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62)
62화. 황야의 아들들 (5)
그러나 핏줄기가 솟구치고 머리가 바닥을 구르는 일은 없었다.
챙!
칼날은 막혔다. 피투성이 전사의 손에. 툰달은 하나뿐인 손으로 검신을 꾸욱, 그러쥐었다.
“……!”
곧장 베어 내려 했는데 손가죽이 베이질 않았다. 옥죄는 힘 또한 심상치 않았다. 카딤은 피에 젖은 적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잠깐 힘이 풀린 틈을 타 검신을 빼내고 뒤로 물러났다.
툰달은 신음조차 내뱉지 않았다. 비척거리며 일어나 스산한 어조로 읊조렸다.
“신성한 결투의 결과를 거역하고 싶진 않았다만…… 생각이 바뀌었다.”
“…….”
“대전사의 무기를 더럽히는 것도 모자라, 그 이름을 사칭하기까지 하다니……. 이런 자를 내버려 두고 가면 아탈라께서도 나를 책망하실 테지……. 악마에게만 쓰기로 맹세한 힘이지만 하릴없이 그 약조를 어겨야겠군…….”
카딤은 실소를 터뜨렸다. 결국 끝까지 망집의 우물에서 헤어 나오지 못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아탈라의 곁으로 보내주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다만, 그전에 어떻게 자신의 칼을 붙든 건지 알아보려는데……
……돌연 툰달이 고개를 숙이고 읊조리기 시작했다.
“[불굴의 군세를 거느린 선봉장, 아탈라시여. 당신의 전사를 굽어살피소서, 횃불을 들어 전장으로 인도하소서, 부정한 적들에 대적할 힘을…….]”
“……!”
낯설지 않은 형식의 기도문. 흙바람처럼 혼탁하게 일렁거리는 싯누런 기운.
카딤은 눈을 부릅 치켜떴다. 그는 저 기운이 무엇인지, 기도문을 다 외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벼락처럼 도끼를 내던졌다.
패래래래래랙, 쩌 – 걱!
파형의 도끼날이 이맛살을 터뜨리고 두개골을 쪼갰다. 중심을 잃고 털썩 무릎 꿇는 툰달. 카딤은 방심하지 않았다. 문신의 힘을 끌어올리려 정신을 집중하고, 도끼를 또다시 던지기 위해 인력을 당기려 했다.
그런데 카딤만 행동에 나선 게 아니었다.
쐐 – 액! 쐐 – 액! 쐐 – 액!
뒤이어 날아드는 여러 줄기 빛살. 단창이 툰달의 육신을 사정없이 관통했다.
퍽, 퍼벅, 퍽!
팔다리가 바들바들 경련했다. 쪼개진 머리와 꿰뚫린 몸의 구멍으로 누런 운무가 질질 새었다. 망가진 몸뚱이로는 자신이 불러낸 기운을 감당할 수 없었다.
“끄윽, 아, 아탈라시여…….”
콰드드드드득 – !
툰달의 육신은 끝내 스스로 붕괴하여 곤죽이 되고 말았다.
“…….”
“…….”
살점 찌꺼기와 뼛조각이 낭자한 지저분한 최후.
카딤은 이마까지 튄 피를 슥슥 문질러 닦았다. 그러곤 단창을 던진 아탈라인 전사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건 상상도 못 한 일에 대한 놀라움이 아니라, 일어나선 안 될 사고를 목도한 자들의 기겁에 가까웠다.
후웅, 훙, 훙, 턱!
카딤은 도끼를 회수하고 짓씹어 뱉듯이 물었다.
“네놈들은 무엇이냐.”
“…….”
“어떻게 ‘아탈라의 신기’를 불러낼 수 있는 거지.”
전사들은 말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나머지 토벌대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벌벌 떨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토벌대를 꿰뚫어 버릴 듯이 응시하는 용병의 시선. 심장이 차갑게 식고 혈액이 역류할 만큼 불편한 침묵이 오래도록 그들 사이에 머물렀다.
침묵을 깬 건 아탈라인 전사 중 하나였다. 그자는 착잡하게 시선을 떨구고 앞으로 나아왔다.
