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own bear country is mine now RAW novel - Chapter 80
불곰국은 이제 제겁니다 80화
080 루카셴코의 움직임/코리아에서 온 손님들
1997년 12월 27일.
니콜라이는 칼춤을 잠시 멈추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모스크바에 짓고 있던 아파트 5,000세대(35층)의 입주일이 바로 오늘이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12월 평균 기온은 영하 5도.
일반 주택들의 ∧모양 지붕과 마당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으나 여긴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바닥에 눈이 보이지 않았다.
“커튼 주문받습니다.”
“입주 청소해 드려요.”
“관리사무소에서 주차증 두 장씩 받아 가세요.”
“‘브이스트라(빨리)’ 이삿짐입니다.”
“실내 장식 새로 하실 분은 구경하는 집으로 오세요. 입주 기간에 접수하시면 10% 할인합니다.”
《구경하는 집》
82㎡(25평)-101동 101호.
115㎡(35평)-120동 101호.
148㎡(45평)-150동 202호.
181㎡(55평)-200동 201호.
이 모든 건 니콜라이가 우수리스크 아파트 현장에 만들어 둔 시스템이었다.
그걸 여기에서도 그대로 활용했다.
관리사무소 직원들도 제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저기요. 쓰레기 거기 막 버리시면 안 됩니다. 각 동 뒤에 음식물/쓰레기 분리 수거장 있으니까 그곳에 버리세요.”
“입주 기간에만 지상에 주차할 수 있습니다. 저녁 일곱 시 이후엔 차 모두 빼야 해요.”
“단지 내 도서관에 헌책 기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직원들은 입에 단내가 나도록 소리를 질렀다.
“입주 절차 모두 끝내신 분은 관리사무소에서 ‘다차’ 열쇠 받아 가세요. 비닐하우스 보일러는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관리소 직원이 작동시켜 드려요.”
“노인정 회원 접수합니다. 자녀분들이 어르신 인적 사항만 접수하시면 됩니다.”
“어린이집은 20일 후부터 여니까 사무소에서 접수부터 하세요.”
아파트 단지는 입주하거나 입주하기 전에 집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우와! 아빠, 여기 너무 신기해.”
“구름이 땅으로 내려왔어요!”
“엄마, 나 저거 앙! 앙! 먹을래.”
단지 내 바닥에서 새하얀 김이 아지랑이처럼 살랑살랑 솟아오르고 있었다.
중앙난방 시설에서 보낸 열이 단지 내 바닥 아래를 통과해 각 동으로 들어가면서 만들어 낸 현상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이 광경을 보고 신기해했다.
“여보, 아이들이 왜 안 보여요?”
“실내 수영장에 갔어. 다섯 시쯤에 올 거래.”
“같이 청소 좀 하려고 데려왔는데 거기 다 보내면 어떡해요?”
“그냥 청소업체에 맡기자니까 그러네.”
“뭐 거긴 공짜래요? 당신이 다 하세요.”
“이 여자가 남편한테 어디서 큰소리야?”
“….”
입주 예정자 중엔 다투는 부부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행복해하는 얼굴이었다.
니콜라이는 그들을 보며 아파트 관리소장에게 물었다.
“아파트 홈페이지는 개설해 뒀죠?”
“네. 우수리스크처럼 관리사무소에서 운영하게 될 겁니다.”
“운동 시설에 기구들은 모두 들어왔나요?”
“러닝 머신 50대 중에 두 대가 불량이라 교환 처리한 것 외엔 모두 들어와 있습니다.”
눈살을 찌푸린 니콜라이가 건설 부사장에게 물었다.
“독일제잖아요?
“저번에는 아무 이상 없었는데 이번에 처음 생긴 일입니다. 다음엔 여러 번 살펴본 후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니콜라이는 샤샤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건설 부사장과 아파트 관리소장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소장님. 비상계단은 작동시켜 봤습니까?”
