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67)
67화. 노인을 위한 악마는 없다 (3)
강철처럼 탄탄한 팔뚝 속으로 짙붉게 달아오른 바늘이 틈입했다. 바늘의 혈기는 체내로 빠르게 흘러들어, 살갗 위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그 무늬를 흐느적대다 칼날의 날개와 같은 문양을 형성했다.
“되었다……. 이제 정신만 집중하면 그 악마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게다. 효과가 그리 길진 않고, 사후의 광증은 여전히 유의해야 하지만…….”
“수고했다. 고맙군.”
카딤은 짧게 고개를 까딱였다. 무녀는 후우,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래도록 짊어지고 있던 짐을 벗어던져 한결 자연스럽고 홀가분해진 표정. 쪼그라든 눈가에서 잉걸불처럼 미진한 의문과 호기심이 타올랐다.
“나보다 앞서 만난 무녀가…… 베샤카였다고 했나?”
“그렇다.”
“끌끌…… 다행이로군. 그치는 맹안의 무녀님을 아주 독실히 따르던 자였지. 그분의 뜻이 그대에게 닿는 걸 보았으니, 평생을 고독과 기다림에 시달리다 죽었다 한들 여한은 없었을 게야.”
무녀의 눈동자는 두터운 세월을 들추고 과거의 잔상들을 엿보고 있었다. 아마도, 함께 이 유적에서의 유폐를 택했을 자들의 얼굴을.
카딤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시릴의 뜻을 따른 걸 후회하는가.”
무녀는 빙그레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나? 끌끌끌……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후회하지!”
“…….”
“한 십 년쯤 기다리면 오겠거니 싶었는데, 무려 수백 년이 지나고 나서야 찾아올 줄이야! 게다가 맹안의 무녀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막연히 위엄 있고 지혜로운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 아탈라의 대전사가 이런 괴짜였을 줄은! 다른 무녀들이 그대를 만났을 때 어떨지가 기대되는구만!”
“…….”
“아직도 그치들이 살아 있다면 말이지만, 끌끌끌…….”
쓰디쓴 자조가 묻어나는 말꼬리. 카딤의 낯에는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무녀는 곧 그 사실을 눈치채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나 대전사여, 자책하진 말거라.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었고, 그 고통과 결과를 감당하는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제 발로 황야에 들어선 자가 불타는 갈증과 내리쬐는 볕을 욕하는 건 우스운 꼬락서니지.”
“…….”
“다만, 부디 이 인고의 세월을 가로질러 그대를 맞이한 자로서, 딱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는가?”
말해보라 턱짓하는 카딤. 무녀의 갈라진 입술이 신탁을 내리듯 비장하게 떨어졌다.
“황야의 아버지께서 그대에게 맡긴 사명은 구호가 아니라 투쟁이지. 비단 그대뿐 아니라 모든 대전사들은 고통받는 자를 구하는 게 아닌, 시대의 거악을 뿌리 뽑기 위한 사명을 타고났다네.”
“…….”
“그렇지만…… 그럼에도 여유가 된다면, 부디 가끔씩 짓밟힌 잡초 한 포기도 되돌아보는 아량을 가져 주게나. 이 세상엔 자네와 같이 풍랑이 일어도 꿈쩍 않는 거인도 있지만, 무심코 디딘 발걸음 한 번에 영영 죽고 마는 잡초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
“…….”
“신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세상 모두를 구할 순 없네. 하지만 가까이 있는 한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렇지만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얼마 없었어. 적어도 내가 밖에 있었을 적엔 말이지…….”
“…….”
“그런데 만일 자네가 짓밟힌 잡초마저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준다면, 황야의 무녀들이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아탈라의 대전사가 그런 사람이 되어 준다면…… 조만간 황야의 먼지로 사라질 이 노구의 마음도 한결 홀가분해질 듯하구먼.”
카딤의 눈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공교롭게도 무녀의 간촉은 그가 인간성을 잃은 악귀가 되지 않기 위해 삼은 신조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피로 물든 진창을 건너며 오물을 마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이 달린 문제가 아니라면 손에 쥔 빵조각을 보다 허기진 자에게 건넨다.
다만, 무녀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길 청하고 있었다. 손에 쥔 빵조각이 없어도 찾아서 허기진 자에게 건네는 것. 간악한 악마들과 투쟁하고, 후환이 남지 않도록 훼방꾼들을 쳐 죽이고, 정신을 거듭 광증에 파먹히는 와중에도 그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카딤은 혹여 아탈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길 원하냐 물었다. 무녀는 늙은 노새처럼 목을 빼고 도리질했다.
“존엄한 투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진 말게나. 누가 뭐래도 대전사의 최우선 사명은 악을 멸하고 투쟁하는 것이니. 이건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부탁일 뿐이니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네.”
