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own bear country is mine now RAW novel - Chapter 21
불곰국은 이제 제겁니다 21화
021 현실은 달라/강남 부동산
손님은 왕이다.
이 말은 서비스의 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호텔업종(스위스)에서 시작되었다.
호텔 체인으로 잘 알려진 리츠칼튼의 창업자 ‘세사르 리츠’가 한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은 당시의 시대적 환경과 밀접하다.
역사적으로 호텔을 방문하는 고객은 실제 ‘왕’과 그 동종 계급의 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사르 리츠는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정당하게 돈을 지불하고 호텔을 이용하는 고객이라면 왕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의 한국 기업들에도 손님을 왕처럼 대해야 한다는 서비스 정신이 만연했다.
서비스를 잘해 주면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데, 어느 나라 건 비뚤어진 생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가 맞아야 먹히는 법이다.
여기 미쉐린 타이어 부부는 때와 장소를 잘못 만난듯했다.
마트를 들어온 이 회장 일행도 소리의 진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마트 내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으나 고함이 워낙 컸고 쇼핑을 하던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이 회장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던 니콜라이는 재밌는 광경을 구경하겠다는 생각에 거리를 좁혔다.
“잠깐 저쪽으로 갑시다.”
짱구와 새우깡이 묶음으로 10% 세일 한다는 팻말이 붙은 진열대 옆쪽이 가장 잘 보였기에 거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이 회장 일행이 문제의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선 마트에서 고객 응대를 전문으로 하는 직원까지 나와 부부를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부부는 막무가내였다.
마치 오늘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서 내일이 없는 것처럼.
둘이 가지고 있는 모든 스트레스를 여직원에게 풀려는 모양이다.
이혼서류에 도장 찍었으면 기뻐해야지.
‘이 회장이 봤으니 바로 해결되겠군.’
이 회장은 그 모습을 잠깐 쳐다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극적인 순간.
‘괜히 긴장되네.’
갑질하는 사람에게 더 큰 힘으로 눌려 버리려는 순간이다.
그런데….
잠깐 멈춰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회장이 그냥 획 지나가 버렸다.
‘어? 이게 뭐야?’
무빙 워크를 탄 것처럼 반대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이 부장과 대리운전 직원도 눈을 잔뜩 크게 떴다가 실망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이 회장님은 드라마를 많이 안 보셨나 봐.’
저럴 때 힘 있는 누군가가 나서 멋지게 해결해 준다?
재벌가의 아들이 백화점 평직원을 사랑한다?
재벌가 회장이 가사도우미와 결혼한다?
‘역시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군.’
하지만 드라마도 현실을 어느 정도는 반영한 것.
불의를 보고 참고 모른 척하는 것은 과거의 삶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은 그러지 않으리라.
니콜라이는 비록 외국인이었지만 참지 않기로 했다.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가슴을 타고 오른다.
당하고만 살았던 과거가 자꾸 떠올라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거기 이봐요!”
“…!”
“아니, 별것도 아닌 일로 왜 그렇게 몰아세우는 겁니까? 직원이 미안하다고 수십 번을 말했잖아요. 그랬으면 됐지, 뭘 더 원하는 거냐고요.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좀 적당히 하세요, 적당히!”
갑작스러운 속사포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니콜라이에게 향했다.
미쉐린 부부마저 고함과 삿대질을 멈추고 그를 빤히 보았다.
한국인들도 가만있는데 외국인이 나서서 이 정도 했으면 할 만큼 한 거다.
니콜라이는 일단 소란이 멈춘 것으로 만족했다.
나머지는 마트 측에서 해결할 테니까.
그런데….
‘사람들 반응이 왜 이래?’
옆을 보니 샤샤가 ‘너의 이런 멋진 모습은 처음 봤다.’라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너 방금 러시아 말로 했어.”
“….”
“나는 속이 시원하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방금 한 말을 다시 한국말로 해야 하나?
구경꾼들과 사건 당사자들도 이런 상황은 생소했던지, 뻘쭘하게 있는데 일단의 사람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 뒤엔 이 회장과 일행들도 있었다.
