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eating Who Loved Me RAW novel - chapter 40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오.”
케이트는 슬슬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잠시라도 시선을 떼면 그가 덤벼들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이제 나갑니다.”
그녀는 불필요하게 또다시 말했다.
막 문손잡이를 잡으려는데 그가 말했다.
“다음 번 에드위나를 보러 갈 때 또 만나겠구려.”
케이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물론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난생 처음으로 피부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는 그냥 내버려두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요?”
“아니.”
앤소니는 오만한 몸짓으로 의자 위로 몸을 굽히며 대답했다.
“당신이 내가 그녀와 결혼할 수 있게 내버려 두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소. 어차피 당신이 내 인생을 마음대로 조종하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으니까. 당신의 그런 말은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지.”
케이트는 갑자기 목구멍에 대포알이 턱 막히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설마 아직도 그 애와 결혼하실 생각은 아닐 테죠. 자작님이…… 제가…….”
그는 몇 걸음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마치 고양이처럼 나른하고도 유연한 동작이었다.
“당신이 내게 키스를 했으니까?”
“전 절대…….”
뭐라고 항변을 하려고 했지만 말은 목구멍 뒤쪽을 태울 뿐 나오지를 않았다. 그의 말이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키스를 먼저 시작한 것은 그녀가 아니지만 결국에는 그녀도 그 행위에 동참했으니까
“아, 이러지 맙시다, 셰필드 양.”
그는 몸을 쭉 펴며 팔짱을 꼈다.
“이왕이면 그쪽으로는 가지 말도록 합시다. 우린 서로를 좋아하지 않소, 그것만큼은 사실이오. 하지만 난 아주 기묘하고도 비뚤어진 방법으로 당신을 존경하고 있소. 당신이 거짓말쟁이가 아니란 걸 알고 있거든
.”
케이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존경 이란 단어와 삐뚤어진 이란 단어가 한꺼번에 들어간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한단 말인가?
“당신은 내 키스에 응했소.”
그가 희미하게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말했다.
“별로 열렬하게 응답한 것은 아니란 점은 인정하오. 하지만 시간이 더 있었으면 그것도 어찌되었을지 모르는 노릇이지.”
케이트는 이런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고개를 흔들었다.
“제 동생에게 구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올리실 수 있죠?”
“아, 내가 당신이 짜놓은 완벽한 계획을 약간 뒤틀리게 할 거란 건, 알고 있소.”
그는 마치 새 말을 살까 말까 오늘은 무슨 크러뱃을 맬까 궁리하는 것처럼 지극히 가볍고도 약간 고민하는 투로 말했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평소 태도일지도 모른다. 마치 무슨 생각을 하는 것처럼 턱을 긁는 것이 버릇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태도에 깃든 뭔가가 케이트의 몸 안에 있는 도회선에 불을 당겼다. 그녀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온 세상의 분노가 모두 영혼에 집결된 것처럼 그녀는 앤소니에게 몸을 던지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당신은 절대 에드위나와 결혼할 수 없어!”
그녀가 울부짖었다.
“절대! 내 말 알아듣겠어?”
앤소니는 한 팔을 들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그녀의 주먹을 가뿐하게 쳐냈다.
“난 귀머거리가 아니니 당신 말을 잘 알아들었소.”
그리고는 아주 능숙하게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아 그녀의 팔을
봉쇄했다. 그녀의 몸은 분노로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그 애를 불행하게 만들게 내버려둘 수 없어. 그 애 인생을 망쳐 놓게 하지 않겠다고.”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 애는 착하고 명예롭고 순수한 아이야. 그 애한테는 당신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어울려.”
앤소니는 뚫어져라 케이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 위를 헤매고 다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강렬한 분노를 뿜어내고 있는 그 얼굴은 아름다웠다. 발갛게 홍조를 띤 뺨,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젖어서 촉촉하게 빛나는 눈. 갑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비열한 악당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런, 셰필드 양. 당신이 진심으로 동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확실하게 믿게 되었소.”
“그 애를 사랑하는 게 당연하지요!”
그녀가 버럭 외쳤다.
