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5)
나의 악당들 005화
2. 눈을 뜨다(3)
소녀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곁눈질하곤 허리춤에서 유리병 을 집어 던지며 외쳤다.
“정신 차려, 이 얼간아!”
“어, 어억!”
간신히 받아든 유리병은 붉은 액체 로 가득 차 있었다. 쇠테를 두른 병 과 그 빛깔이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상처 치료의 물약. 다시 말해, 포 션이 었다.
내가 멍하니 그 유리병을 보고 있 자, 어느새 곁까지 다가온 소녀가 뒷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빡
“컥.”
“죽고 싶은 거 아니면 빨리 일어 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잽싸게 병뚜껑을 열었다. 그렇게 포션을 들 이켜자, 전신의 통증이 줄어들고 흐 르는 피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 크으••••••
화살을 셋이나 달고 있는 채였지 만, 포션의 효과인지 아니면 원래 육체가 튼튼했던 탓인지 어찌어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넘어지면서 허리춤의 고리가 풀어 진 덕에 방패도 주워들 수 있었다.
“후우, 후!”
고작해야 머리통만 한 방패였지만 어쩐지 자신감이 솟구쳤다.
이미 피를 보고 죽음의 고비를 넘 긴 탓인지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 다.
상처를 통해 흐르는 피가 전신을 뜨겁게 덥히는 기분이었다.
마음을 가다듬는 동안, 내 앞에서 칼바람을 쏘아대던 원소마법사가 잇 소리를 내었다.
“이익!”
소녀가 이를 악물며 완드를 휘둘렀 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벌써 마나가 동난 건가? 열 번도 안 쓴 것 같은데?
칼바람은 2랭크 스킬이긴 하지만, 바람계열의 주문답게 마나 소모량이 적은 편이었다.
15레벨 원소마법사면 한 번에 열 댓 번은 너끈히 쓸 텐데?
내 의문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 았다. 짐 더미나 돛대, 오크통 따위 의 장애물 뒤에 숨어있던 해적들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끝났나?”
“그래, 끝났어!”
“덤벼들어! 죽여 버리라고!”
원소마법사가 해적들을 열 명 가까 이 쓰러뜨렸지만 배 위에는 아직도 많은 수의 해적들이 남아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소녀는 내 쪽으로 뒷걸음치며 소리를 질렀다.
“시간을 끌어! 궁수들은 내가 처리 했으니까!”
“뭐?”
내가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쏘아 붙였다.
“정신 차리고 포션값 하라고!”
•••이 녀석, 혹시 날 고기방패로 삼 으려고 포션을 준 건가?
근데, 내가 고기방패 노릇이나 제 대로 할 수 있을까?
“후우, 후우.”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흘려보내며 호흡을 골랐다.
어차피 도망칠 구석은 없다. 여기 서 살아남을 방법은 오직 하나, 싸 우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물러나고 싶 은 마음을 간신히 이겨냈다.
소녀의 등을 보니 문득 조카인 지 원이가 떠올랐다. 덕분에 한 걸음을 내디뎠다.
어른으로서의, 남자로서의 자존심 이 힘겨운 발걸음을 떼게 했다. 두 번째 걸음이었다.
해적들이 나보다 덩치가 훨씬 작다 는 사실 역시 용기를 돋워주었다.
그렇게 세 걸음을 옮기고 나니, 나 는 소녀 앞에 서 있었다.
“으아악!”
기세를 더하기 위해 기합을 내질렀 는데, 어쩌면 비명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기합을 지르니 정신이 맑아 지고 심장박동이 커지는 기분이었 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피가 내 감 각 속에서 선명한 존재감을 발했다.
그 존재감을 느끼곤, 문득 이 몸이 가진 능력에 대해 떠올렸다.
그래. 나, 혈기사였지? 그 깨달음과 함께 본능이 내 의지 를 이끌었다. 나는 강렬한 기대감을 담아 피에서 비롯된 본능에 정신을 집중했다.
심장에서 뿜어진 피가 내 의지에 따라 꿈틀거렸다.
마치 전신에 손가락이 돋아난 것 같은 오묘한 감각. 그것은 비교할 바 없이 생소한 경험이었다.
내 의지가 명령하는 바에 따라, 화 살이 꽂힌 곳에서 흘러나온 피가 문 어 다리처럼 뭉쳐 꾸물거리기 시작 했다.