상념의 바다를 오래도록 유영하다가, 결국 카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유폐의 세월과 투쟁하여 뜻을 이룬 자에 대한 마땅한 예우였으니까. 항상 들어줄 순 없어도 지킬 수 있을 때는 지켜보도록 하지, 뭐.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지.”
“…….”
“그대의 육신이 덧없이 흩날리는 먼지가 될지라도, 그대의 이름과 부탁은 잊지 않겠다.”
늙수그레한 얼굴에 푸근한 희락이 깃들었다. 비로소 무사히 삶의 종착에 닿았음을 안도하는 미소. 무녀는 기억의 창고 속에 수백 년간 방치되어 있던 이름을 찾아 조심스레 끌러 놓았다.
“내 이름은, 케투라라네.”
“…….”
“만나서 반가웠네, 대전사여. 부디 되도록 머나먼 미래에, 저 전쟁과 연회가 끊이지 않는 곳에서 재회할 수 있기만을 빌지.”
끄저저저저저저적…….
낡은 벽지처럼 풍경이 벗겨졌다. 늙은 무녀의 모습도 그 안에 담긴 채 차곡차곡 접혀 사라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비좁은 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미풍이 부는 메마른 구릉만이 나타났다. 마치 찰나의 백일몽이라도 꾼 것처럼.
그러나 팔뚝 위에 선명히 새겨진 문신이, 꿈이 아님을 방증했다.
카딤은 문신, 그리고 빛을 잃은 석패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먼 곳으로 눈을 돌리고 서둘러 발걸음을 뗐다. 벌써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이젠 저기 저 동쪽, 살을 탐하는 쇠붙이처럼 집요하게 파고드는 마기, 그 근원이 도사린 곳으로 갈 때가 되었다.
그런데 수십 발자국쯤 나아갔을 즈음, 카딤의 걸음이 갑자기 느려졌다.
“…….”
도저히 떠날 수 없게 발목을 붙드는 케투라의 부탁, 그리고 뇌리를 스치는 어느 얼굴.
발길이 무거워졌다. 보폭이 좁아졌다. 그러다 아예 멈춰서더니 뒤돌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가볍게 구보하는 것처럼 걸음을 딛다가 어느 순간 박차를 가했다. 바람이 살결을 스치며 산산이 흩어지고 멀어졌던 마을이 단숨에 코앞으로 다가왔다.
– 케헤헤, 케헤에에에!
– 케헤헤헤헤헥!
떠났던 집에 다시 이르고 보니, 홉고블린들이 창칼로 찌그러진 문을 마구 두들겨대고 있었다. 카딤은 걸음을 늦추지 않고 그대로 가속을 실어 도끼를 내던졌다.
패래래래래랙, 퍼거거거걱!!
– 케엑!!
– 케헥!!
휘몰아치는 금속의 원반이 골통과 모가지들을 횡축으로 분쇄했다. 홉고블린들은 힘에 짓눌려 찌그러진 단면으로 뇌수와 선혈을 콸콸 흘리며 허물어졌다. 그나마 살아남은 녀석들도 이어진 모기의 참격에 휘말려 먼저 죽은 놈들과 같이 유명을 달리했다.
콰 – 앙!
카딤은 즉각 어깨로 문을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구석에 귀를 틀어막고 쥐며느리처럼 옹송그린 노파가 보였다. 머리를 툭툭, 건드리자 죽는 소리를 내며 발작하듯 온몸을 떨었다.
“으에에엑, 으헤으윽……. 켈룩, 켈룩, 으흐, 으흐흑…….”
십수 번은 두들기고 나서야 간신히 눈물과 콧물로 잔뜩 얼룩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야만인을 알아본 노파의 눈동자가 말갛게 반짝였다.
“……에, 에에, 아, 아바?”
“…….”
카딤은 이마를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대신, 오늘은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도록 하지. 어디 가보고 싶은 데라도 있더냐.”
*
노파는 근처의 들판에서 뛰어놀길 원했다.
카딤은 한참 헤맨 끝에 겨우 시체와 마물이 없는 들판을 찾아냈다. 물론 그곳에서도 관절이 약한 노파가 뛰어노는 건 무리였다.
노파는 대신 들꽃을 꺾어 엉성한 반지와 화관을 만들고, 흙을 맨손으로 파고 경단을 만들어 소꿉놀이를 했다. 카딤은 노파가 개망초 화관을 자신의 머리에 씌운 것까진 그러려니 하며 냅두었다. 흙 경단을 진짜로 자신에게 먹이려고 들 때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길을 내쳤지만.
대성통곡하는 노파를 달래주기 위해 카딤은 근처의 나무들을 꺾어 움막을 지어주었다. 노파는 그 허접한 집이 자신의 진짜 집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닳아빠지도록 벽과 지붕을 쉴 틈 없이 어루만져 댔고, 어디에 뭘 놓을 거라며 내부 장식을 구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흐리터분한 날씨와 대조적으로 노파의 입가에선 하루 종일 환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날이 저문 뒤엔 들판에서 모닥불을 피웠다. 두꺼운 모포처럼 깔린 구름 뒤로 달은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고 별은 아스라한 여광을 내비칠 뿐인지라, 땅 위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은 유독 더 선명하고 따뜻해 보이는 광채를 발했다.
