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657)
나의 악당들 657화
74. 난투(5)
유릴은 널뛰는 가슴을 누르며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녀도 바보는 아니라, 자신이 지금 매우 위험한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없습니다, 왕녀님.”
공손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적기사는 총대주교께서 직접 파문한 흉적이며, 제 오라버니와 주종의 연을 맺었음에도 끝내 죽음으로 몰아 넣은 배신자인 걸요.”
미세한 떨림마저 잦아든 진술에 에아디나 왕녀는 옆을 흘긋 돌아보았다.
수녀원장 건너편에 앉아있던 중년의 여인은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미동도 없이 유릴을 살피고 있었다. 깜빡임 없는 눈동자에는 희미하나마 흰 서광이 스민 채였다.
“주님의 종으로서 배척해야 마땅할 악당이요, 개인적으로도 원수인데 어찌 그런 자와 연통할 수 있을까요? 하물며 제게는 그럴 만한 수단조차 없답니다.”
“……그렇긴 하죠.”
에아디나가 재촉하듯 팔걸이를 두드리자, 중년 여인이 왕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치 유릴이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처럼.
유릴은 직감적으로 중년 여인의 정체를 알아챘다.
‘심문관?’
광명교, 특히 엘 가노어 교단에서 여성 사제는 매우 희귀한 존재다. 주교급 이상 고위직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며, 왕도에서 활동하는 심문관으로 그 범위를 좁히면 여성은 단 한 사람뿐이다.
‘……파티마구나. 심문관 파티마.’
총대주교 사코의 최측근이자 엄혹한 심문관으로 이름 높은 여인이 왕녀와 함께 유릴을 찾아온 이유? 뻔하다. 심문관의 본분대로 그 권능을 이용해 참과 거짓을 판별하러 온 게 아니겠나.
그 정체를 알아챈 탓일까? 파티마의 시선이 다시금 자신에게 향하자, 유릴은 온몸이 발가벗겨진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무감정한 눈빛이 자신의 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것만 같다.
“좋아요, 그럼……. 고모님께선 적기사나, 그가 꾸미고 있는 음모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거죠?”
“……네.”
나직한 대답에 심문관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 반응을 눈치챈 유릴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몇 달 전에 이상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요.”
“이상한 이야기라면?”
“어느 문병객이, 어린 여자아이가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요. 적기사가 저를 데리러 올 거라고,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서쪽으로 갔다고…….”
“아.”
에아디나의 싸늘한 시선이 이번에는 수녀원장에게 가닿았다.
“그 건은 이미 들었어요.”
수녀원장은 난처한 듯 어색하게 입가를 움찔거렸다.
“알다시피 전쟁이니 괴질이니 해서 왕도 분위기가 조금 뒤숭숭해요. 그런 종류의…… ‘괴담’이 도는 것도 이상할 건 없죠.”
“아, 네, 그렇죠. 저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이후로 얼마쯤 영양가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중간중간 은근히 떠보는 질문도 섞여 있었으나 유릴은 끝까지 태연히 응대했다.
살아 있는 거짓말탐지기, 심문관 파티마도 침묵을 지켰다. 유릴이 말한 내용에서 거짓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하긴, 유릴로서는 애초에 숨길 만한 정보조차 없으니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별반 소득을 올리지 못한 에아디나는 내심 혀를 찼다.
‘차라리 감시 태세를 조금 늦추었더라면 적기사의 접근을 유도할 수 있었을 텐데…….’
의미 없는 아쉬움을 곱씹으며, 왕녀는 약간의 미련을 담아 툭 말을 던졌다.
“혹시 기대…… 같은 걸 하고 계시진 않겠죠?”
“예? 기대라고 하시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쭤보는 거예요.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적기사가 데리러 오는 날을 내심 바라고 계시지는 않을까, 싶어서.”
“……송구하지만, 그건 조금 이상한 질문이네요.”
유릴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적기사는 제 원수인걸요. 원수가 데리러 오리라는 소문을 듣고 기대를 품다니요?”
“음.”
에아디나는 약간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주 태연한 기색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그럴 이유는 없죠. 다만 수녀의 인생이 워낙…… 고되고 외롭잖아요? 괴로운 와중에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다 보면 완전히 헛된 망상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렇군요.”
