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own bear country is mine now RAW novel - Chapter 3
불곰국은 이제 제겁니다 3화
003 놈을 만나기 100m 전/탈모가 진행되지 않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에서는 모스크바 다음으로,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인구(500만)가 많고 섬 위에 세워진 도시라,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예전에는 페트로그라드와 레닌그라드로 불리기도 했으나 1991년 6월에 옛 이름을 되찾았다.
이름을 되찾은 지 채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셈이다.
‘20년 정도 후, 여기엔 현대차 공장이 들어서게 되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역에서 내리자 영하 20도의 냉기가 훅 치고 들어왔다.
니콜라이는 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일출이군. 집을 떠날 땐 노을이었는데.’
그의 머릿속은 영하의 기온이 무색하게 태양처럼 활활 불타고 있었다.
‘후우. 이제 만나겠구나. 30대 후반의 푸틴을.’
사람을 해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건 일반인들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뼛속 깊이 새겨진 복수심이 없었다면 니콜라이는 절대로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흔들며 가방을 고쳐메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물어왔다.
“모스크바에서 왔습니까?”
“…!”
그 목소리에 니콜라이의 몸이 순식간에 굳었다.
새 삶을 얻기 전, 모스크바에서 비밀 경찰들에게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곳에 온 건 가족들 외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대체 누가?’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이 태풍처럼 머릿속을 휘감고 지나갔다.
긴장감에 굳어 있던 그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이른 아침이지만 기차를 오르내리는 사람이 많다.
여긴 외진 곳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기차역이다.
마음을 진정시킨 니콜라이는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사복 차림을 한 30대 중후반의 사내.
잔뜩 굳어 있는 표정과 덩치에서 강한 위압감이 느껴진다.
니콜라이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어떻게 아는 겁니까? 제가 모스크바에서 온 걸.”
그러자 사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흠칫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거요? 야간열차에서 내리면 대부분 모스크바에서 오는 거라서. 제가 무슨 실수라도…? 나가면 택시 탈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아, 제가 딱 맞혔네요. 밖엔 워낙 경쟁이 심해서 역 안으로 들어왔거든요.”
“크흠. 택시 기사님이셨군요.”
택시 호객행위를 한 기사에게 순간이지만 긴장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지금이 딱 그랬다.
“네. 맞습니다. 토박이라서 여긴 훤하거든요. 기왕이면 제 차 타시죠.”
“뭐 그래요.”
기사의 안내를 받아 역 밖으로 나오니 이른 아침부터 제설차가 보였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길옆으로 눈이 쌓여 갔다.
나라가 바뀌었어도 눈은 꼭 치워야만 하는 게 러시아의 숙명인 듯했다.
‘강원도에서 군 생활했을 때가 생각나네.’
군대에서는 눈이 내리면 ‘하늘에서 쓰레기가 내린다’라고 했었다.
이제는 다신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하얀 솜사탕 같은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디로 갈 겁니까?”
“‘피의 구원 사원’ 쪽으로 가시죠.”
“어?”
“왜 그러세요?”
“우리 집이 그쪽 근첩니다.”
“잘됐네요.”
“그런데 독특하게 부르시네. 여기서는 ‘그리스도 부활 성당’으로 부르거든요.”
그렇게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택시를 타려고 막 문을 열 때, 웬 건장한 사내가 다가오더니 기사에게 대뜸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블럇! 너, 들어가서 손님 데리고 나왔지?”
“아 미안. 돈이 좀 급해서.”
“야! 여기에 돈 안 급한 사람도 있어?”
“다음부턴 안 그럴게. 한 번만 눈 감아 줘.”
“너 다시 한번 또 이러면 그땐 정말 죽을 줄 알아.”
주먹을 꽉 쥐어 보인 후, 뒤쪽을 쳐다보았다.
그와 덩치가 비슷한 사내 네 명이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빈말로 듣지 마.”
그러고는 침을 찍 뱉더니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저런 사내들한테 제대로 맞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
“아, 이거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제가 평소엔 이러지 않는데. 알다시피 나라가 바뀐 후부터 먹고 살기가 워낙 힘들어져서요.”
“그래도 조심하세요. 정말 때릴 것 같던데요.”
