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90)
90화. 잊힌 신의 추종자들 (12)
총 16개에 이르는 망국의 은화.
비토리오 의원에게서 강탈한 것들을 합치자 그들이 가진 은화의 개수는 그 정도가 되었다. 겉보기엔 한 줌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법을 다루는 사제의 손에 들어가면 소도시 하나 정돈 너끈히 멸망시킬 수 있는 양이었다.
간단히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학사실. 카딤은 그 은화들을 한 손에 쥐고 일레니아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걸로 뭘 할 생각이지?”
“……일단 이쪽으로 따라오시겠어요? 아, 염소수염 아저씨는 밖에서 기다려주시고요.”
“…….”
던컨은 뚱하게 도끼눈을 떴지만, 일레니아가 1천 루덴 금화를 두 닢 건네주자 금방 표정을 풀고 헤실거렸다.
일레니아는 학사실 뒤꼍의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허리를 옹송그리고 문턱을 넘자 쿰쿰한 곰팡내가 훅 밀려들었다.
낡은 책장과 판자 위로 너덜거리는 고문서와 책, 석판이나 깨진 거울 따위의 골동품이 무질서하게 쌓여있었다. 아마도 자료를 쌓아놓는 창고로 보이는 방. 이전에 유적을 찾을 때 들고 다니던 골동품도 이곳에서 가져오지 않았나 싶었다.
그녀는 익숙한 몸짓으로 잡동사니들을 넘어 벽면의 커다란 책장 앞에 이르렀다. 그러곤 뒤따라온 카딤에게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그 은화들…… 잠시만 제게 맡겨 주시겠어요? 대화를 나눌 은신처를 조성하고, 답례품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해서요.”
“…….”
“그냥 주시기 찝찝하시다면 제가 가진 유물을 맡길게요. 비록 그것들에 비해 가치는 떨어지지만, 개인적으로 제겐 가장 소중한 유물을…….”
카딤은 손을 젓고는 선뜻 망국의 은화를 건넸다. 단, 가지고 있는 것 중 절반만.
“이 은화를 갖고 있으면, 어둠의 성법에 저항할 수 있다고 했지?”
“…….”
“나머지 절반을 줄지 말지는 네 말을 들어보고 결정하도록 하겠다.”
일레니아는 씁쓸한 눈빛을 했지만, 결국 선선히 수긍하고는 은화를 건네받았다. 그러곤 그것들을 책장 위에 올려놓고 경건히 손을 모았다.
“[만물을 현혹하는 빛에 파묻혀 그 이름마저 잊힌 태초의 어둠이시여, 망향(望鄕)의 고통을 품고 이 땅을 헤매는 종복들을 잊지 마소서. 환란을 부르는 여명에 일천한 안식이 사멸하는 새벽, 세상을 굽어살피는 눈을 피할 당신의 옷자락을 내어주길 간절히 청할지어니…….]”
우우우우웅 –
송독이 끝나자 은화들이 검은 광채를 발하고, 겹겹이 닫혀있던 책장이 일시에 열렸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드르르르륵 –
목재의 통로처럼 늘어선 책장 끝에 자리한 것은 어둠.
바닥, 천장, 벽이 따로 구별되지 않는, 꿰뚫어 볼 수 없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칠흑의 공간.
“…….”
기시감.
카딤은 그 공간을 보는 순간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빨리 들어오세요. 오래 쓸 수 있는 은신처는 아니라서요.”
그 감각을 되짚어 볼 여유는 없었다. 앞서간 일레니아가 따라오라 재촉하고 있었다. 일단 상념을 접고 뒤따랐다.
드르륵, 드르르륵, 드르르륵, 쿵!
발을 들이기 무섭게 책장들이 알아서 닫혔다. 은신처는 순수한 어둠 속에 잠식되었다. 티끌만 한 광원도 없어 암순응할 여지조차 없는 완전한 암흑세계.
빛의 부재가 오래가진 않았다.
화륵 – !
어디서 난 건지, 일레니아가 촛불을 하나 밝혔다. 어두컴컴한 은둔처에 조촐한 음영이 드리워졌다. 아탈라인과 고고학자는 굳게 입술을 닫고 은근한 불빛에 달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일레니아였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딤 님. 바깥에서 진실을 말씀드리면 당신과 저희의 안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라면 잠시나마 저희를 ‘굽어살피는 눈’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일레니아는 치렁한 머리칼을 귀로 넘겼다. 말투와 표정, 분위기, 모두 바깥에서보다 훨씬 더 무감정하고 사무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카딤이 보기엔 오히려 이쪽이 가면을 벗어던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물어볼 게 너무 많아서, 대체 뭣부터 물어봐야 할지를 모르겠군.”