왕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릴이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었다.
“자상하신 분. 염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다만 제게 해당되는 경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수녀원 생활이 꽤 할 만한가 보죠?”
“……그건 아니지만,”
유릴은 부자연스러운 표정 그대로 잠시 말을 골랐다.
“받아들여야죠. 제게 주어진 운명이니.”
에아디나는 고모의 쓸쓸한 기색에 딱히 동정심을 품지 않았다. 그저 심문관을 돌아볼 뿐이었다.
물론 중년의 심문관은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왕녀는 흡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릴은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수녀원장이 한 달간의 은수(隱修)를 명한 것이다.
은수는 말이 좋아 수양이지, 실상 좁다란 골방에 가둬두는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유릴의 여러 별명 중 하나대로, ‘봉쇄수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왕녀와의 대담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교단 혹은 왕실로부터 따로 지시 받은 바가 있었던 걸까. 수녀원장이 그처럼 가혹한 조치를 한 이유를, 유릴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는 너무 절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다. 고리십자가 앞에 서원한 이래, 이유 모를 고난이야 숱하게 겪은 바였으니.
다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잠시면 돼요. 10분, 아니, 5분이면 충분해요.”
유릴의 간절한 부탁에도 주임수녀는 기계처럼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유감이네요. 원장님께서 엄명을 내리신 터라.”
“간단히 지지대나 하나 꽂아두려는 건데요. 어려운 부탁은 아니잖아요.”
“자매님.”
주임수녀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유릴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자매님이 그 꽃나무를 아낀다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그깟 지지대 하나 꽂는 간단한 일까지 직접 해야만 하는 이유는 없겠지요?”
“…….”
“뜰을 관리하는 자매님들이 정성껏 돌볼 겁니다. 염려 놓으세요.”
“저는 그저,”
“자매님.”
평소처럼 엄격한 얼굴의 주임수녀가 타이르듯이 경고했다.
“꼭 원장님의 뜻에 거스르려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네? 아뇨, 그건 오해-”
“그렇다면 여기까지 하죠. 오해가 더 깊어지면 곤란하잖아요? 물론 오랜만에 참회실에 들고 싶은 거라면 계속하셔도 됩니다.”
참회실이라는 단어에 유릴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가혹한 체벌의 기억이 단숨에 그녀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저는,”
유릴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문득 눈물 두어 방울이 볼을 타고 흐르더니 턱하고 목이 메었다.
저 노골적이고 단순한 협박에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아니, 물론 두렵긴 했지만, 그보다는 분한 마음이 더 컸다. 유치한 위협에 움츠러드는 자신이, 불같이 분노를 토해내야 할 순간에 맥없이 울기나 하는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
그 초라한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주임수녀는 굳은 얼굴로 뒤돌아섰다. 그 무언의 명령에 주변 수녀들이 망설이던 차, 유릴도 휙 돌아서더니 제 발로 방에 들어섰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버린 문짝을 등지고, 유릴은 소리 없이 오열했다.
그리고 한두 시간이나 흘렀을까?
두꺼운 문 너머로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얼마쯤 평정을 되찾은 유릴은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께서 깊이 우려– —-. 아닌 게 아니라, — —지, 포로- — –니까?”
“예, 물론 – — –다만…….”
“……다가 두 분께선 — — -지 않으셨지요? — –는 단순히 학장님의 — –니다. 총대주교께서도 직접 언명하신 바…….”
“……한 말씀—-. 그러나…….”
“……고 잠시……”
문 너머 멀리서 작게 나누는 대화라 그 상세를 정확히 파악하는 건 어려웠다. 다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인이 목소리를 높일수록 그 상대인 여기사들이 곤란해하는 것 같았다.
옥신각신 이어지던 대화는 저벅거리며 멀어지는 일단의 발소리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유릴은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숨을 죽였고, 이내 막연한 바람이 실체화되어 문을 두드렸다.
“자매님, 자매님. 듣고 계시나요?”
익숙한 동료 수녀의 목소리에 유릴은 반색하여 답하고는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수녀는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며 대답을 해주었다.
