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eating Who Loved Me RAW novel - chapter 54
“어머니와 동생에게 도움을 구해 위안을 얻을 수 있을 때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는 한 번 더 헛기침을 했다. 가족을 끔찍하게 사랑하면서도,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두려옴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없는, 그 기묘한 기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떠들썩한 가족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끔찍한 고립감과 외로움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소.”
일부러 평이하고 누그러진 목소리를 내며 그가 다시 말했다.
“가장 깊이 사랑하는 대상일수록 자신의 두려움을 얘기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다는 것을.”
현명하고 따스하며 무엇이든 꿰뚫어볼 것 같은 케이트의 갈색 눈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순간 앤소니는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 태어난 순간부터 젊은 나이에 죽게 될 거라는 확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기묘한 생각을 했다. 그 순간에는 그를 향해 고개를 약간 들고 입술은 살짝 벌리고 있는 그녀가 이 지구상에
서 그를 진실로 이해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짜릿했다.
하지만 그보다 두려웠다.
“자작님은 정말 현명한 분이시군요.”
그녀가 속삭였다.
앤소니가 지신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기억해 내는 데 시간이 약간 걸렸다. 아 그래, 두려움이었지. 그는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칭찬을 웃어넘겨 보려고 했다.
“대부분의 시간에는 정말 멍청한 사람이라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정말이지 정곡을 찌르신 것 같습니다. 메리와 에드위나에게 얘기를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그녀의 이빨이 우스운 모양으로 움직이는데 그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녀가 덧붙였다.
“물론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말을 하지 않은 동기라는 것도 어느 정도 이기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정해야겠지요. 분명 말하기 싫은 이유 중 반은 약한 사람으로 보이기가 싫어서일 거예요.”
“그렇다고 그게 커다란 죄는 아니잖소.”
그가 중얼거렸다.
“죄치고 큰 죄는 아니겠지요.”
케이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자작님께서도 역시 똑같은 죄를 짓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에서 맡은 역할이 있지요.”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제게 주어진 역할은 언제나 강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어요. 번개가 친다고 테이블 밑에 웅
크리고 있는 것은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지요.”
“당신 동생.”
그가 조용하게 말했다.
“분명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강한 사람이오.”
그녀의 눈이 곧 그의 얼굴을 향했다. 에드위나와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하려는 것일까? 전에도 동생의 우아한 태도와 미모에 대해서 칭찬한 적은 있었지만 동생의 내면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케이트는 무안한 기분이 들 때까지 그의 눈을 살폈지만 그의 진심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마침내 대답했다.
“그 아이가 나약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던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아이의 언니지요. 언제나 그 아이를 지켜 줄 수 있을 만큼 강해야만 했습니다. 반면 그 아이는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을 정도만큼만 강하면 되었지요.”
다시 눈을 들어 앤소니의 눈을 마주본 그녀는 그가 기묘할 정도로 열심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피부를 뚫고 영혼까지라도 들여다보는 것처럼.
“자작님도 맏이시지요. 제 말씀을 분명 이해하실 거예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즐거워하는 동시에 뭔가 체념한 듯이 보였다.
“물론이오.”
비슷한 경험과 시련을 겪은 사림들 사이에 통하는 그런 미소로 케이트가 답했다. 그녀는 그의 곁에 있는 것에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의 곁에 기대어 그의 따스한 온기에 몸을 묻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해야 할 일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에드위나의 결혼을 반대하던 것을 취소하기로 했다는 말을 해야만 한다. 바로 이곳 정원에서. 잠시나마 그를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을 간직해 봐야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어깨를 편 다음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앤소니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뭔가 할말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케이트는 입술을 벌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뭐요?”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자작님.”
그녀가 불쑥 말했다.
“앤소니.”
그가 부드럽게 정정해 주었다.
“앤소니.”
왜 그의 이름을 부르니 이 말을 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일까.
“사실은 꼭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가 미소지었다.
“그런 것 같더군요.”
그녀의 눈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땅 위에 반원을 그리고 있는 자신의 오른발에 붙박여 있었다.
“저……음……에드위나에 대한 일입니다.”
