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73)
73화. 모든 순간, 모든 때 (2)
――――――― 콰 – 앙!
기형적으로 팽창한 비복근이 발 앞꿈치를 거세게 밀어 내리며 딛고 있던 판석을 으스러뜨렸다. 파편과 균열을 폭발시키는 도약, 기둥 뒤에 웅크렸던 카딤의 신영이 붉은 잔상만을 남기고 단숨에 악마의 지척에 다다랐다.
순간적으로 가면의 문양이 혼미한 형상을 그렸다. 악마는 급히 십자무늬로 낫을 휘둘렀다.
――――――――――――― 써 – 겅, 써 – 겅!!
스치지도 못했다. 낫의 잔영은 카딤의 터럭조차 베지 못하고 벽과 기둥만을 긁어내렸다. 카딤은 내뺐던 몸에 반동을 주어 튀어 올라, 먹이를 덮치는 포식자처럼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아직 상황을 명확히 깨닫지 못한 녀석의 목에 거칠게 도끼를 박아 넣었다.
퍼 – 걱!
그런데 도끼날이 손톱만큼 파고들자마자, 악마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 후 – 웅!
허공을 휘젓는 파괴적인 도끼질. 도끼날이 지난 궤적을 따라 사나운 돌개바람이 일었다. 카딤은 동요한 기색도 없이 두리번거렸다. 시뻘겋게 흔들리는,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 없이 뒤섞여 진홍색 섬광을 발하는 눈동자.
삽시간에 자취를 포착했다. 단상 위, 혼란한 소용돌이 문양을 그리며 목을 움켜쥔 악마. 카딤은 광포한 함성을 내지르며 다시 그쪽으로 달려들었다.
“크하아아아아아악!!!”
– …….
악마는 목에서 손을 놓았다. 혼란을 추스르며 가면 위로 차가운 불길을 내비치고는, 자세를 가다듬고 연이은 낫질로 접근을 견제했다.
―――――――――― 써 – 겅, 써 – 겅, 써 – 겅!!
범위가 넓을 뿐 아니라 파괴력과 속도도 절륜한 공격이었다. 숨 한 번 내쉴 시간에 수 개의 잔영이 날아들어 기둥을 끊고 벽면을 거하게 파먹었다.
――――― 콰과과과과 – !
심지어 낫자루를 돌릴 때마다 날아갔던 잔영들이 돌아오니, 한번 피했다고 능사도 아니었다. 공간을 끊어 버리는 검은 선분들이 쏜살같이 왕복 운동을 하며 촘촘한 절단의 그물을 형성했다.
허나 광전사의 몸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써 – 겅, 써 – 겅, 써 – 겅 ―――――――――― !!
카딤은 핏빛 시야로 잔영을 포착하기도 전에 먼저 움직여 회피했다. 극한으로 증폭된 촉각이 마기의 흐름을 읽고 잔영의 궤도를 미리 감지했다. 그 안에 이성적인 사고와 전략적인 판단은 생략되어 있었다. 오로지 육신으로 느끼는 감각과 본능뿐.
되돌아오는 잔영도 마찬가지였다. 카딤은 앞서 잔영이 어떻게 날아갔는지 외워 놓고 행동하지 않았다. 그저 날아가는 순간, 돌아오는 순간, 매 순간마다 예지에 가깝게 감지하고 몸을 던졌다. 그 틈에 여러 개의 잔영이 교차된다 쳐도 교묘하게 사각지대를 찾아냈다. 폭주하는 감각과 반사 신경에만 의존하는 짐승적인 곡예가 연거푸 펼쳐졌다.
– …….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낫질을 멈춘 악마. 카딤은 기다렸다는 듯 도끼를 던졌다.
“그으, 크하아아아아악!!”
――――― 쐐래래래래래래랙!!
동체시력이 맹금류만큼 뛰어나다 해도 궤적을 포착하는 건 불가능했다. 광풍처럼 마기를 가르며 쏘아져, 붕괴와 파괴를 촉발하는 분쇄의 원반.
――――――― 콰과과과광 – !!!
먼지의 안개 너머로 벽면을 으스러뜨리고 무참히 처박힌 도끼가 보였다. 여진이라도 일어난 듯 벽면 전체로 진동이 퍼져나가고 만신창이가 된 기둥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도끼라기보단 차라리 초자연적인 힘을 빌린 질량 병기에 가까운 위력이었다.