“짠! 산책 시간이에요.”
“산책 시간, 이라니.”
“이안 님이 힘을 써주셨어요.”
“추기경님께서요?”
“네. 자매님이 은수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많이 안타까워하셨대요. 간단한 산책 한 번도 못 하는 신세라면 영어(囹圄)의 몸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아…….”
홍당무처럼 발갛고 긴 얼굴을 가진 수녀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조금 급한 기색으로 유릴의 손을 잡아끌었다.
“서두르는 게 좋겠어요. 호위기사들보다 먼저 돌아오셔야 하거든요. 에둘러 말을 해뒀는데, 그래도 자매님이 방에 안 계신 걸 확인하면 분명 길길이 날뛸 걸요.”
“기사님들은 어디에 가셨는데요?”
“볼고론 대성당이요. 잠깐 실례.”
수녀는 유릴에게 후드를 씌우더니 앞장서서 잰걸음을 옮겼다.
“알고 보니 그분들, 이달 들어서 ‘항병(抗病)의 세례’를 받은 적이 없더라고요? 뭐, 수녀원에서 생활 중인 근위기사들에게 그런 게 필요할 것 같지는 않지만…… 원칙은 원칙이니까요.”
수녀가 뒤돌아보며 찡긋 눈짓을 하자 유릴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수녀원장이나 주임수녀 등 관리자를 제외한 사람과 눈을 맞추고 말을 주고받는 건 근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뛰다시피 걷던 둘은 수녀원 뒤뜰로 향하는 문간에서 멈춰 섰다.
“저는 여기서 돌아가야 해요.”
“네? 그게 무슨.”
“의식용 정수(淨水)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잠시 빠져나왔거든요. 이따 방에 돌아가시면 다른 수녀가 가서 문을 잠가 드릴 거예요.”
“아, 네, 알겠어요. 정말 고마,”
수녀는 허둥지둥 감사를 전하려는 유릴의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힘내요, 공주님. 분명 좋은 날이 올 거예요.”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수녀는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
잠시 우두커니 서서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던 유릴은, 작게 심호흡하며 뒤뜰로 향했다.
‘볼고론’은 왕궁 안에 자리한 대성당으로, 평범한 걸음이면 성 토마시아 수녀원에서 20분 이상 소요되는 거리다.
‘세례에 걸리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넉넉히 1시간 이상 걸리겠지만……. 기사 분들은 일반인이 아니니까. 안전하게 30분 안에는 돌아가자.’
유릴의 결심은 바깥공기를 들이마신 바로 그 순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봄날의 저녁 바람이 시원해서, 희미한 석양 위에 뜬 달이 아름다워서, 감시자 하나 없는 자유가 너무 오랜만이라서, 담벼락 너머 점점이 켜지는 마법등의 불빛이 신비로워서…….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짧아서 더 소중한 시간을 만끽하며, 유릴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후드를 젖히고 머릿수건까지 풀어버렸다. 번쩍이는 은발이 부드럽게 풀리며 흘러내렸다.
“하아…….”
감탄하듯, 탄식하듯 소리를 낸 유릴은 선선한 바람을 즐기며 살짝 눈을 감았다.
그렇게 익숙한 산책로를 짚어가다 눈을 떴고, 헛숨을 삼켰다. 순간 유릴의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어?”
그녀가 목격한 건 작은 양벚나무 앞에 옹송그린 거대한 인영이었다.
이곳은 성 토마시아 수녀원이다. 왕도의 내성 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금역. 그런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과 마주치다니?
선 채로 기절한 것처럼 서 있던 유릴이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지르기 직전, 더 놀라운 광경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후웅.
쪼그린 인영을, 사내를 중심으로 작게 바람이 일더니 주변의 키 작은 풀들이 일제히 몸을 뉘었다. 사내는 두 조각 난 양벚나무를 접붙이듯 쥐고 있었다. 유릴의 허리 높이 어림에서 부러진 밑동에 아직 이파리가 생생한 윗동을 가져다 대고 있는 것이다.
츳츠츠츠-
무슨 조화일까? 윗동과 아랫동의 부러진 부분에서 관다발이 줄기줄기 돋아나더니 서로에게 뻗어나갔다. 그리고 이어졌다.
