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64)
64화. 황야의 아들들 (7)
토벌대는 부지런히 악마를 토벌하고 남은 잔해를 수습했다.
뿌리부터 가지까지 죄다 전소되어 악마의 시체에서 직접 얻어낼 만한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현장에서 뜻밖의 전리품을 찾아냈다.
카딤이 열심히 잘라냈던 가시들.
“대장님, 이것 좀 보시지요!”
푹 – !
병사 하나가 그것을 창처럼 쥐고 흙바닥을 찔렀다. 그러자 멀쩡했던 흙이 딱딱하게 나무로 변해 갔다. 악마가 살아있을 때보다 속도는 느렸지만 효과만큼은 동일했다.
모든 가시에 ‘목질화’ 효과가 남은 건 아니었다. 길게 잘린 소수의 가시에만 효과가 남았다. 그래도 양이 원체 많다 보니 다 추려도 너댓 개 정돈 되었다. 카딤은 나무 등걸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턱짓했다.
“한 줄기만 이 앞에 두고 가고, 나머지는 따로 챙겨두었다 너희들이 필요할 때 쓰도록.”
“옙! 알겠습니다, 대장님!”
병사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카딤은 헛웃음을 쳤다. 호칭은 또 언제부터 대장이 된 건지.
이번엔 팔을 잃은 전사, 페룬이 앞에 와서 섰다. 그는 팔의 절단면에 헝겊을 칭칭 감고 응급조치를 마친 상태였다. 잠시 찝찝하다는 듯 눈앞의 가시를 내려다보았으나 이내 신경을 끄고 카딤에게 물었다.
“위대한 형제여,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어보고자 왔소. 악마의 토벌을 마쳤으니 이제 우린 방어선 진지로 돌아가는 거요?”
“……토벌을 마쳤다고 누가 그랬지?”
페룬은 흠칫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설마 이 악마가, ‘중심 악마’가 아니라는 말이오……?”
“…….”
카딤은 근육을 뚝뚝 풀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저 멀리 들판 너머 동쪽을 내다보았다.
전투 중에는 그도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급 악마가 죽고 마기가 흩어지자 확실히 알아차렸다. 이젠 송곳이 아니라 창날처럼 살갗을 꿰뚫는 마기.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야가 온통 깜깜하게 물들 것 같은.
그를 이곳으로 인도한 강대한 피 주머니는, 아직 멀쩡히 살아 있었다.
카딤은 팔을 잃은 전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토벌대를 이끌고 진지로 돌아가도록 해라.”
“……음?”
“다음에 마주칠 악마는 이 녀석보다도 훨씬 강력할 거다. 저항이 불가능한 힘, 혹은 상식을 거스르는 권능을 가졌을 수도 있지. 팔이 없는 전사나 오합지졸 병사들 따위는 방해만 될 뿐이다. 방어선 진지로 돌아가 그곳을 지키는 일이나 거들어주도록.”
“…….”
페룬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카딤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심장에 들끓는, 유의미한 투쟁을 향한 향상심이 그 말을 납득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무의미한 항변일지언정 일단 무언가 설득할 말을 꺼내 보려 했다.
그런데 입을 떼려는 찰나, 악마의 시체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뭐, 뭐야!?”
“어어? 뭐야, 어디 갔어?”
당황하여 소리치는 병사들. 카딤과 페룬은 대화를 잠시 중단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탈라인 전사들도 일시에 몰려들었다. 현장을 목격한 자들은 모두 똑같이 당황을 금치 못했다.
거대한 악마의 시체가 통째로 사라졌다. 회초리같이 얇은 나무 한 그루만을 남기고.
카딤은 미간을 와락 구기고 맨 처음 소리친 병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 그게…… 악마를 잡은 걸 증명하려면 뿔을 가져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친구와 같이 뿔을 자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달랑 이 나무 쪼가리 하나만 남겨두고…….”
페룬은 잠시 유심히 나무를 살펴보았다. 그러다 앞으로 나아와 말했다.
