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66)
66화. 노인을 위한 악마는 없다 (2)
투명한 광채를 두른 부정형의 액체 거인.
말하자면, 이번에 나타난 적은 그런 모습이었다.
구덩이에서 솟구쳐오른 액체는 쏟아지지 않고 틀에 담긴 것처럼 웅대한 인영을 형성했다. 뒷배경을 고스란히 비추는 투명한 살갗에서 잔잔한 물결이 일어났다. 얼굴에 이목구비라 할 만한 것은 없고 빛무리만을 옷감처럼 두르고 있어, 어찌 보면 정오의 햇살을 받는 호수를 의인화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무 거인에 이어서 이번엔 물 거인이라…….’
카딤은 김빠진 실소를 터뜨렸다. 그 본질이나 구체적인 생김새는 상이했지만, 덩치와 형상이 비슷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여 2회차에선 온갖 거인들을 속성별로 하나씩 만날 운명인 건가? 그러면 조만간 용암 거인이나 바위 거인, 얼음 거인 같은 것도 나타나겠군.
허나 그런 잡념은 제쳐두고, 막상 어떻게 싸워야 될지를 생각하니 난감해졌다. 보다시피 저 액체 덩어리는 쇠붙이에 썰리질 않으니까. 풍랑을 만난 어부들을 일컬어 흔히 물과 사투를 벌인다고 표현하곤 하지만, 자신은 비유 없이 정말 물과 사투를 벌여야 할 처지가 됐으니…….
철퍽! 훙, 훙, 후웅, 턱!
카딤은 일단 도끼를 회수하고 거인을 유심히 살폈다. 황야의 무녀들이 배배 꼬인 작자들이긴 해도 해결이 불가능한 시련을 내리진 않는다. 대개 저런 부정형의 적은 내부에 ‘핵’을 갖고 있기 마련. 그것을 찾아 공격하면 되는 건가 싶어 몸뚱이를 유심히 살펴보려는데…….
거인이 여유로이 관찰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쏴아아, 쏴아아아 – !
허벅지에서 발바닥으로, 어깨에서 주먹으로 세찬 물결이 일었다. 불그스름한 횃불의 조명 탓에 그건 언뜻 유혈의 파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인은 몸을 웅크렸다가 높이 뛰쳐 오르더니 성대하게 투신하여 주먹을 내리꽂았다.
――――― 콰과과과과 – !
산산이 부서지는 빛의 포말, 물주먹이라 비웃기엔 지나치게 그 위력이 강했다. 물결로 가속된 주먹은 판석을 으스러뜨리고 천장까지 울릴 만큼 강렬한 충격을 선사했다. 직후 액체로 된 몸까지 흘러내려 주변을 휩쓰는 거센 파도로 변모했다.
콰르르, 콰르르르르…….
급히 뛰쳐 올라 벽에 도끼를 박아넣었다. 대차게 한번 몰아친 파도는 썰물처럼 되돌아가 다시금 거인의 형체를 갖췄다. 카딤은 그 틈에 적의 온몸 곳곳을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핵이 없는데?’
거인의 몸뚱이는 오직 반짝이는 빛무리와 투명한 액체로만 이루어져 있을 뿐, 아무런 내용물이 없었다. 카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쿠르르륵, 쿠르르르륵 – !
형체를 되찾기 무섭게 거인은 연이어 공격을 가했다. 격류로 가속된 주먹이 벽으로 쇄도했다.
카딤은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도낏자루를 놓고 칼자루를 쥔 채 뛰어올라 한 바퀴 회전, 칼날의 선풍을 일으키며 주먹과 맞부딪혔다.
콰과과과과과과 – !
선혈처럼 산산이 물방울이 튀어 오르고 팔뚝은 반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갈라진 물살은 흩어지지 않았다. 외려 두 갈래의 물줄기로 변하더니, 잔뜩 독 오른 물뱀처럼 사납게 카딤을 향해 달려들었다.
쿠르르르, 쿠르르르 – !
옥죄는 물길이 야만인의 몸뚱이를 집어삼켰다. 카딤은 당장 헤엄쳐 그 안에서 벗어나려 했다. 허나 와류가 사지를 단단히 붙들어 쉬이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부질없는 발버둥만이 반복되고 입가에서 물방울이 부글부글 피어올랐다.
별수 없이 카딤은 정신을 집중했다. 곧 가슴팍 상부에서 선명한 적광이 피어올랐다.
