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93)
93화. 잘 드는 칼(3)
카딤 일행은 갈렌타나 시내를 쏘다니며 여정에 필요한 물자들을 사 모았다. 그 품목은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도시락과 건조 식량, 가죽 부대에 담긴 식수와 햇포도주, 깨질 걱정 없는 철 수통과 쇠로 된 병, 강철 버클이 달린 가죽 견갑과 무기 거치대가 달린 허리띠, 가벼운 모포, 질기고 튼튼한 옷가지들, 동백기름, 밀랍, 냄비, 소금, 여벌의 지도까지…….
무조건 다 가장 비싸고 좋은 고급품으로만 골라 샀다. 흉악한 겉모습을 보고 괴한인가 싶어 껄쩍지근하게 굴던 상인들의 태도는, 카딤이 돈주머니에서 금화를 뭉텅이로 꺼내기 시작하자 삽시간에 돌변했다.
“그, 그것들은 좀 비싼 거라…… 한 벌에 5백 루덴씩입니다만…….”
“열 벌 사도록 하지.”
“예?!”
쌓아 둔 재고를 일시에 처분한 포목점 주인은 입을 쩍 벌렸고.
“이거까지 하면, 값이 거의 1만 루덴 가까이 나가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상관없다. 이곳에 담아라.”
한 달치 매출을 하루 만에 올린 잡화점 주인은 얼떨떨하게 물건을 포장했고.
“전부 다 해서 1천 2백 루덴 주시면 됩니다!”
“여기 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으니 집어넣도록.”
“가, 감사합니다, 용병 나리! 복 받으실 겁니다!”
며칠치 수익을 팁으로 받은 건량 가게 주인은 허리가 부러져라 몸을 숙였다.
카딤은 협상도 않고, 흥정도 않았다. 매번 가장 비싼 물건들을 잔뜩 고르고 우직하게 금화를 꺼내 계산했을 따름. 거리에 입소문이 돌자, 상인들은 이제 카딤만 보면 입이 찢어져라 미소 짓고 극진한 친절을 베풀었다.
반면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던컨은 살점을 깎아내는 기분이었다.
“흐아아…… 이건 잘만 말하면 2백 루덴은 싸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이게 1천 루덴이라굽쇼?! 다른 도시에선 5백 루덴도 안 하는데…….”
“저, 저, 나으리…… 아직도 더 살 게 남았습니까요?”
“…….”
카딤은 그 푸념을 전부 무시했다.
어차피 남아도는 게 돈이었다. 푼돈 깎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질 좋은 강철 검과 단검을 한 자루씩 사 주자, 던컨도 더 이상 꿍얼거리지 않고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물자를 다 사고 보니 짐짝이 잔뜩 늘어났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젠 ‘인벤토리’가 있었으니까. 산더미 같은 물자가 그리 크지 않은 가방 속으로 꾸역꾸역 다 들어갔다. 그걸 본 율리탄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한바탕 호화로운 보급을 마치고 나자, 어느덧 서녘으로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로써 이 도시에서 볼 일은 마쳤다. 이젠 다음 목적지로 향할 차례. 카딤과 던컨은 떠날 채비를 했다. 시내를 안내하느라 혼이 쏙 빠져나갔던 율리탄이 뒤늦게 정신을 되찾았다.
“자, 잠깐만…… 이보시오, 아까 회당에서 정말로 의원님들을 위협하셨소?”
“그렇다만.”
“그, ‘그렇다만’이라고 답할 일이 아니지 않소! 참사회 의원들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이 도시의 수뇌부요! 정말로 그분들을 위협하였다면, 이는 당장 참사회 공판에 회부될 만한 중죄란 말이오! 분명 성문에서 붙잡힐 텐데 어떻게 도시 밖으로 떠날 생각이시오?”
“…….”
“…….”
카딤은 미묘한 눈길을 보냈고, 던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밤 그들은 참사회 의원을 고작 위협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택을 털어먹고 담궈 버렸으니까.
어쨌든 큰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이미 해결책은 준비해놓았다. 카딤은 어깨를 풀고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넘어서 가면 되지 않나.”
“……뭐?”
“성벽을 넘어서 가면 된다고. 던컨, 내 어깨를 붙잡아라.”
“……예?”
어리벙벙하게 반문하는 경비대장과 행상인.
카딤은 던컨이 인벤토리를 메게 한 다음, 그를 들어 가뿐히 어깨 위로 들쳐메고 작별 인사를 남겼다.
“하루 종일 수고 많았다, 경비대장. 아곤파 의원들이 왜 나를 도와줬냐고 추궁하거든, 도끼 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이르거라.”
“에? 어어…….”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그러고는 거리 너머로 내달려 사라지는 카딤.