정작 의도한 대로 악마의 몸뚱이를 베어내진 못했지만.
――――― 쐐래래래래래래랙, 콰과과광!!
도끼를 회수하고 다시 내던졌으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악마는 부지불식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잔상이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거진 순간이동에 가까운 회피.
낫에 달린 시계를 핑그르르, 돌리며 악마는 냉소 어린 비아냥을 내뱉었다.
– ……꽁지에 불붙은 개새끼처럼 날뛰는 모습이 아주 볼 만하군. 그래, 얼마나 더 날뛸 수 있을지 보자꾸나.
“크하아아아아아악!!”
평범한 사람의 눈으론 잔상조차 쫓을 수 없는 교전이 이어졌다. 스치기만 해도 뼈와 살이 으스러질 공격들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날아들었다. 아마 서로가 상대가 아니었더라면, 이미 다른 한쪽은 그 시체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양쪽 다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다. 광전사는 한계에 이르도록 증폭된 감각에 의존한 회피, 악마는 그 원리를 가늠키 힘든 권능에 의존한 회피를 일삼았기에, 치명적인 일격들은 언제나 의도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빗나가기 일쑤였다.
콰과과과, 콰르르르르 – !!
두 괴력난신의 격돌에 애꿎은 공간만 난자당하고 있었다. 기둥과 옥좌는 조각조각 완파되었고, 벽과 바닥에는 거수가 몸부림친 듯한 자국이 남았다. 공간의 우측 구석은 벌써 무너져내려 바스라진 돌 더미가 내깔려 있었다. 어느 쪽도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교착 상태만 이어지니, 이대로라면 공간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 문제일 듯싶었다.
그 상황에 변화가 생긴 건, 카딤의 심신을 지배한 혈기가 다소 사그라들고 나서였다.
– 얼마나 더…… 그ㄹ…… 구나…….
[…………스쉬ㄹ…………세-ㄷ…………메-ㅌ레드아………….]“……그흑.”
뭉개지는 악마의 목소리, 대신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는 속삭임이 귓전에 파고들었다. 카딤은 버프가 잦아들고 서서히 광증이 찾아오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잠식된 건 아니었다. 도리어 폭주하는 혈기와 광증 사이에서, 카딤은 태풍의 눈과 같이 일시적으로 정신이 명징하게 맑아지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악마의 권능에 대해 추론했다.
‘날아드는 도끼나 박살 나는 벽돌은 되돌리지 못했다. 저 녀석의 권능은 필시 ‘생물’이나 ‘마기’의 시간만을 조작하는 것. 아마 그 ‘생물’의 범위에는 자신도 포함되겠지. 그렇다면 저렇게 단숨에 공격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은…….’
카딤은 10분의 1초, 100분의 1초,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자신의 감각과 의식을 쪼갰다. 그러자 흐릿하게나마 포착할 수 있었다. 도끼를 내던지는 순간, 낫 머리에 박힌 시곗바늘이 맹렬히 회전하고 마치 뒷걸음질 치듯 악마의 모습이 사라지는 걸.
위치. 이전에 서 있던 위치로 돌아가도록 자신의 시간을 순식간에 되돌리는 게 틀림없었다.
“…….”
터무니 없는 권능이었다. 인간들을 늙게 만들고 악마들을 승격시키는 것도 모자라, 까다로운 공격과 절대적인 회피로도 써먹을 수 있는 능력이라니.
어째서 그 권능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건지 의문이었다. 이렇게 귀찮게 분투할 필요도 없이, 자신을 바로 노화시키기만 하면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권능을 발동하는 데 무슨 조건이 있는 건가? 아니면 힘이 온전한 나와 겨루기 위해 일부러 쓰지 않았다던지…….’
어느 쪽이건 아직 버프가 남아 있고, 악마가 권능을 발동하지 않은 지금만이 기회였다. 카딤은 인지 능력을 가속한 다음 의식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 주변 환경을 인식했다.
– ……느-으-은-지-이…… 거-어-엇-이-이………….
