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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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당들 003화
2. 눈을 뜨다(1)
어, 뭐야.
놀이동산? 나 왜 여기 있지?
“삼초온!”
뒤에서 들려오는 사랑스러운 목소리.
갑작스레 적막이 깨어지자 나는 눈 물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그림이 프린팅된 티셔츠에 청치마를 입은 소녀가 깡충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재밌었냐?”
“어, 진짜 개쩔었어! 사진은? 찍었 어‘?”
“여기.”
내가 깨진 스마트폰을 내밀자 지원 이는 쨍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푸하학, 이게 뭐야! 삼촌 수전증 이야?”
녀석은 방글거리며 사진을 넘겨보 았다.
“와, 진짜 못 찍네. 삼촌도 아저씨 다 됐구나. 센스가 완전 죽었어.”
“야, 아저씨라니. 스물셋이 어떻게 아저씨야?”
“하아, 삼촌. 나이가 중요한 게 아 니야.”
“그럼?”
내 물음에 지원이는 익살스러운 표 정을 지어 보였다.
아주, 누나를 쏙 빼닮아서 가증스 럽기 그지없구만.
“당연히 생긴 게 중요하지!”
“야, 나 정도면 동안이거든? 요즘 도 술집 가면 민증 검사해.”
“일부러 립서비스하는 거지. 삼촌 은 그런 것도 몰라?”
나와 지원이는 폴리스라인을 지나 쳐 벤치에 걸터앉았다.
녀석은 제 종아리를 주무르며 내게 턱짓을 했다.
“삼촌, 저기 츄러스 판다.”
“•••근데?”
“나 배고팡.”
“팡 같은 소리 하네. 팡팡 처맞고 싶니?”
“아 빨리이!”
“설마… 사 오라고?”
“히히.”
“아저씨라고 후려치더니 이젠 자연 스럽게 시켜 먹네. 이팔청춘인 네가 사와.”
“아, 힘들단 말야. 이쁜 조카한테 그 정도도 못 해줘?”
녀석의 성화에 나는 결국 일어나 가게로 향했다.
불이 꺼진 가게에서 츄러스가 나오 길 기다리는데….
와, 버터구이오징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건 못 참지.
“야, 한지원! 오징어 먹을-”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보았다.
당연하게도, 벤치엔 지원이가 없었 다.
“어.”
아무도 없던, 텅 비어 있었어야 할 그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
“어어?”
낯익은 외모의 소녀는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과 물방울이 세차게 얼 굴을 두드렸다.
••바다 냄새?
나는 코끝을 스치는 짠 내에 퍼뜩 눈을 떴다. 시야 가득 들어오는 거친 바다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아이씨, 놀래라!”
가까이에 있던 험상궂은 인상의 선 원이 돛을 당기며 으르렁거렸다.
“형씨! 다치기 싫으면 엉덩이 붙 여!”
“네, 네?”
나는 그제야 내가 서 있는 곳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배 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커다란 돛이 두 개나 달린 배였지 만 갑판 위엔 온갖 잡동사니와 자리 를 채운 상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 어 보였다.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나 에게 선원이 다시금 고함을 질렀다.
“앉으라고! 안 그래도 어지러워 죽 겠구만!”
“네? 아— 네, 네!”
나는 어버버 거리면서도 선원의 검 게 그을린 우람한 어깨를 곁눈질했 다. 그의 험상궂은 인상과 거친 어 조가 나를 절로 주저앉혔다.
자리라고 해봐야 짐 더미 사이에 난 조그마한 틈에 불과했지만, 어떻게든 엉덩이를 비집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축축한 물기운이 전신에 엄습하니 절로 이가 딱딱거린다.
뭐야, 시X. 여기 뭐야?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윽박을 질러 대는 통에 일단 앉긴 했는데…… 대 체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사방을 살피며 상황을 파악하 려 노력했다.
이미 파악한 대로 나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 그리고 그 위를 항 해하는 배의 갑판에 앉아 있었다.
내 돌발행동에도 갑판의 선객들은 눈길 한 번 준 게 다였고 선원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바빠 보였다.
그러고 보니 파도가 어찌나 강한지 배가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만 같았다.
어, X발, 나 멀미하는데…… 어?
난 원래 한강 유람선도 타지 못할 정도로 멀미가 심했다. 근데 어째선 지 지금은 멀쩡하다.
