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8)
8화. 고블린, 악마, 아이들 (4)
악마는 교활하고 감이 뛰어난 존재다. 약자를 만나면 가학성을 여실 없이 드러내지만 강자를 만나면 도주도 서슴지 않는다. 본래대로라면 악마는 카딤이 피를 마시는 걸 보자마자 즉각 달아났을 터였다.
그러나 관자놀이에 이제 막 돋아난 뿔이 판단을 흐렸다.
기껏 더 강한 힘을 손에 넣게 되었는데 달아난다니? 심지어 그 상대는 조금 전까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인간이다. 고작 피 좀 마셨을 뿐인데, 인간 따위에 겁을 집어먹었단 사실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악마는 직감을 무시하고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 크륵, 죽어, 너……. 말 안 듣는 녀석은, 죽어.
터억!
바닥을 박차고 쏜살같이 인간을 향해 돌진했다.
갈퀴처럼 뻗어 오는 세 줄기의 손톱. 카딤은 악마의 높이에 맞춰 자세를 낮췄다. 이전까진 몸놀림이 너무 빨라 볼 수 없었으나 이젠 아니었다. 향상된 동체 시력이 악마의 움직임을 정확히 읽어 냈다.
챙 – !
손도끼와 손톱이 부딪히는 순간, 악마의 표정에 동요가 일었다.
깊숙이 베어 내려던 일격을 거둬 황급히 뒤로 빠졌다. 바깥쪽 손톱이 살짝 휘어져 있었다. 그대로 뻗었더라면 아마 손톱이 완전히 잘렸을 터.
다만 손도끼도 무사하진 못했다. 부딪힌 부분의 날이 살짝 깨져 있었다. 이렇게 싸웠다간 이가 다 빠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카딤은 상관치 않았다.
도끼가 망가지면 칼을 쓰면 되고, 그마저도 박살 나면 맨주먹으로 싸우면 되는 것이었다. 무기의 유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피를 향한 갈망과 끓어 넘치는 살의면 충분했다.
“흐어어어어어업!!”
광전사가 노호한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불길한 직감이 또 한 번 악마의 발목을 잡아챘다. 악마는 불안을 감추기 위해 성난 짐승처럼 그르렁거렸다.
– 크르르르르륵!!
부웅 – !
악마는 좌측으로 뛰쳐 올라 성난 도끼질을 피했다. 회피하는 찰나, 카딤의 옆구리에서 또 다른 일격이 섬광처럼 튀어나왔다.
휙!
오른손으론 도끼를 휘두르고 왼손으론 허리춤의 칼을 꺼내 휘두른 것. 악마는 매서운 칼날 또한 한 끗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회피했다.
– 크륵!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카딤은 뒤로 물러난 악마를 향해 도끼를 투척했다.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이 실린 도끼가 허공을 분쇄하며 날아왔다.
쐐액, 쾅 – !
쿠르르르 –
맞기 직전 상체를 숙여 도끼는 악마에게 적중하지 못했다. 대신 그 뒤에 있던 석주를 맞췄는데, 대들보만 한 석주는 단숨에 박살 나고 바닥이 징징 울렸다. 비산하는 파편이 악마의 살갗을 긁어 작게 생채기가 났다.
악마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저것에 정통으로 맞았으면 단번에 고기반죽이 되었을 터였다. 평범한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버린 괴력이었다.
– 너, 뭐야……? 인간, 아니지? 인간이 어떻게 이런 힘을…….
대답 대신 돌아오는 건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드는 칼날이었다.
“흐업!”
후욱!
어느새 코앞에 다다른 카딤. 근육이 팽창한 덕에 카딤의 속도는 악마 못지않게 신속해져 있었다. 악마는 기겁하여 몸을 빼면서도 반사적으로 손톱을 휘둘러 반격했다.
카딤이 잽싸게 뒤로 몸을 빼 손톱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연달아 이어지는 공격은 전부 칼날에 가로막혔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엔 움직임을 읽혀 도리어 역공을 당하기 시작했다.
악마는 톱날 같은 이빨을 으드득 갈았다. 속도도 의미 없고 근력은 압도적으로 밀리니 정면전으로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악마는 펄쩍 용수철처럼 튕겨져 올라 천장에 달라붙었다. 그러곤 종유석 사이를 기어 횃불을 든 인간을 향해 다가갔다. 불을 꺼트리고 어둠 속에서 기습하면 저 인간처럼 생긴 괴물도 어찌할 수 없을 거란 판단이었다.
한편 던컨은 고블린에 맞서 분투하고 있었다.
“으악, 저리 가! 저리 가!!”
눈먼 횃불에 한 번 달궈진 후 고블린들은 쉬이 그를 덮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성질은 한층 더 포악해지고 말았다만.
– 키에에에!
– 키에에엑!
그악스럽게 빈틈을 노리는 집착에 던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악마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건 당연한 일.