“‘금철목’의 묘목 같소. 자란지 얼마 안 된 녀석이군. 두께도 얇고, 길이도 짧고, 뿌리도 얕고, 게다가…….”
“…….”
“……뿔도 달려 있지 않고.”
페룬의 눈에 의미심장한 빛이 깃들었다. 카딤의 머릿속에도 빛살처럼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정황상 이 묘목이 악마의 진짜 모습인 듯했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 뿔도 없는 얄따란 묘목이 그토록 거대하고 흉악한 거목으로 변했다가, 바싹 탄 다음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다니?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불가사의한 권능을 가진 ‘악마’가 개입한다면, 이 세계에선 있을 수 없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설마…… 되돌아가면서 피까지 사라진 건 아니겠지?’
카딤은 품 안의 병을 확인했다. 다행히 악마의 피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떨어져 나가지 않은 부위만 원래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악마를 직접 보았던 페룬도 그와 비슷한 짐작에 이르렀다. 그는 이걸 하나의 기회로 생각했다. 카딤 앞으로 다가와 숙연하게 간청했다.
“형제여, 그대의 말대로 다음에 만날 악마가 상식을 거스르는 권능을 지니고 있다면, 어쩌면 일신의 무력만으론 대적할 수 없을지도 모르오.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계책을 쥐어짤 머리, 혹은 단순히 그 계책을 쥐어짤 동안 시간을 벌어줄 화살받이가 필요할 수도 있지.”
“…….”
“나와 내 다른 형제들이 그 역할을 맡겠소이다. 죽음에 이르는 명이라도 기꺼이 따르겠소. 우리는 흙바닥 위에서 무의미한 싸움박질을 벌이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이 ‘의미 있는 전장’에서 투쟁하고 싶소이다. 혹여 힘이 모자라거든 기꺼이 ‘아탈라의 신기’도 받아들일 테니…….”
카딤은 전사를 내려다보았다. 팔 하나 잘린 것쯤으론 이 아탈라인의 투지를 꺾을 수 없었다. 검은 눈동자에서 끝내 산화한다 하더라도 기꺼이 몸을 내던지겠다는 각오가 엿보였다.
뒤늦게 사정을 전해 들은 10인의 아탈라인 전사들도 망설임 없이 페룬과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사정을 전해 듣지 못한 25인의 참사군 병사들도 뭣도 모르고 일단 고개를 주억거리고 봤다.
“…….”
그러나.
카딤은 그 의지와 뜻을 거절했다.
“모두 돌아가라.”
“…….”
“‘의미 있는 전장’은 이곳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토벌대를 이끄는 용병의 입에서 단연한 명령이 떨어졌다.
“가서 방어선 진지의 전투를 거들어라.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그곳은 필시 악마들에게 함락당할 것이다. 그러면 그다음은 너희들이 지켜야 할 대도시가 전쟁터가 되겠지.”
“…….”
“또한 진지를 살펴 보면 던컨이라는 행상인이 있을 거다. 나와 동행하는 길잡이인데, 아직 제 한 몸 지킬 만한 힘이 없는 놈이다. 가는 김에 그 녀석의 안위도 좀 부탁하도록 하지.”
전사들은 침묵을 지켰다. 페룬은 눈꼬리를 달싹였다. 그러다 솟구치듯 시선을 치켜올리며 마지막으로 반문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소. 그대가 홀로 능히 거악에 맞설 만한 자란 것도 알고 있소. 하지만 앞서 말했듯,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당면할 수도 있지 않소? 그때 반드시 우리가 도움이 되어 줄 터이니…….”
카딤은 흉포한 미소를 짓고 전사의 말을 끊었다.
“세상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
“…….”
“더군다나, 그것이 더러운 악마를 족치는 일이라면.”
사늘하게 와닿는 전율. 페룬은 더는 반문하지 못했다. 그저 가늠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이 광오한 전사를 아득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들을 이끄는 ‘대전사’를 만났을 때 이후로 처음 겪는 기분이었다.