“네. 오늘 아침에도 작동시켜 봤는데 이상 없었습니다. 한 달에 두 번씩은 작동하게 되어 있으니 계속 확인하겠습니다.”
화재가 발생하면 아파트 건물 뒤쪽에 만들어진 비상계단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각 동의 1층에서 작동할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철제 계단이 35층부터 1층까지 펴지면서 순식간에 연결되는 식이었다.
“이 정도면 문제없는 것 같네요.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우수리스크 관리사무소 도움을 받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웬 젊은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사장님?”
“어머, 진짜 사장님이셔.”
“꺄악!”
갑작스러운 여자들의 육탄 공격에 경호원들이 일단 제지를 했으나 니콜라이가 손을 들었다.
잘 아는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오늘 이사합니까?”
“네. 저는 1회 입상자예요.”
“저두요.”
“저는 3회요.”
“저는 2회 입상자예요.”
“모두 친한 사이 같네요?”
“우리 홈페이지 만들었거든요. 유니콘 미스 미스터 입상자 홈페이지요. 사장님이 방문하셔서 글 한 줄만 남겨주시면 안 돼요?”
“그러죠. 언제 한번 들러서 남길게요.”
봉사도 눈을 번쩍 뜰 만큼의 미인들이 몰려 있자 오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 들었다.
“모두 115㎡(35평)에 입주하는 거죠?”
“네.”
“저는 그거 팔고 181㎡(55평)로 샀어요. 가족들이랑 살려고요. 아버지가 ‘다차’ 더 큰 거로 받자고 하셔서요.”
“축하드립니다. 아, 그쪽 분은 요즘 TV에서 본 것 같은데…?”
“얘는 요즘 드라마에 출연하거든요. 저번 달부터 이리온과 광고 계약 맺었어요. 초코파이 광고에 나와서 보셨을 거예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수줍어하며 인사하는 모습에 니콜라이는 씩 웃었다.
“저는 도시락 광고 나오고, 얘는 미래 자동차 광고 나오는데 못 보셨어요?”
“아, 미안합니다. 제가 TV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니라서요. 그런데 모두 러시아 분들이신가요?”
“저기 열한 명과 저는 러시아고, 쟤는 벨라루스, 여기 둘은 우크라이나예요.”
“사장님, 저는 몰도바예요.”
“아 네. 저분은요?”
“…모르는 사람인데요?”
웬 여자가 중간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모두 자기를 보자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사장님 사진 찍어도 되나요?”
“그럼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녀들이 양쪽으로 우르르 달라붙었다.
모델들이라 그런지 카메라는 필수로 가지고 다녔다.
샤샤는 졸지에 사진사가 되었다.
아파트 밖으로 나온 니콜라이는 건설 부사장에게 물었다.
“‘미르니’ 알로사 공사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파트, U마트, 학교, 관공서와 다이아몬드 세공 공장과 주변 상가들 모두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계획대로 99년 1월까진 모두 끝내야 합니다.”
“문제없을 겁니다.”
“가스관과 송유관도 잘 마무리 지어야 하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시로 확인하고 있으니 내년 7월까진 이상 없이 끝날 겁니다.”
모두 잘 돌아가고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니콜라이는 행보관이 되어서 잔소리를 해 대며 다시 확인하고 확인했다.
“그럼 휴가 잘 보내시고 다음에 또 뵙죠.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휴가 끝나면 코리아로 가시는 겁니까?”
“다시 들어가야죠. 아 맞다. 깜빡한 게 있네요. 이번에 코리아 건설사를 하나 인수했습니다.”
“…!”
“코리아에서도 아파트를 좀 지어 볼까 해서요. 그러니 부사장님이 거기도 맡아서 지금처럼 관리해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대신 월급은 지금보다 더 오를 겁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건설 부사장과 헤어진 니콜라이는 차에 오르려고 하다가 샤샤의 말에 머리를 돌렸다.