차가운 빗방울과 몸을 싸늘하게 만 드는 바닷바람, 그리고 귀를 찌르는 온갖 고성까지, 감각은 그 어느 때 보다 날카로웠지만, 이상하게 어지 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이게 뭐야……
얼굴의 물기를 훔치다가 퍼뜩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분명 내가 손을 올려 얼굴을 쓸었 는데 마치 남의 손으로 남의 얼굴을 만진 듯한-너무나 낯선 감촉이 느 껴졌기 때문이다.
낯선 감촉은 얼굴과 손의 변화에 기인했다.
일단 코가 너무 높았고, 손은 크고 거칠었다. 고등학생 시절 주방에서 아르바이트하느라 텄던 손이나 혹한 기 훈련 동안 건조해졌던 손보다 몇 배는 거칠었다.
“이거, 이거 뭐냐고 X발……
다시 내려다보니 몸도 이상했다.
원래 내, 그러니까, 김승수의 몸을 떠올리자면-평균을 간신히 넘는 키 에 앙상한 팔다리, 툭 튀어나온 술 배까지-한마디로 전형적인 사무직 아저씨의 체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몸을 뒤틀 때마 다 전신에 틀어박힌 단단한 근육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팔다리는 놀랄 만큼 길쭉했고, 허 리엔 군살이 하나도 없었다. 놀라 스스로를 더듬는 손길에 대리석 같 은 가슴근육이 느껴졌다.
복장도 이상했다.
상, 하의는 가죽 재질이었는데, 바 지는 그나마 가공을 거친 것 같았지 만, 상의는 생가죽으로 만든 듯 거 칠었다.
가슴과 어깨엔 줄을 느슨하게 풀어 둔 철제갑옷이 매달려있었다.
발치엔 천에 둘둘 말린 칼 한 자 루가 뒹굴고 있었는데, 아까 일어나 며 내가 떨어뜨린 물건 같았다.
허리께가 걸리적거려 내려다보니 머리통만 한 방패가 허리띠에 매달 려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뭘 입고 있었지?
나는 애써 침착하며 기억을 짜내기 시작했다.
일 년 가까이 공들여 키운 혈기사 ‘피케신청쪽지요’가 트릭스터에게 죽 었다.
핵이든 버그든 명백한 치팅플레이 에 나는 놈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트릭스터는 떠났고, 나는 화를 삭 이며 밥을 먹은 후 다시 자리에 앉 았다.
홧김에 만든 1레벨 혈기사, ‘핵쟁 이새기야’를 플레이했다.
무난하게 챕터 1을 클리어하고 챕 터 2로 향하는 배에 태운 뒤, 게임 을 종료하고 잠들었다…….
‘잠깐만, 배에 태워?’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이 부르르 떨렸다.
주변의 풍경, 변한 내 몸과 복장, 머릿속에 흘러드는 희미한 지식 들……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인 뇌 가 순식간에 연산을 마쳤다.
그리고 흔히들 말하는 ‘감’과 한 조각 남아있던 차가운 이성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런.”
올해 서른, 직장 생활 3년 차 청 년, 혹은 아저씨인 내가…….
“씨 X……
다크월드의 하드코어 캐릭터, 혈기 사 ‘핵쟁이새기야’가 된 것이다.
하루 동안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쓴 후에야 나는 눈앞 에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굶주림을 달래려 가방인지 보따린 지 헷갈리는 주머니에서 굳은 흑빵 을 꺼내어 빗물에 적셔 씹었다. 그 러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다크월드의 주 무대는 두 갈래로 나뉜다. 캠페인과 익스페디션.
익스페디션은 지옥 같은 이차원을 떠돌며 아이템 파밍을 하는 고레벨 컨텐츠이고, 캠페인이 바로 게임의 스토리를 진행하는 컨텐츠였다.
다크월드의 캠페인은 사실상 튜토 리얼인 챕터 1을 포함하여 총 열 개의 챕터로 구성된다.
그 캠페인 동안 플레이어는 미들월 드가 다크월드에 물들지 않도록 사 투하는 여정을 벌인다.
그리고 내가 타고 있는 배가 바로 다크월드 캠페인 챕터 1과 챕터 2 를 잇는 통로였다.
짧은 영상과 함께 여정이 생략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비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항해한다는 것이 게임과 현 실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X발.”
얼굴의 물기를 털어낸 나는 한숨 섞인 욕설을 뱉으며 무릎 사이로 이 마를 파묻었다.
‘왜 하필이면 다크월드냐고……
다크월드의 세계관을 한마디로 표 현하자면, ‘꿈도 희망도 없는 막장’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왕들은 전쟁을, 영주들은 내전을 벌인다. 교회는 타락했으며 도적, 괴 물, 언데드들이 각지에서 창궐하고 있었다.