*
황금가도 제9 관문 방어선.
갈렌타나 참사군 병사들이 새까맣게 몰려든 마물들과 치열하게 맞서고 있었다.
“제기랄, 지식의 도시에 무궁한 번영을!”
“뒤져라, 이 불알이 녹두만 한 난쟁이 새끼들아!!”
– 키에에엑, 키에에에엑!
눈이 붉게 물든 고블린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병사는 방패로 막고 칼을 뻗어 고블린을 찔렀다. 칼날늑대가 달려들어 그 병사의 옆구리를 물어뜯었다. 다른 병사의 철퇴가 늑대의 대가리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콰 – 직!
– 흐웨에에에엑!
“어억!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코볼트가 그 병사의 척추에 곡괭이를 박았다. 토벽 너머의 궁병들이 코볼트들에게 화살을 쏘아댔다. 오크들이 토벽 너머로 힘껏 돌덩이를 내던졌다. 기마병이 말을 몰아 오크들을 발굽으로 짓밟았다.
콰드득, 콰드득 –
– 쉬이이익, 쉬이이이익!!
삼키고 삼켜지며 끊임없이 맞물리는 난전. 병사와 마물들이 한데 뒤섞여 쇠붙이와 발톱, 화살촉과 이빨을 서로에게 찔러넣기 위해 그악스럽게 날뛰었다. 한 사람, 한 마물이 그 뜻을 이룰 때마다 어김없이 잔혹한 피해가 뒤따랐다.
관자놀이를 뭉개는 일격에 눈알이 빠지고, 뒤틀린 뼈가 살갗을 뚫고 튀어나오고, 동맥을 찌르는 칼질에 핏물이 솟구치고, 내장이 쏟아지지 않도록 다급히 갈라진 복부를 동여매고……. 비정한 전황의 저울은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무의미한 시체들만 차곡히 쌓아 나갔다.
그런데 그때, 마물 측에 묵직한 무게추가 실렸다.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다!!!”
“……!!!”
전방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외침. 병사들의 얼굴이 시체처럼 해쓱하게 질렸다. 반면 마물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기세등등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 쿠워어억, 쿼어어어!!!
– 키에에에에에에!!
목책 너머,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던 경비대장 율리탄이 다급히 망루 위로 올라왔다. 어떤 악마가 얼마나 나타났냐고 캐묻자 감시병은 말을 더듬어대며 간신히 답했다.
“세, 셋입니다. 전부 다 머리에 뿔이 하나씩 달려 있습니다. 주, 중급 악마가 세 마리 나타난 것 같습니다…….”
“뭐? 제기랄, 그게 무슨 말이야! 저리 비켜 봐!”
직접 내다본 율리탄은 자신의 부하가 매우 정직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차라리 이 새끼가 거짓말쟁이였다면 좋았을 텐데.
중급 악마가 한 마리만 나타나도 전황은 매우 불리해진다. 지금으로선 남은 병사들을 죄다 그쪽으로 보내도 토벌이 가능할까 말까였다. 그런데 세 마리가 동시에 나타났다? 이건 그냥 몰살당하라고 하늘이 계시를 내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으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율리탄의 움푹 팬 눈가에 짙은 그늘이 졌다. 전방에 있는 병사들은 벌써 휩쓸려 나가고 있었고, 다른 병사들은 공황에 빠져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지켜보던 감시병이 초조하게 물었다.
“어, 어떻게 합니까, 경비대장님? 퇴각 명령을 내립니까?”
“…….”
불현듯 며칠 전 떠나보낸 토벌대의 얼굴이 율리탄의 뇌리를 스쳤다.
갈렌타나 참사회에서 보낸 용맹한 아탈라인 전사들, 아니면 ‘악마 학살자’인지 뭔지 헷갈리는 그 흉악한 용병……. 그 둘 중 하나만 진지에 남았어도 악마 몇 마리쯤은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출병을 조금만 더 늦게 시킬걸…….
“흐억! 아, 악마들이 나타났다고요? 그게 진짜입니까?”