[……시-이-샤-알-ㄹ…………쎄-ㅈ…………보-올-ㄹ-ㅌ…….]시간 감각이 아득하게 느려졌다. 혈해에 잠긴 것처럼 검붉고, 뭉근하고, 느슨하고, 무겁게 흐르는 공간.
콰 – 아 – 아 – 아 – 앙!
그 공간 속에서 카딤은 또다시 판석을 으스러뜨리며 악마를 향해 도약했다.
이번에는 보다 뚜렷하게 보였다. 낫자루를 돌리는 손길, 회전하는 시곗바늘과 거꾸로 되감기는 악마의 발걸음. 이번에 피한 방향은 자신이 달려들었던 쪽의 우측이었다.
카딤은 즉각 발길을 내디뎌 제동을 걸고, 팽창한 중심 근육들을 비틀어 관성의 축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악마가 보기엔 거진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가면 위 문양이 동요로 인해 물결 같은 형상을 그렸다.
악마는 다시 낫자루를 돌리자마자, 카딤도 또다시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몸의 방향을 틀었다. 그런 전환이 여러 번 반복되자 악마는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리지 않았다. 대신 낫자루를 끌어당겨, 쏘아내고 회수하지 않았던 모든 낫의 잔영을 일시에 수거했다.
―――――――――― 써 – 거 – 엉, 써 – 거 – 엉!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빛살처럼 날아드는, 절대 피할 수 없는 검은 잔영들.
카딤은 피하지 않았다.
써 – 거 – 어 – 엉!
다리가 잘리는 걸 감수하고 악마의 목전까지 접근했다. 그러곤 허리춤의 칼을 발도하여 붉은 벼락처럼 내리쳤다.
쩌 – 걱.
칼날을 따라 뻗어 나오는 시뻘건 궤적, 분절되는 공간, 폭발하는 혈기.
―――――――――――― 콰 – 과 – 과 – 과 – 과 – !!
날카로운 참격에 이어 거센 피의 격랑이 뒤따랐다. 닿는 대로 모든 걸 끊어 먹는 사나운 혈기는, 악마를 반으로 가르고 판석에서 천장까지 지울 수 없는 칼자국을 새기고는 핏빛 이슬로 스러졌다.
쿠 – 르 – 르 – 르 – 릉…….
충격으로 천장과 벽면이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다. 직후 악마의 가면이 쩌거걱, 갈라지고, 그 너머에 있던 육신도 거대한 작두로 내려친 듯 쪼개졌다. 악마는 걸레짝 같은 단면으로 뼈와 장기를 후드득 쏟으며 허물어졌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감이 툭 끊겼다. 시간 감각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크윽.”
카딤은 바닥을 한 바퀴 나뒹굴고 땅을 짚었다.
인지 능력을 가속하는 바람에 통증도 몇 배는 더 길게 느껴야 했다. 그래도 다리를 잃을 걱정은 없었다. 슬쩍 절단면을 바라보니, 벌써 종아리뼈와 정강뼈가 자라나고 있었다. ‘히드라의 문신’의 효과가 아직 남아 있었던 덕.
피를 다 토하고 적을 도륙 낸 ‘혈귀’는 후련한 울림을 발하고 있었다. 확실히 참격의 위력은 고위 악마도 예외 없이 토막 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저렇게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져 죽었으면 아무리 재생력이 좋아도 살아날 수 없을 테지.
이젠 다리에 살점도 어느 정도 붙었다. 걷는 건 무리여도 서있을 순 있었다. 카딤은 칼을 지팡이 삼아 느지막이 몸을 일으키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예상이 빗나갔다.
언제 잘렸냐는 듯, 저 홀로 허공에 떠올라 들러붙는 육신, 핏기를 씻어내리고 수복되는 예복, 접합되는 가면.
악마는 단숨에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모습을 되찾았다. 가면 위로 폭죽이 터지는 형상을 그리고는 천천히 박수를 쳤다.
– 축하한다, ‘32초 전의 나’를 쓰러뜨린 걸.
카딤의 눈동자가 깨지기 직전의 구슬처럼 흔들리고.
페빌라투스는 연극적인 몸짓으로 팔을 펼쳤다.
– 그렇다면 이번엔 지금, 아니, ‘1초 전의 나’를 쓰러뜨려 보거라.
찰칵, 찰칵, 찰칵…….
악마의 손에 들린 회중시계가 초연하게 시간을 곱씹었다.