“니콜라이, 예바가 인사하고 싶다고 왔어.”
“무슨 인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샤샤의 약혼녀 예바가 부끄러워하며 다가왔다.
“예바, 말해 봐.”
“….”
“이럴 게 아니라 일단 같이 타지. 어차피 지금 집 보러 갈 거잖아?”
“그렇네. 우리 집 보러 가기로 했어. 예바도 타. 같이 가게.”
다음 스케줄은 마리아가 결혼 선물로 마련해 준 샤샤의 집을 보러 가는 거였다.
차에 타자 예바가 용기를 내어서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
“5캐럿짜리나 되는 다이아몬드를 결혼반지로 주셔서요.”
“아, 난 또 뭐라고요.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샤샤한테 그 정도 선물을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그래도 가격이 너무 비싸서….”
“제가 다이아몬드를 채굴하는 회사의 사장인데 그게 문제겠어요? 괜찮으니까 그냥 받으세요.”
예바의 새하얀 볼에 살짝 보조개가 파였다.
얼마 후, 그들은 모스크바 중심가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우와…?”
“이건 좀 과분한데…?”
“샤샤 너 처음 와 보는 거야?”
“응. 네 어머니께서 가 보라고 주소랑 열쇠만 주셨어.”
“우리 어머니 배포가 이렇게 클 줄이야. 진짜 멋진 집이다.”
그들이 보고 있는 집은 러시아식 3층짜리 저택이었다.
니콜라이의 집에 비하면 한참 작지만 그걸 그대로 축소한 것처럼 생겨서 멋이 있었다.
두 사람이 살 집인데 이렇게나 큰 걸 준비했다니.
샤샤와 예바도 놀라 눈과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기에 두 사람만 살면 집이 너무 커서 무섭겠다. 너 없으면 예바 씨 혼자 살아야 하잖아?”
“일하는 사람들 몇 명 둬야지. 예바 혼자서는 안 되겠네.”
집을 쭉 둘러보니 앞뒤 정원도 크고 집안 인테리어도 멋졌다.
유리 유수포프와 니콜라이 부모님의 집이 너무 커서 그렇지, 이 집도 보통 사람들이 보면 감탄을 쏟아내기에 충분했다.
“네 어머니가 결혼 선물로 집을 주신다고 해서 적당한 걸 주시려나 했는데, 이 정도로 큰 집일 줄은 몰랐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고맙게 받아도 돼. 우리 부모님이 널 친아들처럼 생각하고 계셔서 그런 거니까.”
“…고맙다.”
그 강하던 샤샤가 눈을 붉혔다.
샤샤는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때를 제외하면 니콜라이와 지냈던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졌을 때부터 사람이 갑자기 바뀌어서 당황스러웠으나 늘 그랬듯 그를 믿고 따랐다.
코리아에 처음 갔을 때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냥 믿었다.
첫 방문임에도 마치, 거기에 살았던 사람 같이 모든 걸 알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로.
니콜라이에게도 자기처럼 말 못할 사연이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결정을 참 잘했다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매일같이 느꼈다.
지금은 니콜라이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심복이 되었다.
‘종신 정규직 넘버 1’로서 니콜라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중에서 손에 꼽을 인물로.
니콜라이는 집을 다 둘러본 후 샤샤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집에 들여놔야 할 것들은 이 카드로 사. 한도 없으니까 맘껏.”
“…이거 정말 받아도 돼?”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받아. 예바 씨가 사면 되겠네요.”
“이렇게까지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잊으셨나 본데, 예바 씨를 샤샤에게 소개해 준 사람이 저잖아요. 두 사람이 잘살면 저는 그거로 족합니다. 아, 될 수 있으면 아이는 3명 이상으로요. 하하. 샤샤가 가족이 없어서 많이 외로워했잖아요.”
“….”
예바와 샤샤의 얼굴이 동시에 붉어졌다.
