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72)
72화. 모든 순간, 모든 때 (1)
악마는 바위를 깎아 만든 옥좌에 앉아 있었다.
두 발을 길게 뻗고 팔걸이에 걸친 손으로 이마를 짚은 나른한 자세, 하얀 가면 위로 창연한 빛의 문양이 잔잔한 물결을 그리고 있었다.
악마들은 잠을 자지 않고 꿈도 꾸지 않는다. 그토록 정적인 상태라 한들 악마가 선잠에 든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어할 수 없는 환영 속으로 불시에 빠져드는 것을 꿈이라 정의한다면, 어쩌면 악마는 지금 필멸자들과 마찬가지로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꿈속에서 악마는 마기에 물든 창백한 대지 위에 있었다. 그는 그 땅에서 가장 미천한 존재 중 하나였다. 그 위치에 걸맞게, 면상을 땅에 처박고 연보랏빛 흙먼지를 들이마시며 누군가에게 애절히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제, 제발, 살려줘…… 나는 주, 죽기 싫어…… 키이이, 나 같이 하찮은 악마는, 살려줘 봤자 티도 안 날 테니까…….’
‘…….’
악마의 앞에 서 있는 건 태산처럼 광대한 그림자였다.
정말로 큰 고위 악마들에 비하면야 사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살을 저며낼 듯 압도적인 살기와 존재감은, 악마로 하여금 거한의 신영을 실제보다 훨씬 더 커다랗게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시선을 치켜올리자 보이는 나락처럼 깊고 어둑한 눈매. 손에는 흉흉한 서슬을 발하는 전투도끼가 들려있었고, 얼굴에는 피와 어둠으로 빚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차라리 바로 도끼를 내려치던, 도망가라 풀어주던, 어떤 식으로든 선고를 내리면 좋으련만, 거한은 목석처럼 침묵을 지키며 서 있기만 할 따름이었다.
산더미 같은 바위 속에 파묻힌 느낌. 압박감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신물과 눈물이 동시에 왈칵 솟았다. 악마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공포에 질려 헐떡대며 손바닥이 벗겨지도록 싹싹 비는 것밖에 없었다.
‘키이이익, 제발 살려 줘……. 뭐든 할게……. 키익, 뭐든 알려 줄게……. 키익……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그때, 불현듯 저 너머에서 다른 인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딤, 어디에 있나! 자네, 괜찮은 건가!’
‘카딤 님! 카딤 님! 어디 계세요!’
‘멜리사 자매님! 빨리 추적 마법을…….’
‘후우, 잠깐만 기다려 봐……. 지금 준비 중이니까…….’
철겅 – !
악마의 낯짝에 화색이 돌았다. 그 목소리를 들은 거한이 전투도끼를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번거롭게 이런 미물까지 죽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 먹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한 줄기 광명처럼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치명적인 착각에 불과했으니.
‘…….’
거한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악마의 목전까지 다가왔다. 공허한 눈동자, 그 안에 핏발처럼 곤두선 광기를 가득 담은 채.
달아나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거한이 먼저 악마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아귀처럼 입을 쩍 벌렸다.
‘……키, 키이이익, 키이이익!! 아, 안 돼, 안 돼애애애애!’
악마는 죽을 듯이 버둥거리며 발악했다. 그러나 손아귀는 지옥의 형틀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살기 위한 모든 저항이 무위로 돌아가고, 끝내 둔탁한 이빨이 낯짝을 전부 뒤덮는 순간.
콰 – 직!
검붉게 암전하는 시야.
– …….
가면 뒤에서 아릿하게 퍼지는 통증.
낡은 악몽은 늘 그렇게 끔찍한 결말로 끝났다. 아무리 되새겨 봐도, 아무리 잊으려 해도 바꿀 수 없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쓰일 이야기는 다를 터였다.
찰칵, 찰칵, 찰칵…….
악마의 왼손에는 자그마한 청색 회중시계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가볍게 쥐고 흔들자 핑그르르, 시곗바늘이 돌아갔다. 동시에 시간을 압축한 것마냥 돌바닥과 옥좌 틈새에서 잡초와 꽃들이 단숨에 자라나고 피어났다.
악마는 이번엔 시곗바늘이 반대편으로 돌아가도록 흔들었다. 자라났던 것들이 도로 씨앗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이번엔 좀 더 많이 돌아가도록 흔들었다. 녹음이 파르라니 자라다가 금방 거멓게 시들어갔다. 악마의 손짓에 따라 식물들은 여러 번 시들고 다시 피어나기를 반복했다.
가면 위의 푸른 문양이 비틀린 호선을 그렸다.
