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55)
55화. 혀와 이빨, 그리고 턱 (3)
앞서 말했듯, 카딤은 매료종 악마를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악마에 홀리지 않고, 녀석의 숨통을 끊으면 된다.’
카딤은 자신의 정신력이 약하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광증과 마찬가지로, 매료종 악마의 미혹은 인간으로선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는 숲에 들어서기 전부터 대비를 했다.
바로 남은 빙의종 악마의 피를 전부 다 마신 것.
이 피의 효능은 이전에 마법사를 상대했을 때 입증을 마친바. 예상대로 ‘정신 공격 면역’ 버프는 미혹의 효과를 대부분 차단했다.
다만 이건 중급 악마의 피고, 상대는 상급 악마이다 보니 완벽한 차단은 불가능했다. 노출 시간이 길어지자 카딤마저도 정신이 흐릿하게 흔들릴 정도였다.
그래도 완전히 홀려 넘어갈 일은 없었다. 그는 악마의 체취를 지독한 악취로 느꼈으니까. 악마의 혀가 입술에 맞닿는 순간, 찰나의 미혹마저 사라지고 오직 분노와 혐오만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에, 에에에…….”
혀가 잘린 메세티스는 소박맞은 여인처럼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또로록, 눈물이 이슬처럼 반짝이며 흘러내렸다. 뭇 사내들이라면 마음이 약해져 방심할 수밖에 없는 모습.
카딤은 그것이 얄팍한 위장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쐐 – 액, 챙!
목울대를 노리고 모기를 휘두르자 메세티스는 한 손으로 가뿐히 막아냈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은 어느샌가 새까만 갑각질로 뒤덮여 있었다. 악마의 눈 속에서 충격이 사그라들고 지독한 원념이 차올랐다.
–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었는데.
더 이상 청아하게 울리지 않는 혼탁한 육성.
급히 칼을 빼내려 했으나 악력이 지나치게 굳셌다. 칼자루와 몸을 비틀며 악마의 턱을 힘껏 걷어차고 나서야 간신히 빼낼 수 있었다. 메세티스는 꺾인 고개를 천천히 되돌리며 일어났다.
– 그 팔다리만 내게 준다면, 기꺼이 너에게 특별한 총애를 베풀 생각이었는데.
치르르, 손만 뒤덮고 있던 갑각질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새하얀 나신이 눈 깜짝할 사이 전부 단단한 갑각으로 뒤덮였다. 이후 허리를 굽히고 옹송그리자 어깻죽지에서 울룩불룩한 돌기가 돋아났다.
콰드드드드드득 – !
돌기는 꿈틀대다가 등가죽을 꿰뚫고 만개했다. 피와 점액을 흩뿌리며 드넓은 날개의 형상을 드러냈다.
깃털 대신 겹겹이 인간의 팔다리로 이루어진 날개를.
– 이제 되었다. 그깟 몇 토막 살덩이는 필요 없다. 지옥의 구렁텅이 속에서 내 총애를 거부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하거라.
깊게 메아리치는 증오. 메세티스는 사지의 날개를 펼치며 공격할 준비를 했다.
카딤은 주변을 살폈다. 악마의 살기뿐 아니라 주인의 분노에 동조하여 매섭게 내달려오는 기척들도 느껴졌다. 아마 이대로 저 상급 악마와 종복들을 상대하는 건 무리겠지.
그리하여 정신을 집중했다.
선명한 붉은빛을 발하는 가슴팍의 문신, 중첩된 버프들이 신경을 일깨웠다. 시야가 붉어지고 검은 눈동자에 새빨간 안광이 깃들었다. 하급 악마의 피를 마셨을 때보다 훨씬 독한 혈기가 뼈와 근육으로 퍼져 나갔다.
강렬하게 그 효능을 발하는 ‘히드라의 문신’.
다만 이전에 들었듯 지속 시간이 길진 않을 터였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속전속결.
– 죽어라!
날개를 휘두르는 악마를 향해, 카딤은 칼자루를 쥐고 신속히 박차 올랐다.
쩌거거거거거걱 – !
대번에 날개를 관통하고 갈라버리는 일섬.
압도적인 힘 앞에선 두껍게 겹쳐진 팔다리도 종잇장과 다를 바 없었다. 뭉텅이로 갈라진 근육 사이로 뼛조각과 끈적하게 굳은 피가 튀어 올랐다.
남은 팔다리들이 꿈틀거리며 찢어진 틈을 메웠다. 하지만 질풍처럼 재차 휘둘러지는 칼질에 그 노력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카딤은 갈라진 날개를 넘어 가뿐히 악마에게 다다랐다.
– 이게 무슨……!
콰직 – !
칼날이 손목의 갑각을 관통했다. 메세티스는 반사적으로 다른 손을 휘둘러 반격을 가했다. 손톱이 날카롭게 구릿빛 살갗을 베었지만 무의미한 상처였다. 카딤은 조소를 머금고 악마의 팔뚝을 종으로 갈라 버렸다.