그렇게 꾸물거리며 뻗어 나온 피는 내가 쥔 펄션에 엉겨 붙었다. 검붉 은 피가 하얗게 빛나는 칼날을 코팅 하듯 감싸 안았다.
칼날은 빛을 빨아들이는 듯 요사스 러운 색깔을 내었다. 그리고 점차로 맥동하며 날은 선홍빛, 등은 검은빛 으로 물들었다.
피의 칼날.
1랭크 스킬, ‘피의 칼날’은 혈기사 의 가장 기본이 되는 공격 기술이 다.
액티브 스킬이지만 레벨이 높아지 면 패시브처럼 습관적으로 누르는 기술이기도 했다.
자체적인 효과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랭크 스킬다운 위력이지 만, 고렙이 되면 여러 고급 스킬과 시너지를 일으켜 위력도 강해지고 다채로운 효과를 낸다.
어찌 보면 혈기사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스킬이었다.
설명은 길었지만, 피의 칼날은 눈 깜빡할 사이에 완성되었다. 흉흉한 기세로 다가오던 해적들은 내가 기 괴한 빛을 내는 칼날을 겨누자 흠칫 한 모습이었다.
“스벌, 저건 뭐야?”
“마법인가?”
잠시 머뭇거리던 해적들은 한 덩치 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저 새끼 빌빌거리던 거 못 봤어? 쫄지 말고 죽여!”
아까 내가 보인 추태가 꽤 인상적 이었나 보군.
나는 칼날 전체에 신경이 퍼진 것 만 같은 오묘한 감각에 신음하다가 불쑥 방패를 내밀었다.
깡!
방패의 중앙에 툭 불거진 쇳덩이에 해적이 휘두른 칼이 부딪쳤다. 의외 로 가벼운 감각에 오히려 당황하며 칼을 내질렀다.
XL O
피를 덧입은 펄션의 묵직한 칼날이 마치 두부를 가르듯 해적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분명 가슴뼈가 있어야 하는 부위임 에도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검을 뽑아냈 고, 그제야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 께 섬뜩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오르 는 것을 느꼈다.
“후우우.”
생소한 감각에 전율하는 도중, 또 다른 해적이 덤벼들었다.
나는 불에 덴 듯이 급하게 칼을 휘둘러 놈의 도끼를 걷어내고 명치 를 향해 발을 내질렀다.
“컥!”
배를 잡고 상체를 수그리는 놈을 향해 이번엔 칼을 내려그었다.
휘둘러진 칼날의 끝이 놈의 목 안 으로 한 뼘쯤 사라졌다가 아래로 빠 져나왔다.
놈은 목에서 피보라를 뿜으며 그대 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 썅놈이!”
옆에서 한 해적이 괴성을 지르며 창을 내질러오자, 나는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젖혔다.
카가각.
내 몸부림에도 조잡한 창날은 끈질 기게 따라붙어 흉갑을 길게 긁었다.
“크윽.”
흉갑을 긁으며 올라온 창이 목을 꿰뚫기 직전 고개를 틀었고, 볼과 귀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날 에 베이는 것은 화살에 맞는 것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들며 방패 를 내밀었지만, 이는 오히려 악수가 되었다.
차례로 덤벼들던 해적들이 내가 물 러난 공간을 점하며 한꺼번에 몰려 든 것이다.
“ Q »
실책을 알아챈 나는 통증을 억누르 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무기 셋이 한꺼번에 날아들었고, 나는 칼과 방패를 휘둘러 둘을 쳐내 었다.
까강!
10레벨 혈기사의 근력 덕에 내가 쳐낸 칼 두 자루는 손아귀를 빠져나 가 속절없이 허공을 갈랐다.
두 놈은 막아냈지만, 나머지 한 놈 이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급한 마 음에 일단 발차기를 내질렀고.
콰직.
“크악!”
놈은 내 발에 배가 걷어차이는 것 과 동시에 도끼로 내 다리를 내리찍 어 버렸다.
으으, 언뜻 무릎 아래로 허연 뼈가 보였다.
아니, 그건 둘째치고 진짜, 조온-나 아프다.
창에 베인 것보다 몇 배는 고통스 러웠기에, 나는 분노와 고통을 담아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
순간 시야가 붉어지고, 나는 아랫 배에 힘을 주며 전력으로 칼을 휘둘 렀다.
그렇게 붉은 선이 그어졌고, 해적 둘의 목이 그 선에 걸려들었다.
