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own bear country is mine now RAW novel - Chapter 22
불곰국은 이제 제겁니다 22화
022 1993년의 부산역/해운대 아파트와 땅
니콜라이가 기억하는 부산역은 건물 외벽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 현대화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증축하기 전의 모습이라 어릴 적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샤샤, 여긴 어떤 느낌이야?”
“킁킁, 비린내가 나는 거 같은데…?”
“저 부산역 건물 뒤쪽이 바다거든. 여기 사는 사람들은 잘 못 느끼겠지만 외지 사람들은 냄새가 날 수도 있을 거야.”
니콜라이는 잠깐 눈을 감았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맡아지는 짠내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 냄새에는 그의 수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기에.
“사람들 옷차림이 서울보단 좀 촌스럽다.”
“니 옷이 어떤지나 보고 말해. 어디 누런 양털 가죽점퍼에 노리끼리한 그 골덴 바지는 대체 어디서 샀냐?”
“모스크바 중국 시장에서 위아래로 맞춘 건데? 많이 이상해?”
“쯧쯧. 니 눈엔 이게 멋져 보이지?”
“아 거기 여직원이 엄청 멋지다고 했는데.”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근데 너 기차 타고 올 땐 아무 말도 없더니 갑자기 말이 왜 이렇게 많아졌어?”
“배고파서 그랬다.”
“기차 안에서도 먹거리 팔았잖아. 그거라도 사 먹지.”
그거 먹으면 배가 불러서 여기서 먹어야 할 별미를 맛볼 수 없잖아.
“일단 배부터 채우자.”
건널목을 지나자 상해 거리가 보였다.
흔히들 텍사스 거리라고도 하는데 이 안엔 러시아 거리도 있다.
한국으로 건너온 중국인들과 러시아인들이 가게를 열어 장사하는 곳이라 부산에서도 특별한 지역이었다.
이곳은 정기적으로 미국 항공모함이 들어와 정박하기에, 훈련이 있을 때면 수많은 미군이 이 지역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 덕분에 이곳은 부산의 명물로 계속 명맥을 이어갔다.
“여기 안으로 들어가면 러시아 음식들도 파는데 그거 먹을래?”
“외국 나왔으면 그 나라 음식을 맛봐야지. 돌아가면 실컷 먹을 수 있잖아.”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럼, 저기로 가.”
롯데리아를 지나 왼쪽으로 꺾으니 돼지국밥 간판이 보인다.
부산역에 올 때면 매번 들렀던 곳.
겨울이라 창문 사이로 허연 김이 뭉게구름처럼 뿜어져 나오면서 구수한 냄새까지 코를 파고드니 침샘이 절로 반응한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 수육 하나랑 돼지국밥 둘이요.”
거의 반자동으로 주문을 마치자 점심때라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 먹었던 돼지국밥 맛과 어떻게 다른지 잘 음미해봐. 부산은 돼지국밥의 본고장이랄 수 있는 곳이라서 좀 다를 거야.”
“어후, 막 기대되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에 올려졌다.
니콜라이는 이 첫 느낌을 온몸으로 느껴보기 위해 뜨듯한 국물을 떠 천천히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캬아. 그래 이 맛이지. 모름지기 돼지국밥은 이런 깊은 맛이 있어야 해. 돼지한테는 미안하지만 이걸 오래오래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넌 어떠냐?”
“모스크바에서 먹었던 거랑은 확실히 다르네. 깊은 맛이 달라. 여기 혀 봐봐 막 떨리고 있지?”
“안 떨려.”
돼지국밥으로 배를 든든히 채운 니콜라이는 부산에 온 목적을 실행코자 일단 돈부터 뽑았다.
“무슨 돈을 그렇게나 많이 뽑아?”
“좀 쓸데가 있어서.”
“아무리 편하게 쓰라고 했지만, 카드에서 돈을 이렇게나 많이 뽑아도 돼? 두 장에서 얼마나 뽑으려고?”
“네 말대로 마음대로 쓰라고 했잖아. 이 정돈 괜찮아. 원래 계약이 성사되면 뒤로 돈을 찔러주는 관행이 있어서.”
돈을 꽤 많이 뽑은 니콜라이는 원래 가지고 있던 돈에서도 넉넉히 보탰다.
이어, 샤샤를 모텔에 던져놓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그런 니콜라이를 보며 샤샤는 생각에 잠겼다.
‘너무 잘 알고 있어. 나처럼 처음 와보는 코리아일 텐데.’
마치 이미 와본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러시아에도 생소한 부분을 많이 느꼈었지만 여건 좀 심한 것 같다.
그러나 이걸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니콜라이는 샤샤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참으로 많이 달라진 것을 느꼈지만 정말 설명할 수 있는 게 없다.
샤샤는 언덕위로 사라지는 니콜라이를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뭐, 상관없지. 현실에만 집중하자. 니콜라이만큼 날 생각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니콜라이가 살았던 곳은 초량동이었다.