“제가 왜 그토록 애를 쓰며 당신을 그 애에게서 떼어놓으려 하는데요? 재미로 그러는 줄 아시나요? 이것 하나만큼은 장담하지만요. 자작님, 서재에 포로로 잡혀 있는 것말고도 세상에 재미있는 일은 훨씬 더 많답니다.”
갑자기 그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녀는 벌겋게 부풀어오른 팔목을 문지르며 훌쩍거렸다.
“적어도 자작님이라면 에드위나에 대한 저의 사랑을 완벽하게 이해해 주실 것 같았어요. 가족에게는 그토록 헌신적이라는 자작님이라면 이해해 주실 줄 알았다고요.”
앤소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맨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이 여인에게 감춰져 있는 것은 아닐지.
케이트는
아주 치명적으로 정곡을 찔렀다.
“만일 자작님이 에드위나의 오라버니였다면, 그 애가 자작님 같은 남자와 결혼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앤소니는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귀에도 침묵이 어색하게 들렸다.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그것은 지금 논의할 바가 못 되오.”
놀랍게도 케이트는 미소짓지 않았다. 환성을 올리지도, 비아냥거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몹시도 나직하고 침착했다.
“제 질문에 대한 답은 들은 것 같군요.”
그녀는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나갔다.
“내 여동생은.”
그의 커다란 목소리에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헤이스팅스 공작과 결혼했소. 사람들이 그를 뭐라 불렀는지 들어본적 있으시오?”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듣자하니 아내에게 몹시도 헌신적인 분이라 하더군요.”
앤소니는 쿡쿡 웃었다.
“그렇다면 그 자의 평판에 대해 들은 적이 없는 모양이로군. 적어도 그가 결혼하기 전까지의 평판에 대해서는?”
케이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혹시라도 개과천선한 난봉꾼이 최고의 남편이 된다는 말을 믿으라고 설득하실 작정이라면, 아무런 성과가 없으실 겨예요. 방금 이 방에서, 채 15분도 지나지 않았죠. 자작님께서는 로쏘 양에게 결혼한다고 해서 정부들을 포기하실 생각은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내 기억으로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라면 그렇다고 한 것 같은데.”
그녀의 코에서 아주 우습게 들리는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코방귀라고 하기엔 조금 모자라고 숨소리라고
하기엔 조금 큰.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에 그녀가 그의 말을 아주 우습게 듣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녀는 이주 신랄하게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제 동생을 사랑하시는지요, 브리저튼 경?”
“물론 아니요. 거짓말을 해서 당신이 속을 만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도 않소. 하지만.”
그는 그녀가 끼여들 것 같아 일부러 큰 소리로 내어 선수를 쳤다.
“레이디의 동생분을 알게 된 지 고작 1주일밖에 되지 않았소. 결혼해서 몇 년 동안 함께 살다 보면 그녀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잖소?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그녀는 팔짱을 꼈다.
“왜 자작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믿어지질 않을까요?”
그는 어깻짓을 했다.
“나 역시도 그 까닭을 모르겠소.”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에드위나를 아내감으로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자신이 절대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리란 것을 애당초 알고 있었다.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를 존중했다. 자식들에게 더없이 훌륭한 어머니가 되어 주리란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절대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그녀와 그 사이에는 도무지 불꽃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그런 표정을 보니, 앤소니는 왠지 자신이 몹시 왜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도 자작님이 거짓말쟁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난봉꾼에 악당, 혹은 그 외의 어떤 것일지는 몰라도 거짓말쟁이는 아니라 여겼어요.”
앤소니는 주먹으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뭔가가 심장을 불쾌하게 움켜쥐었다-그녀에게
덤벼들고 싶었다. 고통을 주고 싶었다. 그녀에겐 자신을 아프게 할 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고 싶었다.
“아, 셰필드 양.”
그가 잔인하게 말꼬리를 끌며 말했다.
“이것이 없으면 멀리 가시지 못하실 텐데요.”
