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96)
96화. 투기장의 제왕 (3)
아곤은 황량한 땅이다.
굳은 발가죽처럼 쩍쩍 갈라진 땅. 숲은커녕 풀 한 포기도 드물다. 강은커녕 우물 하나 찾기도 힘들다. 풍요로운 초원 지대에 둘러싸여 있어 유독 더 메마르고 황폐하게 느껴지는 황무지였다.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다. 그렇지만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든 이래, 사람들은 이곳에 관심을 두질 않았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비옥한 땅이 지천에 널려 있었으니까. 만인에게 버려진 황무지는 그렇게 오래도록 길고 쓸쓸한 낮과 밤을 지샜다.
허나 이젠, 저 모든 이야기가 과거의 사담에 불과해졌으니…….
현재, 아곤은 동맹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말이 좋아 네 번째지, 참사회가 있는 대도시들을 제하면 사실상 가장 큰 도시가 된 셈. 두터운 토벽 건물이 겹겹이 늘어선 도시는 휑뎅그렁했던 황무지의 기억을 완전히 잊었다. 중심가부터 가장 변두리에 있는 빈민가까지, 어딜 가나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게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생육의 은총이 비껴간 이 도시가 이렇게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롯이 하나뿐이었다.
투기장.
대륙 제일의 규모를 자랑하는 피의 오락장이 세워졌기에.
그 명망 높은 건축물이 바로 일행의 눈앞에 있었다. 던컨은 쉴 새 없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어떻게 사람이 이런 걸 만들었는지……. 두 눈으로도 보고도 믿기질 않는구먼요…….”
“…….”
카딤도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언뜻 봐선 현실의 콜로세움과 비슷한데, 그보다도 훨씬 더 크고 화려한 모양새였다. 규모는 하늘을 담아 마시는 거신의 술잔처럼 웅장했고, 대리석 석재로 된 외벽에는 격렬히 전투를 벌이는 검투사들이 세밀하게 부조되어 있었다. 어떤 놈이 지었는진 모르겠지만 돈지랄 좀 했겠군.
과거에 이런 건축물을 본 기억은 없었다. 그는 아곤을 연고지로 둔 금발의 의원에게 물어보았다.
“더럽게 크군. 이건 언제 지어진 것이더냐.”
“……완공된 지는 한 백 년 정도 됐을 겁니다. 처음 계획을 구상하신 건 레밀리온 님이신데, 공사에 착수하고 완성하기까진 시간이 훨씬 더 소요됐지요.”
“그런데 왜 하필 이런 데 지은 거지. 계획을 세웠을 땐 아곤이 황무지가 아니었나?”
“예? 아, 그건……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군요. 아곤이 예전엔 황무지가 아니었단 얘기를 언뜻 들어본 것 같긴 한데…… 저는 아무래도 역사가가 아닌지라…….”
“여기가 연고지라 하지 않았나.”
“…….”
“애향심이 부족하군.”
아도니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면면에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했다.
명색이 의원인데, 관광 안내원 노릇이나 하다 면박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단 호위를 빙자한 위협을 받고 있다는 점이 더 컸다. 자신이 인질로 잡혀 있으니 이제 악마 학살자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수작은 원천차단되었다.
‘제기랄, 어떻게든 일정이 끝나기 전에 따돌려야 하는데…… 당최 빠져나갈 구석이…….’
그렇다고, 이자를 정말 아곤의 성난 뿔과 만나게 할 순 없었다. 만에 하나 아곤의 성난 뿔이 죽는다면, 군세는 대번에 머리 잃은 짐승 꼴이 된다. 그래서는 결코 갈렌타나 관할령을 장악하고 외부 세력에 맞설 수 없었다.
게다가 극소수의 의원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금 아곤의 성난 뿔은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중심 악마와 맞서다가 꽤나 큰 부상을 입었다고…….
“어엇, 의원 나리! 저 인파는 무엇입니까요? 왜 저기에 저렇게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답니까?”
아도니스는 픽, 코웃음을 칠 뻔했다. 그래, 이젠 저 콩알만 한 짐꾼까지 날 안내원 취급하는 건가……. 의원 체면이 말이 아니로군.
한데 던컨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아도니스는 이내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발코니처럼 툭 튀어나온 외벽의 구조물 아래, 열광에 차 함성을 지르는 무수한 사람들.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악! 나와라! 나와라!!”
“나와라! 나와라!! 나와라!!!”
저긴 투기장의 챔피언이 정기적으로 시민들에게 얼굴을 비추는 자리였다.
그리고 지금 투기장의 챔피언은…… 아곤의 성난 뿔이었고.
“금일 경기에 참가하는 검투사들을 소개하는 노대입니다. 충분히 구경하셨으면, 이제 슬슬 가시죠. 일단 저쪽으로 가서 중요한 후원자 한 분을 먼저 만나봐야 할 것 같군요.”
아도니스는 당황을 감추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이후 자연스레 발길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허나 그 훌륭한 연기가 무색하게, 뒤에서 이런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곤의 성난 뿔! 아곤의 성난 뿔! 아곤의 성난 뿔!”
