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own bear country is mine now RAW novel - Chapter 9
불곰국은 이제 제겁니다 9화
009 세계 1위를 이긴 얀덱스를 만든 자/45일 후
샤샤와 함께 도착한 곳은 웬 허름한 컨테이너 근처였다.
러시아의 일반인들은 넓은 공터에 대량의 중고 컨테이너를 갖다 두고 거기에 차를 보관한다.
도둑 천지다 보니 이런 골 때리는 방법을 쓰게 됐는데, 이게 가성비가 아주 좋았다.
소련 시절 배급됐던 낡은 아파트는 안 그렇지만, 원화 기준 3억짜리 새 아파트를 사면 1층에 두 줄만 찍찍 그어진 7,000만 원짜리 주차장을 따로 사야 했다.
‘미쳤지.’
전쟁이 한창일 때 러시아 상황이 그랬다.
그 넓은 땅덩어리에서 왜 그런 요상한 일이 생기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러시아다.
그런데 여기선.
주차장으로 써야 할 뻘겋게 녹슨 컨테이너가 집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여기 맞아?”
“맞아. 확실해.”
“여긴 주차장이잖아. 이 한겨울에 여기서 산다고?”
“전에 만났을 때 얼핏 보니까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것 같더라고.”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냐. 공동묘지에 그 많은 무덤에도 다 사연이 있어.”
“알았어. 아무것도 아닌 거로 열을 내.”
그때.
주차장으로 차 한 대가 들어오더니 건장하고 오만둥이(미더덕 비스무리)같이 생긴 네 놈이 차에서 내렸다.
두툼한 검은색 가죽 외투를 깔 맞춤한 놈들은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녹슨 그 컨테이너로 다가갔다.
이어, 쾅! 쾅!
“야! 문 열어! 안 열어?”
쾅! 쾅!
“안 열면 이거 부순다!”
등신들. 아무리 녹슨 컨테이너라도 그게 부순다고 쉽게 부서지냐?
“야, 그거 가져와.”
그중에 가장 더럽게 생긴 오만둥이의 지시를 받은 사내가 트렁크에서 뭔가를 꺼냈다.
대형 절단기?
아… 저거면 부서지겠네.
“이거 잘라.”
“네.”
절단기를 든 사내가 둥근 구멍 안으로 들어가 있는 1자 모양의 철근을 자르기 시작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은 걸 보니, 컨테이너 안에 사람이 있긴 한가 보다.
이 상황을 건너편 컨테이너 모퉁이에서 지켜보고 있던 니콜라이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모른 척하기엔 너무 위험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이유도 모른 채 무턱대고 나설 수도 없고.
구글을 만들 세르게이에 관한 정보를 받으러 왔다가 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편.
턱.
절단기에 몇 번 힘을 줬을 뿐인데 철근은 엿가락 잘리듯이 싹둑 잘려 나갔다.
그리고 놈들이 재빨리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덜컹.
“아 C발. 있으면서 안 열어. 괜히 힘 쓰게 만들고. 저 새끼 끄집어내.”
밖으로 끌려 나온 사내의 얼굴이 보인다.
30살 전후로 보이는 얼굴인데 몸은 전형적인 러시아 남자와는 거리가 먼 체형이었다.
“숨는다고 숨어지냐? 여기 말고는 갈 곳도 없는 게. 고개 들어 새꺄. 안 들어?”
두목으로 보이는 이의 욕지거리에 바닥에 무릎이 꿇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사내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내가 지구 끝까지 쫓아간다고 했지? 넌 우리 손에서 못 벗어나.”
“….”
“돈 준비됐어? 아, 내가 괜한 질문을 했네. 준비됐으면 안에서 문을 안 잠갔겠지. 너 이제 어떡할 거야?”
두목의 물음에 사내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속을 꽉 틀어막고 있던 것을 토해 내듯이 외쳤다.
“원금과 이자는 이미 다 갚았잖아! 근데 왜 자꾸 괴롭히는데. 왜!”
“어쭈?”
“집까지 뺏어 갔으면서 나한테 뭘 더 원해. 이 썩은 컨테이너도 뺏으려고 찾아왔냐! 흑흑흑….”
영하의 날씨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 속에는 그간의 이야기를 담은 함축된 감정들이 여럿 있었다.
체념, 절망, 포기, 원통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이.
훅 불면 바로 꺼질듯한 아주 작은 희망의 불꽃.
이 희망의 불꽃은 그가 이런 일을 당하면서도 지금까지 생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이리라.
