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7)
7화. 고블린, 악마, 아이들 (3)
오늘 밤, 숲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잔등처럼 일렁거리는 휘광. 줄 지어선 횃불들이 고요한 어둠을 할퀴었기에.
그러나 그들은 위풍당당한 밤의 정복자가 아니었다. 걸음걸이에는 주저함이 뚝뚝 묻어났고 불꽃 아래 드러난 얼굴들은 바짝 굳어 있었다. 대부분 겁먹은 짐승처럼 촉각을 곤두세우고 어둑한 덤불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 저거…….”
“으헉, 깜짝아!”
파드득, 정체 모를 날짐승의 날갯짓에 놀란 장정 대여섯이 자지러졌다. 반딧불을 고블린의 안광으로 착각하여 호들갑을 떠는 자도 있었다. 남의 발소리에 식겁하여 쇠스랑을 휘두르는 바람에 부상자가 나올 뻔도 했다.
일행 중 공포에 휘둘리지 않은 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선두에서 길잡이를 뒤따르고 있는 그을린 피부의 거한.
카딤의 얼굴은 아예 모든 감정을 잊어버린 것처럼 무덤덤했다. 걸음은 또 어찌나 빠른지 길잡이를 몇 번이나 앞지를 뻔했다.
때아닌 담력 훈련은 동굴 인근에 이르면서 비로소 끝났다. 힐끔힐끔 막간의 치열한 눈치 싸움이 벌어졌다. 누군가 허리를 쿡쿡 찌르는 바람에 하릴없이 손도끼를 빌려준 남자가 멋쩍게 나섰다.
“으흠, 우린…… 이제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겠소이다. 고블린들이 갑자기 마을을 습격할 수도 있으니까…….”
치졸한 변명이었으나 카딤은 상관치 않았다. 어차피 악마에게 겁을 먹은 자들은 별 도움도 되지 않을 터. 괜히 여러 명 데려가서 거치적대느니 혼자 싸우는 게 더 나았다.
그래도 아예 아무도 안 데려갈 순 없었다. 카딤은 던컨을 바라보며 턱짓했다.
“행상인, 너는 나와 같이 간다.”
“예, 예?”
“악마와 싸우는 동안 빛을 밝힐 횃불잡이가 한 명 필요하다.”
카딤은 밤눈이 밝은 편이지만 완벽히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정말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동굴 안에서 싸우기 위해선 불을 밝혀 줄 사람이 필요했다.
“…….”
던컨은 동굴을 내다보았다. 시커먼 아가리를 쩍 벌린 모습. 저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안에서 희미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으…… 진짜 가기 싫은데…….’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야만인은 무심한 눈길을 보냈고 마을 주민들은 열심히 시선을 피했다. 자신을 대신해 나서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나으리. 후우, 가시죠.”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는 던컨. 마을 주민들은 그에게 여분의 횃대와 부싯돌을 건네고는 도망치듯 부리나케 떠나갔다.
두 사람은 동굴 앞에 섰다. 불빛을 드리우자 미세하게 밑으로 경사진 길이 보였다. 안으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는 형태였고 가장자리에 가느다란 도랑이 졸졸졸 흘렀다. 카딤이 앞장서고 던컨이 뒤에서 불을 밝히며 조심조심 뒤따랐다.
초입부터 악마나 고블린이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던컨은 한동안 몸을 숨길 만한 종유석과 바위 뒤를 유의 깊게 살폈다. 그렇지만 괴물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 들은 비명소리 또한 착각인 모양이었다.
다소 긴장이 놓인 던컨이 카딤을 힐끔 바라보며 말을 붙였다.
“나으리, 그런데……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나으리는 어째서 저자들을 나무라지 않고 도와주시는 겁니까? 자식을 악마에게 바치고, 심지어 직접 구하러 가지도 않고 달아나는 비열한 놈들인데요?”
딱히 제대로 된 답변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계속 이렇게 묵묵히 가는 게 멋쩍어 꺼낸 말일 뿐.