우락부락한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날렵한 질주였다. 거인만큼 커다랬던 신영이 순식간에 난쟁이보다 작아졌다. ‘나으리? 나으리? 나으리……’하고 메아리치던 새된 목소리가 저 멀리, 저 멀리 소실점으로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그리고 잠시 후, 노을이 드리워져 금빛으로 빛나는 성벽 위로 낯설지 않은 윤곽이 나타났다.
거한은 튀어나온 홈을 붙잡고 발을 딛으며, 한 손만으로도 재주 좋게 드높은 성벽을 타고 올랐다. 인간이라기보단 차라리 암벽을 타기 위해 태어난 짐승에 가까운 모습.
우연히 그 모습을 보게 된 행인들은 눈을 의심하며 멈춰 섰다.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니 정지한 사람들이 서서히 무리를 지었다.
“저, 저게 뭡니까? 사람입니까, 저거?”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성벽을 저렇게 탈 수가…….”
“아니, 그럼 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의원들의 명을 받고 거리를 헤매던 참사군 병사들도 그 모습을 포착했다. 그들은 다급히 인파를 뚫고 성벽 쪽으로 내달려갔다.
“쪼, 쫓아라! ‘악마 학살자’다!”
“붙잡아! 성벽을 넘어가지 못 하게 막아야 한다!”
황금 가도 제9관문 경비대장, 율리탄 제르마니는 허탈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허, 허허…… 허허…….”
이제 내 평생, 저만큼 경이로운 전사를 또 만날 일은 없으리라고.
*
아곤파 의원들은 난리가 났다.
그들은 생각했다. 악마 학살자는 오직 적들만을 겨누는, 날카롭고 잘 드는 칼이라고. 머지않아 그 칼자루를 쥐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착각이었다. 악마 학살자는 분명 잘 드는 칼이었다. 그렇지만 적들만 겨누는 게 아니라, 그들까지도 베어 버릴 수 있는 망나니 같은 칼이었다. 그토록 가까이서 살기에 짓눌려 본 경험은, 전투 경험이라곤 투기장 구경밖에 없는 신진 의원들의 심사를 혼미하게 휘저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당장 목숨을 위협당한 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가 아곤의 성난 뿔을 죽이리라 선언했다는 것.
이전에 들었다면, 그저 분수 모르는 자의 객기 어린 협박으로 치부했을 터. 그러나 직접 만나고 보니 도저히 흘려넘길 수가 없었다. 그를 또다른 중심축으로 포섭하여 군세의 영향력을 증진시킬 계획이었는데, 자칫하다간 가장 중요한 군세의 간판까지 잃게 생겼다.
의원들은 뒤늦게나마 참사군 병사들을 풀고 성문을 봉쇄하라 명했으나, 되돌아온 소식은 이런 것이었다.
“아니, 맨몸으로 성벽을 넘어갔다고?”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저 성벽의 높이가 얼마나 되는데! 악마들조차도 갈렌타나의 성벽을 넘어 침입하진 못했잖나?”
“그, 그게…… 믿기 힘들지만 사실입니다, 의원님들……. 저 말고도 증인이 굉장히 많습니다…….”
“…….”
악마 학살자는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갈렌타나를 탈출했다. 아니, 사실 붙잡는다 한들 제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겠지만……. 의원들의 낯에 짙은 수심이 드리워졌다.
아곤파는 신진 의원들로 이루어진 만큼 체면보단 효율과 실리를 중시하는 편이었다. 필요만 하다면 한낱 용병이라 해도 하대하지 않고, 능력만 된다면 다른 의회에선 핏덩이 취급받을 젊은 의원도 수장으로 쳐줄 정도로.
그렇지만, 그들도 본질은 다른 정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가 터졌으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분위기를 선도한 젊은 수장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처음 악마 학살자를 포섭하잔 의견에 미적지근하게 반응했던 의원들이 아도니스를 격렬히 지탄하기 시작했다.
“아도니스 의원, 분명 악마 학살자는 과격해도 사리분별이 있는 인물일 거라 단언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런 일이 터졌으니 이젠 어떡할 거요?”
“……단언이 아니라 그럴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지요. 실제로 대면하기 전까진, 저희들의 적들에게만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까? 제가 보기엔 그의 면전에서 듣기 불편한 말을 꺼낸 저희의 태도가 훨씬 문제…….”
“아니, 그럼 그냥 그 큰돈만 달랑 주고 내보낼 생각이었단 말이오? 이번에 놓치면 언제 다시 목줄을 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아도니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른 의원들은 불똥이 튈까 싶어 잠자코 있었다. 소신 발언으로 악마 학살자에 대한 여론을 바꿨던 의원만이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왜 악마 학살자는 아곤의 성난 뿔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걸까요? 아탈라인들은 대개 그를 민족 영웅이라며 떠받들기에 여념이 없지 않습니까? 혹여 황금 가도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것 아닐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어차피 벌써 아곤의 성난 뿔을 죽이러 떠난 마당에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이오?”