그는 목숨과 바꿔서라도 그 희망을 지키고자 했다.
“이 새끼 이거 머리는 좆나 좋으면서 계산은 오지게 못하네. 내가 학교 다닐 때 수학은 못했어도 산수는 기똥차게 잘했거든. 어이, 잘 들어. 니가 낸 돈은 모두 이자와 원금의 반이었어. 그러니까 아직 반이 남은 거지. 알아들어?”
“원금의 두 배를 냈잖아! 어떻게 6개월 동안 이자가 원금의 두 배가 되냐고.”
“억울하냐? 억울해? 억울해도 어쩔 수 없어. 우리 계산은 원래 이러니까.”
사태를 지켜보던 니콜라이의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저것들의 몸뚱이를 거의 3일 지난 상추처럼 만들어 버려?’
나라가 개판이 되면서 민생 치안도 엉망이 됐다.
지역 마피아가 극성을 부렸지만, 돈을 받아 처먹은 경찰들은 힘없는 주민들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
경찰이 제구실을 하고 법이 제대로 집행이 되었다면 저 사람이 저렇게 당하고만 있었겠나.
현실은 지금처럼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
‘외할아버지와 외숙부를 옐친의 측근으로 만든 후, 꼭 시작해야겠어.’
범죄와의 전쟁을.
범죄와 관련된 이들이라면 싹 다 잡아들여서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보내 버릴 생각이다.
러시아를 바이칼호수처럼 맑디맑은 청정국으로 만들어 주마.
“보아하니 이제 돈 나올 구멍은 더 없는 거 같고. 아들 어디 숨겼어?”
“이, 이 개X끼들아~!”
“이젠, 아예 발악을 하네, 발악을 해.”
“이 짐승만도 못한… 컥! 커흑!”
두목의 주먹이 사내의 얼굴에 한 번 이어, 배에 깊숙이 박혔다.
그 한 방으로 입안이 터져 버리면서 시뻘건 핏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이게 주둥아리 털게 가만히 놔두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야, 정신 차리게 적당히 좀 주물러 줘.”
저 물벼룩보다 못한 인간들.
더는 안 되겠다.
아무리 남남이라지만 현장을 본 이상, 이제 더는 두고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니콜라이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어서 어금니를 꽈악 깨물고 양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리고.
샤샤를 앞으로 냅다 밀었다.
“어, 어?”
이번에도 네가 해결해.
강제로 모습이 노출된 샤샤와 패거리들의 시선이 중간에서 딱 마주쳤다.
잠시의 정적.
샤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뒤쪽을 보는 바람에 니콜라이도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당신들 뭐야?”
놈들은 막 사내를 패려던 어정쩡한 자세를 풀며 몸을 이쪽으로 완전히 틀었다.
니콜라이는 그들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지나가던 행인… 아니, 여기에 주차하러 왔다가 그만 못 볼 걸 보게 됐네요.”
“주차 끝냈으면 가던 길 가시지?”
“그런데 사람을 그렇게 패면 어떡합니까?”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 했다고. 일단 폭력은 막아야 한다.
니콜라이는 샤샤에게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눈짓을 보내고 두목에게 다시 말했다.
“쭉 들어 보니까 저분이 이미 돈을 다 갚았음에도 못 갚은 모양인데. 그런 건 말로 해도 되잖아요.”
“너 그 말이 문법에 안 맞잖아.”
“….”
“이봐요, 말 이상하게 하지 말고 그냥 가던 길 가시라니까. 여긴 우리 둘이 자알 해결 볼 테니 그냥 가쇼.”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그 사람 놔주세요. 안 그러면 경찰 부를 겁니다.”
“경찰? 허 참. 여기 또 영웅 납셨네.”
190cm가 넘는 샤샤는 일단 덩치와 얼굴이 먹히고, 나도 180cm가 넘는다.
대가리 숫자에서 밀리긴 해도 외견상 액면가가 꽤 되다 보니 오만둥이들도 괜히 시비를 걸려고 하진 않았….
“야, 저것들 좀 치워.”
아니네.
세 명이 성큼성큼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샤샤가 두 놈을 맡는다고 해도 나는?
한 놈과 붙어야 하는데… 솔직히 무리다.
그래서 니콜라이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잠깐!”
다가오던 세 놈이 자신들도 모르게 엉거주춤 멈춰 섰다.
“왜?”
“너희들 안톤 형님 알아?”
“…?”
“알아, 몰라?”
“몰라.”
물으면 대답은 두목이 했다.
“몰라?”
“그래, 몰라.”