카딤이 먼저 악마가 노리는 바를 알아챘다.
계획대로 되도록 가만둘 생각 따윈 없었다. 붉게 물든 홍채가 흉흉한 빛을 발했다. 도끼자루를 움켜쥔 손에 묵직한 힘이 들어갔다.
‘……몸놀림 하나는 잽싼 놈이다. 녀석을 노리고 던져 봤자 어차피 피할 테지.’
카딤은 차라리 천장 전체에 강력한 충격을 주기로 했다.
둔기처럼 쓰기 위해 도끼를 거꾸로 잡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쇠심줄처럼 근육에 힘을 축적. 반탄력을 싣기 위해 상체를 비틀고 오른팔을 한껏 뒤로 뺐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전완근과 상완근, 그 완력을 손가락 끝까지 밀어 내리며 투척.
쐐액 –
포탄처럼 뻗은 도끼가 천장에 닿는 찰나, 작은 규모의 폭발이 일어났다.
콰 – 앙!!
묵직한 진동이 동굴 전체를 울렸다. 종유석과 석주가 부서지고 석회질의 천장에 쩍쩍 금이 갈라졌다. 그 여파로 악마는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악마의 얼굴 위로 먼지와 돌무더기가 쏟아졌다.
– 캬악!!
콰르르르 –
악마는 고통으로 신음하며 버둥거렸다. 툭 불거진 두 눈에 흙먼지가 잔뜩 들어갔다. 충격으로 귀가 징징 울렸다. 어디가 바닥이고 어디가 천장인지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광전사는 적이 무방비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푹 – !
– 캬아아아아아악!!
세로로 꽂힌 칼날이 코뼈를 으깨며 머리통을 완전히 관통했다. 양 눈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코와 입에서 피가 왈칵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악마는 쉬이 숨을 거두지 않고 팔다리를 버르적대며 발광했다.
카딤은 머리통을 관통한 그대로 칼을 들어 올렸다. 무게 탓에 악마의 몸뚱아리가 칼날을 타고 점점 아래로 미끄러졌다.
– 캬아아악, 캬아아아악!!
악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뇌가 칼날에 갈려 나가는 와중에도 카딤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그 일격이 닿는 일은 없었다. 어느 정도 몸뚱이가 내려오자 카딤은 날이 잘 들게 칼을 고쳐잡았다. 그러곤 완력과 악마의 무게를 중첩시켜 세차게 칼날을 휘둘렀다.
쩌걱 – !
잔혹한 꽃봉오리가 만개했다. 두개골이 양단되며 진분홍빛 뇌수가 터져 나왔다.
악마는 바닥에 털썩 엎어졌다. 반토막 난 머리통에서 남은 찌꺼기와 피가 흘러내렸다. 바들바들 떨리던 악마의 손이 어느 순간 맥없이 바닥에 툭 떨어지고 말았다.
“……후우.”
카딤은 작게 한숨을 토하며 검신에 묻은 피를 훔쳤다. 신경을 잠식했던 혈기가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좀 더 빨리 끝냈어야 됐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고 말았다. 하마터면 버프 없이 악마와 맞서야 될 뻔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악마가 워낙 날래기도 했고, 환경이 열악하기도 했다. 지금은 큰 부상 없이 악마를 처치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터였다.
– 키에에, 키에에…….
– 키륵, 키르르르…….
주인 잃은 고블린들이 애처로운 신음을 흘렸다. 악마가 죽었으니 마기의 영향은 안 받겠지만, 그래도 이미 한번 ‘마물’이 되었던 놈들이다. 카딤은 아이들을 찾으러 가기 전 녀석들을 마저 정리하고 가기로 했다.
녹슨 칼을 든 고블린의 목을 베어냈다. 머뭇대는 고블린의 심장을 꿰뚫었다. 달아나는 고블린의 등짝에 칼침을 놓아주었다. 횃불 든 고블린을 향해 칼날을 뻗……
“나, 나으리! 왜, 왜 그러십니까!! 접니다요!! 저, 저!!”
우뚝, 가까스로 칼을 멈춰 세웠다.
칼날은 가슴팍과 고작 반 뼘쯤 떨어져 있었다. 카딤의 눈동자에 커다란 동요가 일었다.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면면이 딱딱하게 굳었다. 던컨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괘, 괜찮으십니까, 나으리? 아,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요. 혹시 악마에게, 악마에게…….”
‘홀리신 건 아닌지’라고 끝내 묻진 못했다. 카딤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칼을 거두고 착잡한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아니, 난 괜찮다. 미안하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 그런 겁니까? 휴우, 그런 거였구만요. 전 또…….”
“악마는 죽었다. 주변의 고블린도 대충 다 정리된 거 같군. 아이들은 아마 이 안쪽에 있을 거다. 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도록 하지.”
“예, 예! 알겠습니다요, 나으리!”
