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75)
75화. 모든 순간, 모든 때 (4)
오랜만이었다.
기억상으로는 고작 몇 달만이었다. 허나 그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현실에 300년이나 되는 공백이 놓인 탓인지, 카딤이 체감하기엔 이 몸을 되찾은 게 굉장히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익숙했다.
길이 든 갑옷은 언제 다시 걸쳐도 어렵잖게 적응할 수 있는 법이다. 이 모습, 이 감각, 이 느낌, 악마의 피 없이도 무엇이든 찢어발길 수 있을 것 같은, 이 충만하고 압도적인 힘.
원리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악마의 권능이 원인이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어떻게 2회차의 육신이 1회차의 육신으로 이어지는 지는 미지수였다. 다만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그건 가장 중요한 일을 마치고 차분하게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저 더러운 악마의 숨통을 끊고 그 피를 취하는 것.
손아귀에 조금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여지없이 또 붉은 폭죽이 폭발했다.
――――――― 퍼 – 걱!
질깃한 머리 가죽과 들러붙은 두개골이 비산하고, 걸쭉한 뇌수와 회백질 덩어리가 카딤의 손아귀에서 으깨진 반죽의 형상으로 흘러내렸다. 악마는 지옥의 우물처럼 덩그러니 드러난 목구멍으로 부글부글 피거품을 끓어 올리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 키리리릻, 키리리리릻…….
핑그르르, 돌아가는 회중시계가 악마의 모습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목구멍 위로 박살 난 골격과 찌그러진 살점들이 달라붙고 깨진 가면도 도로 조각조각 맞춰졌다.
– 허억! 허어어어…….
페빌라투스는 질겁하여 가면 위로 혼탁한 문양을 그렸다. 시간을 되돌려 당장 이 위치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카딤은 그 꼴을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 심연을 품은 눈동자가 쪼개진 시간 속으로 파고들어 되돌아가는 악마의 움직임을 쫓았다.
“어딜 가는 거냐. 아직 안 끝났는데.”
즉각 머리통을 붙들고 밑으로 쑤셔 박는 손아귀.
―――――― 콰 – 앙!!!
시간을 되돌리는 찰나의 속도보다 손놀림이 더 빨랐다. 악마의 몸뚱이가 깊숙이 땅속으로 처박히며, 인근에 굵직한 균열이 퍼져나가고 땅바닥이 움푹 가라앉았다.
쩌저저저적! 쿠구구구구구…….
그 압력에 고스란히 짓눌린 머리통은 상체 안쪽으로 파묻혀 거진 심장맡에 닿았다. 목울대가 있어야 할 곳에서 정수리를 드러낸 페빌라투스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이젠 위치를 바꿔 회피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기어 나오는 두더지를 다시 굴속으로 쑤셔 박듯, 카딤은 악마가 시간을 역행하여 튀어나올 때마다 무자비한 주먹질을 선사했다. 공성추를 내려찍는 듯한 충격이 연신 정수리를 강타했다. 악마는 고통의 나락 속에서 무의미한 재생만을 반복했다.
―――――――――― 퍼 – 걱!! 퍼 – 걱!! 퍼 – 걱!!!
– 키에에에엑!! 키에에에에…….
페빌라투스는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은 고위 악마, 이전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지고의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이 거한에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토록 불합리하고, 이토록 부조리한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거한을 원래대로 돌려 놓으려 시도해보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시곗바늘은 티끌만치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권능이 통하지 않을 만큼 저 거한이 ‘격이 높은 존재’가 되었다는 뜻.
압도적인 공포 속으로 조금씩 초조함이 스며들었다. 악마는 정말로 ‘모든 순간’을 목숨으로 쓸 수 있진 않았다. 돌아갈 수 있는 건 오직 머릿속에 ‘기억해 놓은 순간’뿐. 그것만 해도 수천 개가 넘었지만, 두뇌가 연달아 파괴되고 재생되는 고통 속에 대부분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또다시 거한에게 죽음을 맞이하게 생겼다. 페빌라투스는 최후의 저항으로 천장에 마기를 잔뜩 모았다. 장엄한 성채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진득하게 압축하여, 거한의 머리 위로 맹렬한 마기의 폭우를 내리꽂았다.