“…….”
“일단 자기소개부터 다시 들어보도록 하지. 네 녀석의 진짜 정체와 이름은 무엇이더냐?”
일레니아, 혹은 수많은 다른 이름을 가진 여인, 혹은 아무런 이름도 갖지 못한 여인은 가슴맡에 넌지시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해 결례가 많았습니다, 카딤 님. 어느 정도 짐작하셨겠지만, 저 또한 잊힌 신을 모시고 있는 사제입니다. 다만 저는 ‘밤까마귀 분파’와 같은 이단이 아닌, 신의 계시를 곡해하지 않고 온전히 그 뜻을 받드는 정통적인 분파에 속해 있습니다.”
“…….”
“그리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잊힌 신 교단의 사제들은 원래 이름을 갖지 않습니다. 모시고 있는 신마저도 신명(神名)을 잃었거늘, 그 추종자들이 감히 이름을 갖는 건 불경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이름이 없으면 지칭하기 난처하실 테니, 앞으로도 ‘일레니아’라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여인의 진짜 정체가 잊힌 신 교단의 사제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교단의 사정에 박식할 리도 없고, 망국의 은화 같은 성유물을 들고 다녔을 리도 없으니까.
결국 남는 의문은 이것이었다.
“그럼 너희 분파가 모습을 감추고, 번거로운 방식으로 나를 도왔던 이유를 얘기해 보거라.”
“…….”
“혹여 그 ‘계시’라는 것 때문인가?”
일레니아는 고민하다 신중하게 물었다.
“사정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려면 다소 배경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잊힌 신’께서 이름을 잃게 된 배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설명을 드려도 될는지요?”
카딤은 짧게 고개를 까딱였다. 일레니아는 생각을 정리하고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과거 루카오니아 제국…… 아니, 그땐 루카오니아 왕국이었죠. 루카오니아 왕국이 엘가 교단과 제정일치를 이룬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잊힌 신의 나라를 침략한 것이었습니다.”
“…….”
“그들이 기치로 삼은 것은 빛과 질서. 당연히 어둠과 혼돈을 숭상하는 저희들은 정당하고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었지요. 살육을 올바른 정의라 착각한 성기사들의 칼날 아래, 갓난아이부터 노인까지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시체를 하도 많이 파먹어, 그 땅의 쥐와 까마귀들이 더는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였죠.”
카딤은 불현듯 1회차의 동료, 고든을 떠올렸다.
그 호쾌하고 웃음 많은 사제는 의심할 바 없이 정의롭고 공정한 선인이었다. 허나 그러한 그조차도 잊힌 신과 그 추종자들에 대해선 매우 껄끄럽다는 입장이었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다. 지선했던 사제도 그러할진데, 힘에 미친 아크팔라딘이나 다른 성기사들이 어땠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학살을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일레니아는 촛불을 한 조각 머금은 눈동자를 처들었다. 너무나 밝은 빛에 불타 스러진 선조들의 넋을 위령하듯.
“엘가의 사제들이 정확히 무슨 술수를 쓴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잊힌 신의 신명(神名)을 봉인했습니다. 그 탓에 신의 이름을 망각한 사제들은 성력을 대부분 잃고 말았지요. 마치 불가사의한 이유로 신통력을 상실한 황야의 무녀들처럼…….”
“…….”
“사제들은 그나마 남은 성력을 ‘망국의 은화’를 비롯한 헌금에 봉인하고, 생존한 추종자들과 함께 대륙 각지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러곤 신명을 되찾을 방법을 백방으로 찾아다녔지요. 하지만 그사이 루카오니아는 제국이 돼 버리고 엘가 교단도 더욱 강성해져, 저희들은 수백 년에 이르도록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
“그런데 약 20년 전…… 잊힌 신으로부터 한 가지 ‘계시’가 내려온 겁니다.”
그 계시의 내용은 이러했다.