“그러면 안드레이 형님 알아?”
“모르는데.”
“그레고리 형님은?”
“몰라!
“그레고리 형님 진짜 몰라?”
“모.른.다.고! 이게 미쳤나. 야! 뭐해? 빨리 처리 안 하고.”
모르면 안 되는데. 이러면 일이 좀 복잡해지는데.
두목의 지시에 세 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샤샤도 다가올 사태를 대비해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아직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거기 잠깐만 있어 봐! 러시아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그래도 세 놈은 조금씩 다가왔다.
“잠깐만 쫌! 아 왜 이렇게 급해! 마피아 스럽지 못하게. 너희들 시간 많잖아?”
“없어!”
니콜라이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이어서 물었다.
“그럼 맥심 형님은?”
순간, 두목의 눈이 커지며 관심을 보인다.
“맥심 형님? 니가 맥심 형님이랑 무슨 관곈데?”
아 다행이다. 하나 얻어걸렸네.
흔하디흔한 이름만 쭉 나열했는데 마지막에 용케 하나 걸렸다.
“맥심 형님과는 아주 가까운 사이지. 피를 나눈 형제 같은 사이라고나 할까?”
“형제 같은 사이?”
“그래. 저번 달에 같이 사우나 가서 보드카도 마시고 샤슬릭(꼬치구이)도 같이 굽고 했어!”
“정말이냐?”
“그래 인마.”
‘맥심’은 러시아 끄레스티니 오테츠(두목 중의 두목)들이 많이 쓰는 이름이었다.
워낙 유명한 이름이라 일반 두목들 중에서 어깨에 힘 좀 주려고 맥심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젊은 남성들이 ‘맥심’ 이름을 아주 좋아할 듯하다.
커피 말고 다른 거.
모스크바에서 맥심이란 인물이 대단히 유명한 사람인지 두목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마른침까지 꼴깍 삼키는 것이 제대로 낚인 듯하다.
그 표정을 본 부하 세 명이 흠칫하며 뒤로 한 발짝씩 물러섰다.
됐어.
일단 위험한 상황은 넘겼다.
병원부터 데리고 간 후에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면 될 거다.
두목이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니콜라이를 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맥심 형님은 작년 8월에 총 맞고 돌아가셨는데?”
“으 응?”
“돌아가신 분이랑 저번 달에 같이 사우나 가서 보드카도 마시고 샤슬릭도 구웠다고?”
조대따.
“너 이리 잠깐 와봐. 아까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이름은 말 안 했다 인마.
아씨, 걸렸네.
이젠 어쩔 수 없이 모든 걸 샤샤한테 맡기는 수밖에.
“샤샤, 니가 처리해.”
“아, 또 이런다.”
투덜대면서도 샤샤는 웃옷을 벗고 운동화 끈을 고쳐 매더니, 잔뜩 굳은 표정으로 사내들을 향해 말했다.
“튀어!”
“그래, 튀, 뭐? 뭐?”
“튀라고!”
니콜라이야, 내가 혼자서 무슨 수로 네 명을 이겨. 이길 수 있어도 이런 놈들과는 그냥 싸우기 싫다. 일단 살짝 벗어났다가 다시 오자고.
우린 눈썹이 휘날리도록 튀었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연속해서 울려 댔다.
삑! 삑! 삑~!
쫓아오던 놈들이 그 자리에서 딱 멈췄다.
이어, 부리나케 차로 달려가 타더니 소리가 들리는 반대쪽으로 도망쳤다.
그래도 아직은 경찰이 무섭긴 한가 보다. 아니면 귀찮아서 피하거나.
놈들은 도망가면서도 마지막 협박을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너, 내일까지야. 내일 점심때까지 돈 못 구하면 진짜 죽을 줄 알아. 아니면 아들 넘겨!”
놈들이 사라지자 7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컨테이너 모퉁이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작은 입에 호루라기를 문 채.
‘저 아이가 아들인가?’
그렇다.
아이는 사내가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희망이었다.
그가 생을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한 아들.
그 아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아빠에게 다가간다.
아이는 조막 만 한 손으로 아빠를 일으키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이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향했다.
도와주세요.
사내에게 다가간 니콜라이는 조심히 일으켰다.
“정신 차리세요.”
“크윽.”
“안에 물 있니?”
“가져올게요.”
컨테이너 안으로 쪼르르 달려 들어가더니 물통을 가져온다.
입안으로 조금씩 물을 흘려보내자 사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정신이 돌아온 것인지 아들을 덥석 안았다.