*
솔타나 성문 앞의 악마들, 그리고 마물들은 여전히 그악스럽게 날뛰고 있었다.
– 먹이, 먹이 잡아라!
– 이번엔 안 놓쳐!!
– 케헤헤헤헤헤헥!!
비보가 있다면, 이번에 찾아온 손님도 결코 만만치 않은 자였다는 것.
후 – 웅, 쩌거거거거걱!
너른 도끼날이 짚단을 베어내듯 마물을 무더기로 썰어 넘겼다. 아곤의 성난 뿔은 뺨에 튄 핏물을 훔치곤 뒤쪽을 곁눈질했다.
“내 뒤에 잘 붙거라, 행상인.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
던컨의 귀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괴상망측한 악마와 마물들에 포위당한 그는 넋이 나가버렸다. 그토록 안전한 곳을 찾고 악마들을 피해 다닌 결말이 이런 것이라니! 마치 운명이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큰 먹이는 노리지 마! 작은 먹이를 노려!!
– 키에에에에엑!
– 손가락 다섯 개만 줘! 아니, 손가락 여섯 개만! 그것만 먹고 돌아갈게!
“아하악! 으, 으흑, 쿨럭, 쿨럭, 저리 가! 저리 가라, 이 괴물들아!”
화르륵, 화르륵 – !
“…….”
공포에 질린 던컨은 지옥불 단검을 꺼내 들어 필사적으로 휘저었다. 그걸 본 아곤의 성난 뿔은 의아한 눈빛을 했다. 하기야 한낱 행상인이 갖고 있기엔 다소 비범한 무기이긴 했다.
던컨의 무차별 공격은 큰 성과를 올리진 못했다. 기껏해야 떠밀려 온 고블린의 살갗이나 슬쩍 긁어내리는 게 고작. 결국 거의 아곤의 성난 뿔 홀로 전방위의 악마들을 도륙 내며 두 사람은 솔타나의 성문으로 나아갔다.
갑자기 땅에 거센 진동이 일었다.
쿠구구구구구…….
악마와 마물들이 움찔, 멈춰 섰다. 아곤의 성난 뿔도 잠시 도끼를 거두고 멈춰 섰다. 진동은 한 번만 이는 게 아니라 연달아 울려 퍼지고 있었다. 꼭 땅속에 파묻힌 거대한 괴수가 몸을 뒤채는 것 같았다.
아곤의 성난 뿔은 눈썹을 좁히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벌써 중심 악마와 싸우기 시작했나 보군……. 내 등에 매달려라, 행상인. 곧바로 성문으로 돌파한다.”
“……예?”
뭔 소릴 하는 거야? 성문은 닫혀 있는데?
던컨은 끝까지 설명을 듣지 못했다. 아곤의 성난 뿔은 가뿐히 던컨을 짊어지고는, 무릎 꿇고 숙연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불굴의 군세를 거느린 선봉장, 아탈라시여. 당신의 대전사를 굽어살피소서, 횃불을 들어 전장으로 인도하소서, 부정한 적들에 대적할 힘을 주소서…….]”
우우우우우우웅…….
던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도문을 다 외우자 전투도끼에서 모래 폭풍처럼 싯누런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나오더니, 강건한 팔뚝과 드넓은 어깨를 뒤덮고, 끝내 황금의 갑옷처럼 빛나며 전사의 육신을 칭칭 둘러쌌다.
황야의 아버지께서 함께하사,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신기’를 받아들인 아곤의 성난 뿔은, 그것을 선사한 투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격노한 황소와 같이 돌진했다.
“아 – 탈 – 라 – !!!”
퍼거거거거거걱 – !
– 키에에에에에엑!!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거체에 받힌 악마와 마물들은 전차에 치이기라도 한 듯 찌그러지고 나가떨어졌다. 어깨맡을 부여잡은 던컨은 강풍에 휘날리는 빨랫감처럼 나풀거렸다. 포위망을 뚫은 아곤의 성난 뿔은 성문 바로 앞에 이르러, 도낏자루를 치켜들고 드높게 도약했다.
“황야의 아버지를 위하여!!!”
――――――――――― 후 – 웅, 쩌 – 겅!!!
도끼를 내려치는 순간, 싯누런 잔영이 솟구치며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