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aebol's Youngest son RAW - Chapter (32)
33화. 물고 물리는.
백산백화점 인천점.
“전화 받아.”
이지호는 진동으로 울리는 휴대폰을 보고 모르는 전화번호임을 확인하고 끊으려고 하자, 서재은이 받아보라며 손짓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이지호는 고개를 돌려 전화를 받았다.
짧은 통화가 이어지는 동안 평온했던 그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일이야?”
통화가 끝나자 서재은은 그가 생각하고 대답하는 짧은 시간을 참지 못하고 먼저 질문했다.
“한도영입니다. 만나자고 합니다.”
“한도영? 걔 고등학생이잖아? 정말 한도영이 맞아?”
“네. 정확히 한도영입니다.”
“그래서 만나려고?”
“네. 만나자고 하는데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간 궁금했었던 것도 있고요.”
“뭐가?”
“이제까지는 솔직히 백은지가 사장님의 앞을 막아 섰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녀가 한홍식, 한예희를 만나 설득도 했고요. 하지만 어쩐지 그녀 뒤에 한도영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호호호.”
서재은은 입을 막고 웃음을 터트렸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유쾌한 웃음이었기에 이지호는 서재은의 그런 웃음소리를 언제 들었었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지호야. 너, 참 재밌다. 걔 고등학생이야. 백은지는 경제에도 밝고, 인맥도 넓어. 또 부동산을 가지고 장난치면서 돈도 많이 벌었고. 그런데 도영이가 백은지를 움직였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상식적으로는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아까 한도영과 전화할 때 느껴지는 뭔가가 있었는데, 매우 섬뜩했습니다. 저도 제 감이 틀렸기를 바랍니다.”
이지호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걸 서재은은 웃음을 거뒀다.
샤프한 이지호는 상당히 감이 좋았고, 적중률이 높았기에 서재은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만나봐.”
“네. 그럼 그를 만난 후에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이지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사장실을 나왔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차키를 집어 들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송도.
온통 허허벌판인 간척지에 들어서자, 이지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런 곳으로 불렀을까? 설마 나를 납치하려고?’
불현듯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지호는 이내 고개를 흔들어 그런 마음을 떨쳐내고 담담하게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때 먼지를 일으키며 중형차가 다가와 멈춰 섰고, 그 차에서는 한도영이 내렸다.
“담배는 몸에 해롭습니다.”
무심한 표정으로 말하며 한도영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간척지를 바라봤다.
“한도영?”
“맞습니다.”
“나를 왜 보자고 했습니까?”
이지호는 한도영이 나이가 어리다고 얕잡아보지 않고 조심스럽게 존대했지만, 그의 눈은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한도영 또한 이지호의 그런 언행을 꼼꼼하게 살피고는 만만치 않은 자란 걸 직감했다.
“이지호씨를 한번은 만나고 싶었습니다.”
‘정말 고등학생이 맞습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지만, 이지호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삼켰다.
검은색 양복을 입었지만, 앳된 얼굴은 언뜻 보면 사회초년생으로 보였다.
“목적이 뭡니까?”
“포기하십시오. 이쯤에서 발을 뺀다면 다치지 않을 겁니다.”
한도영의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분명한 협박이었지만,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이지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어깨를 펴며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본분에 맞게 공부나 하시지요. 백산그룹 경영권이 어떻게 되든 한도영군은 평생 돈 걱정하지 않고 살 겁니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군요.”
한도영은 싱긋 웃고는 화제를 바꿨다.
“이지호씨. 이 싸움을 이기리라 생각하십니까?”
“그건 그렇고, 말투가 원래 그럽니까? 무슨 40대도 아니고.”
이지호는 참다 못해 한마디 했다.
“제 별명이 애늙은이입니다. 답해주시죠. 정말 이기리라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렇군요. 오늘 만남 고마웠습니다. 그럼.”
한도영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차에 올라탔고, 그 차는 천천히 그 자리를 벗어나 사라져갔다.
“뭐지?”
이지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도영의 의도가 전혀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의 머릿속에는 당했다는 생각만 감돌았다.
무엇을 당했는지는 그도 특정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기분 나쁜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확실하게 한 가지를 깨달았다.
진짜는 백은지가 아니라 한도영이라는 것을.
그의 이성은 여전히 말도 안 된다며 부정하고 있지만, 그의 동물적인 감각은 한도영을 위험하다고 알리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나올까? 한홍식, 한예희는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은 인물. 웬만한 건 한강식이 맞춰줄 테니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은행들이야 이사회의에서 눈치를 보다가 유리한 쪽에 붙을 테고. 그런데 한도영의 여유는 뭘까?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이지호는 답답했다.
머리가 좋다고 소문난 그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도영의 의도가 읽혀지지 않았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가 인천점으로 돌아갔다.
**
한도영은 차 뒷자리에 앉아 먼지가 풀풀 날리는 간척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곳이 그 유명한 송도국제도시가 들어설 간척지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구나.’
한도영은 놀랍게도 이지호에 대한 생각은 싹 지워버리고 송도국제도시에 대해 생각했다.
“도영아.”
한도영은 동광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요. 형도 내가 이상해보여요?”
“뭐, 네가 나이에 비해 굉장히 조숙했으니까. 그런데 아까 이지호를 만난 이유가 뭐야?”
“들었어요?”
“듣지 않으려고 해도 다 들리던데.”
“별다른 이유 없어요. 상대와 싸우려면 상대를 보고 대화를 해봐야 해요. 오래된 습관이죠. 그의 기질을 파악하고 나면 대책을 세울 때 훨씬 수월해져요. 계획을 아무리 꼼꼼하게 세워도 사람에 대한 판단이 잘못되면 실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은 컴퓨터가 아니라서 감정에 휘둘리기에 엉뚱한 결정도 잘 내리거든요.”