“크흑. 흑흑흑.”
온갖 감정이 뒤섞인 울음이었다. 아니,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아이도 그런 아빠와 함께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운 부자가 바닥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얘가 제때 호루라기를 불어서 놈들이 도망가 버린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죠.”
밖은 너무 춥다.
굳이 추위 때문이 아니더라도 상처를 입은 아빠와 아이는 냉기를 피해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내가 곧바로 철문을 닫더니 백열등을 켰다. 오랜지빛이 따스하게 내부를 보듬었다.
바깥은 영하고 이곳은 고작 녹슨 컨테이너였지만 부자에겐 사랑으로 가득한 보금자리였다.
“이틀 전에 오셨던 분이군요.”
사내의 말에 샤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전화번호, 주소, 이메일 등. 그 사람과 관련된 건 대부분 적어 뒀습니다.”
“감사합니다.”
샤샤가 종이를 받고 바로 니콜라이에게 줬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려는데 사내가 머리를 저었다.
“돈은 안 받겠습니다.”
“이 돈은 어차피 드려야 할 돈이니까 받으셨다가 마음대로 하세요.”
“….”
“저기, 괜찮으시면 어떻게 된 일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니콜라이는 왠지 이 사람의 사연을 듣고 싶었다.
“아까 들으신 대롭니다. 그놈들한테 돈을 빌렸다가 말도 안 되는 이자 때문에 집 뺏기고 우리 둘이 여기서 살게 된 거죠.”
“여기서 얼마나 사셨나요?”
“석 달 정도 됐습니다.”
모스크바가 가장 추울 때 여기로 들어왔다.
저 어린것과 단둘이 이런 곳에서 석 달을 살았다니.
니콜라이는 아이를 보았다.
아빠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아이는 마치 다른 DNA를 물려받은 것 같다.
사내아이가 어쩜 저렇게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생겼는지. 크면 여자들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할 얼굴이다.
“고생이 정말 많았겠습니다. 혹시 하시는 일은 뭔가요?”
“KGB 산하에 있었던 국제정보처리 부서에서 일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요.”
이 사람도 KGB와 관련이 있구나.
그래서 이런 비밀정보들을 손쉽게 알아낼 수 있었던 거였어.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갚아야 할 돈이 얼만지 물어도 될까요?”
“이미 다 보셨는데 비밀이랄 것도 없습니다. 30,000루블입니다.”
일반적인 가정이 한 달에 보통 3,000루블로 생활하니까, 30,000루블이면 열 달 생활비 정도 된다.
직장을 다니고 있으면 그리 큰 금액이랄 수 없겠지만 무직에다가 지금과 같이 어려운 시국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다.
아마 이자를 내지 못해 이자에 이자가 붙어 30,000루블이 됐을 거다.
“그러면 직장을 나온 후엔 컴퓨터 관련 일을 하시면서 생활해 나갔던 겁니까?”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이요?”
“네. 정부에서 일할 때부터 틈틈이 준비했던 건데 나와서 본격적으로 매달렸죠. 그 때문에 돈을 좀 빌렸다가….”
아, 그러고 보니 소련 시절 때 컴퓨터 관련 일을 하던 고급 인력들이 참 많았다는 걸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인터넷 어디서 본 것도 같고.
소련이 붕괴하면서 그 인력들이 죄다 해외로 나가버렸다고 했지.
“혹시 좀 보여 줄 수 있나요? 그 프로그램 말입니다.”
사내가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재산 1호처럼 보이는 컴퓨터의 폴더를 열어 여태 자신이 만든 것을 보여 주었다.
‘응? 얀덱스?’
구글보다 1년 앞서 출시된 러시아를 대표하는 검색엔진 서비스.
구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도 대부분 얀덱스를 쓴다.
구글은 거의 모든 국가의 검색 시장을 정복했는데, 아직 정복하지 못한 국가 네 곳 중 하나가 얀덱스가 버티는 러시아였다.
나머지는 바이두의 중국, 야후! 재팬의 일본, 그리고 네이버가 장악하고 있는 한국이다.
니콜라이는 화면 속의 내용이 뭘 의미하는지 한눈에 알아봤다.
‘이건 이름만 다르지, 구글의 바탕화면과 거의 똑같잖아?
검색을 통해 찾아내는 방식도 일치한다.
니콜라이는 얀덱스를 알고 있었다.
러시아어 원본이 필요할 때면 간혹 얀덱스를 통해 자료들을 찾곤 했으니까.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사내의 얘기에 푹 빠져 있다가 니콜라이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본 샤샤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지?
