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70)
70화.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3)
해가 지고, 다시 떠오르고, 시간이 흐르며 던컨은 깨닫게 되었다.
아곤의 성난 뿔은 적어도 처음 만났던 시기의 카딤보다는 사교성이 훨씬 나은 자였다. 열심히 눈치를 보고 싹싹하게 비위를 맞춘 덕에, 던컨은 동승하는 동안 그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선대 대전사께선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셨지. 그분의 삶과 업적에 대해 좀 더 많은 전승이 남지 않은 게 안타까울 뿐이야.”
“아, 그, 그렇군요. 그래도 지금까지 명성이 전해지는 걸 보면 참으로 대단한 전사셨나 봅디다!”
“……그렇지.”
“그, 그런데…… 나으리께선, 이 이야기를 어떤 분께 들어 알게 되신 겁니까? 선대 대전사에 대해선 전승이 거의 남지 않았다고 하셨으면서…….”
“…….”
물론 반응이 초창기의 카딤보다 낫다 뿐이지, 건드려선 안 되는 부분이 잔뜩 있는 건 별 차이 없었다. 던컨은 그런 부분을 건드렸을 때마다 급히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이번 토벌이 끝나면, 나를 따르는 전사들에게 ‘불굴의 군세’라는 이름을 줄 것이다. 아탈라를 따라 고대의 악마들을 멸하였다던 전설 속 군대의 이름을 본뜬 것이지.”
“그, 그렇습니까? 그, 참으로 멋진 이름입니다요…….”
“억지로 입에 발린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네 일행이라는 그 ‘악마 학살자’는 꼭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군.”
“그, 어……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합디다…….”
던컨은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는 또 한 번 급히 말을 돌렸다.
“하, 한데…… 그렇다면 나으리를 따르는 전사들은, 다들 원래 나으리처럼 아곤의 투기장에서 활약하던 검투사들이었던 겁니까?”
“그렇다. 이만한 전사들이 세상의 눈을 피해 모여 있을 만한 곳은 거의 없지. 비좁은 투기장의 창살 속에서 전의를 삭이며, 우리에게 걸맞은 전장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아직은 요원한 일이지만, 우리는 이번 토벌을 발판으로 삼아 종국에는 온 대륙에 아탈라와 ‘불굴의 군세’의 위명을 떨치는 때가 올 것이라 믿고 있다.”
다른 자가 저런 말을 했다면 망상에 부푼 헛소리라 치부했을 테지만, 그는 뭔가 달랐다. 무겁게 울리는 목소리에는 그 말이 반드시 진실이 되리라 믿게 만드는 신묘한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실제로 아곤의 성난 뿔, 그 자신은 이미 아무런 배경도 없이 동맹 전역에 명성을 떨치는 자리까지 올라가지 않았는가?
등골로 파고들어 척추를 저릿하게 만드는 전율. 던컨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있었다.
‘괜히 저 전사들이 이자를 따르는 게 아니었구만…….’
아무쪼록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군세는 착실히 솔타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토벌대가 먼저 정리를 마친 덕인지 악마와 마물을 마주할 일은 많지 않았다. 드문드문 재수 없게 전사들과 마주한 마물들은 뼈도 못 추리고 절멸당했다.
그런데 그들은 곧 뜻밖의 인물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페룬?”
“대전사님?!”
소스라치게 놀라 한쪽 무릎을 꿇는 외팔이 전사, 그를 따라 무릎 꿇는 다른 아탈라인 전사들, 그리고 동요하여 촉새처럼 떠들어대는 참사군 병사들.
“맙소사, 진짜…… ‘아곤의 성난 뿔’인가?”
“틀림없네! 저렇게 투구에 뿔을 달아 놓은 전사는…….”
“아, 아니…… 어쩌다 저만한 거물이 이런 곳까지…….”
먼저 떠났던 토벌대 일행이었다.
토벌대는 이 군세에서 선발대 격으로 떠난 부대. 만일 토벌대가 조속히 악마 토벌을 마쳤으면 거기서 끝났을 테지만, 창궐의 피해가 심각해지니 본대가 후발대로 지원을 나온 것이었다.
아곤의 성난 뿔은 눈살을 찌푸리며 의문에 찬 시선을 보냈다.
“페룬, 너희들이 왜 여태 여기에 있는 거지? 팔은 어쩌다가 잃은 것이더냐? 툰달은 또 어디로 갔고?”