카딤은 던컨을 슬쩍 곁눈질했다.
“너는 살아 있는 악마와 마주한 적이 없나?”
“예? 어어, 예…….”
없었다. 대륙 전역에 악마들이 창궐했다고는 하나, 그에 관한 소문이 돌면 항상 여로를 돌렸다. 그래서 행상인이 보아 온 악마는 오직 암시장의 시체들 뿐이었다.
야만인은 작은 한숨과 함께 꽤 긴 설명을 내놓았다.
“악마를 직접 마주한 인간은 그전과 달라진다. 생의 모든 고결한 의지는 꺾이고 뼈저린 두려움과 생존에 대한 갈망만이 남는다. 소수의 인간은 그걸 극복하고 악마에게 맞서지만, 범인(凡人)에게 그만한 극기심을 바랄 순 없지.”
“어, 그렇지만 나으리,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칠 수 있습니까? 짐승도 지 새끼 귀한 줄은 알기 마련인데…….”
“때때로 살아남기 위해선 진창을 건너며 오물을 들이켜야 하는 법이다. 추악하다 할지라도 저들 나름 생존을 위해 내린 선택이니 무작정 비난할 순 없지. 변명을 듣지 않았는가? 그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고.”
“아, 아니, 그렇다 해도 아이의 입장에선 온 세상이 자신을 저버린 격 아닙니까? 그런 몹쓸 짓을 하며 살아남은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답니까?”
“…….”
딱딱하게 굳는 야만인의 얼굴. 마지막 질문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던컨은 실언을 했다고 생각했다. 사색이 되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카딤은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생각했다. 뭔가 입장이 바뀐 것 같다고.
던컨의 윤리 의식이 훨씬 현실의 것에 가까웠다. 용사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피의 수라도를 건너며 완전히 뒤틀린 자신의 관념보다.
‘……이렇게 현실로 돌아간다 한들,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구름 위에 붕 뜬 허망한 질문이었다. 그보단 차라리 던컨이 말을 돌리기 위해 던진 질문이 훨씬 의미 있는 편이었다.
“그, 그건 그렇고요, 나으리. 납치당한 아이들은 과연 살아있을까요?”
카딤은 눈을 감았다. 지난날 마주쳤던 악마들의 습성을 되짚어 보았다.
회고는 길지 않았다.
“악마가 덜 교활하고 덜 사악하다면 죽였겠지. 하지만 교활하고 사악한 놈이라면 분명 살려 두었을 거다.”
“예? 그게 무슨…….”
말이 거꾸로 된 거 아니냐고 반문하려는 찰나, 성대를 긁는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키이익, 키엑!
– 킥, 키에에에……!
석순 사이 틈틈이 도사린 붉은 눈동자들이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맹목적인 살의가 피부에 와닿았다. 던컨은 의문 따윈 까맣게 잊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히, 히익!”
행상인이 돌부리에 걸려 비틀댄 것과 야만인이 손도끼를 쏘아 낸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렁이는 횃불의 몸짓을 따라 허위허위 그림자를 뻗은 손도끼는 선두에 선 고블린의 양 눈 사이에 정확하게 적중했다.
퍽 – !
– 켁!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고블린들은 눈치채지도 못했다. 맥없이 허물어지는 동족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을 뿐.
그사이, 카딤이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흐어어어어업!!”
푹 –
– 그륽, 히헥…….
칼날이 콩알만 한 목젖을 관통했다. 고블린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몸을 걷어차 칼을 뽑아낸 다음, 허리 숙여 손도끼까지 회수하는 카딤.
퍽 –
도끼날에 이마를 적중당한 한 마리가 더 쓰러졌다. 카딤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고블린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거구의 야만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 키에에에에엑!!