예바에게 먼저 차에 타 있으라고 한 샤샤가 장난기가 싹 가신 얼굴로 말했다.
“벨라루스 대통령 말이야.”
“루카셴코?”
“응. 그 사람이 정부 인사들을 만나고 다녀.”
정보원들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이제는 독립국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운영비의 범위가 커지다 보니 활용할 수 있는 정보원들의 수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 때문에 양질의 정보를 계속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루카셴코가 정부 고위급 인사들을 만나고 다녔는데 아무도 자하르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다?
자하르 대통령이 니콜라이에게 아무런 말이 없었으니 자하르도 모르고 있다는 거였다.
니콜라이는 정부 고위급 인사 중에서 솎아 내야 할 사람들이 꽤 있겠다고 판단했다.
“이유는 몰라?”
“아직 그것까진 알아내지 못했어.”
이 작자가 무슨 일을 꾸미고 다니는 거지?
“전에 루카셴코가 크렘린궁에 갔을 때 무슨 말을 했어?”
“10억 달러를 빌려 달라더라. 아무렇지 않게.”
“헉! 10억 달러? 미치겠네.”
샤샤는 블랙홀의 자금 운용에는 관여하고 있지 않았기에 상상이 가지 않는 금액에 눈을 껌벅거렸다.
“생각해 본다고 하면서 일단 기다리라고 했어.”
“그때가 언제였는데?”
“8월 말이었으니까 3개월 조금 넘었네.”
“…아, 대충 알겠다. 3개월 동안 소식이 없으니까 정부 인사들을 통해서 정보를 알아내려는 것 같네. 자기 입으로 다시 빌려 달라고 하긴 좀 뭐할 테니까.”
아닌데….
“내가 아는 루카셴코는 그렇게 빙빙 돌아가는 스타일이 아니야.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해 버리지. 그랬으니까 당당하게 10억 달러를 빌려 달라고 했지.”
“그것도 또 그렇네.”
“샤샤, 이번엔 따라오지 말고 러시아에 남아서 좀 더 자세히 알아봐. 결혼 전이니까 준비할 것도 많을 거잖아.”
“알겠다.”
루카셴코 대통령이 뭔 짓을 꾸미는지 일단 정보를 모아야 했다.
14개 독립국 중에 가장 먼저 끌어안으려 했는데, 어쩌면 그 시기가 생각보다 더 당겨질 수도 있겠다.
* * *
며칠 후, 새해를 맞아 니콜라이와 가족들은 늘 그랬듯이 아침 일찍 유리 유수포프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유리의 서재에서 고성이 흘러나왔다.
밖에서도 다 들렸기에 모두 숨을 죽이며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누가 널 보낸 것이냐? 사돈이 보냈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제 생각으로 말씀드린 거예요.”
“여태껏 아무 말이 없던 네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을 땐 누군가 옆에서 자극한 거겠지. 안 그러냐?”
“아버지. 아니라니까요.”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 오냐오냐하면서 키웠더니. 허어 참.”
유리는 기가 찼다.
자기가 아는 올가는 절대로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낼 위인이 아니다.
늘 오빠에게 부탁하거나 했었지, 이렇게 당돌하게 뭔가를 직접 말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큰 걸 직접 얘기한 적은 더더욱.
아무리 유수포프 가문의 여식이라도 러시아에서 여자가 함부로 나설 순 없었기에, 올가도 어느 정도의 선은 지켜 왔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재산을 물려달라고 하다니.
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예고르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에 자하르 대통령을 찾아갈 것 같아 절대로 가지 말라고 당부를 해서 막아 놨더니, 새해에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예고르가 생각하기에도 올가의 시댁에서 뭔가 말을 꺼낸 것 같았다.
그랬으니 유리의 말대로 이런 적이 없는 올가가 말을 꺼냈을 테지.
옆에 있던 이반은 안 되겠다 싶어서 예고르에게 들어가자고 눈짓했다.