“형제여, 우리들의 대장…… 아니, 대장이었던 자가 결투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것을 대신 사과드리겠소. 이자가 불러내려 한 힘은 결코 신성한 결투에서 사용해선 안 되는 힘이었소. 황야의 계율에 따라, 이자는 지엄한 아탈라의 칼날 아래 크나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닐 텐데. 혹여 너희들도 ‘아탈라의 신기’를 불러낼 수 있는 건가?”
“…….”
전사는 이를 악물었다가 어렵사리 다시 입을 열었다.
“……부인하진 않겠소. 하지만 우리는 이 강대한 권능을 온전히 다룰 만한 역량이 되지 않소. 이자가 우리 중 그나마 가장 나은 수준이었는데, 보다시피 지금은 이렇게 곤죽이 되고 말았지. 사실상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권능이란 뜻이오.”
“그래도 어쨌든, 쓸 수 있긴 하다는 거군.”
“…….”
“대답하거라. 절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권능이 아니거늘, 어떻게 네놈들 따위가 ‘아탈라의 신기’를 부를 수 있는 거냐.”
카딤은 불티 어린 눈동자로 전사를 노려보았다. 전사의 면면에 어둑한 그늘이 졌다. 하지만 이내 긴장을 추스르고 담담한 목소리로 고하였다.
“형제여…… 우리도 이젠 그대가 범상한 용병이 아님을 알고 있소. 게다가 결투에서 승리하여 패자의 모든 것을 취하였으니, 지금 우리를 이끄는 대장 역시 그대라 할 수 있지. 이제 우린 그대가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라 명한다 해도 기꺼이 복종할 것이오.”
“…….”
아탈라인 전사들은 묵묵히 수긍했지만, 나머지 병사들은 불알을 걷어차인 듯 기겁했다. 앞에 나선 전사는 신경 쓰지 않고 초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힘의 근원을 밝힐 순 없소. 그에 대해 누설하지 않기로 아탈라의 이름에 대고 맹세하였기 때문이오. 부디 이해해 주시오. 만일 그 맹세를 어긴다면…… 우리는 영영 전쟁과 연회가 끊이지 않는 천국에 이를 수 없게 될 터이니.”
“…….”
카딤은 쯧, 혀를 찼다. 빌어먹을 아탈라인들의 전승.
그 말대로였다. 아탈라인들은 죽은 후 아탈라와 싸울 기회를 얻고, 그 결투에서 아탈라에게 생채기라도 낸다면 전쟁과 연회가 끊이지 않는 천국으로 갈 것이라 믿었다. 반면 생전에 아탈라의 이름을 건 맹세를 어긴 자는,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 해도 결투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패배와 굴종뿐인 지옥의 밑바닥에 처박힐 거라 믿었다.
신앙에 달린 문제이니 죽음의 위협으로도 답을 얻지 못할 공산이 컸다. 그래도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순 없었다.
후 – 욱!
카딤은 전사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살갗이 얕게 베여 핏방울이 맺혔다. 전사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답하지 않으면, 당장 그곳에 이르게 된다 해도 말이냐?”
“…….”
눈동자에 죽음에 대한 공포, 삶을 향한 미련이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고.
전사는 담대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선 다른 전사들도 그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
“…….”
카딤은 천천히 칼날을 내렸다.
이래서야 쓸데없는 살생을 하게 될 뿐이었다. 맥 빠진 탄식을 내뱉고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지금부터 전부 내 행동에 일체의 간섭을 금한다. 절대로 내게 가까이 오거나, 무언갈 건드리지 마라. 너희들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다 해도 나는 구해주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 같잖은 마물들이나 잡고 있거라.”
그 말을 끝으로 카딤은 성큼성큼 새카만 대지를 따라 나아갔다.
우두커니 그 모습을 바라보길 잠시. 전사들은 질서정연하게, 병사들은 우왕좌왕 그 뒤를 따라나섰다. 카딤과 대면했던 전사가 다급히 발길을 따라잡고 물었다.
“형제여, 그래도 어디로 향하는 건지 정돈 말해주지 않겠소?”