제 허벅지만 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고블린 하나,
카딤은 칼을 짧게 휘둘러 몽둥이를 쳐냈다. 그러곤 칼날을 안으로 당겨 신속히 옆구리를 가르는 직선을 그었다. 복막이 쇠톱으로 뜯어낸 것처럼 갈라지며 구불구불한 창자가 쏟아져 내렸다.
– 키힉, 키히히히힉!
– 키에에에에에!!
개구리처럼 도약하여 달려드는 고블린 둘,
주변에 석순이 많아 폭넓게 칼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카딤은 칼을 거꾸로 잡았다. 칼날 옆면을 손바닥에 붙이고 손가락 끝으로만 칼날을 쥐었다. 그러곤 그걸 마치 짧은 곡괭이처럼 세차게 휘둘렀다.
휘익 – 퍽, 퍽!
– 켁!
폭 좁은 부채꼴 형태의 궤적. 가공할 힘이 담긴 십자막이가 골통을 분쇄했다. 고블린들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카딤은 손을 베이기 전에 다시 원래대로 칼을 쥐었다. 역시 이렇게 방해물이 많은 공간에서 칼을 사용하는 건 적절하지 않았다. 남은 고블린들은 손도끼로 도륙 내기로 했다.
찌푸린 이마에 박힌 손도끼를 다시 뽑아 또 다른 이마를 내리찍었다. 녹슨 부지깽이를 쥔 손을 으깨 버리고 정수리를 기점으로 대가리를 쪼갰다. 허리를 걷어차고 나동그라진 녀석의 목을 내리쳤다. 몸통을 찍힌 후 옹송그려 툭 불거진 척추를 끊어 버렸다.
야만인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 하에 고블린의 머릿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스무 구가 넘는 시체가 양산되고 이제 남은 것은 고작 서너 마리뿐.
– 키에에에, 키엑!
– 키히히, 키익, 키익!
공격성이 극히 높아졌으나 겁을 상실한 건 아니었다. 살아남은 고블린들은 공포로 신음하며 허겁지겁 달아났다. 어둠 속으로 진녹색 난쟁이들의 신영이 사라졌다.
던컨은 넋 나간 얼굴로 횃불을 쳐들고 핏빛 참상을 둘러보았다.
“흐억, 헉, 맙소사…….”
“바로 쫓아간다. 무리의 대부분이 죽었으니 분명 악마에게 돌아갈 거다.”
카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미건조한 태도였다. 던컨은 대체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야만인을 뒤따랐다.
넓어지던 길은 어느 부분에 이르며 급격히 좁아졌다. 서너 사람이 널널하게 지나갈 만했던 폭이 한 사람도 겨우 지나갈 만큼 줄어들었다. 카딤은 몸을 옆으로 돌리고 도끼 뒷머리로 종유석과 석순을 깨부수며 고블린을 추적했다.
길은 이내 다시 넓어졌다. 여기는 원래부터 넓은 길은 아닌 듯했다. 벽면이 습기 어린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통로였는데 조악하게 깎아낸 흔적들이 선명했다. 아마 고블린들이 여길 거점으로 삼으려 확장한 것일 터.
그때, 카딤이 흠칫 눈초리를 떨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물러나라. 악마가 주변에 있다.”
“예, 예? 허억!”
던컨은 머뭇머뭇 뒷걸음질 쳤다. 카딤은 낮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적당히 떨어져 있되, 절대 도망가진 마라. 고블린들이 무리로 너를 추적해서 죽일 수도 있다. 한두 마리쯤 다가오는 건 그냥 횃불로 지져서 쫓아 버리도록.”
“어, 어, 으으…….”
카딤은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냄새가 제법 선명한 것이 분명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다. 피를 머금은 도끼날이 바르르 떨렸다.
허나 기이한 일이었다. 악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소리가 들려오는 일도 없었다. 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하고 눈매를 가늘게 뜨는 카딤.
악마의 위치를 알아챈 건 불빛이 드리운 벽면을 통해서였다.
굵직하게 드리운 종유석 그림자 사이, 뾰족한 돌출부를 가진 기묘한 윤곽.