그러나 니콜라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대 출신답게, 미래 청사진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노예2 확보.
‘으음. 노예라고 하니까 좀 그렇네. 그러면 격상시켜서 샤샤에 이어 ‘종신 정규직 넘버 2’로 임명한다.’
샤샤와 사내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종신 정규직’으로 채용되어 버렸다.
입술에 침을 듬뿍 바른 니콜라이는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긴 더 있긴 힘들 것 같습니다. 내일 놈들이 다시 올 테니 말이죠.”
“….”
“그래서 말인데요. 당분간 우리 집에서 사는 게 어떻겠습니까?”
“…?”
“아, 뭐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제 마음이 편치 않아서요. 아이를 봤더니 더 그렇네요.”
별다른 뜻 있잖아.
“어차피 저도 이 분야 전문가를 찾던 중이었거든요. 아 이런. 저기 이름이 어떻게…?”
“일리야 세갈로비치입니다.”
“저는 그냥 니콜라이라 부르십시오.”
“샤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때 아이가 불쑥 끼어들더니 자기도 예쁜 이름이 있다는 듯이 자랑스레 말했다.
“저는 쏘냐예요. 하늘나라에 계신 엄마가 지어줬어요.”
“쏘냐?”
“맞아요. 쏘냐.”
‘응? 근데 이름이 꼭…?’
샤샤도 좀 이상한 걸 느꼈는지 아이를 빤히 보다가 니콜라이처럼 일리야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 쏘냐는….”
“…?”
“…?”
“여자아이입니다. 머리는 제가 짧게 깎은 겁니다.”
“…!”
“…!”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혹 나쁜 일이 생길까 싶어 겉모습을 사내아이처럼 보이게 바꿨습니다. 그래서 쏘냐가 아들인 줄 알고 있죠. 그런데 놈들은 아들인 줄 알면서도….”
잡아다가 어디 팔아먹으려 했던 거군.
똥물에 튀겨서 시궁창에다 처박아버려야 할 놈들이다.
‘정했어. 옐친을 구워삶은 후, 가장 먼저 잡아들일 놈들을 방금 정했어.’
니콜라이는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하늘이 안배한 인연이라 생각했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저랑 같이 가시죠. 뒷 일은 제가 모두 처리할 테니까요.”
“저야 고맙지만. 염치가….”
“그런 생각 마십시오. 저도 꼭 필요한 분이라서 같이 가자고 말씀드린 겁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됩니다. 되고 말고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샤샤! 문제없지?”
“으응? 엉. 문제 없습니다.”
여기서 쐐기를 박아야겠다는 생각에 니콜라이는 집안 얘기를 꺼냈다.
“유니콘 그룹 아시죠?”
“압니다. 그 유수포프 가문에서 소유한….?”
“네. 유니콘 그룹이 저희 할아버지 회사고. 저희 아버지가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하시죠. 저는 2남 1여 중 둘짼데, 그러니까….”
잠시 말을 끊었더니 부녀의 시선이 내게 확 몰렸다.
샤샤는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고 그래?’라는 눈빛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인 셈이죠. 하하.”
“…?”
“아 뭐 그렇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저를 믿고 가시겠습니까?”
* * *
일 처리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오만둥이 네 놈들에겐 유수포프 가문의 니콜라이가 보증한다는 차용증을 써줬다.
상환 기간은 1년.
갚아야 할 금액에 35%를 더 보태서 주기로 했다.
놈들은 일리야에겐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흔쾌히 OK를 했다.
유수포프 가문 사람의 보증이었으니 더욱 믿음이 갔을 것이다.
어차피 퍼센티지는 의미가 없다.
놈들은 할아버지나 외숙부를 통해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끌려갈 테니까.
그게 조금 늦어지더라도 올 12월쯤엔 화폐가치가 휴짓조각이 될 테니, 니콜라이가 돈을 갚으면 놈들은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될 거다.
그간의 사연을 들으신 부모님은 두 사람을 가족처럼 받아들였다.
집은 워낙 크고 넓은데 사람이 없어서 썰렁한 터였고, 방도 남아돌아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더 반기시는 듯했다.
어머니도 좋아 하셨지만 특히, 아버지가 더 그랬다.
꼬맹이 쏘냐의 꿀떨어지는 애교에 그냥 넘어가 버려서다.
그 깐깐하던 양반이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한 달 하고도 보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러시아 전역에서는 불길한 기운들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길한 기운들은 유수포프 가문과 니콜라이에겐….
비상을 위한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