“그게, 저…….”
페룬은 토벌대에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곤의 성난 뿔은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형형한 눈빛을 발했다.
“그러니까, 그자가 너희들에겐 방어선으로 돌아가라 명하고 혼자 ‘중심 악마’를 잡으러 떠났단 건가?”
“예, 그렇습니다…….”
“왜 그런 어리석은 명을 따른 거지. 아무리 그자가 뛰어난 무위를 지녔다 해도, 단신으로 그만한 악마를 상대할 수 있을 리는 없지 않더냐.”
페룬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봐놓고도 여전히 믿기 힘든 위업을 털어놓았다.
“그 형제, 그러니까, 카딤 형제는…… 이미 저희의 도움 없이 홀로 상급 악마를 죽였습니다.”
“…….”
“……저희처럼 ‘신기’를 내려받지도 않고 말입니다.”
뿔투구 밑의 두 눈이 억실하게 뜨였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다른 토벌대 전사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거려 긍정했다. 아곤의 성난 뿔 뒤에 서 있던 전사들도 흠칫 어깨를 떨고 서로를 바라보며 경악을 내비쳤다.
“그 말에 추호의 거짓도 없노라고, 아탈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겠느냐.”
“예. 물론입니다, 대전사님.”
“…….”
페룬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맹세하자, 아곤의 성난 뿔은 더없이 심각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덥수룩한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깊이 고뇌하는 거구의 전사.
“…….”
무릎 꿇은 전사들의 다리에 쥐가 오르고 감각이 사라지도록 장고한 끝에, 마침내 이런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먼저 가봐야겠군.”
“……예?”
“내가 먼저 솔타나로 가보도록 하겠다. 아무리 상급 악마를 홀로 처치할 수 있다 한들 ‘중심 악마’까지 상대하는 건 무리다. 서둘러 돕지 않으면 아까운 인재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겠군.”
“…….”
“진지에는 병력을 일부 남겨 놓고 왔으니 그쪽은 신경 쓸 필요 없다. 혹시 팔을 잃은 부상의 예후는 괜찮은가, 페룬?”
“예,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네게 지휘권을 맡길 테니 전사들을 전부 인솔하여 솔타나까지 뒤따라오도록. 절단상의 치유는 토벌이 끝나는 대로 조치해 주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대전사님.”
페룬은 애써 반문을 집어삼키고 수긍했다.
아곤의 성난 뿔은 말고삐를 움켜쥐고 적장을 쫓듯이 내달렸다. 장대한 신영이 부지불식간에 머나먼 티끌처럼 작아졌다. 때문에 졸지에 지휘관이 된 외팔이 전사는 커다란 의문 두 가지를 해소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나는, 뒷자리에 동승한 그 왜소한 사내는 대체 누구인지.
“엑? 자, 잠깐만요, 나으, 나으리, 나으리이이이…….”
“…….”
다른 하나는, 혹시 자신이 보았던 환상에 대해 뭔가 아는 바가 있는지.
“…….”
여전히 잊을 수가 없었다. 당장 팔의 절단면에 파고드는 작열감보다 수일 전의 환상이 훨씬 더 뜨겁게 마음에 와닿았다. 페룬은 지그시 눈을 감고 그때의 그 심상을 다시금 되새겼다.
대지가 갈라진 메마른 황야 위, 위풍당당하게 ‘아탈라의 심판’을 치켜든 카딤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
솔타나의 중심, 붕괴한 참사관저의 지하에 어느 동굴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다.
동굴의 입구에서 진하게 농축되다 못해 액체처럼 비습해진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매연을 닮은 응축된 마기는 계단을 타고 올라 바깥으로 향했다. 먹물 덩어리처럼 하늘을 뒤덮은 적란운은 모두 이곳으로부터 비롯된 게 틀림없었다.
“…….”
카딤은 숨을 고르고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워낙 마기의 농도가 짙어 보통 사람은 시야 확보는커녕 호흡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길이었다. 실제로 간간이 목을 부여잡고 질식한 시체들이 나타났다. 그래도 잇따른 전투로 강화된 카딤의 폐는 그 독한 공기마저도 거뜬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코와 목이 칼칼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동굴은 안으로 갈수록 더 넓어지는 구조였다. 두세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했던 폭이 점점 넓어지다가, 다섯 사람도 거뜬히 지나갈 만해지고, 끝내 오우거 무리가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가도 될 만큼 폭이 넓어졌다. 널따랗지만 공허한 통로에 축축한 발소리가 연신 메아리쳤다.