그녀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서재열쇠를 꺼낸 뒤 그녀 쪽으로, 일부러 발끝을 겨냥해 던졌다. 미리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았기에 케이트는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녀는 열쇠를 잡으려고 양손을 내밀었지만 열쇠는 전혀 엉뚱한 곳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손이 공허한 박수 소리를 냈고 그 뒤를 이어 열쇠가 카펫 위에 떨어지는 둔한 소리가 들렸다.
케이트는 잠시 가만히 서서 열쇠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잡으라고 열쇠를 던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 역시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증오로 이글거렸다.
아니, 그것보다 더욱 심한 것이 있었다.
경멸.
앤소니는 아랫배를 정면으로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앞으로 뛰어나가 카펫 위에 떨어진 열쇠를 주워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건넨 뒤, 자신의 행동을 사죄하고 그녀의 용서를 바라고 싶은 말도 안 되는 충동을 느꼈다.
허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이 상황을 수습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좋게 봐주거나 하는 걸 바란 게 아니었으니까.
그 어쩔 수 없는 불꽃-그가 결혼하고자 하는 그녀의 동생과의 사이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바로 그 불꽃-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불꽃만으로도 방안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 무엇도 그를 이토록 두렵게 하진 못했었다. 케이트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
다 훨씬 더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괴로운 모양이었다. 그토록 방에서 나가고 싶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열쇠를 집기 위해서 무릎을 꿇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앤소니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바닥에 놓인 열쇠에서 그녀의 얼굴로 옮겨갔다.
“이 방에서 나가고 싶으신 게 아니던가요. 셰필드 양?”
그가 지나치게 매끄럽게 말했다.
그는 케이트의 턱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목구멍이 침을 삼키려는 듯 발작적으로 꿈틀거렸다. 마침내, 그녀는 불쑥 몸을 숙여 열쇠를 집어들었다.
“절대로 제 동생과 결혼하시지 못합니다.”
그녀의 낮고 강렬한 목소리에 앤소니는 뼛속까지 한기를 느꼈다.
“절대로.”
그리고는 단호하게 자물쇠를 돌린 뒤, 그녀는 방에서 나갔다.
이틀 뒤, 케이트는 여전히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음악회 다음날 에드위나 앞으로 커다란 꽃다발과 함께 “빠른 쾌유를 기원하며. 눈부신 레이디의 참석이 없었던 지난밤은 너무도 지루했소-브리저튼.”이라 쓰여진 카드가 도착하여 더더욱 그녀의 화를 돋구었다.
메리는 카드를 보며 오오 아아 호들갑을 떨었다-너무도 시적이네, 너무도 사랑스럽네, 이건 완전히 사랑에 폭 빠진 남자의 글이네 해대며.
하지만 케이트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에드위나에 대한 찬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신에 대한 모욕임을.
응접실 탁자 위에 신주 단지 모시듯 올려놓은 그 카드를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글이다. 이 카드를 갈가리 찢고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실수로 그랬다고 둘러댈 수만 있다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날 밤 서재에서 자작이 자신에게 느꼈던 것이 지루함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집으로 찾아오지는 않았다. 에드위나를 데리고 마차 산책을 나가는 것이 카드보다는 더 커다란 모욕인데 왜 그러지 않을까 오히려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가끔 상상력이 이주 풍부해질 때면 그가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건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특히 호기심과 분노 그리고 동정이 뒤섞인 감정으로 키스한, 평범하게 생긴 노처녀 따위를 두려워할 리가 없지 않은가.
케이트는 창가로 다가가 밀너 가를 바라보았다. 런던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은 아니지만 적어도 카드를 보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그녀를 가장 속상하게 하는 것은 그가 자신을 동정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의 키스에 무슨 마음이 담겨 있었건, 동정심보다는 호기심과 분노가 컸기만을 바랄 뿐이
었다.