카딤은 손이라도 씻으러 간다고 말하듯, 지극히 일상적인 말투로 답했다.
“악마를 족치러 간다.”
*
신기(神氣), 신이 그 추종자들에게 내리는 축복의 기운. 사람들은 대개 ‘신기’라 하면 빛과 질서의 신, 엘가를 추종하는 성기사들이 받는 기운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세계에 신이 엘가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
투쟁과 황야의 신, 아탈라도 그 추종자들에게 신기를 내릴 수 있었다. 심지어 ‘아탈라의 신기’는 ‘엘가의 신기’보다도 훨씬 강렬한 효능을 지녀, 일단 받아들이기만 하면 어린아이도 능히 뿔 달린 악마에게 맞설 수 있게 될 정도였다.
문제는, 효능이 강해도 너무 강해 도통 인간의 몸으로 버틸 수가 없다는 것.
투신의 명성에 걸맞게 압도적인 무력을 주었으나 그건 부작용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자는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몸이 터져 나갔다. 육신을 강철처럼 단련한 전사도 1분쯤 지나면 뼈와 살이 헌 집처럼 무너져내렸다. 육신의 강함이 인외의 영역에 다다른 1회차의 카딤조차도, 악마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오랫동안 기운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이건 유구한 설정이었다. 게임에서도 이 ‘신기’의 위력과 위험성이 충실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모든 디버프에 면역이 되고 모든 전투 관련 스탯이 말도 안 되게 뻥튀기되지만, 매 초마다 수천에서 수만까지 이르는 피해를 입는 식으로.
‘괜히 카딤이 시작부터 ‘고유 특성’으로 ‘아탈라의 신기’를 쓸 수 없도록 막아놓은 게 아니었지. 시험이라도 해 보려고 했다간 바로 게임 오버였을 테니…….’
또한 ‘아탈라의 신기’를 불러내려면 특별한 준비물도 필요했다. 1회차의 카딤이 ‘신기’를 처음으로 사용했던 시점은, 그 기운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육신을 단련하고 그 기운을 선사하는 파멸적인 무구를 얻은 이후.
그러니까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비록 제대로 사용도 못 한다지만, 이렇게 아무나 ‘아탈라의 신기’를 불러낼 수 있다는 게.
게다가 황야의 무녀들은 신통력을 잃고 사라져 버리지 않았던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누구의 힘은 빼앗고, 누구에겐 감당 못할 힘을 주고, 어째서 아탈라가 이토록 이상한 변덕을 부리고 있는지…….
“…….”
그 순간,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추측.
사고의 조각들이 모여 무언가 어렴풋한 윤곽을 이루었다. 다만 지금은 추측을 진전시킬 만한 결정적인 단서도, 사색에 잠겨 있을 만한 경황도 없었다.
카딤은 도끼눈을 뜨고 꽁무니에 붙은 전사를 흘겼다.
“왜 따라오는 거지? 분명히 멀리 떨어져서 마물이나 잡고 있으라고 했을 텐데.”
카딤이 목울대에 칼집을 남긴 자였다.
“나도 악마를 잡는 데 손을 거들겠소, 형제여. 큰 도움이 안 될진 몰라도 악마에게 상처 하나쯤은 더 입힐 수…….”
“그러니까, 내 명을 어기겠다는 건가?”
“…….”
전사는 침통하게 고개를 떨구고 거리를 벌렸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나서부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따위로 명을 농락할 거라면, 차라리 앞에 서서 고기 방패 역할이라도 하거라.”
“정말이오? 고맙소, 형제여! 기꺼이 그 뜻대로 선두에서 악마와 맞서는 첨병이 되겠소!”
“…….”
카딤은 그냥 신경을 끄기로 했다. 불행이 있다면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지가 죽을 것 같으면 ‘아탈라의 신기’를 불러내든지, 어쩌든지 하겠지.