“동맹을 구한 영웅! 악마의 창궐을 끝낸 종결자!! ’불굴의 군세’를 이끄는 선봉장!!!”
“위대한 챔피언이시여! 오늘은 부디 그 존안을 비춰주소서!!”
“…….”
망했다.
아도니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허망하게 눈을 깜빡였다. 카딤의 입매가 비뚜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마침 잘됐군. 그놈도 오늘 경기에 참가하나본데.”
“…….”
“시간 끌 것 없이 여기서 만나고 가면 되겠군.”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질대는 아도니스.
암석처럼 갈라진 야만인의 다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노대는 꽤나 높았으나 안심할 순 없었다. 그는 이자가 30미터에 이르는 갈렌타나의 성벽도 가뿐히 넘어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유사시를 대비해, 신호하면 어떻게든 저지하라고 호위로 온 전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저들만으로 이 괴물 같은 용병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만……. 아도니스는 제발 아곤의 성난 뿔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만을 속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원했다.
천만다행으로, 노대에는 끝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뭐야, 오늘도 안 나오는 거야……?”
“에이, 또 공쳤구만……. 끼니도 거르고 기다렸는데…….”
“벌써 며칠째냐! 비싸게 굴지 말고 이젠 좀 나와봐라, 아곤의 성난 뿔!”
“쉿! 입조심하게, 이 사람아……. 저기 아탈라인들 서 있는 거 안 보이는가?”
“……헙!”
인파는 저마다 실망에 찬 불평을 읊조리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아마도 아곤의 성난 뿔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게 하루 이틀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 연유를 짐작하긴 어렵지 않았다. 아직도 부상을 다 치유하지 못한 모양. 아도니스는 놀란 가슴을 겨우 쓸어내리며 애매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하, 역시, 바빠서 나오지 못하는 것 같군요……. 그, 모쪼록, 유감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저쪽의 저택으로…….”
“…….”
카딤은 대답 없이 얼굴을 딱딱히 굳힌 채 텅 빈 노대를 응시했다.
*
아곤의 어느 대저택, 호화로운 응접실.
금사 양모옷을 걸친 뚱뚱한 사내가 울그락불그락 터질 듯이 혈색을 붉혔다.
“그러니까, 오늘도 내 호출을 무시했다고?”
“……그, 그렇습니다, 대단주님.”
“이렇게 계속 멋대로 굴면, 후원을 끊을 수도 있단 얘기도 전했나?”
“……예, 다른 전사들에게 똑똑히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무시하고 안 왔다는 말이지? 내 도움이 아니었으면 챔피언 딱지 한 번 못 달았을 놈이? 동맹을 구한 영웅이라고 추켜세워 주니까, 제가 뭐라고 된 줄 알고, 팔뚝 좀 굵었다고 옛 은혜는 싹 잊고, 감히, 어?!”
쾅 – !
보석 반지에 파묻힌 피둥피둥한 주먹이 탁상을 내리쳤다. 위력은 대단찮아도 진노한 감정만큼은 똑똑히 전해졌다. 시종장은 불똥이 튈까 싶어 넙죽 엎드렸다가, 눈치껏 인사를 올리고는 부리나케 달아났다.
쾅, 쾅 – !
“제기랄…… 푸우, 푸우…….”
사내는 두어 차례 더 주먹을 내려쳤다. 그러고도 분이 가라앉지 않아 거칠게 숨을 씩씩댔다.
만일 아곤에서 제일 영향력이 큰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답할 터였다. 당연히 아곤의 참사관과 그 보좌관들 아니냐고.
그건 오답이었다. 아곤에서 공적인 권력보다 더 중요한 건 ‘투기장’, 그 자체에 대한 영향력. 그러므로 아곤의 사정에 능통한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이 씩씩대고 있는 사내의 이름을 꺼낼 터였다.
유빅 아그라멘두스.
뭇 사람들이 부르는 별명은 ‘투기장의 제왕’.
누구보다 많은 용병과 노예들을 거느린 용병단주이자, 투기장 지분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대부호였다.
그 대단한 대부호는, 손수 찬장에서 오우거 뼈로 담근 독주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홧홧하게 식도를 따라 미끄러지는 기운이 화를 누그러뜨리고 정신을 일깨웠다. 붉게 달아올랐던 혈색도 도리어 멀쩡한 빛깔로 변했다.
유빅은 더 이상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게 사고했다.
‘아곤의 성난 뿔…… 너무 커 버렸어. 이젠 내 힘으로 제어가 불가능하다.’
‘아곤의 성난 뿔’은 말할 것도 없이, 그가 키운 상품 중 최고로 뛰어난 걸작이었다.