“그럼 이지호에 대한 판단은?”
“아주 골치 아픈 상대.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해요. 거기에 머리도 좋고, 실천력도 있고. 솔직히 이지호가 없었다면 할머니는 이런 반란을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그 전에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오늘 이지호를 만나 보니 확실히 알겠더군요.”
“큰일 났네.”
“뭐, 큰일 날 건 없어요. 상대를 정확히 모를 때는 그가 어떻게 공격할지 몰라 걱정되죠. 그럴 때 큰일 났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힙니다. 좀 어려울 뿐이죠.”
한도영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싱긋 웃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광철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며 운전을 이어갔다.
“형. 백산건설로 가줘요. 아빠를 만나야겠어요.”
“그래.”
동광철은 그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분명 뒷자리에 앉아 있는 한도영은 생체학적으로는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 속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혹시 신기라도 들린 건가?’
동광철은 차마 이 말을 내뱉진 못하고 성실하게 운전을 이어갔다.
그만큼 오늘 한도영이 보여준 언행은 그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
백산중공업.
한강식은 담배를 힘껏 빨고는 길게 내뿜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남의 멋진 시내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세상을 모두 가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제 백산건설 대표이사와 백산그룹 대표이사에 취임하면 내 세상이다. 형은 백산증권 하나 떼 주고 내어보내야지. 솔직히 형에게 백산그룹 대표이사 자리가 가당키나 해? 그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뭘 하겠다고?’
한강식은 들뜬 마음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더니 비서가 들어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백산생명 한예희 대표이사님 오셨습니다.”
한강식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고, 비서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나갔다.
“오빠.”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한예희가 들어왔다.
여자에게 우렁찬 목소리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화통을 삶아먹었다는 표현이 생각날 만큼 컸다.
한강식은 그녀의 큰 목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찌푸리면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
조용조용 말하라는 신호였다.
“나참, 왜 이렇게 예민해. 큰오빠는 아무 말도 안 하는구먼.”
한예희는 툴툴거리면서도 톤을 낮췄다.
“왜 왔어?”
“뭐야? 괄시하는 거야? 다 잡은 물고기라 이거지.”
“뭔 말을 그리 서운하게 하냐? 가족이니까 편하게 말하는 거지.”
한강식은 움찔하며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백산그룹 경영권을 되찾을 때까지는 한예희가 가진 백산건설 지분 5%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새언니 만났어.”
“형수님을? 왜?”
한예희가 백은지를 만났다는 말에 한강식은 심한 갈증이 일었다.
“먼저 찾아왔더라고. 이번에 이사회의가 개최되면 큰오빠를 지지해달라고.”
“그래서 설마 너, 다른 생각하는 거 아니지?”
“생각해보겠다고 했어.”
“야!”
한강식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를 지르자, 한예희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이제야 오빠답네. 고상한척 하지 마. 역겨우니까. 솔직히 아버지 저렇게 되지 않았으면 오빠가 꿈이라도 꿨을 거 같아? 그런데 벌써 백산그룹을 다 차지한 것처럼 거만 떨지 말라고.”
한예희는 샤넬백을 열어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여 한 모금 빤 후에 ‘후우’하고 한강식을 향해 길게 내뿜고는 대화를 이어갔다.
“새언니가 앙큼하더라고.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내 뒷조사를 했어. 그것도 상당히 깊게. 잘못하면 감옥 갈지도 모르겠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한예희가 이 정도로 겁먹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 한강식은 날카롭게 되물었다.
“뭐랄까? 내 지분 가격이 올랐다고 할까?”
“그러니까 뭘 원하는데.”
한강식이 크게 소릴 질렀지만, 한예희는 빙그레 웃기만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가 고민해서 내게 선물을 줘야지. 내가 가진 지분의 가치는 단순히 5%가 아니야. 적어도 저울추를 할 수 있지. 새언니가 고맙게도 그걸 가르쳐줬어.”
한예희는 다시 활짝 웃으며 등을 돌렸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걷던 그녀가 문고리를 잡고 멈춰 서서 한마디 덧붙였다.
“너무 늦지 마. 저쪽에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올지도 모르니까.”
쾅.
한예희가 문을 닫고 나가자, 한강식을 탁자 위의 재떨이를 들어 힘껏 문에 집어던졌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소파와 탁자를 들어 뒤집어 놓았다.
“후우, 후우. 빌어먹을.”
한강식은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수를 쓰든 백산그룹을 차지하겠어.”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봉착했지만, 백산그룹을 품겠다는 한강식의 야망은 더욱 크게 활활 타올랐다.
**
한강식의 집무실을 나온 한예희는 차에 탑승하자마자 발로 앞 좌석 시트를 툭툭 두 번 찼다.
출발하라는 신호였다.
운전기사는 조심스럽게 차를 출발시켰고 한예희는 휴대폰을 꺼내 한홍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홍식아.”
-아이씨, 한 상무라고 불러달라니까.
“그래. 한 상무.”
-무슨 일이야.
“오빠 만났다.”
-강식이 형? 뭐래?
“욕심으로 눈이 번들거리더라고. 아마 좋은 선물을 가지고 올 거야. 넌 가만히 있어. 이 누나가 다 챙겨줄 테니까.”
-나를 속이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너, 누나한테 그게 무슨 말이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한예희는 어린애 달래듯 한홍식을 달래놓고는 통화를 종료했다.
그녀는 기지개를 켜고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차는 한강을 건너고 있었고, 태백산맥에서 발원한 한강은 힘차게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번에 잔뜩 뜯어낼 거야. 오빠. 웬만한 걸로는 어림도 없어.’
한예희는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