– 크아아아아아악!!
갑각 파편이 후두둑 튀어 오르고 결을 따라 갈라진 근육이 넝마처럼 늘어졌다. 반면 카딤의 상처는 진흙을 헤집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아물었다. 악마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충격으로 흔들렸다.
– 무엇이냐, 네놈! 어째서 상처가…….
시시콜콜 답해 줄 이유는 없었다. 다른 팔까지 찢어발기려 했으나 악마도 가만 있진 않았다. 황급히 날갯짓하여 물러나 손을 휘젓는 악마. 카딤의 발밑에서 잘린 팔뚝들이 치솟아 올랐다.
콰득, 콰득, 콰드드득 –
물귀신처럼 억세게 발목과 종아리를 붙드는 손아귀. 그러나 광전사의 발길을 붙잡기에는 한없이 미진했다. 카딤은 어렵잖게 빼내곤 힘껏 발을 굴렀다. 지진처럼 땅이 울리며 바닥이 움푹 가라앉았다.
――――― 쾅 – !
갈라진 균열 사이로 용암처럼 핏물이 솟구쳤다. 흙 밑에 있던 팔다리는 모조리 압착된 고깃덩이가 되고 말았다. 카딤을 또 한 번 땅을 박차고 거리를 좁혔다. 메세티스는 경악에 차 급히 방어 태세를 갖췄다.
“흐어어어어업!!!”
– 흐윽! 흑!
채 – 앵! 콰 – 직!
그래도 메세티스의 신체 능력은 확실히 상급 악마에 걸맞은 수준이었다. 한쪽 팔을 잃은 후로는 칼날을 비스듬히 흘려넘기고 검로에 날개를 들이밀어, 교묘하게 모든 공격을 차단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광전사의 흉포한 검세는 반격을 허락하질 않았다. 메세티스는 오로지 공격을 막아내기에만 급급했다. 갑각이 갈라지고 날개가 뜯어져 그것도 슬슬 한계에 달할 즈음, 비로소 지원군이 당도했다.
“크아아아악, 메세티스 님!!!”
“크아악, 메세티스 님을, 크아아악, 지켜야한다!!!”
– 치이익, 치이이익!!
화르르륵, 화르르륵 – !
어처구니없게도, 종복들은 스스로 지옥불을 몸에 붙이고 달려들고 있었다.
그 주인을 지키기 위해 쥐어짜 낸 극단적인 고육지책. 기실 무력으론 카딤에게 비길 수 없으니 나름대로 합당한 판단이긴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별 효과는 없었다. ‘히드라의 문신’은 화상마저도 치유할 만큼 강력한 ‘재생’ 버프도 주었으니.
화르르륵 – !
“크아아아아아악!!”
카딤은 아무렇지 않게 지옥불을 뒤집어쓰며 종복들을 도륙 냈다. 흩날리는 불티, 토막 나는 몸뚱이, 끓어오르는 피. 한 몸을 불살라 주인을 지키고자 했던 의지는 한 줌의 잿가루와 연기로 허무하게 흩날릴 뿐이었다.
다만 종복의 수가 꽤나 많아 길이 틀어막힌 게 문제였다.
카딤은 이를 악물었다. 서서히 혈기가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렇게 잡졸들이나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불타는 장벽을 뛰어넘어 악마의 멱을 따야만 하는데…….
문득 상황이 기묘하게 돌아갔다.
– ……그만, 거기까지. 모두 그분의 앞에서 비켜서거라.
우뚝, 멈춰서더니 앞길을 터주는 병사와 마물들.
메세티스는 갑각질을 거두고 도로 여인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사뿐하게 나아오더니 다짜고짜 카딤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 쓸데없는 저항은 그만두겠습니다. 더 맞서 봤자 당신의 날카로운 칼날과 강건한 육신을 이겨낼 순 없을 테니까요.
“…….”
– 다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이 미천한 자가 당신의 발등에 입 맞추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아, 바라는 건, 당신께서 바라시는 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설령 이 한 몸 다해 목숨을 바치라 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었다. 카딤은 인상을 찌푸리고 악마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더 이상 원념으로 가득 찬 시선이 없었다. 오직 뜨거운 열망과 정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망울만 있을 뿐.
반사적으로 쯧, 혀를 찼다. 아, 제기랄, 그렇게 된 거로군.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만했다.
‘아까 혀를 끊을 때 녀석의 피를 삼켰지. 팔을 베어내면서 모기가 피를 흡수하기도 했고.’
매료종 악마의 피는 강렬한 ‘매료’ 버프를 준다. 아무래도 피를 마시고 저도 모르게 악마를 홀린 모양. 제 피의 효과에 미혹 당한 악마의 꼬락서니를 보자니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숨통을 끊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카딤은 칼자루를 치켜들고 준엄하게 말했다.
“내 발등에 입을 맞추고 싶다 그랬나?”