홧홧한 혈기가 충분히 스며든 순간, 비틀린 근육을 풀어내며 몰아치는 격동의 검세.
――――――― 콰아아아아 – !
맹렬한 충격파가 에워싼 물길을 단번에 떨쳐냈다. 빛의 액체가 폭발하듯 비산하여 거센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러나 떠밀려 간 액체는 또다시 인영으로 조립되어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카딤은 붉게 물든 두 눈을 부릅뜨고, 폭풍처럼 칼을 휘둘러 검격의 장막을 펼쳤다.
――――――― 콰과과과, 콰과과과과과 – !!
검세가 물살 사이로 날카롭게 스며들었다. 검압이 액체의 격류를 흩어 버렸다. 처음처럼 온몸을 투신하는 일격마저 드넓게 칼날을 휘두르며 솟구쳐올라 받아쳤다. 문신의 힘을 빌어 낸 카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없지만 ‘물’과 팽팽한 사투를 벌일 수가 있었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무의미한 방어에만 치중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칼날로 파도를 갈라버리는 내내 카딤은 방의 구석구석을 주의 깊게 살폈다. ‘핵’이 거인의 몸속이 아니라 바깥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없었다. 천장 끝부터 구덩이 속까지, 방 안 그 어디에도 ‘핵’이나, 주술적인 기능을 갖췄을 것처럼 보이는 물건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오는 결론은 결국 한 가지였다.
‘물리적인 타격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족치라고 만들어놓은 녀석인가 보군. 이를테면 속성 공격이라던지…….’
제일 확실한 방법은 얼려 버리는 것이었다. 액체를 꽁꽁 굳혀 버리면 더 이상 물살을 뻗지도 못할 테니까. 그러나 카딤에겐 저 녀석을 얼릴 수단이 없었다.
‘멜리사, 그 녀석이 있었다면 곧바로 빙결 마법을 써먹었을 텐데…….’
동료의 부재를 아쉬워할 틈은 없었다. 카딤은 차선책을 택했다. 모기를 집어놓고 적철의 검집에 갇혀 있던 지옥불 단검을 두 자루 꺼내 휘둘렀다.
화르르르르륵 – !
보통의 불은 닿자마자 꺼졌을 테지만 지옥불은 달랐다. 폭포처럼 액체를 뒤집어쓰고도 꺼지지 않고 건재하게 그 화력을 과시했다.
푸쉬이이이익 – !!
도리어 달려든 물살이 홍염의 칼날에 닿고 수증기로 기화했다. 단검으로 격랑을 거듭 난자하자, 액체가 뭉텅이로 증발해 버리며 거인의 덩치가 조금씩 줄어들어 갔다.
그렇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한계가 찾아왔다.
화르륵, 화르르르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방을 뿌옇게 물들이고, 거인의 몸뚱어리를 3분의 1쯤 날려 버렸을 무렵, 단검들의 화력이 눈에 띄게 미적지근해졌다. 끝없이 쏟아지는 파도와 검신에 추적추적 달라붙는 습기가 불길의 이빨을 좀먹은 탓.
게다가 증발한 액체는 천장에 이슬처럼 맺혀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다. 거인의 몸뚱어리는 횃불 몇 개만 꺼뜨린 채 원래대로 수복되었다. 물의 거인을 불태우는 게 해답을 향한 올바른 접근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서서히 문신의 혈기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카딤은 착잡하게 이를 악물었다. 버프가 떨어지면 다시 와류에 사지를 붙잡힐지도 몰랐다. 일단 다른 악마의 피라도 마시고 좀 더 시간을 끌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 순간, 카딤의 눈에 기이한 물체가 들어왔다.
거인의 발치에 놓인 주먹만 한 나무토막.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없었던 것이었다. 너무 생뚱맞은 물건인지라 왜 저런 게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
카딤은 머지않아 저게 생겨난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곧장 물의 거인을 퇴치할 공략법으로 이어졌다.
콰르르르르 – !
물의 거인이 또 한 번 주먹을 앞세워 달려들었다. 카딤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등에 메고 있던 ‘가시’를 끌러 손에 쥐고, 거인의 다리를 노려 쏜살같이 내던졌다.
――――――― 철 – 퍽!
목질의 ‘가시’가 일렁이는 액체의 표면을 꿰뚫었다. 하얗게 일어난 물거품은 자금자금한 톱밥으로 변했고, 가시의 첨단이 지나간 자국을 따라 서서히 나뭇결무늬가 번졌다. 굳어버린 액체가 가라앉으며 균형이 무너져, 거인은 카딤에게 닿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쿠르르륵, 쿠르륵 –
역질종 악마로부터 얻어낸 가시. 쓸데가 있을까 싶어 참사군 병사가 자른 걸 하나 챙겨 온 것이었다.