“아뇨, 중요하지요! 그 이유만 알면 다시 악마 학살자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이 사람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렇게 소신 발언 의원과 미적지근 의원들이 첨예하게 갑론을박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워낙 악마 학살자가 저지른 일이 크다 보니, 아무리 두둔해 보려 해도 소신 발언 의원 쪽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의원들의 성토가 격화일로를 걷던 와중, 아도니스가 손을 들었다.
“그만, 다들 진정하시지요.”
말소리가 멎고 모두가 아도니스를 주목했다.
“지금은 절대 저희끼리 분열해선 안 될 시기입니다. 걸림돌들이 싹 사라져, 갈렌타나와 관할령 일대를 거머쥘 순간이 목전에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편을 가르고 싸우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적들이 가장 바라는 일일 겁니다.”
““…….””
“다만, 이번 일은 큰 실책이 분명하니 누군가 책임을 지긴 져야겠지요. 그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리고 우려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조치하도록 하지요.”
대체 어떻게 조치할 거냐고, 저런 괴물을 어떻게 막을 거냐고 묻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아도니스는 손을 휘휘 내저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목전에서 그런 일을 겪었으니 다들 놀라신 건 이해합니다. 저희는 전장에 나가 싸우는 전사들이 아니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그렇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들 밑에 어떤 군세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군세를 이끄는 자가 바로 누구입니까?”
의원들은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아도니스가 기세를 타 말을 이어 나갔다.
“게다가 아곤은 바로 저희의 앞마당입니다. 저희가 그곳에서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모든 마실 물과 끼니에 독을 푸는 것도, 가진 걸 죄다 털어버리는 것도, 군세의 전사들을 전부 풀어 포위하는 것도 어렵진 않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위험한 건 악마 학살자겠습니까, 아곤의 성난 뿔이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악마 학살자가 심어놓은 공포심은 쉬이 휘발되질 않았다. 이미 비토리오처럼 당한 전례도 있지 않던가?
아도니스는 심호흡을 하고는 결연하게 말했다.
“제가 아곤에 먼저 가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참사관과 후원자들의 협조를 얻어, 악마 학살자를 제거하도록 하지요. 아무리 그만한 초인이라도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함정을 파서…….”
의원들은 힐끔대며 눈치를 살피다 아도니스의 결단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자기들은 무서워서 못 할 일을, 제 완장 지키는 데 눈 돌아간 놈이 대신 해준다는데 독려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일레니아라 불리는 여인,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런 이름도 없는 잊힌 신의 사제는 비틀대는 걸음걸이로 갈렌타나의 밤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러다 암흑가의 눈길조차 닿지 않는 으슥한 창고 앞에 이르러서는 멀쩡한 척을 했다.
안대를 한 외눈박이 남자가 나무 상자에 걸터앉아 창고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는 천벌의 고통을 내색하지 않는 일레니아를 보곤 빈정거렸다.
“아주 위풍당당하시군. 그래, 뭐……. 밤까마귀 분파를 멸하고, 멋대로 성유물을 모으던 의원을 제거한 건 확실히 칭찬받을 만한 일이지.”
“…….”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무모한 짓을 했더군. 설마…… 그 전사에게 우리의 정체를 밝히고 진실을 말해 줄 줄이야. 그건 잘못하면 너 혼자 천벌을 받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어.”
외눈박이의 한쪽 남은 눈이 첨예한 빛을 발했다.
“만일 저 ‘천공에 떠오른 광륜’이 계속 네 자취를 추적해 왔다고 생각해 봐라. 밤이 되도 해가 중천에 떠 있을 테고, 엘가 교단이 그 괴이한 이변의 원인을 좇아 사냥개들을 무더기로 풀었겠지? 어쩌면, 놈들이 또다시 우릴 찾아 절멸시킬지도 모를 위험한 도박이었단 말이다…….”
일레니아는 남자와 말을 섞지 않았다. 어차피 그 전사의 신뢰를 얻는 게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설명해 봤자 납득하지도 못할 터. 그래서 그냥, 수북한 망국의 은화들을 보여주고 그중 한 닢을 튕겼다.
팅!
그런 일은 안 일어났고 이만한 성과를 올렸으니, 입 다물고 어서 들여보내 주기나 하란 의미.
수많은 성유물에서 흘러나오는 성력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온몸을 전율케 할 정도였다. 이윽고 남자는 자기가 졌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일단은 들어가라. 변명을 해도 나에게 하는 건 의미 없지. 총대주교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
은화를 회수하고 남자를 지나쳤다. 창고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어둠이 아닌, 공간을 왜곡한 검은 구멍이 그녀를 맞이했다.
들어가기 전 슬며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또다시 그 전사의 얼굴을 볼 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사명을 마친 잊힌 신의 사제는,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듯 검은 구멍 너머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