콰과과과과과과 – !
하지만 카딤은 그것을 간단히 파훼했다.
―――――――――――― 퍼 – 엉!!!
주먹을 휘두르자 허공에서 권압이 폭발했다.
닿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휘두른 것만으로 쏟아지던 마기들은 흔적도 없이 산산이 흩어졌다. 뒤이어 주먹의 궤적을 따라 진공이 생겨났다가 막대한 공기가 솟구쳐올랐다.
그렇게 바닥에서 천장까지 휘몰아치는 거센 돌풍.
휘오오오오오 – !
페빌라투스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까마득한 벽을 마주한 기분. 저건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아니, 가히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닌 힘이었다. 저만큼 압도적인 폭력은 ‘대악마’가 아니고서야 절대 대적할 수가…….
――――――― 콰 – 앙!
– 키익!
아무쪼록 최후의 저항마저 실패했으니, 악마에게 남은 건 반복되는 죽음뿐이었다.
최근을 ‘기억해 놓은 순간’은 진작에 다 떨어졌다. 죽을 때마다 악마는 점차 옛 기억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고위 악마로서 대륙에 첫발을 디뎠을 때를 지나, 지옥에서 군림하던 때, 지옥에서 분투하던 때, 무시받고 고통받던 때, 그러다 끝내 마경에서 목숨을 구걸하던 때까지…….
– 키이이익,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키이이익…….
“…….”
카딤은 잠시 멈춰 섰다.
여기서 더 죽이면 악마가 소멸하리라는 걸 직감했다. 그전에 물어볼 것들이 있었다.
300년만이라면서 자신을 어떻게 알아본 건지, 누가 네 녀석을 되살린 건지, 악마의 창궐, 그리고 다른 동료들의 행방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게 있는지…….
– 제발, 뭐든지 할 테니까…… 아는 건 뭐든지 알려줄 테니까……. 부디 목숨만, 목숨만은…….
다행히도 녀석은 무척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카딤은 악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곤 준비한 질문들을 하나씩 물어 ̸̧̛̜̹̀̃͗̑̃̽͊̃ͅ ̷̢̛̝̘̠̰̟͕̈́̋̈̉́̋̃͜͠ ̵̛̹̞̗̝̳̟̑̃̉̆̈͆͝ ̵̧͇͍͓̞̲͕͎̍͊́ͅ ̴̞͉̦̝̚ ̴͎̯̻̟͚̜̲̒̽̾͆͊아, 이 녀석 죽이는 게 참 즐겁네.
더 죽여야지.
카딤은 두 눈을 부릅떴다.
―――――――――― 콰 – 직!
멈출 틈도 없이 발이 튀어 나가 악마의 대가리를 짓밟았다. 뭉그러지다 터져 퍼석거리는 촉각, 발바닥 밑으로 진홍빛 꽃 무리가 만개했다. 뇌 찌꺼기가 시뻘겋게 피에 절여진 것이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카딤은 손을 뻗어 그걸 집어먹으려다…….
급히 자신의 손을 내려쳤다. 눈을 질끈 감고, 어금니를 부드드득 깨물고, 손 가죽이 찢겨나가도록 주먹에 힘을 주었다. 낯설지 않은 사늘한 기운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 뇌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실수였다.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다. 1회차에 그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고생했는지를. 부작용은 제외하고 간편하게 힘만 골라 받았을 리가 없는데, 어째서 ‘광증’에 대해 미리 떠올리지 못했는지…….
지금은 그를 속박할 구속 마법도, 강화 주술이 걸린 쇠사슬도 없었다. 이런 힘을 갖고 미쳐 날뛰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카딤은 급한 대로 자신의 팔다리를 부러뜨리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왜 팔을 부러뜨려야 하나 싶었다. 여기 족쳐야 할 악마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는데?