거친 피륙음에 이어 머리통 두 개 가 터덩-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갑판에 떨어졌다.
“흐으!”
전신을 타고 오르는 통증과 아드레 날린인지 뭔지 모를 호르몬이 비위 를 마비시킨 듯했다.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들이 피를 내뿜으며 발치를 구르고 있는데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했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들끓 는 피가 내 몸을 조종하는 것 같았 다.
“우웨에엑, 컥!”
내 발차기에 맞고 속을 게워내던 해적의 더러운 머리칼을 휘어잡았 다.
그러곤 목 아래에 펄션을 드리우자 해적은 더러운 찌꺼기들을 튀기며 무어라 사정하기 시작했다.
“흐으, 잠깐, 잠깐만! 살려줘! 살 려, 끄르륵!”
천천히 저며진 울대가 피를 내뿜기 시작하자, 나는 이를 악물고 뼈와 살을 끊어냈다.
“어, 저, 저 새끼 뭐야?”
“니기미- 화살, 누가 화살 좀 쏴!”
허둥거리는 해적 놈들을 보니 문득 우스워졌다. 이 몸을, 이 초능력을 가지고 저런 놈들한테 쫄았다니.
나는 눈을 까뒤집은 해적의 머리를 나머지 해적들에게 집어 던지곤.
쾅
갑판을 부술 듯 박차며 몸을 날렸 다.
그렇게 해적들 사이로 뛰어들곤 마 구잡이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아악!”
“싸워, 맞서 싸우라고, 커억!” 요사스러운 빛을 내는 펄션이 살과 뼈를 가를 때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 다.
해적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공포 어 린 눈빛,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주체 못 할 힘이 강렬한 쾌감이 되어 전 신을 핥았다.
나는 이 쾌감을, 우월감을, 해방감 을 견디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악!”
싸이코처럼 미쳐 날뛰는 내 활약에 해적들은 완전히 겁에 질렸다.
살아남은 너덧 명의 해적 놈들은 타고 온 조각배에 도로 몸을 싣고
도망쳐 버렸다.
생존한 선원과 선객들은 힘을 합쳐 상황을 수습했다. 뭐, 수습이라고 해 봐야 무기를 한데 모으고 시체는 바 다에 던져 버리는 정도였지만.
난 뭘 했냐고?
“우웨에엑!” 난 갑판에 길게 늘어지는 장기들을 보고 난간에 기대어 속을 게워내고 있었다.
토를 하기 위해 몸에 힘을 줄 때 마다 화살에 맞은 상처들이 피를 줄 줄 뿜어대었다.
거기에 도끼가 박힌 무릎은 뼈가 허옇게 드러날 지경이었다.
“시-히 발.”
나는 들숨마다 욕을 내뱉으며 소매 로 입을 훔쳤다.
굴러다니는 머리통과 똥을 지린 하 반신 등을 눈에 담지 않으려 애쓰며 상처를 틀어막았다.
그러고 있자니 한 선원이 다가와 붕대로 쓸 만한 천 조각을 건네주었 다. 별거 아닌 친절이 눈물 나게 고 맙게 느껴졌다. 아저씨, 얼굴 기억했 어. 꼭 갚아줄게.
나는 몸에 박힌 화살을 꺾어 지혈 대를 만들었다. 상처 위를 단단히 묶고 천을 넓게 접어 묶었다.
죽을 것같이 아팠지만, 눈앞이 흐 릿해지는 것이 출혈을 이대로 내버 려 뒀다간 진짜 죽을 것 같았다.
“썩을••••••
문득 눈물이 삐져나왔다.
나름 목숨 걸고 싸워서 해적 놈들 을 다 쫓아냈는데, 누구 하나 도와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붕대 준 아저씨는 빼고.
그건 마법 소녀, 아니, 원소마법사 도 마찬가지였다. 칼바람을 난사한 뒤 내 등 뒤에 숨은 탓에 그녀는 피 한 방울도 묻지 않은 깔끔한 차 림새였다.
그녀는 마치 연극의 관객처럼 주변 의 소란과 동떨어진 채 홀로 평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서 주웠는지 웬 털가죽 같은 걸 참나무통에 깔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곤 구경이라도 난 듯 내가 끙끙대는 꼴을 빤히 지켜보 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불편한 몸으로 어깨를 지혈하 기 위해 한참을 끙끙거리다 원소마 법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