미래는 더 막장이 된다. 다크월드 를 포함한 온갖 이차원들이 얇아진 차원 경계를 허물고 이곳, 미들월드
를 집어삼킬 예정이니까.
“후우.”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에 눈을 감 고 있기를 잠시, 아까 전 억지로 잠 이 들었을 때 꿈속에서 보았던 광경 을 떠올렸다.
익숙한 텍스트와 기호들. 오해할 여지 없이 스탯과 스킬을 표시하는 캐릭터 시트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장비 창은 나타 나지 않았지만, 캐릭터 시트만으로 도 내가 지금 다크월드에 들어와 있 다는 확신을 굳히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스탯과 스킬의 상태, 그리 고 손에 끼워진 반지까지 확인한 바 였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나는 지금 다크월드 속의 캐릭터가 된 것 같았 다. 챕터 1을 클리어한 10레벨 혈기 사 ‘핵쟁이새기야’가 된 것이다.
하, 기왕 게임 캐릭터가 될 거였으 면 ‘피케신청쪽지요’로 해주지.
‘피케신청쪽지요’는 캠페인을 성공 적으로 마무리하여 대륙은 물론 전 차원의 구원자로 대우받는 영웅이었 다.
게다가 캠페인 내에 등장하는 적들 의 수준으로는 절대 목숨을 위협하 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캐릭터였다.
나는 ‘피케신청쪽지요’가 남긴 유 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반지를 보니 자연히 ‘피케신청쪽지요’를 죽인 원 소마법사가 떠올랐다.
트릭스터. 정황상 나를 이곳에 던 져 버린 것으로 의심되는 아재다.
사실 그 새끼가 아재인지 아지매인 지도 알 방도가 없었다.
실제로 만나본 건 아니고, 그저 게 임상으로 만나며 나이와 성별을 유 추했을 뿐이니까.
어쨌든 숨겨진 퀘스트니, 초대장이 니 운운한 것을 보아 분명 지금의 사태와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뭍이 다!”
“사우스하버다!”
뱃전에서 터져 나온 고함에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이 분분 히 엉덩이를 떼는 모습에 나도 덩달 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비바람이 그치고, 검은 먹 구름이 한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찬란한 태양 아래, 저 멀리 아름다운 항구도시가 노란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챕터 2의 시작이자 밀라놀 왕국의 최남단인 ‘사우스하버’였다.
“와-”
나는 내가 처한 상황도 잊고 감탄 사를 내뱉었다.
혈기사의 젊고 건강한 눈은 먼 거 리에도 불구하고 사우스하버를 선명 히 비춰주었다.
갈색 벽돌로 높이 쌓은 성곽, 바다 를 향해 길게 뻗은 부두, 곳곳에 정 박한 커다란 배들, 알록달록한 색깔 의 지붕들, 개성 있는 옷차림의 상
인과 사슬갑옷을 걸친 병사들, 처음 보는 생김새의 가축들…….
대학 졸업 직후 오 개월에 걸쳐 세계여행을 다녀온 나였지만, 사우 스하버의 풍경은 그 어느 것과도 비 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웠다.
끝없는 해안선의 니스, 야경이 아 름다운 암스테르담, 사람들이 붐비 던 바르셀로나 등 지구의 그 어떤 해안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풍경 에 나는 매료되고 말았다.
자동차 할부금, 월세, 지긋지긋한 회식, 꼰대 같은 팀장과 무능력한 과장 등- 지옥 같던 서울에서의 삶 을 탈출했다는 해방감이 들 정도였 다.
그리고 강건하기 그지없는 육신과 피를 타고 끓어오르는 미증유의 힘 은 내 마음 한구석에 숨겨두었던 모 험심이라는 것을 살며시 꺼내 들게 끔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행복한 감상은 채 오 분도 되지 않아 산산이 깨어지고 말 았다.
쐐애액.
“ 응?” 어디선가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퍽- 하는 소름 끼치 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별생각 없이 소리가 난 곳으로 눈 을 돌린 나는 상상도 못 한 풍경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기엔 목에 화살이 박힌 남자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륵••••♦•
“뭐, 뭐……
화살은 남자의 목을 꿰뚫고도 힘이 남았는지 난간에 단단히 틀어박혀 있었고, 남자는 목이 꺾인 채 뭐라 고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올려 피를 머금은 화살 대를 더듬었지만, 그것을 뽑지도, 부 러뜨리지도 못하고 의미 없는 손짓 만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남자의 입을 내려다보 며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내 기 위해 노력했다.
“해적이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한 선원과 어 깨를 부딪쳐 넘어질 때까지 나는 그 남자의 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의 유언을 들을 수 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