– 구오오오오오…….
– 마툼, 게헨나, 마툼, 골가타, 마툼, 그리모스…….
– 죽여 버려!! 죄다 가죽을 벗기고 눈알을 뽑아 버려라!!
아니었다. 저건 환상이었다. 여긴 악마들이 그득한 마경이 아니라 동맹령의 도시, 솔타나였다. 늦기 전에 어서 팔다리를 부러뜨려야 하는데, 이 도시도 악마들에게 점령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저것들은 환상인가? 아닌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등하던 카딤은, 문득 무언가 자신의 입에 그득하게 들어차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독하고 비릿하게 퍼지는 혈향. 시선을 떨궈 보니 목에 깊은 잇자국이 난 악마의 시체가 보였다. 뜯긴 동맥에서 붉은 피가 샘처럼 울컥대며 솟고 있었다.
그걸 보자 헷갈리던 것들이 비로소 명징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맞아. 자신은 저 악마의 군세와 맞서기 위해 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저건 환상이 아니라 진짜 악마들이란 뜻이었다.
입에 머금은 살점과 핏물을 꾸득꾸득 씹고 꿀꺽 삼켰다. 뜨겁게 식도를 지나 속으로 퍼져나가는 혈기가 서서히 살의를 고취시켰다.
– 쿠워어어어어어어!!
– 키히히히힉!! 죽어라, 인간!!
광전사는 흉살스럽게 입가를 찢고 힘껏 발을 굴렀다.
―――――――――― 콰 – 릉!! 쩌저저저저저적 – !!
판석에서부터 벽, 천장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고, 고위 악마의 터전은 단 한 번의 발길질에 처참히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
아곤의 성난 뿔은 긴장하고 있었다.
“…….”
목울대가 바르르 떨리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기분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직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을 적, 처음으로 투기장의 챔피언에게 도전하게 되었을 때도 이만큼 떨리지는 않았다.
솔타나의 도심 중앙, 대규모로 지반이 가라앉은 구덩이.
그는 그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쿠구구궁, 쿠구구구구궁…….
발밑에서 연신 육중한 진동과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만한 침강을 일으키고 저렇게 날뛸 정도면…… 어마어마하게 덩치가 크거나, 어마어마하게 힘이 센 악마가 틀림없었다.
그 ‘악마 학살자’라는 용병은 이미 죽었을 터였다. 이런 대규모의 붕괴 현장에서 인간이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다. 짙은 탄식을 내뱉었다. ‘신기’도 없이 단신으로 상급 악마를 사냥할 만큼 대단한 인재를 잃었다는 게 못내 안타깝게 느껴졌다.
‘함께 싸웠더라면, 죽지 않고 중심 악마를 처치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곤의 성난 뿔은 고개를 내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악마 학살자가 죽었으니 이제 유일한 희망은 자신뿐이었다. 중심 악마를 멸하고 동맹을 위기에서 구할 구원자, 시대의 거악을 멸할 사명을 짊어진 ‘아탈라의 대전사’.
자신의 손에 용맹한 전사들과 동족들, 수많은 동맹인들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부리부리한 두 눈이 섬찟한 광채를 발했다. 결연하게 각오를 다지며 양손으로 도낏자루를 움켜쥐는데…….
꾸득.
……돌연 탈골된 것처럼 왼팔이 축 늘어졌다.
뿔투구 밑의 미간이 팍 찡그려졌다. 하필 중요한 순간에 또 부작용이…….
아곤의 성난 뿔은 품에서 작은 철 수통을 하나 꺼냈다. 그 내용물을 꿀꺽꿀꺽 들이켜고 왼팔 어깨에도 치덕치덕 펴 발랐다. 그러자 늘어졌던 팔이 거짓말처럼 멀쩡하게 돌아왔다.