눈에 띄기 딱 좋은 표지였으나 훼방꾼은 없었다. 근처를 어슬렁대던 마물들은 전부 애저녁에 도끼날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으니.
카딤은 불 위에 미리 챙겨온 솥을 올렸다. 그 안에 물을 붓고 잘게 부순 건량과 소금을 타서 간이 수프를 끓였다.
보글, 보글, 보글…….
솔직히 맛대가리 없는 음식이었다. 카딤마저도 한번 맛을 보곤 퉷, 침을 뱉었을 정도. 그러나 노파는 그것이 천하의 진미라도 되는 것처럼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다 먹고도 연거푸 한 그릇을 더 달라 청했는데, 대체 그 많은 양이 저 쪼그만 몸뚱이의 어디로 가는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어느덧 으슥하게 기운 밤. 움막에서 하루 자고 싶다고 졸라대는 노파를 억지로 붙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막상 돌아오자 언제 고집을 부렸냐는 듯 새근새근 잠들었지만. 하기야 익숙지 않은 늙은 몸으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놀았으니 피곤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카딤은 다른 폐가에서 가구 따위를 주워 와 노파의 집 주변에 방벽을 만들어주었다. 문설주를 부숴 문을 막은 것보단 한층 더 안전할 터였다. 구하러 온 사람들의 눈에 띄기에도 좋을 테고.
마지막으로 노파의 곁에 길에서 주운 단검을 한 자루 놓아주었다. 어쨌든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순 없다. 피치 못할 상황이 오면, 결국은 이 노파도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투쟁해야 할 테지.
볼일은 마쳤다. 이젠 정말 떠날 때가 되었다.
한데 문턱에 발을 딛는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는 거예요?”
“…….”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카딤은 부스스 잠에서 깬 노파를 마주보았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밤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너를 그 모습으로 만든 악마를 죽이러 간다.”
“…….”
“그 단검을 잘 챙겨라. 내가 없는 동안에는 그 단검이 너를 대신 지켜줄 테니.”
노파는 더 이상 칭얼대지 않았다.
그저 단검을 소중한 보물처럼 품에 꼭 끌어안고는,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을 뿐.
“고맙습니다, 아저씨…….”
카딤의 눈초리가 꿈틀 떨렸다.
아주 짧은 찰나, 악마가 덧씌운 저주가 벗겨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름과 검버섯이 사라지고 젖살도 안 빠진 발간 뺨이 드러났다. 잿더미 같은 머리칼은 윤기 나는 갈색으로 물들고 희부연 홍채도 그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미진한 광명조차 없는 깜깜한 고요 속에서, 카딤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누르고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어린 소녀의 미소를 엿볼 수 있었다.
환상은 길지 않았다. 눈앞의 얼굴은 홀연히 노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더는 천진하지 않은, 모든 슬픈 일을 직감하고 깨달아 버린.
카딤은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찌그러진 문을 억지로 닫고 가구의 방벽을 넘었다. 가죽신을 붙여 잡는 묵직한 감정의 무게. 그럼에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검은 늪처럼 펼쳐진 밤길을 따라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아마 한 사람의 삶에 있어, 어린 나이에 슬픔을 인내하는 법을 배우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은 없을 터였다.
*
아침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기괴한 격류를 그리는 적란운이 하늘을 틀어막았기에.
쿠르르르르…….
그 범위나 농도나, 고작 안개처럼 퍼지는 정도인 상급 악마의 마기와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눈에 닿는 곳은 전부 거무스름한 색채로 물들었고, 대기에 녹아내린 마기가 화살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모든 긍정적인 감정은 사그라들고 오직 고통과 절망만이 피어오르는 땅이었다.
솔타나.
갈렌타나와 베스타나를 잇는 동맹의 도시, 토벌대의 마지막 공략 지점, 악마와 마물에게 점령당한 폐허.
그리고…… ‘중심 악마’의 본거지가 확실한 장소.
카딤은 드높은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성문을 지키고 서 있는 악마와 마물들을 마주 보았다.
– 케헤헤헤헤헥!
– 또 왔어, 먹이가! 먹이가, 먹이가 또 왔어!
– 키히히힉, 이, 이번엔 안 놓쳐! 어서, 어서 먹어 치워야 해!
칼은 오는 길에 더욱 강력하게 벼렸고, 도끼는 아직도 충분히 예리하고, 단검도 세 자루 든든하게 있고, 문신의 힘도 완충됐고, 악마의 피는…… 저기에 잔뜩 널려 있군.
카딤은 마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입매를 비틀었다.
사냥할 준비는 끝났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