[너희는 자정의 그림자처럼 흑암에 신영을 감추고 예비할지어다. 거악이 심연으로 돌아간 후 세 번의 종이 울리면, 공허한 세월을 가로질러 피칠갑을 한 전사가 다시 오리라. 그자는 이 땅을 부정한 피로 물들이고 천공에 떠오른 광륜(光輪)을 추락시키리라.]일레니아는 계시에 대해 부차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거악’은 이전에 창궐했던 마경의 대악마, ‘세 번의 종’은 관용적으로 300년을 일컫는 표현, ‘부정한 피’는 악마들의 피, ‘천공에 따오른 광륜’은 엘가와 그 추종자들을 일컫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이 해석에 따르면, 곧 악마들과 엘가 교단을 멸할 자가 올 테니 잊힌 신께서 그자를 은밀히 도우라는 사명을 주셨단 뜻이 되지요.”
“…….”
“대부분의 분파들이 이 사명을 따르는 것이 세상을 구하고 잃어버린 신명을 되찾는 길이라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세월 착실히 당신께 드릴 도움을 예비했지요. 비록 밤까마귀 분파의 주교는 잘못된 확신에 빠져, 이를 ‘재앙의 근원’에 대한 계시로 곡해하고 말았지만…….”
카딤의 미간이 꿈틀, 경련했다.
“그러니까…… 저 계시에 나오는 ‘피칠갑을 한 전사’가 나라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할 수 있던 거냐. 피를 뒤집어쓴 전사들이라면 이 세상에 잔뜩 널려 있을 텐데.”
“그야, 당신은…… 다른 흔한 전사들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니까요.”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리 말하는 거지.”
“카딤. 황야의 아들. 두려움을 모르는 아탈라의 대전사. 악마의 피를 삼키고 그 힘을 얻는 피의 광전사. 대악마를 처단한 용사 일행을 모은 주역. 그리고 30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두 번째 여정을 시작한 자.”
카딤은 이름 없는 여인을 무지근하게 응시했다.
일레니아는 볼 수 있었다. 심연처럼 뻥 뚫린 동공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과도하게 많은 걸 알고 있는 자에 대한 경계심이었으며, 사소한 계기만으로도 파괴적인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불안정하고 강렬한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일레니아는 조속히 말을 덧붙였다.
“어떻게 저희가 이 모든 걸 아는지 의아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이곳도 절대적으로 안전한 공간은 아닙니다. 시간이 오래 흐르거나 지나치게 많은 사실을 말씀드리면, 필시 ‘굽어살피는 눈’이 이곳을 발견하고 말 겁니다.”
“…….”
“그래도 잊힌 신께 맹세코, 저희는 당신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당신께 필요한 선물을 찾고, 당신의 여정 속에 적절히 안배하기 위해 저희는 뼈저린 희생을 감내하였습니다. 많은 사제들이 드워프의 유물들을 찾다 북부에서 동사하였고, 저 또한 유적을 좇는 석패를 찾아 황야를 헤매며 갖은 고초를 겪었지요…….”
“…….”
“물론 사명을 짊어진 건 오롯이 저희가 선택한 길. 절대로 당신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디 청컨대…… 넓은 도량으로 저희의 사정 역시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계속 당신께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라도…….”
카딤은 일단 적의를 거뒀다. 여전히 미심쩍은 면이 남아있긴 해도, 이자들이 건네준 선물 덕을 톡톡히 본 건 사실이었으니. 긴장시켰던 근육에 조금 힘을 풀고 물었다.
“그래도 그 ‘굽어살피는 눈’이라는 게 뭔지는 말해 줬으면 한다만.”
“……그전에, 지금 당장 제게 남은 은화들을 건네주시겠습니까?”
“……?”
“죄송합니다만,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약속했던 답례품을 만들어 드리려면 더 많은 성력이 필요합니다. ‘굽어살피는 눈’이 이르기 전에 일단 답례품부터 만들어 드리고…….”
말을 하다 말고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일레니아.
갑자기 공간에 한 줄기 빛이 드리워졌다. 고작 촛불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환한 빛이.
카딤은 빛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저 높이, 검은 도화지 위로 검은 먹물을 덧칠해 놓은 듯한 어둠 위로 뚜렷이 뚫린 구멍, 그 구멍을 통해 낯설지 않은 찬란한 빛이 틈입하고 있었다.
태양.
태양이 은신처의 어둠을 비집고 떠올랐다.
쿠오오오오오…….
평소와 같은 태양이 아니었다. 결코 따사롭게 볕을 드리우지 않고, 게걸스레 빛줄기를 뻗어 어둠을 살라 먹었다. 굶주린 포식자와 같은 광채에 휩쓸려 은신처가 빠르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순간 평정을 잃고 촛불을 떨어뜨리는 일레니아.