그는 어깨를 빙빙 돌려보고는, 무릎 꿇고 다시금 기도문을 외웠다.
“[불굴의 군세를 거느린 선봉장, 아탈라시여. 당신의 대전사를 굽어살피소서, 횃불을 들어 전장으로 인도하소서…….]”
송독을 끝내자 싯누런 모래 폭풍처럼 신기가 몰려들고, 전신에 막대한 힘이 퍼져 나갔다. 투신의 무기, 그리고 투신의 가호가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아곤의 성난 뿔은 도낏자루를 굳게 움켜쥐고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쿵 – !
잔해와 먼지 속을 헤매길 잠시, 그는 얼마 가지 않아 굉음의 근원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크하아아아아아아악!!”
――――――― 콰과과과과과과 – !!
처음엔 악마가 날뛰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흉흉하게 피칠갑을 한 낯짝과 인간이라기엔 너무 큰 체구, 잔해를 박살 내는 어마어마한 힘, 모든 요소가 눈앞의 상대를 인외의 존재라고 판단하게끔 만들었다.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어처구니없이 흉악한 모습이긴 했지만 상대는 분명 인간이었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동족, 황야의 아버지를 섬기는 아탈라인.
아곤의 성난 뿔은 투구를 슬쩍 들어 올리고 남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어째서 이런 곳에서 그러고 있는 거지?”
“…….”
“……혹여 그대가 그 ‘악마 학살자’라는 용병인가? 그렇다면 중심 악마는 어디에 있지? 뭔가 아는 게 좀 있으면 말해 주게나.”
“…….”
남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맹수처럼 숨을 고르며 불가해한 시선을 보내기만 할 뿐.
아곤의 성난 뿔은 발 간격을 벌리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악마는 확실히 아니지만, 악마에 홀린 걸 수도 있었다. 무의미한 살생을 하고 싶진 않아도 상대가 먼저 덤벼든다면 맞서야만 했다.
그런데, 남자는 덤벼드는 대신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 도끼, 내 것이로군.”
“……?”
“어떻게 손에 넣은 거지.”
아곤의 성난 뿔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도낏자루를 슬쩍 품으로 당기며 경고했다.
“이 도끼는 황야의 아버지와 선대 대전사의 의지가 깃든 신성한 무기다. 오직 ‘아탈라의 대전사’만이 이것을 취할 수 있기에, 마땅히 내 손에 들어온 거지. 네놈이 누구인진 모르겠으나 결코 분수에 맞지 않는 무기를 탐해선…….”
“……‘아탈라의 대전사’라고? 네가?”
“그렇다, 나는…….”
아곤의 성난 뿔은 말을 하다 말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남자의 눈에 핏줄기가 스며들더니, 활화산처럼 폭발하여 시뻘건 피눈물을 흘려보냈다. 남자는 찢어져라 입가를 끌어올리며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이었구나, 그 씹어 죽여도 마뜩잖을 광대 놈이.]”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지독한 살기.
전신에 다닥다닥 소름이 돋았다. 아곤의 성난 뿔은 몸이 덜덜 떨리지 않도록 복근에 힘을 꽉 주었다. 남자의 붉은 눈동자 속에 핏발처럼 격노와 광기가 어렸다.
“[그 칭호와 무기의 무게를 감당키 위해, 내가 어떤 빌어먹을 일들을 겪었는지 아느냐?]”
“……뭐?”
“[알 수 없겠지. 네까짓 게 알 리가 없지……. 사명을 등지고 구경거리로 전락해 개싸움이나 벌이고 있었으니……. 네놈의 골통을 부수고 심장을 찢는 정도로는 턱없이 모자라겠군.]”
“아니, 그게 무슨 소리…….”
“[닥치고, 내놓아라.]”
돌연 섬광처럼 남자의 신영이 사라지고.
――――――――――― 콰 – 앙!!!
숨 한 번 들이켜기도 전에, 아곤의 성난 뿔은 잔해 속으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깊숙이 처박히고 말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