부러진 꽃나무는 약간의 상흔만 남긴 채 하나가 되었다. 그 기이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유릴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후우.”
사내는 어째 조마조마해하는 듯한 숨소리와 함께 슬쩍 손을 놓았다. 양벚나무가 저 홀로 우뚝 선 모습을 확인한 사내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딱 좋을 때 오셨네요.”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사내가 천천히 돌아섰다. 한쪽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운 사내를, 유릴은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혼란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젊은 사내였다.
왕도의 여느 상인들처럼 긴 코트와 청색 더블릿, 질긴 면바지 차림새였으나 장대한 체구와 단단하지만 날렵한 체형 그리고 굵은 손마디 등을 보건대 영락없는 무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무장을 하기는커녕 허리춤에 단검 하나 꽂지 않았으니 기이할 따름이다.
보기 드문 미남자라 시선을 당기는 한편, 알 수 없는 위압감 때문에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다. 낮은 목소리에 가벼운 말투, 차가운 인상에 따뜻한 미소, 날카로운 눈매에 부드러운 눈빛…….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사내였다. 그래서 유릴은 무심코 악마를 떠올렸다.
어느새 말라 버린 입술을 적시며,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
가만히 유릴을 내려다보던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흡.’
성벽을 연상케 하는 거구가 성큼 다가오는 모습은 썩 위협적이었지만, 유릴은 속으로 숨을 삼킬 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제오레다운 용기나 수녀다운 의연함의 발로는 아니었다. 그저 뒷걸음도 하지 못할 만큼 몸이 굳어버렸을 따름이다.
“유릴 공주님.”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유릴 앞에서 조심스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럼에도 눈높이가 비슷해 거의 마주 보는 듯한 형상이었으나, 사내는 지극한 예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설마. 설마? 유릴은 속으로 속삭였다.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기사 포이닉스입니다.”
그녀는 머리칼이 쭈뼛 서는 기분과 함께 비명처럼 중얼거렸다.
“……적기사?”
사내, 포이닉스는 환한 미소로 긍정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공주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혼자서, 그 누구도 모르게 상상한 장면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전, 저는, 그게-”
유릴의 떨리고 더듬대는 목소리였지만, 포이닉스는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온갖 것들이 소용돌이치며 유릴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 처음 만난 남자, 적기사의 악명, 동료 수녀들의 친절한 미소, 심문관의 얼음장 같은 시선, 에아디나 왕녀의 금빛 커틀, 어두운 참회실, 그리고, 두려움, 두려움, 두려움.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슴 한켠에 잠자고 있던 무언가가 거세게 불타올랐다. 불꽃은 뒤죽박죽이 된 생각을 단번에 집어삼킨 다음, 또다시 말라붙은 입술을 통해 툭 튀어나왔다.
“저도,”
더운 숨결을 갈무리하며, 유릴이 말했다.
“저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포이닉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예?”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어요.”
“아. 그러시군요. 음, 그럼 일단, 제가 준비한 이야기를 먼저-”
“괜찮아요.”
“……예?”
그녀는 어느새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저를 여기서 꺼내주려는 거 아닌가요?”
“아, 예. 물론 그렇긴 한데요.”
“그럼 당장 움직여요. 혹시 다른 문제가 있나요?”
“음, 따로 챙길 건 없으세요?”
“뭘 챙기겠어요? 가진 거라곤 이 약해빠진 몸뚱이밖에 없는걸요.”
“그럼 마음의 준비라도.”
“필요 없어요.”
어쩐지 황당해하는 포이닉스에게 되레 유릴이 재촉하기 시작했다.
“서둘러요, 기사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제가 뭘 하면 되죠?”
유릴은 달리기 편하도록 당장 치맛자락이라도 찢을 기세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포이닉스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손을 내어주십시오.”
키이잉.
그가 손을 내밀자, 기이한 금속음과 함께 팔뚝에서 하얀빛이 흘러나왔다.
“…….”
유릴은 커다란 손과 기이한 빛, 그리고 검은 눈동자를 번갈아 살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입을 앙다문 유릴이 포이닉스의 손을 붙잡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