카딤은 슬몃 눈썹을 모았다.
참사관저의 은밀한 지하 창고 정도로 보기엔 너무 거창한 장소였다. 악마가 본거지로 삼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낸 공간이 아닐까 싶었다. 그 증거로 종유석이나 석순 같은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오직 조악하게 돌을 깎아 낸 바닥만이 이어졌다.
그리고 ‘중심 악마’의 것 말고 다른 마기들도 느껴지는 보아, 필시 이 앞에는 길을 가로막는 ‘수문장’이 있을 터.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통로의 끝에서 이어진 어느 광활한 공동에 이르러, 카딤은 길목을 지키고 선 수문장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고작 ‘수문장’ 정도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강대한 것들이었지만.
“…….”
재앙의 전조를 알리는 별빛처럼 불길한 안광들이 밤하늘 같은 어둠 속에 촘촘히 흩뿌려져 점멸했다. 짙고 빽빽한 마기에 섞여 들어 거뭇하게 번지는 빛무리, 단두대의 칼날처럼 흉측한 악의가 일시에 카딤을 직시했다.
마기가 눈에 익으며 수문장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 크흐흐, 드디어 왔군. 제가 늑대인 줄 착각하고 있는 황야의 들강아지가…….
쇠판을 긁어내리듯 그르렁대는 육성, 육중한 대검을 든 늑대 머리의 판금 갑옷 전사. 녀석의 관자놀이엔 두 개의 뿔이 치솟아 있었다.
– 꺄하하핫, 실제로 보니까 그렇게 크지도 않네? 저렇게 조그만 녀석이 그 많은 악마들을 죽인 거야? 그 맨날 기분 나쁜 헛소리만 하던 나무토막까지?
몸체가 반투명하게 비치는,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묘령의 여인. 녀석의 관자놀이에도 두 개의 뿔이 치솟아 있었다.
– 신선한 먹이, 달콤한 먹이, 육즙이 풍부한 먹이…….
– 그래도 방심해선 안 된다. 저자에겐 기이한 능력이 있으니까. 명심해라, 우리의 최우선 사명은 ‘페빌라투스’ 님을 위협하는 불씨를 모조리 꺼뜨리는 것. 그분이 죽는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테니 절대 방심하지 말 거라.
– 찌거걱, 찔걱, 찌걱…….
그 옆에 선 언청이 얼굴에 내장을 문어 발처럼 뻗은 괴물이나, 해골 가면을 쓰고 해골 지팡이를 든 해골, 수십 쌍의 날개가 달린 부유하는 눈알까지……. 예외 없이 죄다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려 있었다.
수문장은 도합 다섯 마리. 전부 ‘히드라’나 ‘매료종 악마’, ‘목질화 악마’와 동일한 격을 갖춘 상급 악마들이었다.
지끈, 송곳을 쑤셔 박은 듯 관자놀이가 아려왔다. 카딤은 기가 찬 심정을 억누르고 냉소를 터뜨렸다.
“상급 악마가 이렇게 흔해 빠진 것들인 줄은 미처 몰랐는데. 어디, 근처에 악마를 찍어내는 공방이라도 있는 건가.”
늑대 머리 악마가 구부정했던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펴자 그 덩치가 거진 카딤의 두 배에 이르렀다.
– 크흐흐흐, 틀린 말은 아니지……. 페빌라투스, 그 자식의 권능만 있다면 조무래기 악마도 하루 아침에 뿔을 달 수 있으니. 뭐, 그래도 우리만 한 ‘가능성’을 가진 경우는 그리 많지 않지만…….
– 말을 아껴라, 늑대 머리! 뭣 하러 적에게 그분의 권능에 대한 단서를 주는 거냐!
– 가만 있어라, 해골 대가리. 이 혼자 용맹한 척은 다 하며 달려든 들강아지가, 절망에 빠져 쥐새끼처럼 버둥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더냐?
– …….
해골 가면을 쓴 해골은 마뜩잖은 눈치였으나 일단 이빨을 다물었다. 늑대 머리는 사납게 카딤을 쏘아보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 크흐흐흐…… 그래, 아무튼,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진 알아들었겠지? 페빌라투스에겐 악마를 단숨에 승격시킬 수 있는 권능이 있다. 지금은 네가 처죽인 나무토막와 우리까지, 이렇게 여섯 밖에 안 나왔지만…… 아마 대도시가 함락될 즈음이면 상급 악마가 수십 마리도 넘게 탄생하겠지. 그러면 여기도 분명 ‘마경’이나 다름없이 변할 거다.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내는 카딤. 악마는 비뚜름히 주둥이 끝을 끌어올렸다.
