓을 테니 나중에 꼭 델루타나에 들리라고 했던 거.”
“그래, 기억한다만.”
“그런데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어떤 걸 만들어줘야 할지 도통 좋은 생각이 안 떠오른단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혹시 뭐 필요한 거나 부탁할 만한 게 있나? 내 자네의 의견을 참고해서 장비를 만들도록 하겠네.”
델루타나에 들릴 가능성이 희박하단 카딤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하여 그냥 떠오르는 대로 대충 말했다.
“큰 거.”
“……큰 거?”
“큰 게 좋겠군. 지금 가진 무기들은 너무 작고 가벼워서.”
쇠망치 영감의 얼굴에 진 주름이 두 배쯤 늘어났다.
그는 변변찮은 작별 인사도 없이 ‘큰 거, 큰 거라……’하고 심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병사의 말에 다시 올라탔다. 카딤은 그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보다 눈길을 거두었다.
사실 카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장비는 1회차 때 쓰던 애병, 대악마의 목을 쳐냈던 ‘파멸적인 무구’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노인에게 말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건 애초에 인간이 노력한다고 만들 수 있는 종류의 무기가 아니니까.’
고개를 살짝 튕겨 앞머리를 넘기곤 잡념을 털었다. 쇠망치 영감이 물러난 자리에 엔리코가 마지막으로 왔다. 그는 아직 공포의 여운이 남았는지 멈칫거렸지만, 그래도 곧 능숙하게 감정을 감추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여러 우여곡절이 많긴 했지만…… 아무쪼록 당신같이 대단한 전사와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소. 관할령에서 있었던 일들은 내 최선을 다해 수습할 테니 염려 마시오. 마탑의 기록을 조회할 방법도 백방으로 찾아 서신을 보낼 터이니 꼭 기다려주시고. 그대의 앞길에 레밀리온 님의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과도 같은 축복이 있기를.”
“그래, 네게도 아탈라의 투지가 함께하길 빌지.”
서로가 모시는 자의 이름으로 축복을 마쳤다. 참사관과 야만인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한 명은 타협과 거래, 모략과 배신이 들끓는 위정자들의 소굴을 향해, 한 명은 고통과 절망을 자양분으로 삼는 악마들이 창궐한 땅을 향해.
그들은 각자의 전장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
따사로운 햇살이 부서지는 황금 가도의 정경.
부드러운 하늘 밑으로 화강암 판석이 단단하고 촘촘하게 깔린 도로가 일직선으로 쭉 뻗어 있었다. 길의 가장자리엔 절묘하게 아귀를 끼워 맞춘 드높은 돌담이 세워져 있고 그 너머론 규칙적으로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다. 저 멀리 아득한 소실점까지 펼쳐진 균일한 풍경은 확실히 인간의 건축 능력에 대한 감탄과 경외심을 자아낼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카딤과 던컨, 둘 다 딱히 그걸 보며 감탄하고 있진 않았다.
카딤은 다른 생각에 잠겨있었기에. 그리고 던컨은 심란한 와중에도 길잡이 노릇을 해야 했기에.
“여기가 제2관문이니까…… 반나절쯤 걸어가면 3관문이 나옵디다, 나으리……. 6관문과 7관문 사이에서 조금 외곽으로 빠지면 키본이란 마을이 있는데 하루는 거기서 묵었다 가면 되겠군요. 물론 그곳에 악마가 없다면 말이지만…….”
던컨은 흘끔 불안한 눈길을 보냈다. 카딤은 던컨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레밀리온이 누구지?”
“……예?”
“레밀리온이 대체 누구더냐. 동맹인들은 그자의 이름을 마치 신처럼 사용하던데, 내 기억에 그런 이름의 신은 없었다만.”
생뚱맞은 질문 시기에 한번, 그 질문의 내용에 한번, 던컨은 연달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반사적으로 그것도 모르냐고 되물어 볼 뻔했으나 뒤늦게 떠올렸다. 저자는 이전에 루카오니아 제국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목숨은 아직도 저자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
“레밀리온 님은 오래전 흩어진 왕국과 도시 국가들을 통합하여 동맹을 결집한 위인입디다…….”
던컨은 군말 없이 설명하는 쪽을 택했다.
레밀리온은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동맹을 통일하고 발전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그분이 기틀을 잘 닦아놓은 덕에 동맹은 제국에 패배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맞설 수 있었다, 황금의 맹주, 금화 한 닢으로 도시를 구한 자, 드래곤을 물리친 자 등등 여러 별명을 갖고 있다, 동맹인들의 마음엔 아직도 그가 신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어쩌면 동맹 사람들은 제2의 레밀리온 님이 등장하여, 세 개의 참사회로 나뉜 동맹을 다시 한번 규합하고 제국의 압제에서 완전히 벗어나길 소망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디다…….”
던컨은 암울한 현실을 한탄하듯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한데 이야기를 듣던 중 카딤의 눈에는 오묘한 빛깔이 깃들었다. 그는 묵은 기억을 유심히 되짚어보다가 물었다.
“드래곤을 물리쳤다고?”
“예. 어릴 적에 드래곤에게 납치당하셨는데, 드래곤의 보물을 써서 물리치고 되돌아오셨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손이 닳도록 싹싹 빌고 협상한 게 아니라?”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말씀하셨다간 큰일 납니다!”
동맹에선 신성 모독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봉쇄령 탓에 길가에 아무도 없는데도 던컨은 혹여 누가 엿들었을까 싶어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작 카딤은 신경도 안 쓰고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듯 골똘히 사색할 뿐이었다.
동맹을 세운 위인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묵묵한 걸음이 이어졌다. 가도의 풍경은 여전히 다를 바 없었지만 중천에 있던 태양은 조금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던컨은 지도에서 눈을 떼고 나지막이 물었다.
“그런데…… 악마들이 하필 어째서 황금 가도에 창궐한 걸깝쇼, 나으리?”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그게 무엇입니까?”
“병과 수통을 넉넉히 준비해야 된다는 것.”
“…….”
역시나 악마들을 피하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
던컨은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고 침음을 흘렸다. 카딤은 피를 바라듯 얕게 떨리는 칼자루를 쥐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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