그가 자신을 동정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키스와 그 키스의 의미에 대해 계속 집요하게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날 오후-꽃을 보낸 다음날 오후-브리저튼 가에서 여태껏 받아 본 그 어떤 초청장보다 더욱 마음을 동요시키는 초대장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레이디 브리저튼이 일주일 뒤-사교계 관행으로 일주일이란 거의 순간적인 변덕에 가깝다-주최하기로 결정한 시골 별장의 파티에 셰필드 가를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악마의 어머니가 파티를 열다니. 어떤 수를 써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초청이었다. 지진에다 폭풍에 태풍이 몰아친다면 모를까-셋 다 영국에서 일어날 법한 천재지변은 아니지만 케이트는 천둥 번개만 안 친다면 폭풍쯤은 쳐줘도 상관없지 않을까 기도를 했다-메리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에드위나를 끌고 브리저튼 가의 별장 문 앞으로 갈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메리가 케이트를 혼자 런던에 남아 있게 해줄 리가 없었다. 어차피 케이트 역시 에드위나를 혼자 보낼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자작에겐 아무런 양심도 없다. 아마도 케이트에게 키스했듯 에드위나에게도 똑같이 키스할지도 모른다. 에드위나에게 그런 대담한 행동에 저항할 만한 힘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그런 행동이 낭만적이기 그지없다고 여기고 그 순간 자작을 사랑하게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심지어 케이트조차 그의 입술이 자신에게 닿았을 때 이성을 지키는 것이 힘들지 않았던가. 아주 잠깐 동안 그녀는 모든 것을 잊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자신을 원한다는-아니, 필요로 한다는-그 더없이 격렬한 감각을 느꼈을 뿔 다른 것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짜릿했었다.
심지어 자신에게 키스하는 남자가 쓰레기 같은 비열한이란 것도 거의 잊게 만들어 줄 만한 그런 키스였다.
그래, 거의…… 하지만 완
전히는 아니었다.
8
본 칼럼을 정기적으로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 런던에는 영원히 적대관계로 남을 두 부류가 있다. 야심에 찬 어머니들과 굳은 의지를 가진 독신남.
야심에 찬 어머니들에게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 딸들이 있다. 굳은 의지를 가진 독신남들은 아내를 원하지 않는다. 두 그룹이 난감한 대립 관계에 처하리라는 사실은 머리가 모자란 사람들, 즉 다른 말로 하면 본 필자의 독자층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사람들에게라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일 것이다.
본 필자는 아직 레이디 브리저튼의 별장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의 명단을 보지 못했으나, 소식통에 따르면 결혼 적령기에 이른 괜찮은 젊은 레이디들은 거의 모두 다음 주 켄트에 모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레이디 브리저튼은 아들들이 순조로운 결혼 생활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자신의 생각을 공공연히 표현하는 인물이므로.
그녀의 이러한 생각 덕에, 그녀는 브리저튼 가의 형제들을 굳은 의지를 가진 독신남들 가운데에서도 최악의 부류라 여기는 야심에 찬 어머니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만일 도박금 장부의 승률이라는 것이 믿을 만한 것이라면, 브리저튼 가의 형제들 중 최소한 한 명은 올해가 가기 전에 결혼식의 종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도박금 장부에 동의를 표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우나(그러한 장부들은 본시 남자들에 의해 작성되는 것이고, 따라서 근본적으로 결함을 갖고 있다), 본 필자 역시 도박금 장부의 예측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디 브리저튼은 곧 며느리를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녀의 며느리가 될 것인가? 그리고 그 처녀는 브리저튼 형제들 중 누구와 결혼하게 될 것인가? 아,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레이디 휘슨다운의 사교계 소식, 1814년 4월 29일
이 주일 후, 앤소니는 켄트에서 -정확히는 그의 집무용 개인 스위트에서-어머니의 파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 명단은 이미 보았다. 어머니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 파티를 열었다는 것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아들들 중 한 명, 가능하다면 바로 자신을 결혼시키겠다는 목적임에 분명하다. 대대로 브리저튼 가의 소유였던 오브리 홀은 사랑스러움과 멍청함이 다 그만그만한 레이디들로 꽉 차게 될 것이었다. 숫자를 맞추기 위해 레이디 브리저튼은 신사들도 여러 명 초대해야만 했으나, 이미 결혼한 몇 명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자신의 아들들보다 더 부유하거나 좋은 배경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만을 초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앤소니는 애처로운 심정으로 생각했다. 어머님은 은근한 것과는 거리가 먼 분이란 말이야. 최소한 자식들의 행복(물론 어머니가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행복이었지만)이 관련된 일에서는 말이다.