– 아아, 예…… 당신, 부디 제게 한 번만 기회를…….
“거절한다. 더러운 악마 새끼에게 발등을 내주느니, 시궁쥐에게 발가죽을 내주는 편이 낫지.”
– ……!!
온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듯 악마의 눈이 지독한 절망으로 잠겨 드는 찰나.
쩌 – 걱!!!
선뜩한 칼날이 악마의 목을 끊었다.
여러 줄기로 갈라진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머리통이 데구르르, 흙바닥을 굴러 고목 뿌리 맡에 닿았다. 메세티스는 할 말이 남았는지 애처롭게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성대와 혀를 잃은 입에선 바람 빠지는 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평생 만물의 선망을 받으며 승격을 염원했던 악마는, 이름도 뿔도 얻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이 선망하던 자로부터 철저히 능멸당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
깊숙한 흙구덩이 속, 카딤은 희미한 인력을 느꼈다.
‘……돌아와라, 연어.’
퍽!
훙, 훙, 후웅, 탁 – !
땅속에 파묻혔던 투척도끼가 튀어나왔다. 카딤은 도끼머리와 자루에 잔뜩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막으려면 아무래도 주의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숲에는 어느덧 희붐하게 동이 텄다. 자욱한 마기가 걷혀 숲은 조금씩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근육이 뻐근하여 슬슬 돌아가 쉬고 싶었지만 그 전에 할 일이 남았다. ‘마물’로 변한 괴물들을 정리하는 것.
마기의 영향은 인간보다 괴물들에게 더 강하다. 인간들에게도 미혹의 후유증이 남긴 하겠지만, 마물로 변한 괴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카딤은 잠시 악마의 시체를 내버려 두고 주변 소탕에 나섰다.
그러던 중 뜻밖의 광경을 발견했다.
– 끄지직, 끄지지직!
“흐으윽…….”
독액을 줄줄 흘리며 위협하는 가시벌레, 그리고 그 앞에 누군갈 들쳐 메고 웅크린 자.
구면이었다. 마을에서 만났던 여인. 기어코 남편을 찾기 위해 숲으로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패래래래래랙, 퍼 – 걱!
– 찌익!
카딤은 가시벌레를 죽이고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은 피범벅이 된 카딤을 보곤 사색이 되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가 들쳐 멘 자는 한쪽 팔을 잃고 기절한 사내였다.
“……그자가 네 ‘진짜’ 남편인가?”
“아, 아아아, 다, 당신은…….”
“걱정 말거라. 이제 와서 네 남편을 죽일 생각은 없으니. 악마의 숨이 끊겼으니 정신을 차려도 거치적대진 않겠지.”
그렇게 말하는데도 여인의 불안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카딤은 도끼를 치우고 슬쩍 턱짓했다.
“나를 따라오거라. 아직 숲엔 위험한 괴물이 많이 남아 있다. 볼일을 마친 다음 마을까지 바래다주도록 하지.”
여인은 거짓된 안식이나 포기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가족을 되찾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을 딛고 또다시 위험천만한 숲에 들어서는 길을 택했다. 끝까지 주어진 운명에 맞서 투쟁한 그 의지는 전사의 경의를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
여인은 입술을 꾹 다물고 뚫어져라 검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잔불처럼 서서히 사그라드는 불안. 야만인의 진심을 느낀 건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카딤은 다시 도끼를 치켜들고 앞장섰다. 마물을 다 정리한 다음 악마의 피를 받고 이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가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사가 늘 뜻대로만은 되지 않는 법.
패래래래랙, 쩌 – 걱!
– 찌이익!
마물을 거의 다 처치했을 즈음, 예기치 못한 변수를 포착했다.
멀리서 요란한 거동이 느껴졌다. 카딤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도끼를 회수하고는 여인에게 명했다.
“잠깐 이쪽의 수풀에 숨어서 기다리거라. 내가 부르기 전까진 절대로 나오지 말고.”
여인을 등지고 악마의 시체를 내버려 둔 공터를 향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어째서인지 그 주변에 수많은 기척이 모여 있었다. 마물이라기엔 사람 말소리도 같이 들려오고 있고, 평범한 인간이라기엔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지는데…….
공터에 당도한 카딤은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일사불란하게 현장을 살피고 멋대로 악마의 시체를 주물럭대고 있는, 로브를 걸친 무리들.
“궤짝을 내려놓아라! 나머지는 어서 시체를 보존 처리하고! 아니, 거기, 먼저 목의 절단면부터 냉각해야지! 계속 피가 유실되고 있지 않나!”
“예, 알겠습니다! 가야르도 님!”
“[엘드라, 크사닉, 클레시아…….]”
마탑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사냥을 마치고 수확물을 나르는 사냥꾼들처럼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카딤은 차가운 분노를 담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뭐 하는 거지, 네놈들.”
마법사들의 시선이 일시에 피칠갑을 한 야만인 쪽으로 돌아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