앤소니는 눈을 치켜 뜨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발은 이제 반원을 그리는 것을 그만두고 구불구불한 선을 긋고 있었다.
“동생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요?”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케이트가 얼굴을 들고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니에요. 아마 지금은 휴게실에서 서머셋에 있는 사촌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을걸요. 아시다시피, 레이디들은 원래 그런 일을 좋아하니까요.”
그는 눈을 깜박였다.
“무슨 일을?”
“편지 쓰는 것 말이에요. 저 자신은
그다지 즐기지 않습니다만.”
묘하게 서두르는 듯 빠르게 말들을 쏟아내며 그녀가 말했다.
“편지를 다 쓸 때까지 책상에 붙어 있을 만큼 참을성이 많지 않아서요. 글씨가 엉망인 것은 물론이고요. 하지만 대부분의 레이디들은 매일 많은 시간을 편지의 초안을 작성하는 데 할애하지요.”
그는 비어져 나오려는 미소를 애써 참았다.
“동생이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나에게 경고해 주려던 것이었소?”
“아니오.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우물거렸다.
“그저 동생이 괜찮은가 물으시기에 그렇다는 말씀을 드렸고 그 아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씀드리다가 완전히 주제를 놓치고…….”
앤소니는 케이트의 손 위에 손을 올려놓아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을 막았다.
“꼭 해야 할 말이 뭐요, 케이트?”
그녀가 어깨를 경직시키고 이를 악무는 것을 그는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마치 뭔가 끔찍한 일을 앞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갑자기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에드위나에게 구혼하시는 것을 더 이상은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씀을 드리려던 것뿐입니다.”
갑자기 그는 가슴이 텅 비어 버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알겠소.”
그가 말했다. 정말 무슨 소리인지 알아서가 아니라, 뭔가 대답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제가 자작님께 아주 심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녀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브리 홀에 온 이후로 자작님을 잘 알게 되었고, 그래서 양심상 제가 앞으로도 계속 자작님을 방해할 것이라 생각
하시게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요. 그건-그렇게 한다면 제가 잘못하는 것이니까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앤소니는 그저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꺼이 자신과 동생을 찬성하고 나서자 왠지 약간은 김이 새는 느낌이었다. 지난 이틀 내내 그녀에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키스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보냈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것이 그가 원했던 것 아닌가? 에드위나는 완벽한 아내가 되어줄 것이었다.
케이트는 그렇지 않았다.
에드위나는 그가 마침내 결혼할 때가 되었다고 결심했을 때 꼽았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 에드위나와 결혼할 생각이라면 케이트와 시시덕거릴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고 있는 것이다-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언니가 축복을 해준다니, 이제 에드위나는 그가 원하기만 하면 다음 주에라도 자신과 결혼해 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케이트의 어깨를 불잡아 흔들고, 흔들고, 또 흔들어서 그 망할 말들을 모조리 주워 담게 만들고 싶은 걸까?
불꽃 때문이다.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는 그들 사이의 그 망할 불꽃. 그녀가 방에 들어서거나, 그녀가 숨을 쉬거나, 발을 내딛는 순간 순간을 의식하게 만드는, 살을 태울 듯 따끔한 그 느낌. 만일 스스로에게 허용하기만 한다면 그녀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 심장이 가라앉는 느낌.
하지만 사랑은 바로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지도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혼자뿐이라면 죽음은 무서운 일이 아니다. 이승에 아무런 미련도 남
기지 않는다면 저승이 두려울 리는 없을 테니까
사랑은 진실로 눈부시고 신성한 감정이라는 것을 앤소니는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매일 매일, 부모님이 눈길을 주고받을 때마다, 두 분의 손이 서로 맞닿을 때마다 그는 사랑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죽어 가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다. 남은 세월을 괴롭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사랑이다-더없는 행복을 맛보게 되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분명 그래서였을 것이다. 앤소니가 마침내 그녀의 말에 반응을 보였을 때, 그녀를 확 끌어당겨 그녀가 헐떡거릴 때까지 입을 맞추지 않은 것도, 그녀의 귀에 입술을 눌러 불인 채 자신의 뜨거운 숨결로 그녀의 살을 태우며 정염을 느끼는 것은 그녀지 그녀의 동생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은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천만에. 절대 그녀의 동생이 아니었다.