“몸 사려야죠. 요즘은 지역 마피아도 택시를 몰아서 잘못 걸리면 진짜 죽을 만큼 맞거든요. 상납금 걷는 놈들도 있고요.”
이 기사도 처음 만났던 기사와 다르지 않았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내내 이 도시에서 유명한 곳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더니, 나중에는 개인사까지 묻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국에 여행이라니 대단합니다.”
“아 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왜 줄을 서 있는 거죠?”
“국영상점에서 빵을 사려는 것 같네요. 요즘은 물건이 달려서 그런지 뭘 하나 사려면 저렇게 줄을 많이 섭니다. 가격도 계속 비싸지고 있고요. 나라가 정말 이상해졌다니까요.”
이건 시작일 뿐이다.
물가는 고공행진도 모자라 폭등에 폭등을 하게 된다. 화폐가치는 끝도 없이 폭락하게 되고.
이런 충격파가 6년간 쭉 이어진다.
그리고 대망의 1998년.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지불유예. 한국의 IMF)을 선언하면서 70년 사회주의 실험에 이은 ‘7년 자본주의’ 실험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국민의 고통은 앞으로 최소한 10년은 이어질 것이다.
이 10년의 세월.
러시아 국민에겐 고통의 시간이 될 것이지만, 니콜라이에겐 성장을 위한 기회의 시간이 될 것이다.
“아까 말씀하셨던 데가 이쯤인데 어디서 내려드릴까요?”
“그냥 저기 신호등 옆에 세워 주세요.”
출발할 때 정했던 요금에서 조금 더 얹어 줬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니콜라이는 오리지날 밍크 목도리에 검은색 가죽 장갑과 귀마개까지 하고, 기억해 둔 주소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푸틴의 집은 저기 건널목을 지나서 파란색 칠을 한 상점을 끼고 보이는 5층짜리 아파트였다.
이른 아침이고 학교도 당분간은 휴학인 상태라 거리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으나 차들은 꽤 있었다.
아파트에 도착한 니콜라이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우체통을 뒤져 보았다.
‘여기가 확실하군.’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304호 우편물에 이름이 정확히 박혀 있었다.
그의 집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일단 밖에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춥긴 했지만, 이때를 대비해 단단히 챙겨입었기에 버틸 수 있을 거다. 몇 시간쯤은.
상점에 들러 옆으로 돌려서 따는 500ml 음료수 세 개를 샀다.
한 개는 여기서 마시고, 두 개는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서.
‘준비한 걸 음료수에 넣으면 감쪽같겠군. 나도 마시면서 하나 마시라고 주면 끝나겠지.’
그는 운전 중일 테니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것이다.
일면식도 없고 유약하게 생긴 젊은이가 자신을 죽일 거라고는 꿈에도 모를 테니.
‘속여서 끝장내는 거야.’
자신이 속아서 방사능 차를 마시고 생을 마감한 것처럼.
7일간의 일정을 잡고 왔지만 그건 최대로 잡은 것이라 되도록 그 안에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차가 드나드는 길은 상가 옆길밖에 없었기에 니콜라이는 근처에 숨어서 아파트와 출입구를 살폈다.
‘푸틴이 KGB 내에서 행정 업무만 봤더라도 기본 교육은 받았을 테니 최대한 조심해야겠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손목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20분이었다.
점심 시간이 되어 가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두툼하게 껴입었음에도 한기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영하 20도라더니, 장난 아니네.’
여기 사람들에게 영하 15도는 따뜻한 축에 속한다.
오랜만에 날씨가 훈훈해졌다며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밖으로 나들이를 나갈 정도라.
그러니 영하 20도는 조금 춥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람이었던 그에게 이 날씨는 혹한기 훈련 때에도 겪어 보지 못한 맹추위였다.
사람의 인내와 집중에는 한계가 있는 법.
오후 4시가 넘어가니 더는 버티기 힘들 정도까지 되었다.
‘아 미치겠네. 새끼발가락에 감각이 없어.’
사람이 참 간사한 게.
계속해서 추위에 노출된 상태로 있으니 일생일대의 목표보다 이 추위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졌다.
‘그냥 차를 끌고 올걸. 이러다간 내가 먼저 얼어 죽겠네.’