생장과 사멸, 강장과 쇠퇴, 노화와 회춘. 만생의 생로병사가 이 손아귀 안에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은 미천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거한도 결코 이 준엄한 생명의 질서를 벗어날 순 없을 터였다.
이 순간을 얼마나,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이마에 돋은 뿔들은 기나긴 증오와 인내가 낳은 유산이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복수의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게 감사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무대는 이미 마련되었다. 반동인물의 등장이 머지않았다. 들끓는 분노와 기대감으로 가면에 그려진 문양이 격렬한 청광을 발했다.
고위 악마, 페빌라투스는 바위 옥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아아, 존귀자여! 당신은 역시 만물의 경배를 받아 마땅하신 이…… 일 리가 없는데……? 왜, 왜, 내가 인간 따위를…….
퍼 – 걱!
‘매료’의 효과가 끝났다. 카딤은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 전에 해골 악마의 두개골을 박살 냈다. 언청이 악마는 진작에 처치했으니, 남은 건 반투명한 여인 악마뿐이었다.
– 하, 꽤나 깜찍한 수작을 부렸구나, 너……. 그렇지만 이제부턴 어쩔 거지? 그 칼이 아무리 강해도 나를 베어낼 순 없을 텐데?
맞는 말이었다. ‘악령종’ 악마는 육신이 영체로 되어 있어 물리적인 방식으론 제압할 수 없었다. 유효한 피해를 입히려면 성법이나 주술, 혹은 성유물이나 신병을 동원해야만 했다.
공교롭게도 카딤에겐 그중 하나가 있었다.
화르르르르륵 – !
– 꺄아아아아아아악!!!
지옥불 단검은 본디 아크팔라딘의 신병으로 만들어진 것. 엘가의 축복이 깃든 불꽃은 영체도 능히 불사를 수 있었다. 검신에 닿자 악마의 드레스 자락이 불타오르고 반투명한 살점도 새까맣게 그을렸다.
화르르륵, 화르르륵 – !
카딤은 연달아 악마를 향해 단검을 투척했다. 칼날이 스친 곳마다 유황의 불꽃이 번졌다. 차근차근 화마에 휩싸인 악마는 아련한 비명만을 남기며 잿가루처럼 소멸했다.
– 아아아아아아아…….
다섯 마리 악마를 다 처치했다. 카딤은 단검들을 회수하고 짤막하게 숨을 돌렸다.
“……후우.”
잠시 앉아 휴식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시간을 더 지체할 순 없었다. 이미 강력한 피를 많이 뒤섞어 흡수했으니 언제 광증이 터져 나올지 몰랐다.
이번 전투의 수확은 꽤나 풍족한 편이었다. 고작 한 번의 전투로 강력한 상급 악마의 피를 세 종류나 얻어냈다. 여인과 해골 악마는 그 특성상 피를 못 얻었다는 게 아쉬웠지만, 너무 연연하진 않기로 했다. 카딤은 남은 악마들의 살을 가르고 조속히 빈 병과 가죽 수통을 채웠다.
물론 ‘혈귀’에 악마의 피를 충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푹 – !
‘혈귀’의 참격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이미 입증된바. 설령 고위 악마라 하더라도 제대로 맞으면 명을 부지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다만 참격이 언제나 이런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참격의 위력은 축적한 피의 양과 질에 비례한다. 이번엔 ‘상급 악마’의 피를 가득 머금었기에 강력한 피해를 남길 수 있었던 것. ‘상급 악마’는 그리 흔치 않으니 이만한 참격을 일상적으로 날리는 건 무리였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상관없다.’
여기엔 ‘상급 악마’의 시체와 피가 잔뜩 널려 있었으니까. 병과 수통을 다 채우고 검신에 피를 완충하고도 남을 만큼.
구구구구구구…….
‘혈귀’는 이전과 같이 스멀대는 붉은 기운을 충만하게 머금고 웅웅, 검신을 떨었다. 카딤은 칼의 의지를 달래듯 검신을 쓸어내리고 허리춤에 동여맸다. 이 참격은 악마의 숨통을 끊기 위한 하나뿐인 비수, 반드시 적이 피할 수 없는 순간에만 써야 했다.
공동의 뒤편에 작달막한 구멍이 있었다. 그악스러운 마기의 인도를 따라 그곳으로 들어섰다. 통로는 고블린쯤은 돼야 여유롭게 드나들 만큼 비좁았다. 카딤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반쯤 기어가듯 나아갔다.
역시나 길 전체에 비습하게 마기가 퍼져 있었다.