그 대신 앤소니는 속마음보다는 훨씬, 훨씬 더 침착한 눈으로 태연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마음이 놓이는군.”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실제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빠져 나와 정말 코미디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 모든 장면을 구경하며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러시리라 생각했지요.”
“케이트 나는…….”
앤소니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그녀는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사실대로 말하면 앤소니 자신조차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의 이름이 입에서 흘러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이 말을 하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들은 영원히 입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가 그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낮게 윙윙거리는 소리. 정말 그저 윙하는 소리였을 뿐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저 좀 신경에 거슬린다고 생각할 뿐인.
하지만 앤소니에게는 그 이상 무서운 소리가 없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공포에 질려 거칠어진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케이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려고 몸을 움직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왜 그러시지요?”
“그냥 가만히 있어요.”
그가 다시 말했다.
그녀의 눈이 왼쪽을 향하는가 싶더니 턱이 같은 방향으로 살짝 돌아갔다.
“뭐예요, 벌이잖아요!”
긴장이 풀린 그녀는 씩 웃으며 벌을 쫓으려고 손을 들어올렸다.
“맙소사, 앤소니.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놀랐다고요.”
앤소니가 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아플 정도로 세게 쥐었다.
“움직이지 말라니까.”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앤소니.”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냥 벌이라니까요.”
그는 케이트의 손목을 아프게 꼭 쥔 채 꼼짝 못하게 하고 그 구역질 나는 벌레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벌은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듯 그녀의 머리 주변을 웽웽거리며 날고 있었다. 공포와 분노, 그리고 뭐라 확실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감정에 그는 온 몸이 마비되었다.
마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11년 동안 벌을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차피 영국에 사는
이상 평생 벌을 피한다는 것이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사실 지금까지는 기묘하고 숙명적인 태도로 일부러 벌에 손을 대곤 했었다. 그는 평생 자신이 모든 면에서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고작 벌레에 쏘여 죽게 될 운명이라면, 맹세코 꿋꿋한 자세로 그 순간을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어차피 곧 죽을 것, 벌레 따위에게서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벌이 날아가는 것을 볼 때면 그는 소리내어 웃으며 벌을 조롱하고 저주를 퍼부으며 덤벼 보라는 듯 손으로 쳐서 쫓고는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벌에게 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스쳤다가 드레스 소매 레이스 위에 앉기도 하는 등, 벌이 케이트에게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날아다니는 광경을 보는 것은, 무섭다 못해 거의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모든 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머리가 앞서 달리기 시작했고 그 작은 괴물이 그녀의 부드러운 실에 침을 박아 넣는 모습이, 그녀가 숨이 막혀 헐떡이며 땅으로 가라앉는 모습이 마음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가 이곳 오브리 홀, 아버지가 쓰러졌던 바로 그 꽃밭에 쓰러지는 모습이 뚜렷이 떠올랐다.
“조용히 해요.”
그가 속삭였다.
“일어섭시다……천천히. 그리고 저 쪽으로 걸어가는 거요.”
“앤소니.”
참을성을 잃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그녀가 말했다.
“정말 왜 그러세요?”
억지로 일으키려고 손을 잡아당겼지만 그녀는 반항했다.
“벌이라고요.”
과장된 목소리로 케이트가 말했다.
“이제 그만 하세요. 맙소사, 벌에 쏘인다고 죽기라도 하나요?”
그녀의 말이 공중에 무겁게 떠돌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땅으로 추락하여 두 사람 모두를 산산조각 낼 것처럼. 마침내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목이 트이자 앤소니는 낮지만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케이트는 몸이 굳었다. 그의 태도와 그의 눈에서 보이는 무엇인가가 그녀를 뼛속까지 겁에 질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알지 못하는 악령에게 사로잡힌 것 같았다.
“앤소니.”
자신의 목소리가 침착하고 권위적으로 들리기만을 기도하며 그녀가 말했다.
“지금 당장 손목을 놓아 주세요.”