이 전설적인 챔피언은 유빅의 아낌없는 후원 아래 자라나, 언제나 전석 매진과 암표상의 발족을 보증하는 흥행의 화신이 되었다. 한창 도전자들을 쓰러뜨릴 때만 해도, 아곤의 성난 뿔은 투기장이 망하는 날까지 계속 그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다 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아곤의 성난 뿔은 챔피언,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불굴의 군세’라 이름 붙인 자신만의 세력을 꾸렸고, 악마의 창궐을 막았다. 길바닥의 부랑아들부터 대도시의 의장까지, 그 업적에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그를 키워 낸 후원자라 해도 동맹을 구한 영웅에게 검투사 활동을 지속하길 강요할 순 없었다.
문제는 아곤의 성난 뿔이 은퇴하는 순간, 투기장 수익이 단숨에 곤두박질칠 거란 점.
‘그러니까, 빨리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의논해봐야 하는데…….’
아곤의 성난 뿔은 벌써 며칠째 은거하고 호출을 무시하고 있었다.
예전엔 돈줄로 협박하면 효과가 직방이었다만, 이젠 다른 돈줄들이 생겨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도 힘들었다. 더 확실한 다른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건 앙심을 크게 살 테니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둬야 하고…….
유빅은 이를 부득, 갈고는 하릴없이 홀로 대책을 골몰해보았다.
‘은퇴는 불가피하겠지. 그렇지만, 뻔한 은퇴 경기로 한탕 바짝 벌어먹고 마는 건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발상이야. 뒤를 이을 새로운 상품의 탄생이 필요해. 녀석이 사라져도 계속 투기장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그러려면 반드시, 은퇴 경기에서 아곤의 성난 뿔이 패배해야 하는데…….’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출조차 무시하는 저 고고한 영웅이 승부 조작 제안을 받아들일 리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무패의 챔피언을 정당하게 꺾을 만한 자가 있을 리도 없었고…….
일단 떠오르는 이름들이나 되뇌어 보았다. ‘북부의 창’ 루마크, ‘그물 포식자’ 론, ‘운타나의 오우거’ 올가딘, ‘비열한 사냥꾼’ 말케스, 토메르크, 페룬, 발드로노스…….
하나하나가 뛰어난 상품성을 입증한 쟁쟁한 검투사들이었다. 개중에는 현재 ‘불굴의 군세’에 속한 전사도 있었고. 그러나 그들조차도 아곤의 성난 뿔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아쉬운 대로 일 대 다수로 싸우거나, 몰래 꼼수를 부려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중…….
문득 쐐기처럼 머리에 박히는 이름이 있었다.
황금 가도에서 악마들의 시체로 산을 쌓았다는 용병.
한동안 아곤 전역에 소문이 자자했다. 비록 중심 악마를 처치하진 못했으나, 아곤의 성난 뿔만큼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는 바로 그…….
“대단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갈렌타나 참사회에서 온 아도니스 의원입니다!”
“……?”
아도니스라면 유빅이 후원하는 아곤파의 젊은 의원 중 하나였다. 갈렌타나의 일로 바빠서 당분간은 이쪽에 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갑자기 방문을……?
의아해하며 두툼한 턱을 쓸던 유빅은 시종장에게 일단 손님을 들여보내라 명했다.
*
동공이 팽창했다. 콧구멍이 우므러졌다. 목젖까지 늘어진 턱살이 푸르르 떨렸다.
방문객은 아도니스, 한 명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유빅은 흉악한 기세를 발하는 거한을 흘끔 내다보고는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니까 저자가…… 바로 그 소문의 ‘악마 학살자’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대단주님.”
“어째서…… 저자가 자네와 동행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아곤에 찾아온 이유는 대체 무엇이고?”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간만에 문안 인사를 드릴 겸 찾아왔고, 저분은…… 아곤의 성난 뿔과 모종의 문제가 있는데, 그를 ‘생사를 가르는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
“다른 방식이 아니라, ‘생사를 가르는 방식’으로요.”
아도니스는 일부러 강조하여 두 번 말했다. 빨리 일이 터지기 전에 막아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빅은 아도니스가 기대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유빅은 용병들을 불러 제압하는 대신, 카딤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육신은 둔하고 늘어졌어도 사람 보는 눈만큼은 아곤에서 그를 따라잡을 자가 없었다.
한눈에 봐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 최소한 루마크나 페룬 이상이고,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유빅의 눈동자에 서서히 번뜩이는 이채가 어렸다.
카딤도 퉁퉁하게 살찐 부호를 무심하게 훑었다. 저자를 썰면 고기가 몇 접시나 나올까, 하고 생각하며.
아무리 적게 잡아도 대접 열 개 이상은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방은 덜어내고 살코기로만 채운다면, 부피에 비해 양이 훨씬 적을 것 같았다. 내장까지 빼면 아마 대접 한 개 채우기도 벅찰지도 모르지.
“…….”
“…….”
그렇게 서로를 가늠하는 시간이 지나고.
이윽고, ‘투기장의 제왕’은 이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입이 찢어져라 미소 지었다.
“이보게, 자네…… 혹시 검투사 해볼 생각 없나?”
아곤의 성난 뿔을 처음 만났을 때를 제하면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최고의 상품을 찾았을 때만 보이는 미소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