그중 한 중년의 사내가 부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일단 사무실로 가서 말씀하시죠.”
“내가 이런 대접을 받고도….”
정문에서 경찰 두 명이 들어오는 모습을 본 남편이 아내에게 눈짓을 보내자 둘은 순순히 중년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역시 이런 일을 해결하는 건 경찰이 최고다.
* * *
그날 저녁, 각국의 대통령이 묵었던 방에 이 부장과 직원도 들어와 있었다.
“이 부장님도 여긴 처음인가요?”
“네, 여긴 하루 숙박료가 어마어마해서 엄두도 못 냅니다. 외국 바이어가 와도 여기는 어휴….”
“괜찮으시면 집에 전화하시고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세요. 어차피 내일 같이 일 보러 갈 텐데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건 또 뭐 있어요. 여기 방이 몇 갠데. 직원분도 자고 가요. 이것도 다 추억이고 경험이잖아요.”
직원이 이 부장을 보며 눈치를 살피자 그렇게 하라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출출한데 야식이나 먹읍시다. 뭐를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날까요?”
“니콜라이 씨는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말을 참 잘하시는 거 같습니다. ‘출출’하다느니 ‘소문난다’라느니 같은 건 여기 사람들도 잘 안 쓰는 말이거든요.”
하긴, ‘누가 의심하겠어.’라는 생각으로 막 질러대긴 했었지.
뭐 그렇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이니 말이다.
“하하, 외국인이 이런 말 쓰면 재밌어하더라고요. 족발 어때요?”
“족발 좋죠.”
“족발 하나로는 안 되고 보쌈이랑 피자까지 곁들이면 딱 좋네요. 거기에 소주와 콜라까지.”
술을 시킨다는 말에 샤샤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직원이 빠르게 주문을 마치고 얼마 후, 우리는 배달온 음식으로 위장에게 보상을 넉넉히 주었다.
* * *
다음 날 약속 시간에 맞춰 오또기 본사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지만 처음 ‘8’도에 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니콜라이 씨 처음 뵙겠습니다.”
중년을 조금 넘긴 듯해 보이는 사람이 명함을 내밀며 깍듯이 인사를 했다.
홍주열 상무.
여긴 처음부터 아예 결정권자가 나왔다.
이건 니콜라이가 의도한 대로 ‘오또기’로 정보가 흘러 들어갔단 뜻이다.
그 덕분에 사업 이야기를 아주 편하게 풀어 나갈 수 있었다.
“초도 물량으로는 조금 많다는 생각이 들지만, 유통기한이 8개월이나 되어서 큰 무리는 없을 거 같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보내 드리죠.”
“그런데 하나 건의 드릴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300g짜리는 20%만 보내고 나머진 모두 3.2kg짜리 업소용으로 보내 주세요.”
“네? 업소용을 80%나 말입니까?”
“러시아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3.2kg이면 가정집에서는 몇 달을 먹을 양인데….”
대화를 해보니 여기도 러시아 실정을 너무 모르고 있다.
지금이 1993년이라 인터넷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양국 간에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수출을 생각하고 있다는 회사가 이렇게도 모를까.
니콜라이는 모르면 자신이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한국인들이 먹는 고추장보다 대략 열 배쯤은 많이 먹을 겁니다. 많은 인구에 러시아인들이 덩치도 큰 것도 있지만 거의 모든 음식에 사용하니까요.”
“그래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초도 물량 보내고 나중에 물량 달린다는 말 안 나오게 더 만들어 놓기나 하세요.”
“그러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2시간이 더 지나서야 깔끔하게 계약을 끝낼 수 있었다.
여기서도 현지 공장을 건립할 때 로열티 문제로 의견이 많이 나뉘었지만, 니콜라이가 압박을 하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제가 ‘8도’에서는 숙소와 자동차와 운전기사까지 지원을 받았거든요. 숙소는 오성전자 이 회장님이 신라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잡아 주셔서 거기로 옮겼고요.”
“아 오성전자의 이 회장님께서 말입니까?”