악마와 고블린의 위협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너무 컸다. 때문에 던컨은 이런 의문을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달빛마저 흐릿한 야음을 꿰뚫고 추적해 왔던 사람이…… 횃불 바로 밑에 있는 사람 얼굴을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 되나?
*
악마는 교활하고 사악했다.
아이들은 카딤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상태였다. 죽은 아이는 아무도 없지만 멀쩡한 아이도 아무도 없었다.
“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마툼, 게헨나, 마툼, 골가타, 마툼, 그리모스…….”
“인간의 파멸과 죽음이 구더기와 뼈가 들끓는 하얀 골짜기로부터 오는도다, 눈알을 파먹는 새가 선각자의 빛을 앗아가고……”
“버리지 마!!! 가지 마!!! 가지 말라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둠 속에서 전부 망가진 인형처럼 멈춰 있었다. 불빛이 드리우자 아이들은 발광하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얘, 얘들아? 괜찮니, 어, 어어?”
말을 붙여도 알아먹는 기색이 아니었다. 던컨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카딤을 돌아봤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으리……?”
카딤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명하고 있을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대신 지금 해야 할 일을 지시했다.
“아이들에게 따라오라 말하고 앞장서라. 나는 뒤따라갈 테니.”
“예, 예? 그렇지만 다들 저런 상태인데 절 따라올까요……?”
“……잘 따라갈 거다.”
카딤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다지 쓰고 싶은 방법은 아니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이 많은 아이들을 전부 둘러멜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정신이 아닌 아이들을 내버려 둔 채 동굴을 계속 오갈 수도 없으니.
쿵!
카딤은 뒤로 가서 벽을 힘껏 내리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모두 여길 봐라.”
그리고 머리가 반토막 난 악마의 시체를 들어 올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으아, 으아아아아아아악!!”
“으허헉, 으허허허헉!!”
아이들은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던컨도 덩달아 기겁하여 자지러졌다. 그러다 겨우 당황을 추스르며 아이들을 이끌었다.
“나, 날 따라오렴! 얘들아, 겁먹지 마! 악마는 벌써 죽었단다. 다들 아저씨만 따라오면 돼, 응? 착하지?”
“어허허헝, 어허허헝, 엄마…….”
“으허어어어어엉…….”
과정은 그다지 안 좋았지만 결과는 좋았다.
아이들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르거나 기괴한 주문을 외우지 않았다. 얌전히 던컨의 소맷자락과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동굴 밖으로 나아 갔다. 머뭇거리거나 뒤처지는 아이는 없었다. 뒤에선 악마의 시체를 짊어진 거구의 야만인이 따라오고 있었으니.
동굴 밖으로 나와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던컨은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아침 햇살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소맷단으로 일일이 아이들의 콧물과 눈물 자국을 닦아 주고 마을로 향했다.
마을 어귀에는 부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들은 헛기침을 하며 곁눈질을 했고, 어머니들은 아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내달려왔다.
“아멜리아!”
“로니! 로니!!”
“세린! 괜찮니? 어디 다친 덴 없고?”
“엘가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겉보기엔 감동적인 상봉처럼 보였다.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리는 건 오직 어머니들뿐, 아이들은 텅 빈 눈동자로 바닥을 훑거나 생경한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모들도 곧 그 사실을 눈치챘다. 대부분은 그저 일시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아이들은 무슨 상황이었던 건지 잘 모를 거라고. 악마에게 납치되었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라고. 곧 나아질 거라고.
그게 아니란 걸 아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카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짧게 침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영 입맛이 썼다.
한바탕 상봉을 마친 후, 주민들의 시선은 야만인을 향해 옮겨왔다.
피칠갑을 하고 머리가 쪼개진 악마의 시체를 들고 있는 모습. 정말 홀로 악마를 죽인 것이었다. 압도적인 무력과 살벌하기 짝이 없는 외견에 주민들은 일순간 두려움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수많은 아이들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주민들은 주저하면서도 하나둘씩 카딤을 향해 다가왔다. 허리를 굽히고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용병님. 용병님 아니었으면 저희 아이가 어떻게 되었을지…….”
“닭고기와 보리를 넣은 스튜를 끓여 놓았습니다. 고생하셨는데 일단 저희 집으로 가셔서 식사를…….”
카딤은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그 요리는 돌아온 아이들에게나 나눠 줘라. 밤새 잠도 못 자고 울부짖었으니 시장할 테지. 나는 먼저 좀 쉬어야겠군.”
“…….”
살아남기 위해선, 피로 물든 진창을 건너며 오물을 마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이 달린 문제가 아니라면 손에 쥔 빵조각을 보다 허기진 자에게 건넨다.
인간성을 잃은 악귀가 되지 않기 위한 마지막 신조였다.
카딤은 눈치를 살피는 주민들을 등지고 가까운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늦은 잠을 청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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