피부가 쓰라리고, 숨을 쉴 때마다 기도 속에 화살촉을 내리꽂는 듯 따끔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단련된 육신의 저항으로도 배겨내기 힘든 짙은 마기. 그러나 카딤은 투기장으로 들어서는 검투사가 흙먼지를 마시듯 거리낌 없이 마기를 들이켰다.
통로는 말미에 이르러 급격히 넓어졌다. 그 끝에 자리한 건 거대한 석문이었다.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마기에 물들어 벌써 표면이 부식되고 귀퉁이가 깎여 있었다.
드디어 그를 여기까지 이끈 존재와 대면할 때가 되었다. 카딤은 심호흡을 하고 석문을 힘껏 밀었다.
그러자 둑을 무너뜨린 것처럼 그 너머의 마기가 쏟아져 내리고.
구구구구구구구…….
훅, 까맣게 암전되는 시야.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찾아왔다. 뇌에서 감각의 전원을 내려버린 것처럼, 아득한 우주 공간으로 내버려진 것처럼.
카딤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건 마기에 과도하게 잠식되었을 때의 증상. 대처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집요하게 심상에 육체의 형상을 그렸다. 구릿빛 피부, 두꺼운 팔과 다리, 어깨와 몸체, 허리, 머리, 발끝, 손에 들린 무기와 혈기를 품은 문신.
그러자 조금씩 오감이 회복되고, 서서히 불을 밝히듯 공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
이전에 지나온 공동만큼 광활한 곳. 덩그러니 공간만 있진 않았다. 나란히 열주를 세워놓고, 바위를 깎아 옥좌와 단상을 마련해놓고, 천장에 괴상한 암각화를 부조해 놓은 탓에, 흡사 비밀 종교의 불경한 신전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장소였다.
그리고 옥좌가 놓인 단상 위에 이 모든 것들의 근원이 서 있었다.
체구는 평범한 성인 남자 정도. 복장은 멀끔한 청색 예복에 코트, 반질반질한 고급 구두, 얼굴에는 푸른 빛의 문양이 일렁거리는 하얀 가면을 덮고 있었다. 무기도 없이 회중시계 하나만 달랑 들고 있어 겉모습만 봐선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는 녀석도 아니었다.
그러나 일순간 감각을 마비시킬 만큼 지독한 마기, 그리고 이마에 돋은 세 개의 뿔이 녀석의 격을 여실히 증명했다.
촌각의 침묵을 지나 악마는 천천히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구둣발 소리 위로 멀끔한 미성이 덧씌워졌다.
– 오랜만이군. 솔직히 놀랐어. 여전히 살아 있을 줄은 몰랐거든. 인간이 300년 넘게 살고 있다니……. 악마의 피만 마신 게 아니라, 무슨 엘프의 피까지 마신 건가?
“…….”
– 뭐, 아무튼…… 그 성질머리는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열심히 악마들을 내보내고 마기를 퍼뜨렸는데, 혹여 네놈이 걸려들지 않으면 어쩌나 했거든. 지금 생각해 보면 괜한 기우였지. 설마 강림한 지 두 달도 안 됐는데 이렇게 득달같이 찾아올 줄이야…….
카딤은 눈썹을 모았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놈인데 자연스럽게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누구냐, 넌.”
– …….
“본 적도 없는 놈이 왜 아는 체를 하지.”
가면 위로 그려진 푸른 빛의 문양이 격렬한 파형 무늬를 그렸다. 발치에 고여 있던 마기가 천장까지 닿도록 팽배하게 솟구쳐올랐다. 동요를 가라앉히려는지 회중시계를 꾹 움켜쥐었지만 문양의 떨림은 쉬이 멎지 않았다.
악마는 가까스로 가면 위로 날렵한 호선을 그렸다.
– 페빌라투스, 생로(生老)의 악마, 그리고…… 네게 갚아 줄 빚이 있는 자.
그러곤 한 손으로 가면을 짚고 천천히 벗겨냈다.
– ……이렇게 한다면, 누군지 알아보겠더냐?
“…….”
그 안에는 가죽 없는 얼굴이 있었다.
텅 빈 눈구멍, 너덜거리는 살점과 노출된 광대뼈. 갈라진 근육 결 사이로 끈끈한 피와 진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벗겨낸 가면의 안쪽도 검붉은 피딱지와 고름으로 엉망진창 얼룩져 있었다.
악마는 붉은 이빨을 드러내며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 원한다면 이까짓 얼굴쯤,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쓰디쓴 인고의 세월이라 해도 참고 견뎌내기 위해. 초월적인 권능을 거머쥐고 네놈과 재회하기 위해.
“…….”