“우리 할아버지와 친분이 있으셔서 좋은 곳을 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올 때 양국 간 통화 가치를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홍 상무가 마치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카드를 쓱 내밀었다.
“편하게 쓰십시오.”
“아 이걸 바라고 한 말은….”
“다른 것들은 ‘8도’에서 모두 제공한 것 같으니까 저희는 카드를 드릴 테니 편하게 쓰십시오.”
“그럼….”
‘8도’에서 카드까지 줬지만 그 얘기만 쏙 뺐다.
그 덕분에 ATM기처럼 카드가 나왔다.
“그럼 러시아에서 뵙겠습니다.”
홍 상무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니콜라이는 일행들과 함께 강남으로 향했다.
* * *
“너, 저 아파트가 얼마나 할 것 같냐?”
“소비에트 시절에 지은 아파트보다 더 낡았는데 비싸봤자 얼마나 하겠어.”
“모스크바에 있는 102㎡(30평)짜리 아파트 몇 개를 팔아도 저거 못 살 거다.”
“에이, 설마. 저 낡아빠진 아파트가 그렇게나 비싸다고?”
“여긴 서울에서도 가장 노른자위 땅이라는 강남이거든. 거기다 8학군 지역이라 무지하게 비싸.”
이때의 은마 아파트 30평짜리는 대략 1억 2,000~3,000만 원이었다.
러시아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진 않았겠으나 이게 지금의 현실이다.
니콜라이와 일행은 근처의 부동산으로 들어갔다.
“은마 30평대는 수요가 좀 많은 편이라 나오면 빨리 팔립니다. 그래도 한 달 정도면 조망권 좋은 데로 살 수 있을 겁니다.”
“밖에서 보니까 재건축 현수막이 붙어 있던데 가능성은 있는 건가요?”
니콜라이의 물음에 부동산 사장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할 때도 됐죠. 재건축만 결정되면 은마는 완전 노다지가 되는 겁니다. 네. 그럼요.”
그렇게 은마 아파트 재건축은 러우전쟁이 한창일 때까지도 추진이 되지 않았고, 그해 이후로 최소 10년은 더 지나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어쩌면 지은 지 80년이 흘러야 비로소 진행될지 모른다.
서울, 특히 강남지역의 부동산 가격은 1997년 아시아금융 위기 사태(IMF)를 기점으로 끝도없이 떨어진다.
그런 사실을 니콜라이는 정확히 알고 있기에 나중에 먹어 치울 곳들을 돌아다니며 눈도장을 찍어뒀다.
“빌딩도 수익 부동산으론 제격이지.”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빌딩을 보고 다녀?”
“어허. 사람은 모름지기 미래를 확신하고 미리 움직여야 해. 그래야 미래가 현실이 됐을 때 기회를 잡을 수 있어.”
“그 말 책에서 봤지?”
“이 자식이 그냥.”
한편, 이 부장은 니콜라이를 따라다니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뭔가 가벼워 보이고 직진만 하는 거 같아 보였지만, 요 며칠 따라다니면서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저 넘치는 자신감과 행동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파트는 그렇다 쳐도 최소 20층이 넘는 빌딩들을 보고 다니는 건 시간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다.
‘맞는데?’
언제고 그 빌딩들을 꼭 사겠다는 것이다.
빌딩 하나만 해도 수백억인데 한두 개도 아니고 벌써 일곱 개나 봤다.
앞으로 더 본다고 하니 남은 20여 일 동안 수십 개는 더 보지 않을까.
‘이런 독특한 사람은 내 삶을 통틀어 정말 처음이군.’
이 부장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독특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런 불만 없이, 아니 오히려 즐기면서 따라다녔다.
* * *
다음 날 점심은 샤샤의 할머니 고향인 가리봉동에서 먹었다.
그리고 니콜라이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부산으로 향하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했다.
“이 부장님. 부산은 우리 둘만 가겠습니다. 서울로 올라오면 연락드릴게요.”
“네, 그럼 저희는 서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서울역에서 작별 인사를 마친 니콜라이는 지정 좌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아버지,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