– 하, 좋은 눈빛이로군.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바로 덤벼드시겠다?
“…….”
– 크흐흐, 사실 나도 당장 너와 놀아주고 싶은 맘이 굴뚝 같다. 하지만, 지금은 네놈이 감당 못할 악마가 다섯이나 있으니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짓밟혀 죽을 테지. 그러니…… 이번 한 번만 특별히 기회를 주마.
“…….”
– 당장 이곳을 떠나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아나라.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발버둥 쳐 봐라. 조무래기 악마들과 맞서 싸우고, 몰락하는 도시와 짓이겨진 인간들을 지켜보고, 자신의 무력함을 원망하며 깊이 절망하거라. 하지만 끝까지 발악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무의미한 저항의 세월 속에 너의 절망이 가장 탐스럽게 무르익었을 때, 그때 내가 친히 너를 찾아가 뼈와 살을 으깨줄 터이니…….
그 말을 들은 해골이 지팡이를 딱, 내려치며 역정을 냈다.
– 대체 무슨 미친 소리냐, 그게! 내 말을 못 들은 거냐! 페빌라투스 님을 위협하는 것들은 절대 놓쳐선 안 된다고 했는데, 쫓아가진 못할망정 일부러 놓아 준다니!
– 하, 골 빠개진 자식, 너는 이까짓 하찮은 인간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페빌라투스가 이 녀석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권능을 써서…….
그렇게 두 악마는 한동안 첨예한 언쟁을 주고받았다. 다른 악마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관망했다. 그들 앞에 선 조그마한 인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카딤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악물었다.
쉽지 않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이건, 과해도 너무 과했다. 상급 악마가 무려 다섯 마리나 뭉쳐 있다니? 이런 건 참사관저 밑의 비밀 동굴이 아니라 마경의 최심부에서나 마주할 법한 조합이었다.
아무리 카딤이 초인적인 힘을 가진 전사라 해도 이만한 악마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건 무리였다. 잘해 봐야 두 마리 정도와 함께 죽는 게 고작이고, 천운이 따라줘도 네 마리 이상은 저승길 길동무로 데려갈 수 없겠지.
사실 당장 목숨을 부지하고 훗날 다시 도전할 기회까지 얻을 수 있으니, 늑대 머리 악마의 제안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딤은 결코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런 건 절대 아탈라의 대전사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니까.
카딤은 잊지 않았다. 악마는 결코 협상하고 거래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피부와 살점, 뼈와 내장을 으깨 버리고, 동맥을 뜯어 그 피를 받아마셔야만 하는 존재일 뿐.
죽음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그에겐 아직 해소하지 못한 의문과 미련들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강적들을 만났다고 지레 겁먹고 도망칠 것이라면, 그 모든 것들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이 싸움에 아예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악마들이 한눈파는 동안 준비를 마쳤다. 카딤은 입에 털어 넣은 피를 꿀꺽 삼키고 호흡을 정돈했다. 그러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초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사양하겠다.”
– ……뭐?
“이렇게 쓸 만한 피 주머니들이 코앞에 널려 있는데, 나중을 기약할 수는 없지.”
가시 돋친 침묵.
잠시 후, 반투명한 여인은 높은 음색으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언청이와 눈깔 악마는 위협적으로 내장과 날개를 비틀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해골 악마는 두개골 가면 위로 섬찟한 안광을 빛냈다.
―――――― 콰 – 앙!!!
쿠르르르르…….
늑대 머리 악마는 공간이 다 울리도록 힘껏 대검을 내리찍었다. 그러곤 노호한 불길로 카딤을 내려다보았다.
– 네놈이 우리의 피를 마셔 기이한 능력을 얻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주제를 모르고 지나친 만용을 부리는 것 아닌가? 우리는 다섯이고, 네놈은 고작 하나인데?
“아니. 적어도, 하나는 아닐 거다.”
– ……?
이글거리는 늑대의 눈동자에 의혹이 섞여 드는 찰나.
카딤은 입가에 묻은 매료종 악마의 피를 소매로 훔치며 뇌까렸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