카딤은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직감했다. 저 태양이 바로 일레니아가 우려하던 ‘굽어살피는 눈’이라는 걸. 저 빛에 포착당하면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읍!”
일레니아의 허리를 감싸 팔뚝에 끼고, 빛을 피해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아직 어두운 음지에 이르러서야 그녀를 내려놓고 손에 은화들을 쥐여 주었다.
“이 은화들로, 이런 은신처를 다시 만들 수 있나?”
“……예?”
“처음에 그 은화로 은신처를 조성하지 않았나. 다시 은신처를 만들면 저 빛을 피할 수 있을 텐데.”
“아, 아뇨, 그건 불가능합니다……. 은화에 담긴 성력은 그저 연료였을 뿐, 이 은신처는 제가 오랫동안 미리 준비를 해 둔 덕에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방어막 같은 건 만들 수 있나? 저 빛의 침범을 잠시라도 막을 수 있는.”
“…….”
일레니아는 반대편을 내다보았다. 빛이 어둠을 침범하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이래서는 어둠의 장막을 펼쳐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장막을 펼치는 대신, 은화의 성력을 빌어 미리 약속했던 ‘답례품’을 만들어 건넸다. 그 행동을 이거나 받고 떨어지란 의미로 받아들인 카딤은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그러나 섣부른 생각이었다.
일레니아는 판단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큰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진실을 밝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카딤의 신뢰를 얻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계시가 가리키는 자, 언젠가 저 광륜을 추락시키고 잊힌 신의 신명을 되찾아 줄 전사였으니까.
천천히 숨을 고르고는 부드럽게 입술을 열었다.
“혹시 카딤 님께선…… ‘태양은 세상을 굽어살피는 엘가의 눈동자’라는 얘기,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들어본 적 있다.”
“그 얘기는 반 정도만 진실입니다. 지금 이 은신처에 침입한 빛, 그리고 매일 천공을 일주하는 태양의 정체는 바로 빛과 질서의 신, 엘가의 눈동자입니다.”
“…….”
“엘가는 언제나 저 찬란한 눈동자로 세상을 집요하게 주시하고 있지요.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 밝혀선 안 될 진실을 드러내는 자들을 찾아 ‘천벌’을 내리기 위해……. 그렇기에 저희는 언제나 정체를 감추고 당신을 은밀히 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카딤은 헛웃음을 칠 뻔했다. 이 무슨, 신화에서나 튀어나올 법한 이야기란 말인가? 증거를 보지 못했다면 말도 안 되는 궤변 따윈 집어치우라고 일축했을 터.
그러나 저토록 명징한 증거가 눈앞에 있으니 부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 정도만 진실이라고 했나? 그렇다면 그 얘기에선 무엇이 거짓인 거지?”
일레니아는 눈을 감고 그 위로 손을 얹었다. 다른 종교로 치면 성호를 긋는 것과 비슷한 행동.
지금 이 말을 꺼내면 결코 천벌을 피할 수 없겠지만.
아직 은신처 안에 있으니 운이 좋으면 살 수 있을 터.
잊힌 신의 사제는 고뇌 끝에 기어코 진실을 끌러 놓았다.
“저 눈동자의 주인, 그리고 지금 엘가 교단이 섬기고 있는 신은…… 엘가가 아닙니다.”
“…….”
“어제까지 저와 같은 모습을 가졌지만 결코 제가 아닌, 거짓된 분신들을 보셨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저 신, 아니, 저것 또한…… 엘가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엘가 행세를 하고 있는 ‘거짓된 존재’에 불과합니다.”
“…….”
“저희 잊힌 신 교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저 ‘거짓된 존재’를 쓰러뜨리고, 진짜 엘가와 잊힌 신의 신명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녀가 말을 끝마치자, 천장의 빛이 필멸자가 감당할 수 없는 진노한 광염을 발했다.
―――― 쿠우우우우우우…….
불신자에게 천벌을 내리는 절대자의 불빛. 암흑을 살라 먹는 심판의 섬멸. 안식과 비밀의 끝을 고하는 종식의 일광.
마침내 모든 어둠이 사그라들고 공간 전체가 빛에 장악당한 순간.
――――――――― 쩌 – 엉!!
빛줄기가 날카로운 창날처럼 쇄도하여 일레니아의 육신을 꿰뚫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