효과는 볼 것도 없이 뛰어났다. 가시에 담긴 악마의 고유 성질, ‘목질화’는 그 대상이 액체라 할지라도 여지없이 발동했다. 이전에 마을에서 물웅덩이마저 나무의 질감으로 굳혔을 때와 마찬가지로.
카딤은 건너편으로 가 가시를 회수하여 거인을 연달아 찔렀다. 찔린 부분마다 ‘목질화’가 퍼져나가며 굳어가는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순식간에 온몸이 목질로 변해 버린 거인은, 더 이상 몸을 가누지 못하고 판석 위로 장대하게 무너져내렸다.
쿵! 쿠르르르르르…….
무너지는 나무토막. 전투의 끝을 알리는 축축한 고요.
“…….”
카딤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물리 면역이란 특성 탓에 무척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난적이었다. 가시가 없었으면 대체 어떻게 잡아야 했을지……. 그래도 어쨌든 이기긴 이겼으니 숨을 돌리며 풍경이 바뀌길 기다렸다.
한데 풍경이 벗겨지는 대신, 의문에 찬 탄성이 들려왔다.
[……으음?]카딤은 눈썹을 좁히고 벽을 쿵쿵쿵, 두들겼다. 헛짓거리는 그만하고 어서 이동시켜 달라는 뜻. 짧은 정적에 이어 내면으로 더듬대는 울림이 들려왔다.
[증명은 끝나, 끝났다. 이리 오거라, 아탈라의 대전사여…….]끄저저저저저적…….
풍경이 벗겨졌다. 원하던 대로 원형의 방은 사라지고 비좁은 공간이 나타났다. 꿉꿉한 습기와 열기 대신 텁텁한 먼지내음이 물씬 몰려들었다.
카딤은 잔기침을 하고 시선을 돌렸다. 은은한 문양들과 쇠 장식을 지나 규칙 없이 휘갈겨진 주술진에 이르러, 황당함으로 낯짝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린 노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 무엇이더냐, 대전사여? 무슨 짓을 한 게냐? 대체 어떻게, 아, 아니, 왜 그렇게 샘물의 수호자를 쓰러뜨린 거냐? 그런 식으로 수호자를 물리치라고 마련한 시련이 아닌데…….”
수백 년간 감정을 드러낼 일이 없었기에, 황야의 무녀가 짓는 표정은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카딤은 무뚝뚝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럼 저런 걸 어떻게 쓰러뜨리라고 냅둔 것이더냐. 혹여 저 방을 통째로 무너뜨려야 했던 건가? 아직 그 정도는 무리인데.”
“아니, 들어오는 길에 단서를 적어 놓지 않았더냐! ‘전사들을 축성하는 투쟁의 겁화가 모두 사그라들면, 샘물에 담긴 별빛마저 얼어붙는 혹독한 동야가 찾아오리라!’ 그 말대로 천장의 횃불만 모두 꺼뜨리면 수호자가 얼어붙어 시련을 통과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런 요괴한 수단을 써서 수호자를 쓰러뜨린 건지…….”
“…….”
카딤은 지그시 눈살을 찌푸렸다. 저딴 헛소리가 단서였단 건 차치하고서라도, 도통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단서라면, 그 들어오는 통로의 벽과 바닥에 온통 괴발개발 적혀 있었던 것 말인가?”
“그래, 그렇다! 문양 사이에서 ‘고대 문자’만 찾아 읽으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어째서…….”
“왜 하필 단서를 고대 문자로 적어 놓은 거지. 나는 그걸 읽을 줄 모른다만.”
무녀는 흠칫 주름진 눈초리를 떨었다. 그러곤 미심쩍다는 눈길을 보냈다.
“무슨 소릴 하는 게냐? 맹안의 무녀님께서 대전사님은 고대 문자를 읽을 줄 아실 테니, 시련을 헤쳐 나갈 단서는 반드시 고대 문자로 적어놓으라 똑똑히 말씀하셨거늘! 그대, 시련을 해결하는 방식도 그렇고…… 정말로 ‘아탈라의 대전사’가 맞긴 한 건가?”
“…….”