사방에 목질의 잡초가 만연한 들판. 발을 내디딜 때마다 뾰족한 나무 조각이 피부를 날카롭게 긁어 댔다. 마기는 점차 짙어지다가, 이젠 오한이 일고 근육이 떨릴 정도의 농도가 되었다. 카딤에겐 이 저릿한 운무가 이젠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이 느껴졌다.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독한 공기를 잘근잘근 짓씹으며 내달렸다. 전사도 급히 카딤을 따라 달렸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찾아냈다.
저기 저, 자욱한 마기 너머 아스라이 드러난 윤곽선. 대전사가 마땅히 맞서야 할 숙적, 세상에서 박멸되어야 할 해충, 그리고 유용한 피 주머니.
악마가 보였다.
– 푸른 숲 나무 그루터기 너머, 소쩍새 울음, 떨어지는 이파리 검은 날갯짓. 그늘 뿌리 밑 버섯 캐 먹고 죽은 어린아이 시체, 시퍼런 발바닥 다들 모여 구경하세요.
이파리를 덥수룩하게 드리운 아름드리나무의 형상. 그 높이와 두께는 연식이 수천 년에 이르는 거목에 비견할 만했다. 두꺼운 나뭇가지 사이로 두 개의 우람한 검은 뿔이 솟아 있었다.
‘……이번에도 상급 악마인가.’
나무 기둥 중앙에는 기괴하게도 생물의 것처럼 생긴 입이 붙어 있었다. 그 안에서부터 끝없이 지리멸렬한 단어와 문장이 흘러나왔다. 따라붙은 아탈라인 전사가 께름칙하단 표정을 했다.
“이런, 뿔이 두 개 달린 악마라니…….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소.”
“…….”
“한데 주둥이와 뿔을 빼면 생긴 건 꼭 ‘금철목’을 닮았군. 목재가 어지간한 강철보다 단단하고 불에도 잘 타지 않지만, 백 년에 겨우 한 뼘씩 자란다는 나무라오. 저만큼 성장하려면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이 필요할지 짐작도 안 가는군.”
“…….”
카딤은 악마의 피가 든 병을 꺼내 들었다. 저게 어떤 나무를 닮았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진짜 나무도 아니고 곧장 쪼개고 불태울 생각이었으니. 뚜껑을 열고 비릿한 악취의 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바닥을 부수고 맹렬히 가시가 치솟아 올랐다.
――――――― 콰지지지지직 – !
전부 피하는 게 불가능할 만큼 빽빽하게.
카딤은 그럼에도 회피했다. 종아리에 폭발적인 힘을 주어 뛰쳐 올라서. 비복근에 스며든 악마의 혈기가 비상식적인 도약을 가능케 했다.
옆에 있던 전사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몸을 내뺐으나, 결국 가시 하나에 팔뚝을 완전히 꿰뚫리고 말았다.
푹 – !
“크아아아악!!!”
악마는 고통에 찬 비명을 조롱하며 가시를 거두었다.
– 그늘 쉬어 가는 두 나그네, 모가지 끊고 뼈 썰고 배 가르고 팔 자르고, 죽다 보면 갈기갈기갈기갈기갈기갈기 찢긴 창자도 나쁘지 않다나 봐요, 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
전사는 피범벅이 된 팔을 붙들고 이를 갈았다. 카딤은 눈매를 좁혔다. 단순한 관통상이 아니었다. 상처 속에서부터 무언가 번져 나가고 있었다. 딱딱하게 말라붙어 들뜬 나무껍질이…….
‘……빌어먹을, 그런 건가.’
도끼를 쳐들었다. 내버려 두면 이자도 곧 온몸이 목질화되어 마을의 나무 괴물처럼 변해 버릴 터. 당장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사자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콰 – 직!
“끄흡!”
주저없이 칼을 들어 자신의 팔을 내려치는 전사. 핏줄기가 팍 튀었다. 뼈는 바로 끊겼지만 근육 끝부분이 너절하게 들러붙어 남았다. 전사는 그 부분마저 급히 손으로 붙들고 쥐어뜯어 냈다.
지직, 끄지직 –
“크아아아아악!!”
기어코 팔이 뚝 떨어져 나갔다. 잘린 팔뚝은 순식간에 굳어 나무토막이 되었으나, 전사의 몸은 더 이상 목질화되지 않았다. 그는 격통으로 과호흡 증상을 보이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가죽 허리띠를 풀어 절단부 위쪽을 동여맸다.