그러자 예고르가 머리를 끄덕였다.
“너도 들어가자꾸나.”
“네.”
이반과 예고르와 니콜라이가 서재로 들어가자 올가는 니콜라이를 노려보며 머리를 획 돌렸다.
“모두 왔느냐?”
“모두 모였습니다.”
이반의 대답에 유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새해 아침부터 고함을 질러서 말이야.”
“밖에서 다 들었습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저도 아버지 생각과 같습니다. 사돈어른을 한번 만나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빠!”
“넌 조용히 하고 있어.”
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흐음….”
올가의 시댁 식구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 시점부터 여기에 발길을 끊었다.
그때가 유수포프 가문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던 때라서 그들도 상황을 알고 발길을 끊었던 거였다.
그 후로 유수포프 가문이 다시 살아나면서 그들이 연락을 해 왔지만, 유리가 일부러 피했다.
가족이나 마찬가지면서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들의 양면성이 싫었기에.
그들은 유수포프 가문이 힘들어할 때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기에 유리는 그들이 더욱 싫었다.
그런데 지금 딸을 시켜서 재산을 물려달라고 요구한다.
‘상종 못할 인간들이군.’
생각을 접은 유리는 무거운 목소리로 올가에게 물었다.
“좋다. 그러면 너는 뭘 얼마만큼 받길 원하느냐?”
올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말했다.
“굼 백화점 30개만 주세요.”
“허어….”
“30개만 주시면 앞으로 다신 이런 말 안 꺼낼 테니까요.”
그녀의 말에 모두 침을 꼴깍 삼켰다.
유리의 혈압이 점점 더 오르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잠시 숨을 거칠게 내쉬던 유리는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 전에, 사돈과 약속을 좀 잡아 보거라. 내가 한 번 만나 봐야겠으니까.”
“…정말 꼭 만나 보셔야겠어요?”
“약속 잡도록 해. 네가 말한 건 그 후에 결정하도록 할 테니.”
“…알겠어요.”
집안사람 단속이 이렇게 힘들다.
수십 년간을 피땀 흘려 이름난 사업체를 세웠어도, 가족들 때문에 사업체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우는 많았다.
유리도 그런 순간은 최대한 피하려고 사돈을 만나서 상황을 알아보고자 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니콜라이는 올가의 미래가 그려졌다.
‘할아버지가 직접 나섰으니 사돈 쪽 사람들은 뭐….’
* * *
새해 연휴가 거의 끝나 갈 때쯤 한국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오성 그룹의 이 회장과 그의 아들이었다.
“회장님, 그동안 건강히 잘 계셨습니까?”
“나야 늘 그렇지요. 이 회장께서도 잘 있었나요?”
“네. 요즘은 운동도 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통역사를 통해 말을 들은 유리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제분도 함께 오셨군요?”
“새해 인사차 같이 왔습니다.”
아들이 인사를 하고 이 회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장님. 니콜라이 씨를 좀 만나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흐음….”
유리는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을 니콜라이에게 이미 들었다.
코리아든 어디든, 그를 찾는 사람들이 유리에게 부탁을 할 수 있으니 가능하면 거절하라고.
매번 앞을 내다보고 미리 움직이는 니콜라이는 가늠할 수 없는 존재였다.
“코리아 기업들 인수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맞습니다.”
“직접 연락하지 않고요?”
“저를 좀 피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유리는 결심한 듯이 말했다.
“일단 만나게는 해 드리겠지만….”
“…?”
“나머지는 알아서 하셔야겠어요. 아무리 손자라도 내가 관여할 순 없으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만나게만 해 주십시오.”
“그러지요. 그런데 원하는 걸 얻기가 쉽진 않을 겁니다.”
이 회장은 틀림없이 코리아 기업들을 대표해서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은 뻔하다.
유리는 니콜라이가 있을 굼 백화점 블랙홀 인베스트먼트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