문득 들려오는 겁먹은 목소리. 율리탄의 시선이 진지 내부를 향했다.
“…….”
안타깝게도 이곳에 남아 있는 외부인은 저 덩치 작고 어리벙벙하게 생긴 행상인 하나뿐이었다. 악마를 상대하는데 저런 자를 내보내느니, 차라리 발뒤꿈치라도 물어뜯도록 개미들을 훈련시켜 내보내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대, 대장님! 어서 명령을…….”
“……전방보다 후방을 우선으로 병사들을 퇴각시켜라. 악마가 이곳에 닿기 전에 진지를 버리고 철수한다.”
“……!”
마지막 보루인 이곳을 넘긴단 건, 무수한 시민들과 그들의 가족이 머무는 갈렌타나를 악마와의 전쟁터로 삼겠다는 뜻.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명령을 전달받은 기수들은 쉬이 깃대를 들지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였다.
그런데 돌연 감시병이 흥분하여 소리쳤다.
“대장님! 전방에 누군가 악마 쪽으로 난입했습니다! 저희 측의 병사는 아닙니다!”
“……음?”
“엇? 아, 악마의 목이 잘렸습니다! 그자가 다시 다른 악마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어, 어어? 한 마리가 또 죽었습니다!”
“……뭐?”
드디어 이 새끼가 거짓말쟁이가 되었군. 아니면 미쳤거나, 혹은 돌아 버렸거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율리탄은 급히 감시병을 밀치고 전방을 살폈다. 놀랍게도 이번에도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거한이 마물의 포위를 뚫고 차례차례 악마를 도륙 내고 있었다.
심지어 거한은 혼자 온 것도 아니었다. 그 뒤에는 수많은 지원군이 붙어 있었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진영에 파고들어 악마 주변의 마물들을 휩쓸었다.
이윽고 거한이 마지막 악마까지 반으로 쪼개는 순간, 전세는 완벽히 역전되었다.
지원군과 병사들은 주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마물의 군세를 수월하게 섬멸했다. 남은 마물들마저 달아나며 전투는 참사군 측의 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충격과 경악으로 얼어붙은 진지 안. 두 눈으로 보고도, 두 귀로 듣고도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병사들은 입버릇처럼 동맹을 건립한 위인만을 찾아댔다.
“맙소사, 레밀리온이시여…….”
“레밀리온이시여…….”
“세상에, 레밀리온이시여……. 이게 무슨…….”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감시병이었다. 그는 율리탄에게 물었다.
“대장님……? 저 전사들, 전부 아탈라인들 아닙니까? 설마 토벌대가 벌써 돌아온 걸까요?”
“…….”
율리탄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저만한 체구와 저만한 무위는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악마의 피를 뒤집어쓰고 왔던 그 용병 말고 다른 사람을 떠올리긴 어려웠다. 뒤따른 지원군은 필시 그와 함께 나선 아탈라인 전사들일 테고…….
그러나 보다 자세히 살펴본 후, 율리탄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냐…… 토벌대가 아냐. 그 용병이 저렇게 시꺼멓고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진 않았어. 게다가 아탈라인들의 머릿수가 저렇게 많지도 않았고…….”
“그, 그럼 저자들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난입한 병력은 서서히 진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적은 아닌 것 같았지만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무려 중급 악마 셋을 단신으로 도륙 낸 괴물과 그를 따르는 아탈라인 전사들. 이만큼 위험한 신원불명의 병력이 접근하는 걸 허락해도 되는 건지…….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목책 앞에 선 거한을 내려다본 후, 율리탄의 움푹 팬 두 눈이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그는 이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아니, 동맹 내에서 저 투구의 주인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당신은……. 아니, 당신이 왜 이런 곳에……?”
“…….”
도끼자루를 쥐고 지그시 망루를 올려다보는 거한.
상아색 뿔이 달린 투구 밑에서, 성난 황소처럼 뜨인 눈동자가 섬찟하게 빛났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