군대에서 한겨울에 야간 보초를 썼을 때처럼 온갖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이걸 끝내고 난 후엔 무슨 일을 하지? 내가 가진 무기는 다가올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알고 있는 건데….’
미래 정보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돈을 버는 거다.
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 투자해 돈을 버는 것.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돈으로 행복을 100%는 살 수 없을 진 몰라도 99%는 살 수 있으니까.
온 세상의 돈을 쓸어 담겠다는 생각에 니콜라이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추위에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벌겋게 변하고 코에서는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으나, 이때만큼은 찜질방에 있는 것처럼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푸틴이 죽게 되면 러시아는 본래의 역사와는 다르게 흘러갈 거란 말이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자신이 월등히 유리한 고지에 있는 것이니 말이다.
결국 문제는 ‘시드머니를 어떻게 마련하냐?’는 거였다.
지금의 러시아에서 ‘종잣돈’을 마련하려면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먼저 집안의 인정부터 받아야겠지.’
영하 20도에 따른 부작용으로 이런저런 생각에 몰두해 있던 중, 오후 5시가 됐을 때.
‘드디어 나타났군.’
30대 후반의 푸틴이다.
아직은 앞머리 탈모가 진행되지 않은.
그런데 보통 사람처럼 양손을 흔들며 걷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걷는 영상들엔 특이한 면이 있었다.
왼손만 평범하게 움직이고 오른손은 근육병이라도 생긴 것처럼 몸에 밀착해 거의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KGB 사복 요원들이 언제든지 사격을 할 수 있도록 받은 훈련 때문이었다.
이른바 ‘총잡이들의 걸음걸이’라고 불렸던 훈련.
KGB에서 은퇴한 지 오래되었지만, 직업병 때문에 그렇게 걷는 줄 아는데….
푸틴은 KGB에서 행정 업무만 봤었고 구소련 붕괴 직후엔 택시를 몰았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블랙 요원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총잡이들의 걸음걸이’를 보인 것은, 자신의 KGB 이미지를 정치적으로 사용했을 뿐이란 의견이 있었다.
‘그 말이 맞았어. 속이는 데는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군.’
어디서 구한 것인지 ‘대우 르망’차에 탄 푸틴은 엔진 예열을 위해 3분여간 공회전을 시켰다.
그리고 출입구 쪽으로 천천히 차를 몰고 나오기 시작했다.
출입구 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니콜라이는 그를 따라가려고 재빨리 택시를 잡아탔다.
때마침 푸틴의 차가 코너를 돌며 도로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기사님, 저 빨간색 차 좀 따라가 주세요. 눈치 못 채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히터! 히터요!”
“네?”
“아, 페치카. 빨리 페치카요.”
“오늘은 쪼오끔 쌀쌀하죠? 살짝 올려드릴게요.”
영하 20도가 조금 쌀쌀해?
기사가 실내 온도를 높이려고 할 즈음 신호에 걸렸으나 앞의 차도 같이 정지한 상태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 그게.”
갑자기 물어오니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적당히 핑계를 댔다.
“제 아버집니다. 어머니 놔두고 다른 여자 만나는 것 같아서….”
“아, 그러면 이거 미행하는 겁니까? 영화 같은 거 뭐, 그런 거네요?”
“네. 그러니까 최대한 조심해서 따라가 주세요. 돈은 두 배로 드릴게요. 절대로 놓치면 안 됩니다.”
“두 배요? 아, 고맙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래 봬도 젊을 때 KGB에 들어가려고 준비했었습니다. 도로 미끄러우니까 꽉 잡아요.”
KGB에 들어가려고 준비했었다는 기사의 능수능란한 운전실력은 눈 쌓인 도로에서도 빛을 발했다.
덕분에 니콜라이는 큰 어려움 없이 푸틴을 놓쳐버릴 수 있었다.
“아,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갑자기 그때 트럭이… 쓰읍. 신호등도 어떻게 따악 그때 빨간불로 바뀌는지. 아, 1초만 빨랐어도. 아깝네요.”
“이 C. 하아….”
이 추위를 다시 겪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한국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걸 억지로 쑤셔 넣었다.
* * *
다음 날.
돌아가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남은 기간은 5일. 그러나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꼭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