“끄읍! 후욱, 후욱, 후욱…….”
“…….”
“후욱, 이런 제기랄, 미안하오……. 괜히 따라온 모양이군. 설마 악마에게 상처 하나 못 입히고 팔을 잃을 줄이야…….”
전사가 회한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딤은 떨어진 팔뚝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자책할 필요 없다. 무의미한 희생은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유용한 정보를 하나 얻었군.”
“……!”
“다만, 더 도움이 될 일은 없으니 어서 물러나거라. 다른 자들에게도 다가오지 말라 엄중히 경고해 주고.”
“…….”
“잘린 팔의 몫은, 내가 대신 갚아주도록 하지.”
전사는 카딤을 올려다보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오래도록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퍼뜩 고개를 끄덕이곤 뒤돌아서 비틀비틀 내달렸다.
이젠 악마와 그 피를 마시는 자, 둘만의 시간.
멀리서 투사체를 내던진다면 가시로 막을 게 분명했다. 카딤은 사납게 포효를 내지르며 돌격했다.
“흐어어어어어업!!”
악마는 괴이한 문장을 흥얼대며 다시 한번 땅에서부터 가시들을 뻗었다.
– 착한 팔 여럿 부러뜨린 엄마, 모가지 잘려 죽은 누나 관짝 들여다보고 오열. 겁 없는 까만색 장난에, 우리는 돼지풀만도 못하게 꺾이고 무서워서 달아나지요…….
―――――― 콰지지지직, 콰지지지지직 – !
가시가 치솟을 때마다 카딤은 높이 도약했다. 땅으로 떨어질 땐 칼을 내려찍어 가시를 꺾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곤죽이 되고도 남았을 가시의 파도를 카딤은 묘기에 가까운 방법으로 헤쳐 나갔다.
그래도 날개가 없는 이상 완벽한 회피는 불가능했다.
가시가 너무 많고, 너무 빨랐다. 땅속에 파묻혀 있다 보니 미리 막을 수도 없었다. 가시를 다시 치솟아 올리는 간격조차 지극히 짧았다. 결국 카딤조차도 한 줄기 가시를 피하지 못하고 왼팔을 관통당하고 말았다.
푹 – !
“…….”
콰지지지직 – !
즉각 주변의 가시를 휩쓸어 추가적인 피해는 막았으나, 팔뚝은 이미 나무껍질로 뒤덮이고 있었다. 악마의 목소리에 음습한 희락이 깃들었다.
– 깔깔깔깔깔깔깔, 고운 살색 가지, 너도 즐겁게 우리와 뿌리, 생장하는 기쁨, 뼈마디 으스러진 자작나무 비린내, 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
그러나 카딤의 육신이 전부 나무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앞서 전사가 그러했듯, 주저 없이 자신의 팔을 잘라버렸다.
쩌 – 걱!
다만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카딤은 절단면에서 즉각 새로운 팔이 자라났다는 것.
쿠드득, 쿠드득…….
재생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가슴팍의 문신이 휘황한 적광을 발하더니, 순식간에 뼈가 자라고 살점이 뭉쳤다. 카딤은 태연하게 새로 얻은 팔을 휘휘 흔들었다. 멀쩡하게 잘 움직였다. 이전에 광증에 미쳐, 스스로 팔을 난도질하고 재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덧 악마와의 거리도 고작 스무 발자국 남짓으로 좁혀져 있었다. 덥수룩한 가지가 불안하게 요동쳤다. 악마는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봄 파묻힌 구덩이, 다리 부러진 나무꾼, 그루터기 싫은 장작 나무숲, 더는 오지 아무도 말았으면…….
‘히드라의 문신’ 덕에 손쉽게 재생을 마쳤다. 카딤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빛을 빛내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요즘 땔감은 말이 많군.”
―――――― 쐐래래래래래랙 – !
여태껏 피와 살점만을 파먹었던 도끼날이, 처음으로 제 용도에 맞게 충만한 벌목의 의지를 품고 날아들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