카딤은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이제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1회차 당시, 그는 시릴이 해석하지 못한 고대 문자들을 몇 차례 대신 해석해 준 적 있었다. 하지만 그건 카딤이 고대 문자에 능통해서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다. 단지 게임으로 미리 경험해 본 덕에, 스토리 진행 중 뜻이 밝혀진 고대 문자들을 외워서 가능했던 일이었을 뿐.
허나 시릴의 입장에선 카딤이 고대 문자에 능통하다고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그러니 ‘대전사’의 자격을 변별하기 위해 저런 장치를 넣어 놓았겠지. 아무쪼록 새로 적힌 고대 문자들은 거의 해석할 수 없는 카딤으로선 골치가 아픈 노릇이었다.
‘쯧, 앞으로도 계속 단서 없이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인데…….’
잠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생각을 바꿔 먹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정해진 해답대로만 문제를 해결하란 법은 없었다. 이번 같은 난적도 어떻게든 처치하지 않았는가? 칼이 안 들면 주먹을 써서, 주먹도 안 들면 이빨을 써서 해결하면 될 일. 이도 저도 안 되면 진짜로 방을 무너뜨리기라도 해 보지, 뭐…….
고개를 들어보니 여전히 의구심에 차 자신을 응시하는 눈이 보였다. 카딤은 옷섶을 풀어 문신을 보여 주고, 양손에 ‘모기’와 ‘연어’를 들어 올려 보였다. 황야의 무녀는 그제야 축 흘러내린 눈두덩을 들어 올리며 메마른 눈동자를 빛냈다.
“그 문신, 아니, 그 무기들은…….”
“아탈라의 축복을 받아 벼린 무기다. 이미 너와 같은 무녀를 만나 한 차례 문신도 새겼고. 그리고 ‘맹안의 무녀’의 본명은 시릴이지. 이만하면 내가 대전사가 맞다는 증명으론 충분한가?”
“……충분하다. 그런데 어째서 무기에 그런 이름들을 새긴 게지? ‘모기’와 ‘연어’라니……. 무슨 대자연을 섬기는 엘프들도 아니고…….”
“…….”
카딤은 지적을 한 귀로 가뿐히 흘려넘겼다. 무녀는 뱁새눈을 뜨고 있다가 큼큼,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곤 품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주물, ‘각인의 바늘’을 꺼내 들었다.
“묻고 싶은 것은 많다만, 그건 맡은 바 사명을 다한 뒤로 미루도록 하지. 처음이 아니라 하니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겠다. 그대가 바라는 권능을 가진 ‘악마의 피’를 내어 놓거라. 이 바늘이 그 혈성의 기운을 머금고, 그대의 육신에 바라지 않을 권능의 표식을 새겨 줄 것이다.”
카딤은 마지막으로 고민에 빠졌다.
오면서도 계속 생각했던 건데 아직도 결정을 내리질 못했다. 중급 악마의 피를 문신으로 새기기는 아까우니 선택지는 결국 둘 중 하나였다.
매료종 악마의 피를 새기느냐, 역질종 악마의 피를 새기느냐.
‘그런데 역질종은 아직 피를 써보질 못했는데……?’
매료종의 피는 의도치 않게 사용해 봤지만 역질종의 피는 아니었다. 거진 영구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버프인데 효과도 모르고 결정을 내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잠깐, 시험해 보고 결정해도 되나?”
“……음?”
무녀가 의아하게 눈짓하는 찰나, 카딤은 병뚜껑을 열고 악마의 피를 한 모금 입에 털어 넣었다. 시체의 고름과 나뭇진을 섞은 듯한 악취가 피어오르고 독한 기운이 식도를 따라 몸속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곧장 변화가 일어났다.
“……!”
무녀의 눈이 함지박만 하게 뜨였다. 처진 볼살이 희미하게 푸들거리고 이마에는 협곡처럼 갈라진 주름이 패였다. 반면 카딤은 동요 없이 비뚜름한 미소만 지었을 따름이었다. 그래, 역시 이런 효과였나.
“썩 나쁘지 않군. 이걸로 하도록 하지.”
마음에 드는 술이라도 찾아낸 듯, 카딤은 가볍게 악마의 피를 내밀었다. 하지만 변화를 목전에서 지켜본 무녀는 도무지 평정을 지킬 수가 없었다. 먼지가 두껍게 쌓인 폐부로부터 반사적으로 탁한 한숨이 밀려 나왔다.
“……후우.”
수백 년 만에 사람과 만난 무녀가 감당하기에, 아탈라의 대전사는 지나치게 행동거지가 괴이한 기인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