써걱 –
기척을 느끼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으나 한 박자 늦었다.
얼굴을 가려 눈알이 잘리는 꼴만은 면했다. 다만 팔뚝 위로 세 줄기의 사선이 그어지는 건 막지 못했다.
카딤은 홧홧한 고통을 삭이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 아, 인간……. 너는, 본 적 없는 인간이야.
악마는 손톱에 묻은 핏방울을 핥으며 스산하게 읊조렸다.
주민들이 묘사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기괴하게 툭 튀어나온 두 눈과 날카로운 이빨, 붉은 피부에 앙상한 팔뚝, 커다란 손톱과 손. 언뜻 보아선 고블린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보단 훨씬 더 기형적이고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주민의 설명이 모두 들어맞은 건 아니었다.
‘……빌어먹을, 뿔이 있군.’
관자놀이에 돋은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크기의 외뿔. 저 뿔은 이 악마가 중급 악마로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카딤은 낭패한 기색을 비치며 입술을 짓씹었다.
악마는 그런 표정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괴이쩍은 미소를 지었다.
– 나는, 인간이 좋아. 왜냐면, 약하고 말을 잘 듣잖아? 이까짓 고블린들만 봐도 벌벌 떨고…… 지 새끼를 바치래도 곧이곧대로 바치고……. 키, 키힉, 키히히히힉…….
하급 악마와 중급 악마의 전투력은 그 궤를 달리한다.
지레 겁먹지만 않으면 하급 악마는 대개 훈련받지 않은 장정 십여 명만으로도 무찌를 수 있다. 그러나 중급 악마는 정예병 한 부대를 데리고 와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카딤이 기습을 피하지 못한 것도 다 악마의 민활함이 예사로운 수준을 한참 벗어난 탓이었다.
– 근데 너는, 너무 많이 죽였어, 내 고블린들을. 인간이, 싫어지려고 해. 용서를 빌어야 해.
“…….”
– 기회를 줄게. 그 팔은, 이제 쓰지 마. 도끼로 잘라. 팔을 자르고, 그 뼈와 고기를 다 씹어먹은 다음에 나가. 그전까진 못 나가.
그래도 아직 뿔이 저만한 크기라 다행이었다. 아마 아이들을 납치한 후 막 진화를 시작한 것일 터. 완전히 뿔이 자란 중급 악마였다면 지금의 카딤으로선 상대하기 어려웠을 게 분명했다.
악마가 목을 기괴하게 꺾으며 카딤을 향해 다가왔다. 이전보다 훨씬 거칠어진, 쇠를 거칠게 긁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너, 왜 내 말 안 들어?
“…….”
– 아, 지금은 듣고 있네? 이젠, 내 말 잘 들을 거지?
카딤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한참 지껄인 것 같긴 한데 생각에 잠겨 있느라 하나도 듣질 못했다. 어차피 들어줄 가치도 없는 내용일 게 뻔하기도 했고.
그러므로 카딤은 이렇게 답하며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아니, 난 피주머니가 하는 말 따윈 듣지 않는다.”
부욱 –
그러곤 가죽 수통을 뜯어버리고 끈적한 피를 들이마셨다.
자욱하게 감도는 악취. 부패한 혈향이 퍼져 나갔다. 동족의 피냄새를 맡은 악마의 눈빛이 일순간 거칠게 흔들렸다.
– 뭐야…… 너, 인간이 그걸 왜…….
오래된 피라 하나 효과가 없진 않았다. 말단의 신경에서부터 시작해 온몸의 혈기가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시야가 떨리고 현기증이 일었다. 근육이 부풀고 뜨거운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지속 시간이 길진 않을 터였다. 속전속결을 다짐하며 가죽 수통을 집어 던지는 광전사. 카딤은 검붉은 눈빛을 흩뿌리며 손도끼를 치켜들었다.
그 선뜩한 날을 마주한 순간, 악마는 낯선 공포가 등골에 스며드는 걸 느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