– 네놈에 대한 증오를…… ‘모든 순간, 모든 때’에 잊지 않기 위해.
말하는 것으로 보아, 상판대기가 저렇게 된 데에 자신이 일조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되짚어 봐도 카딤은 저 악마를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그야, 살면서 먹었던 끼니들을 전부 기억할 순 없지 않던가?
그러므로 카딤은 그냥 적당히 응수해 주기로 했다.
“기억은 안 나지만 미안하게 됐군. 작업을 하다 말았다니.”
– ……?
“이제 나머지 가죽도 마저 벗겨 주마.”
패래래래래래랙 – !
격렬히 회전하는 도끼날이 날아왔다. 악마는 충격받은 듯 멈춰 서있다가 슬며시 손을 펼쳤다.
우우우웅, 철 – 퍽!!
고여 있던 마기가 치밀어올라 점액의 방패가 되었다. 도끼날은 마기 방울을 질척하게 튀기며 그 표면에 가로막혔다. 수렁에라도 박힌 것처럼 점점 더 날이 깊이 파묻히길래, 카딤은 재빨리 인력을 끌어당겨 연어를 회수했다.
악마는 다시 가면을 썼다. 빛의 문양은 성난 파도처럼 격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 이제 되었다. 내가 어리석었군. 네놈이 날 미물 취급하다 죽였으니, 나도 똑같이 취급해 줘야 마땅할진데…….
“…….”
– 한담은 여기까지다. 지금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생장과 사멸의 굴레 속에서, 진정한 고통과 절망이 무엇인지 익혀 보거라, 하찮은 미물아.
악마는 청색 회중시계를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그 주변으로 마기가 몰려들어 톱날처럼 회전하더니, 곧 하나의 날만 남고 자루가 뻗어 나와 커다란 낫과 같은 형상을 빚어냈다.
차르르르르르 – !
악마는 낫머리에 시계가 매달린 마기의 낫을 단단히 손에 쥐었다. 그러곤 그것을 세차게 휘둘렀다.
――――――――――――― 써 – 겅!!
일체의 지연도 없이 광활한 잔영이 뻗어 나와 기둥과 벽을 갈라버렸다.
쿠르르르르…….
분절되는 석재. 벽이 갈라지고, 잘린 기둥들이 일부 무너져내리며 검게 내깔린 마기 속으로 분진이 섞여 들었다.
그걸로 끝도 아니었다. 악마가 낫자루를 휘릭 돌리자, 벽을 갈라 버렸던 검은 잔영이 다시 그 상흔에서 튀어나오더니 낫의 날을 향해 도로 되돌아갔다.
써 – 겅 ――――――――――――― !!
흡사 카딤이 연어를 내던졌다 회수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의 공격. 다만 그 범위나 파괴력은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단 한 번의 낫질로 네 개의 기둥이 끊겼고, 공간 절반을 포괄하는 대규모의 상흔이 남았다.
카딤은 지그시 미간을 구겼다. 한 끗 차이로 회피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뭔가 해 보기도 전에 반토막이 될 뻔했다. ‘혈귀’의 참격을 확정적으로 먹이려면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데, 저만한 광역기를 펑펑 날려댄다면 웬만한 신체 능력으론 어림도 없었다.
――――――――――――― 써 – 겅!!
써 – 겅 ――――――――――――― !!
날아드는 공격들을 피해 기둥 뒤로 숨었다. 아주 짧은 찰나, 상념을 겹겹이 덧씌워 고민했다. 그리고 조속히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더 불리해질 뿐이니 후유증이 크더라도 확실한 해결책을 택하기로.
풀 도핑.
카딤은 아까 구한 상급 악마들의 피를 전부 목구멍에 쏟아부었다. 그러곤 정신을 집중하고 ‘히드라의 문신’까지 발동했다.
“…….”
불안정하게 명멸하는 문신의 적광, 갓 폭발한 용암을 집어삼킨 듯 독하고 뜨거운 열감이 식도를 따라 흘러내리고.
범람하는 강처럼 막대하게 흘러넘치는 심박출량. 심장 속에서 울컥대며 끓어오르는, 불타오르는, 폭주하는 혈기.
뇌에서 아드레날린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근육이 납덩이를 채워 넣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혈관 속으로 쇳물처럼 달아오른 핏물이 흘렀다. 양 눈이 희번득하게 뜨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실핏줄이 죄다 터져나가며 시뻘겋게 물들었다.
광전사는 잇새로 붉은 증기를 피워올리며 튀어 나갈 준비를 했다.
“……그흐윽.”
고위 악마에게 전력으로 부딪칠 때가 되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