부산역에서 뒤로 한참이나 올라가야 나오는데 전쟁 때 피난 온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형성된 곳이다.
지금은 판자촌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을 뿐 그 분위기는 변치 않은 상태였다.
이리저리 구경하며 올라가던 그의 눈에 익숙한 집이 들어왔다.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에 담장은 연회색 시멘트 블록으로 둘러쳐져 있다.
미장도 되어 있지 않은 담장이라, 이 집 주인의 형편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녹슨 초록색 대문이 반쯤 열려 있었기에 고개를 삐죽 내밀어 안쪽을 살피던 니콜라이의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거 누군데 기웃거리는 거요?”
아!
순간, 그의 몸은 마치 석고상이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몸을 돌려야 하건만…
몸을 돌려서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봐야 하건만….
잠시 심호흡을 해 마음을 진정시킨 니콜라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다.
그 옆엔 역시 이마에 주름이 잡히기 전의 어머니도 있었다.
“여보,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거 같은데요?”
“외국인이 우리 집에 올 일이 없는데….”
아 그렇지. 깜박했다.
자신의 겉모습은 백인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니콜라이는 평소 하던 대로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러시아에서 왔습니다.”
“응? 러시아 사람이요?”
“네.”
“허, 러시아 사람이 한국말을 정말 잘하네요. 그런데 우리 집엔 무슨 일로?”
“아, 혹시 여기에 강진호라는 사람이 있나요?”
자신이 이곳으로 온 시기를 계산하면 대략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나이다.
니콜라이의 긴장한 마음과는 달리 부모님은 머리를 갸웃했다.
“집을 잘못 찾아왔나 봅니다. 여기엔 그런 사람 없어요. 우리 부부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 하나뿐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부모님이 맞는다면 자신의 모습도 초등학교 1학년의 모습으로 되어 있지 않을까?
니콜라이는 이 부분을 반드시 확인해야 했기에 밖에서 기다려 보려는 생각을 막 하던 그 때.
“엄마!”
한 아이가 쫄래쫄래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아이를 발견한 어머니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불렀다.
“형준아, 오늘은 친구 집에 안 갔니?”
“판수랑, 민석이랑 자갈치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책가방 놔두고 가려고. 응? 엄마, 이 아저씬 누구야? 외국 사람이네?”
아니다. 다르다.
어릴 때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내가 없구나….’
니콜라이는 아니, 강진호는 여기에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머리가 복잡해지자 니콜라이의 얼굴은 절로 찡그려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부모님은 그대로다.
자신이 새 삶을 얻고 이렇게 살아있는 게 어딘가.
부모님도 이렇게 버젓이 살아 계신다.
‘그래, 이거면 됐어.’
이게 하늘의 뜻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이렇게 마음이 편한 것을.
니콜라이는 부모님을 다시 눈에 깊이 담으며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를 했다.
“제가 집을 잘못 찾았나 봐요. 텍사스에서 러시아 사람한테 물어보니까 이쯤에 파란색 지붕이라고 해서.”
“보다시피 여기 파란 지붕이 많잖아요. 찾으려면 고생 좀 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무심히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다시 눈에 소중히 담았다.
부모님은 이곳을 벗어나지 않고 쭉 살아간다.
벗어나고 싶으셨겠지만, 가난이라는 끈질긴 놈이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앞으로 몇십 년을 고생고생하시며 살아가실 텐데….’
그러나 이제는 바뀔 것이다.
니콜라이는 이때를 위해 준비해 온 비닐봉지를 꺼냈다.
그리고 안쪽의 방문을 향해 냅다 던졌다.
방문이 열리는 걸 확인한 니콜라이는 재빨리 옆길로 들어가 아래로 사라졌다.
《선원이었던 저희 아버지가 아저씨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연이 있어 인사를 못 드리고 갑니다. 이 돈은 그 고마움의 뜻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껴 쓰면 2년 정도는 돈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을 거다.
그 이후엔 다른 방법으로 평생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모텔로 다시 돌아온 니콜라이는 퍼질러 자고 있는 샤샤를 툭툭 깨웠다.
“야, 어서 일어나.”
“아, 냄새나는 발로 왜 깨워.”
“일어나 빨리. 여기 자러 왔냐?”
“볼일은 다 봤어?”
“다 봤으니까 빨리 옷 입어. 눈곱도 좀 떼고.”
“또 어디 가게?”
“미래에 내 주머니를 가득 채워 줄 곳으로.”
* * *
“보시다시피 여기 해운대에 신시가지 공사가 한창이라 요즘 아파트가 장난 아닙니다. 서울에서도 관심이 많은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가 와요.”
띠리리링-♬
“보세요. 전화가 계속 오잖아요. 잠시만요. 네, 여보세요. 어? 김 여사님? 아아 네. 그럼요. 수영만 쪽으로 2천 평은 좀 그런데. 좌동 쪽은 어때요? 2천 평이 나올 만한 곳은 뒤쪽으로 더 빠져야죠. 아 저기 죄송한데 지금 손님이 있어서 제가 조금 있다가 바로 전화드리겠습니다. 네네.”