초대된 사림들 중에 셰필드 가의 영양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셰필드 부인이 무척 마음에 든다고-그것도 여러 차례에 걸쳐-말했던 것이다. “훌륭한 부모가 훌륭한 자식을 만들어낸다.” 는 어머니의 지론을 하도 여러 번 들었던지라, 어머니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에드위나의 이름을 그 명단에서 본 순간 그는 일종의 체념적인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그녀에게 청혼하고 일을 매듭짓고 싶었다. 케이트와 있었던 일 때문에 어느 정도 불편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또다시 다른 신부감 후보를 찾아내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은 이상 이제 와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앤소니는 뭔가 결정을 하면 지체하는 법이 없었다. 생을 살아갈 시간이 많은 사람들에게나 꾸물거릴 여유가 있는 법이다. 거의 십 년 가까이 피해 왔지만 이제는 앤
소니 자신이 신부를 구할 때가 되었다는 결정을 내린 마당이니 더 이상 늦장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결혼하여 자식을 생산하고 죽는다. 서른여덟이나 서른넷의 젊은 나이에 자기 아버지나 삼촌이 갑작스레 죽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영국 귀족의 일생이란 결국 다 그런 것이다.
현 시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케이트 셰필드를 피하는 것뿐이었다. 분명 사과도 하긴 해야 할 것이다. 그 여자에게 고개 숙이는 짓만큼은 죽는 한이 있어도 하고 싶지 않으니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처음엔 속삭이는 듯했던 양심의 소리가 이제는 귀가 멍할 정도로 큰 고함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에게는 사과의 말을 들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케이트는 그런 말보다는 더 많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겠지만 앤소니는 더 많은 것 이 정확하게 뭔지 생각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서 말을 걸지 않으면, 그녀가 유언으로라도 자신과 에드위나의 결혼을 막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이 바로 행동을 취할 때였다. 오브리 홀은 로맨틱한 청혼을 하기에 더없이 적당한 곳이었다. 따스한 노란색 벽돌로 1700년대 초에 지어진 오브리 홀은 널따란 잔디밭에 안락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 주위를 7만여 평의 공원부지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 부지 중 족히 만여 명 정도가 화원이었다. 좀더 여름이 깊어지면 장미들이 피어날 테지만 지금은 포도 빛 히아신스와 어머니가 네덜란드에서 수입해 온 현란한 색깔의 튤립들이 지면 위에 마치 융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앤소니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오래된 느릅나무들이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나무들이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 위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서, 오브리 홀은 부와 지위, 권위를 상징하는 인공미의 기념비인 전형적인 귀족용 별장들과는 달리 좀더 자연의 일부처럼 보였다.
어쨌거나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개의 연못과, 작은 시내, 그 외에 셀 수 없이 많은 언덕과 골짜기. 각 장소마다 어린 시절의 특별한 추억들이 서려 있었다.
아버지의 추억도.
앤소니는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오브리 홀로 돌아온 것은 정말 좋았지만 그 낯익은 풍경과 향기들 때문에 너무나도 생생하게 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르는 통에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에드먼드 브리저튼이 죽은 지 햇수로 12년이 지난 지금에조차도 앤소니는 여전히 아버지가 즐거워 소리를 질러대는 어린 동생들을 어깨에 태우고 기운차게 저 모퉁이를 돌아 나올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상상하고 앤소니는 씩 웃었다. 어깨에 올라탄 아이는 남자아이일 수도 있었고 여자아이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목말태워 줄 때 한 번도 차별을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세상의 꼭대기에 올라앉은 듯한 그 부러운 자리를 누가 차지하게 되든, 언제나 유모 한명이, 이에는 아버지의 어깨 위가 아니라 육아실에 있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며 그 뒤를 쫓아가곤 했었다.
“오, 아버지.”
벽난로 위에 걸려 있는 아버지의 초상화를 올려다보며 앤소니가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