전화를 끊은 부동산 사장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기 신시가지 입주가 96년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지금이 딱 적기죠. 부동산하면 아파트잖습니까.”
“얼마나 오를 거로 생각하는데요?”
“입주 시점 되면 32평 기준으로 최소한 30%는 오를 겁니다. 그러니까 분양가가 대략 1억 선이니 최소한 1억 3천은 간다는 거죠.”
“그렇게나 많이 올라요?”
“어휴, 말도 마십시오. 지금 문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조금 지나면 이런 물건도 싹 사라져요. 손님은 조상님이 도와서 이리로 오신 겁니다. 네. 그럼요. 오늘 딱 사세요.”
사장은 침을 튀겨가며 열의를 보였지만 니콜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들었습니다. 쭉 둘러보고 연락드릴게요.”
“아 지금 사야 한다니까요. 늦으면 정말 물건 없습니다. 몇 개 안 남았는데. 타이밍이 죽이잖아요.”
“30% 오르는 거 확실합니까?”
“제가 부동산만 20년 넘게 했습니다. 확실해요!”
“그렇게 확실하면 사장님이 다 사면 되겠네요.”
“….”
어디서 사기칠려고.
아니, 사기는 아니지. 여기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는 건 맞으니까.
그렇게 되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는 게 문제지만.
니콜라이와 샤샤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던 사장은 침을 퉤 뱉었다.
“하, 얼빵한 러시아 애 하나 걸리는 가 했는데. 에이, 요즘 손님이 왜 이렇게 없어. 이러다 가게 문 닫는 거 아닌가 몰라. 세상 물정 모르는 놈 딱 하나만 걸려라.”
띠리리링-♬
전화기 소리에 사장은 조금 전의 그 급한 모습과는 달리 느긋하게 전화를 받았다.
“이제 전화 그만해. 갔어!”
-계약은?
“무슨 계약. 완전 나가리야. 러시아 애가 한국말 엄청 잘 하기에 한 껀 하나 했는데. 나중에 신호 주면 다시 해. 끊어.”
지금은 아파트를 살 시기가 아니었다.
* * *
다음 날 샤샤와 함께 다른 부동산에 들른 니콜라이는 사장과 함께 이번엔 땅을 쭉 둘러봤다.
“신시가지가 들어서면 그 주변 땅값들도 요동칠 겁니다. 요즘 외국 사람들도 간간이 보러 오거든요.”
“어느 나라 사람이요?”
“중국인과 일본인이 가장 많았습니다. 러시아인은 손님이 처음이고요.”
해운대 땅값은 서울과 견줄 만큼 오르긴 한다.
비록 IMF 때 크게 한방 맞고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그 이후로는 꾸준히 오른다.
물론 전국적으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긴 해도, 해운대 땅값은 투자지로 적격이었다.
“손님같이 젊은 분은 일단 사두고 묵혀 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툭하면 뒤통수를 쳐도 땅은 절대로 배신 안 하거든요. 3,500평짜리면 해운대 일대에선 보기 드문 매물입니다.”
“부동산은 그래도 좀 더 알아보고 결정해야겠죠?”
“아파트야 널려서 그래도 되지만 땅은 또 다르죠. 내 거다 싶으면 바로 낚아채야 합니다. 뒤돌아섰다가 다시 찾으면 그새 팔려버렸거든요. 하시죠. 제가 복비는 반만 받겠습니다.”
복비를 반만 받는 다는 건 땅 주인과 이미 입이 맞춰져 있다는 뜻. 원래는 지금 나온 가격이 아니란 말이다.
아마 사장은 원 가격보다 조금 더 높게 불렀을 거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좀 더 알아봐야겠습니다.”
니콜라이가 몸을 돌리자 사장이 급히 불러세웠다.
“깎아 드리죠.”
“얼마나요?”
“원하시는 가격을 먼저 말씀해 주시면 최대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사장님이 먼저 말씀해 주셔야죠.”
“1,500만 원 정도는 깎을 수 있을 것 같기도….”
다시 몸을 돌렸다.
“어쩌면 2,000까지도….”
“면적이 만만치 않아서 시간을 두고 좀 살펴봐야겠네요.”
“아 손님. 작년 대통령 선거 운동 때 돈이 많이 풀려서 땅값에도 영향이 곧 올 겁니다. 조금이라도 쌀 때 사세요. 진짜 사실 생각이 있으면 제가 땅 주인하고 통화해서 최대한 맞춰 볼 테니까요.”
“기회가 되면 꼭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이건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다.
때가 됐을 때 반드시 와서 괜찮은 물건은 싹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사장과 헤어진 니콜라이는 다음 목적지로 부산 부동산의 메카로 불리는 남포동과 서면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